435화. 재주
계곡길을 걷는 것은 고된 일이었다.
깎아지른 듯한 경사, 휘몰아치는 바람, 흔들거리는 바위, 절벽 아래에 유유히 흐르는 푸른 물은 풍부한 감수성에 앞서 무서운 상상력을 고취시켰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고소공포증이 있는 짐말이 말썽을 부렸다.
“이걸 그냥 확! 잡아먹어 버릴까?”
허풍쟁이가 고삐를 잡아끌며 버럭! 화를 냈다. 식마(?) 발언에 모닝스타가 눈꺼풀을 뒤집고 푸르릉거렸다. 그렇게 항의하지 않아도 품종 좋은 짐말이라 버릴 수 없었다.
힘 좋은 용병들이 수레를 끌고 밀었다. 싸움개는 지칠 줄 모르는 하프 유니콘이 수레를 끌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기사의 말은 용병보다 귀하신 몸이었다. 불경죄로 채찍질 당할지도 모른다.
“저기! 저기 고지가 보인다!
“옛 신이시여! 감사하나이다!”
가파른 계곡길을 세 번쯤 오르내리자 슐츠 경이 개척 중인 광산 마을이 나타났다. 지금은 천막 몇 동이 전부지만, 채광이 시작되면 금방 불어날 것이다.
“어? 어이! 쟝! 피리 부는 쟝이잖아?”
“허풍쟁이? 네가 왜... 어억! 기사 나리까지 오셨잖아?”
먼저 와 자리 잡은 용병들이 반갑게 모였다. 슐츠 경의 수행원까지 40명이 넘었다. 로벨의 기사와 호위병력을 합치면 전투 가능한 인원이 77명이었다. 호른 경이 까칠한 수염을 만지며 말했다.
“이 정도면 해볼만 하군요.”
숫자는 적이 더 많지만, 전쟁경험은 이쪽이 압도적이었다. 싸움개가 별명처럼 호탕하게 외쳤다.
“남의 땅에서 할 말이 아니지만, 올 테면 와라!”
“아니! 지금 말고! 우리도 준비는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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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천 년 동안 전쟁의 승패는 두 가지로 결정되었다. 기사와 축성술이다.
“이쪽부터 막아! 여기가 뚫리면 광산까지 직행이야!”
‘전쟁’하면 흔히 용맹한 기사들이 심장이 터져라 돌격하는 장면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성을 쌓고, 해자를 파고, 장애물을 설치하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거기가 아니야! 10야드 더 내려가!”
“엥? 여기가 30야드 맞는데?”
“멍청아! 경사를 생각해야지!”
건축자재와 버팀목으로 방벽을 세우고, 관목을 제거해서 시야를 확보하고, 표시석으로 사격지점을 확인했다. 전쟁 전문가들이라 작업 속도가 굉장히 빨랐다. 과장 좀 해서 볼일 한번 보고 오면 주둔지가 변해 있을 정도였다.
“기름하고 화약이 없어서 아쉬운데...”
“그건 저쪽도 마찬가지겠지.”
하루하고 한나절이 지나자 뱀의 계곡 광산은 요새가 되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요새였다.
사실 꼼꼼하게 살피면 목재가 부족해 흙만 높이 쌓은 곳과 지반이 약해 깊이 파지 못한 곳이 있었다. 허나, 그걸 눈치 챌 쯤에는 두 자릿수가 죽어나간 뒤일 테니 문제없었다.
“과연 공왕의 용병들이군. 대단한 솜씨요.”
호른 경이 진지를 둘러보고 감탄했다. 숲 속에 맨몸으로 던져놔도 방어진지를 구축하는 용병들이 잘 다듬어진 자재와 광산 도구를 사용했으니 당연했다.
“적은 어디쯤 왔나?”
호른 경이 묻자 모두 계곡 위를 보았다. 혓바닥 성에서 광산까지 쉬엄쉬엄 걸어도 이틀이 안 걸렸다. 지휘관이 누군지 몰라도 지금쯤이면 가까운 곳에 도달했을 것이다. 시골 기사를 잘 모르고 한 소리였다.
재물 욕심에, 혹은 분위기에 휘말려 병마를 준비했으나 대부분은 공왕과 싸우고 싶어 하지 않았다. 애초에 주종관계로 묶인 사이가 아니라 한 사람 뜻대로 통제가 안 되었다.
“공왕이 무적무패란 것은 과장된 소문이오. 실제로는 여러 번 패해서 도망쳤지.”
알고 하는 말인지, 아무렇게나 하는 말인지 몰라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다만, 로벨을 위협한 적은 희대의 영웅이나 반신적인 존재들이었다.
