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4화. 무력
뱀의 계곡은 검은 숲과 볼탄 반도를 가르는 경계선으로 북부대로 끝에서 북쪽으로 흐른다.
뱀에 비유되는 만큼 머리와 꼬리가 있는데,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과 맞닿은 까마귀 성이 꼬리, 북해안으로 굽이쳐 흐르는 혓바닥 성이 머리였다. 물론, 까마귀 성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았다.
“가난한 곳이야.”
계곡이 깊고 수량이 풍부하여 풍광이 좋았다.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농사짓기에는 일조량이 부족하고, 가축을 키우기에는 땅이 비좁았다. 해안에는 암초가 많아 큰 배가 오지 못했다.
“그럼 무얼 해서 먹고 사나요?”
“보리농사를 짓거나, 산양을 키우거나... 아, 이맘때면 연어잡이를 많이 합니다.”
길잡이로 고용한 청년은 충분할 만큼 말이 많았다. 촌장네 암탉을 누가 훔쳐갔는지, 용병이 되겠다고 집 나간 찰스네 둘째 아들이 왜 반년 만에 돌아왔는지 굳이 알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가끔 중요한 정보가 있었다.
“앗! 다 왔습니다! 저기가 랑트 남작님의 성입니다.”
사실대로 말하자면 ‘남작(Lord)’도 아니고 ‘성(Castle)’도 아니었다.
로벨은 저택과 오두막 중간쯤에 위치한 랑트 가문 가옥을 보았다. 로드릭 시티 기준으로 조금 큰 판잣집이지만, 주위의 흙집을 보아하니 계곡 밖 세상을 본 적 없는 촌민 눈에는 성처럼 보일만 했다.
“아이고, 저기 나오시네요. 저분이 랑트 남작님입니다.”
길잡이 청년은 촌락을 다스리는 ‘남작 나으리’가 나오자 안절부절못했다. 저런 기사를 세 자릿수로 부리는 로벨은 무서워하지 않으면서,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시골 기사의 눈치를 살피니 우스운 일이었다.
‘이래서 무지렁이란...’
호른 경이 고개를 가로젓고 신호를 보냈다. 허풍쟁이가 목을 가다듬고 고용주를 소개했다.
“볼탄 반도의 왕이자 늑대성의 공작이자 포클랜드의 후작이자 포비아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이자 폭풍성의 정복자이자 청옥성의 주인이자 크레타 시티의 지배자이자 북부대로의 관리자이자 잉그비아 왕국의 구원자이자 네일 공국의 조력자이자...”
공식적인 직위만 대여섯 개, 비공식적인 호칭은 스무 개가 넘었다. 싸움개 닥스 이하 동료 용병들은 저걸 어떻게 외우냐는 표정을 지었다.
“...동부평야의 수호자이자 검은 숲의 오랜 벗인 로벨 로드릭 폐하이십니다.”
긴 소개가 끝나자 한숨 비슷한 숨소리가 곳곳에서 흘러나왔다. 가장 큰 소리를 낸 것은 이곳의 주인인 랑트 경이었다.
“볼탄 반도의 위대한 공왕 폐하를 뵙습니다. 저는 랑트 가문의 6대 당주 폴스 랑트입니다.”
작위와 명성이 없으니 소개도 초라했다. 얼굴이 벌게진 것이 패배를 시인한 모양이다.
크든 작든 승리는 좋은 것이기에 마녀와 용병들이 으쓱거렸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남작님’이 머리 숙인 것에 깜짝 놀란 길잡이 표정은 덤이었다.
“보잘것없으나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했습니다. 안으로 드시지요.”
충성을 맹세하지 않은 기사치고 대단히 정중한 말투였다. 로벨의 충직한 기사들은 만족했지만, 생각이 많아 의심도 많은 호른 경은 지나친 저자세를 경계했다.
‘광부들을 쫓아낸 자가 음식이라...’
로벨의 곁을 내주면 안 될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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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스 랑트 경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차린 음식은 정말 보잘것없었다.
이틀쯤 지난 빵과 곰팡이를 걷어내지 않은 치즈는 그런대로 봐줄 만 했다. 짜고 질긴 산양고기와 말라비틀어진 사과조각과 맹물 같은 포도주에 비하면 말이다. 얼마나 맛이 별론지 고기라면 환장하는 아야와 이야카와 술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마녀 키르케가 점잖은 척 거부했다.
“적어도 먹는 것은 안심해도 되겠군.”
호른 경이 빵을 잘게 찢으며 중얼거렸다. 검소함을 미덕으로 아는 리암 수사가 기뻐했다. 사치와 폭력을 일삼는 기사가 옛 신의 품에 귀의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아쉽게 그런 뜻이 아니었다.
“이렇게 맛이 없으면 아무도 안 먹으니 독을 타도 소용이 없지.”
물론, 농담이었다. 로벨은 개도, 아니, 늑대도 안 먹는 고기를 맛있게 먹었다. 소금이 기름에 뭉쳐서 누렇게 떠도 아무렇지 않게 손가락으로 긁어냈다.
“랑트 경, 이리 성대하게 맞아 주어 고맙소.”
소금의 양이 접대의 수준인 시절이 있었다. 제대로 된 향신료가 없던 시절 이야기지만, 아직 그 시절에 머물러 있는 이곳에서는 성대한 만찬이었다.
산골짜기의 구닥다리 기사는 자신의 노력을 알아준 왕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아닙니다. 위대한 왕을 모실 수 있어 영광이지요.”
로벨의 이해심 때문인지, 아니면 경이롭게 둔한 입맛 때문인지 분위기가 좋았다. 여기까지는 말이다.
“식사가 끝나지 않아 성급한 감이 있지만, 먼저 방문 목적을 밝혀야겠소.”
로벨이 운을 떼자 느슨해진 분위기가 단숨에 당겨졌다.
“내 사람을 해친 이유가 무엇이오?”
랑트 경의 눈알이 좌에서 우로 빠르게 굴러갔다. 호른 경, 아자르 경, 싸움개 이하 울프 용병단은 슬그머니 허리춤을 더듬었다. 눈짓과 몸짓은 분주한데 소음은 거의 없었다. 벽난로의 장작 타는 소리와 늑대 남매의 입맛 다시는 소리만 조용히 흘렀다.
“이곳은... 가난한 마을입니다.”
랑트 경이 어렵게 입술을 떼었다. 그리고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무적무패 왕과 수하들을 설득하라고?’ 왜, 하필, 내가, 망할 등의 단어가 빠르게 스쳐 갔다. 그러나 입 밖에 나온 것은 한층 정중했다.
“광산이 개발되면 계곡이 오염되고 농지가 파괴됩니다.”
로벨은 즉시 해결책을 주었다.
“늑대성의 이름으로 보상해주겠소.”
“얼마나 말입니까?”
“광산의 피해를 만회할 만큼이오.”
랑트 경 얼굴에 불만이 엿보였다.
“폐하의 자비로 당장은 먹고 살겠지만, 그것이 영원하겠습니까? 10년 뒤, 혹은 20년 뒤 금이 바닥난 뒤에는 어찌합니까? 뒤처리는 오롯이 저희의 몫이 아닙니까?”
내일만 사는 기사가 10년 뒤를 운운하니 놀라웠다. 로벨은 미래지향적인 기사를 존중했다.
“그럼 무엇을 원하시오?”
“금광의 수익을 저희에게도 나눠주십시오.”
하지만 욕심은 존중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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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에게 전권을 위임받은 리암 수사가 여러 각도로 설득했지만, 욕심 많은 시골 기사에게 통하지 않았다.
사실 어린 집사 일당(?)은 배상금도 마뜩찮았다. 광산 근처에 자리한 기사 가문이 랑트 가문 하나라면 기꺼이 양보할 수 있지만, 그런 양보가 열 번이 되고 스무 번이 되면 늑대성에 남는 것이 없었다. 그러다 보니 협상은 이틀 동안 제자리걸음이었다.
“기사 나리! 기사 나... 아차! 공왕 폐하! 공왕 폐하!”
그리고 사흘째 아침에 일이 터졌다.
로벨의 침소 앞에서 몰래 면도하던 호른 경이 벌떡 일어났다.
“폐하께서는 주무신다. 무슨 소란이냐.”
문짝 뒤에서 ‘나 안 자오’ 소리가 들렸지만 무시했다. 비밀이 많은 왕이었다. 옷을 입을 동안 시간을 벌어야 했다.
“군대입니다! 군대가 나타났습니다!”
“군대? 무슨 군대?”
“저, 정체는 모르겠는데, 숫자가 상당합니다요! 족히 100명은 넘습니다!”
“음... 본인이 알 것 같소.”
로벨이 방문을 열고 나왔다. 호른 경은 깜짝 놀랐다가 금속 반사광에 안도했다. 어느새 풀 플레이트 아머를 갖춰 입었다.