“이 땅의 우리 가문의 땅이오! 그리고 공왕이 거느린 병사는 100명이 안 되오! 겁쟁이처럼 굴지 마시오!”
“공왕을 사로잡아 광산의 소유권을 넘겨받으면 모든 것이 끝나오! 함께 싸웁시다!”
유난히 호전적인 쉬폰 경과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랑트 경이 적극적으로 동료 기사들을 설득했으나 사기가 높지 않았다. 이 핑계 저 핑계로 미적거리니 이틀 거리가 나흘로 늘어났다. 계곡 기사들의 첫 번째 실착이었다.
“저기가 공왕이 욕심내는 우리의 금광이오! 다들 보시오! 우리 것이란 말이오!”
쉬폰 경이 광산 마을을 보며 소리쳤다. 금광이란 소리에 모두들 눈이 반짝였다.
“그런데... 전에 왔을 때와 조금 다르지 않소?”
조금이 아니라 아주 많이 달랐다. 계곡길을 막은 9피트 높이 방벽부터 무시무시한 존재감을 뽐냈다. 그러나 탐욕이 조심성을 집어삼켰다.
“저런 조잡한 성벽이 얼마나 버티겠소? 신경 쓰지 마시오!”
“우리가 무섭긴 무서운 모양이군! 단숨에 허물고 공작을 잡읍시다!”
용감하고 무식한 것이 기사의 네거티브 표본이었다. 쉬폰 경이 재산목록 1호 전투마 위에서 애지중지 아껴온 롱소드를 빼들고 소리쳤다.
“목표는 로벨 로드릭 공작이다! 돌격! 돌격하라!”
마을에서 푼돈으로 모집한 청년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투구가 없어 냄비를 천으로 동여매고, 병장기가 없어 농사짓는 도구를 주섬주섬 챙겨온 농민병이었다. 으리으리한 기사와 비교되어 초라함이 돋보였다. 수염이 풍성한 농민이 확인차 물었다.
“저기로 가서, 그 뭐냐, 공작 나으리를 죽이란 말씀입니까요?”
“네깟 놈들한테 죽을 자가 아니다! 저 벽을 허물고 공작을 따르는 잡것들을 제압해라!”
구체적인 명령이라 이해하기 쉬웠다. 귀한 분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는데 안심한 농민들은 병장기를 꽉 쥐고 전의를 다졌다.
“가자, 가자고! 우리 나으리가 포상해준다잖은가!”
“우리 땅에 쳐들어온 못된 것들을 혼내주자!”
첫걸음이 어렵지, 한번 움직이면 망설임이 없었다. 100명이 넘는 농민병이 소리를 지르며 계곡길을 올랐다. 그리고 방벽 뒤에 울프 용병단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야 오는군.”
“하도 안 와서 그냥 돌아간 줄 알았다.”
무려 사흘이었다.
첫날 방어시설을 완성하고 사흘이란 시간이 남았다. 땅을 파기 위해 준비한 토목자재와 땅속에서 나온 돌덩이를 옮기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지금이다. 던져라.”
위에서 명령이 떨어졌다. 용병은 잔혹한 미소와 함께 밧줄을 끊었다. 비탈길에 아슬아슬하게 걸려있던 버팀대가 풀리자 크고 무거운 바위가 굴러갔다. 바람을 잔뜩 넣은 돼지 오줌보 같았다. 오줌보와 달리 맞아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죽은 자는 쉽게 기분이 상하지 않는다.
“으, 으, 으아...!”
“사, 사람 살려-!”
용기백배하여 계곡길을 오르던 농민병은 마주 굴러오는 바위와 통나무에 기겁해서 몸을 돌렸다. 굳이 조언하자면 계곡 아래로 뛰어드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두 다리가 아무리 빨라도 가속이 붙은 바위보다 빠를 수 없었다. 우지직- 쿵- 꾸직- 쿵- 끔찍한 소리가 연쇄적으로 들렸다. 싸움개가 주름을 잡고 중얼거렸다.
“아으... 밥 맛 뚝 떨어지는군.”
그 정도면 건전한 소감이었다. 한순간에 스무여 명을 잃은 쉬폰 경은 눈알이 뒤집혔다.
“저런 비열한 짓을...! 그러고도 기사인가!”
결과물이 끔찍하긴 하지만 고전적인 수성기술이었다. 비열하단 평가는 조금 과했다.
“이 버러지들아! 계속 가! 바위를 굴리기 전에 올라가란 말이다!”