“랑트 경 일당의 무력시위일 것이오.”
“감히 폐하께 말입니까?”
호른 경이 어이없어서 되물었다. 제임스 공작이나 사트로 공작조차 조심스러워하는 것이 로벨의 위엄인데, 이 깡촌의 기사들이 무엇을 믿고 무력 운운하나 싶었다.
“어디야?”
“계곡길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나오는... 성? 성인지 뭔지 비슷한 것이 있습니다요. 거기서 깃발을 보았습니다.”
“혓바닥 성이군요.”
호른 경이 정확한 지명으로 정정했다. 로벨은 혀 모양의 성채를 떠올리고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오해는 금방 풀렸다.
“혹은 ‘뱀의 혀’라 부르기도 합니다. 뱀의 계곡 머리 부분에 지어진 오래된 성이지요.”
“아, 알고 있소! 당연히 그럴 것이오!”
“예? 아, 예.”
로벨은 헛기침하고 어깨에 걸친 소드 벨트를 허리에 감았다.
“랑트 경과 가족들은?”
“저들의 군대가 움직였으면 필히 도주했을 겁니다.”
“성을 버리고 말이오?”
로벨은 상하좌우를 훑어보고 발언을 철회했다. 역시 성은 아니었다.
“저들이 무력을 사용하면 우리도 대응해야지.”
“까마귀 성에 지원군을 요청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로벨은 소드 벨트의 남은 끈을 매듭지으며 고민했다. 어린 집사의 충고가 귓가에 맴돌았다.
“저들과 가까이 지내온 존 도너반 자작 입장도 배려해야지 않소.”
까마귀 성을 끌어들이는 것은 보류했다. 그래도 아직 아군이 있었다.
“슐츠 경이 있는 광산으로 가겠소. 저들의 목적이 본인과 광산이니 고민을 덜어줘야지.”
호른 경은 면도가 덜 된 턱을 만지다가 고개를 숙였다.
“즉시 출진 준비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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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암 수사는 무기를 점검하는 울프 용병단을 보며 한숨지었다.
“상호간의 이견을 조율한다는 점에서 전쟁도 협상의 하나지만, 옛 신의 뜻을 따르는 입장에서 좋아할 수 없네요.”
울프 용병단도 일부 동의했다. 적수를 찾기 힘든 베테랑 용병이라 해도 낯선 땅에서 세 배나 되는 적과 싸우는 것은 달갑지 않았다.
“이거 원, 귀찮게 됐네.”
“아니, 도대체 뭔 배짱이지?”
표현에 주의해야 했다. 달갑지 않을 뿐 무서운 것은 아니었다.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동안 무적무패 기사를 따라다닌 용병들이었다. 그 무적의 기사가 질 것 같지 않았다.
“입 놀리지 말고 남은 물자 전부 수레에 실어! 여기 안 돌아올 거다!”
싸움개 닥스가 밍기적거리는 쫄다구의 정강이를 차며 명령했다. 용병들은 구시렁거리면서 자칭 ‘성’ 안의 무기와 식량을 약탈했다.
“쓸 만한 게 거의 없수다.”
“쓸 만하면 진작에 혓바닥 성으로 옮겼겠지.”
접대가 소홀한 것이 꼭 가난해서만은 아니었다. 귀한 것, 맛있는 것, 유용한 것을 미리 빼돌렸기 때문이다. 아자르 경이 새삼스럽게 화를 냈다.
“처음이다! 작정이었다! 화난다! 매우 죽어라!”
“오오! ‘죽어라’가 발전했다!”
겁 없는 용병들이 낄낄거렸다. 외해 출신이라도 기사는 기사라 기사들이 좋게 보지 않았다. 몰트 도너반 경이 험악한 표정을 짓자 찔끔해서 바쁜 척했다.
“싸울 준비 됐어?”
로벨이 아야와 이야카와 마녀 키르케를 챙겨서 마당으로 나왔다. 잠이 덜 깬 세 짐승이 무어라 웅얼거렸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허풍쟁이 제이콥이 앞니를 드러내고 웃었다.
“겁대가리 상실한 기사 나으리들을 혼내줄 준비 됐습니다.”
이름처럼 사나운 미소가 번졌다. 이래서 허풍쟁이가 필요했다. 로벨은 멋진 연설을 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지금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았다.
“그럼 출발하자.”
뱀의 계곡 전쟁이 시작되었다. 로벨의 지난 명성을 생각하면 다소 소박한 전쟁이었다. 허나 상대방은 그리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