두 번째 바위를 준비하려면 시간이 걸렸다. 그 틈을 노릴 생각이면 현명했다. 수성무기가 바위뿐이면 말이다.
“우리가 핫바지로 보이나?”
“어린애 괴롭히는 거 같아서 거시기 하네.”
울프 용병단의 장기는 크로스보우를 활용한 일제사격이었다. 싸움개 소대가 크로우보우 소대는 아니지만, 서당개 어쩌고 속담처럼 어깨너머로 배운 것이 있었다.
“사격 준비!”
쿼럴이 굴러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러나 표적이 숨거나 피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방벽 위로 쇠뇌를 끄집어 올렸다. 쇠촉이 햇살이 튕겨내자 마지못해 계곡을 오르던 농민병이 자지러졌다.
“화, 화살이다!”
활로 쏘는 게 아니니 화살(Arrow)이 아니지만, 편집증 심한 소설가가 아닌 바에 중요한 대목은 아니었다.
“발사!”
팅-! 팅팅-!
활대가 펼쳐지고 쿼럴이 쏘아졌다. 기왕 말이 나온 김에 화살과 비교하면 쿼럴은 깃이 없어 사거리가 짧고 명중률이 떨어졌다. 대신 몸통이 짧고 굵어서 착탄시 충격이 곱절은 높았다. 천옷 몇 장 껴입은 농민병이 버텨낼 무기가 아니었다.
“으악-!”
“컥- 커컥-”
서른 발의 쿼럴이 소나기처럼 휩쓸자 다수의 사상자가 나왔다. 팔다리에 쇠촉이 꽂힌 병사는 적절할 때 잘라내기만 하면 되지만, 주요장기가 손상된 병사는 방법이 없었다. 가장 최악은 목이 관통된 병사였다.
“끄어어-! 사, 사려...!”
입을 열 때마다 핏물이 한 컵씩 쏟아졌다. 사람 몸뚱이의 피가 이리도 많은지 몰랐을 것이다. 질식인지 출혈과다인지 모르지만 얼마 못 버티고 쓰러졌다. 운이 좋아 살아남은 병사들에게 새로운 용기를 심어주었다.
“이건 미친 짓이야! 저쪽은 진짜 군대라고!”
“나, 난 죽기 싫어! 집에 갈 거야!”
계곡을 오를 용기가 아니라 대대로 복종해온 ‘기사 나으리’에게 반항할 용기였다. 쉬폰 경 이하 계곡의 기사들은 도망 오는 농민병에 당황하여 칼을 휘둘렀다.
“멈춰라! 자리를 이탈하면 참하겠다!”
“탈영은 사형이다! 가지 마!”
본보기로 한 명을 찔러 죽였지만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마치 산불 만난 멧돼지들 같았다.
방벽 위에서 지켜보는 늑대성 기사들은 볼품없는 적을 한껏 비웃었다.
“훈련받지 않은 농민병을 선두에 세우다니, 수준을 알만 하군요.”
“폐하의 준비가 너무 과했던 모양입니다.”
로벨은 적보다 아군을 먼저 살폈다. 허풍쟁이와 울프 용병단은 적이 도망가자 신나서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마녀 키르케는 죽어가는 병사들이 안쓰러운지 두 손을 꼭 쥐었고, 아야와 이야카는 그런 친구를 열심히 위로했다.
“아직 아니오.”
로벨은 마녀에게서 눈을 떼어 계곡 아래 기사들을 보았다. 상당수의 농민병이 도주했지만 기사와 기사 종자들, 그리고 십여 명의 프리랜서가 남아 있었다. 백 명의 농민병보다 까다로운 상대였다.
“저 숫자로 공성하지는 않겠지요.”
“저들이 병력을 모으기 전에 먼저 치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른 경과 도너반 남작이 제안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 상대 기사를 고려하지 않은 제안이었다.
“로벨 로드릭 공왕! 결투를 신청하오! 명예롭지 못한 싸움을 당장 집어치우고 앞으로 나오시오!”
로벨 일당은 서로를 보았다. 제대로 들은 것이 맞는지 확인하는 동작이었다.
“지금 결투를 신청한 건가?”
“설마? 주제를 모르는 것도 정도가 있지...”
사실 정도가 없었다.
“공왕이 무서워하면 아랫것 중에 아무나 나서라! 쉬폰 가문의 체인 쉬폰이 누구라도 박살 내주마!”
호른 경, 아자르 경, 슐츠 경 등등. 일국의 챔피언이 되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기사를 한꺼번에 도발했다. 실로 놀라운 재주였다.
“...미친 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