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3화. 거창
추수제가 끝나고 며칠이 지났다.
축제의 여운이 사라진 거리에는 취객의 오물과 시궁쥐만 보이고, 가을걷이가 끝난 추경지에는 미련이 많아 악착같이 이삭을 줍는 아낙네만 남았다. 지나간 여름을 그리워하며 다가올 겨울을 대비하는 오묘한 시기였다. 그리고 뱀의 계곡으로 떠난 조사대가 돌아왔다.
“캘 수 있습니다. 꼭 캐야 합니다.”
소금광산에서 8년 동안 괭이질을 한 베테랑 광부가 주먹만한 돌덩어리를 바쳤다. 얼핏 보면 평범한 화강암인데 횃불에 비추니 곰팡이 같은 노란 테가 있다. 어린 집사가 소리 죽여 소리 질렀다.
“금! 진짜 금이에요!”
어지간해서 볼 수 없는 금광석이었다. 광부 얼굴에 큼직한 미소가 그려졌다.
“팔 수 있는 만큼 파보았습니다. 매장량이 엄청납니다.”
“수익이 나온다는 거죠?”
“그야 물론이오.”
함께 온 슐츠 경에게 관심이 돌아갔다. 북해의 파도처럼 차가운 기사가 모처럼 소리 내어 웃었다.
“정식으로 계약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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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두로 수익분배 하는 것과 정식으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것은 달랐다. 채굴기간, 부가수익권리, 광부임금, 시설비용, 운송비용, 조세비율 등등 세세하게 합의할 것이 많았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페닝이 되는 일에는 반드시 제삼자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누가 막았다고요?”
어린 집사의 눈썹 끝이 하늘로 올라갔다. 여드레에 걸쳐 늑대성과 뱀의 계곡의 왕복한 광부는 분노를 짜낼 기력도 없었다.
“기사님들이요. 기사님들이 갱도를 부수고 저희들을 쫓아냈습니다요.”
갱도라고 해도 이제 겨우 입구만 만든 상황이라 피해가 크지 않았다. 죽거나 다친 사람도 없었다. 어느 가문 기사인지 몰라도 로드릭 가문 사람을 해칠 만큼 막나가지는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막나갔죠! 어디에요? 제임스 가문? 도너반 가문?”
두 가문 모두 사람을 보내 설득 중이었다. 왕국법과 관습법이 조금씩 다르지만, 최초 발견자와 투자자에게 우선 채굴권이 있으니 수익분배만 합의하면 문제없었다. ‘무려’ 볼탄 반도의 공왕이 투자자인데 거부할 리 없었다.
“그게... 둘 다 아닙니다. 어디였더라? 랑트 가문? 쉬폰 가문? 그거 말고도 여러 기사님이 있었습니다.”
어느 동네나 터줏대감이 있었다. 검은 숲의 주인은 제임스 가문이고, 뱀의 계곡에서 가장 잘나가는 가문은 도너반 가문이지만, 그렇다고 수백 개나 되는 기사 가문을 모두 지배하지는 않았다.
“걔네는 또 뭐예요?”
“한 분은 계곡 하구에 마을을 다스리는 기사님이고, 한 분은 계곡 북쪽에 목장을 가진 기사님이고, 한 분은...”
“그 지역의 뿌리 깊은 가문이군.”
로벨이 한마디로 정리하자 어린 집사의 근심이 깊어졌다. 첫눈이 오기 전에 광산 시설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야 내년 봄에 수익을 낼 수 있었다.
“울프 용병단 2개 소대를 더 보낼까요? 아니면 아자르 경과 몰트 도너반 남작을 보낼까요? 저쪽도 도너반 가문 사람은 함부로 못 대할 테니까...”
로벨은 횡설수설하는 어린 집사를 점잖게 제지했다. 한 번에 안 되어서 허벅지를 꼬집어야 했지만, 아무튼 제지했다.
“그 지역의 기사들을 전부 만나서 설득할 셈이야?”
“어... 그건 힘들겠죠?”
장원을 가진 기사는 그나마 만나기가 쉬운데, 작은 농장이나 목장을 가진 기사는 품위 문제로 큰 도시 외곽에 사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는 것은 시간낭비였다.
로벨은 검지와 중지로 팔걸이를 두드리다가 슬그머니 일어났다.
“허풍쟁이하고 싸움개 닥스를 불러.”
로벨이 허풍쟁이를 부르는 이유는 한 가지였다.
“설마 직접 가시게요?”
어린 집사가 불안과 불만을 비췄다. 로벨은 어색한 표정으로 안심시켰다.
“맨앳암즈 소대도 부르고, 아자르 경도 호출해.”
“제 걱정은 그게 아니잖아요.”
“그, 그럼 호른 경이랑 도너반 남작도 소환해.”
본의는 아니지만, 뱀의 계곡에 불벼락이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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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부대로 끝자락에서 북쪽으로 더 가야 하는 뱀의 계곡은 멀고 험한 곳이었다. 겨울이 코앞에 닥친 마당에 집 떠나 먼 길을 가고 싶어 하는 사람은 없었다.
“무사히 복귀하면 100페닝. 전투수당 별도지급.”
어디까지 무보수일 때 말이다. 어린 집사가 포상금을 걸자 자원자가 폭주했다. 페닝은 귀신도 부린다는 믿음이 증명되어 착잡했다.
어린 집사는 실력 있고 신뢰할 수 있는 용병을 30명 추려서 호위대를 구성했다. 명색이 공왕인데 용병만 끌고 가기 무엇해서 호른 경, 아자르 경, 그리고 추수가 끝나 한가한 도너반 남작 등을 소집했다.
“너무 걱정 마세요. 제가 같이 가잖아요.”
“제 걱정의 3할은 그쪽이거든요?”
칼잡이만 보낼 수 없어 리암 수사도 동행케 했다. 볼탄 반도 왕의 권위는 인정하지 않아도 옛 신의 권위는 존중할 거란 생각했다. 이렇게 꼼꼼한 어린 집사가 상정하지 못한 것은 마녀 키르케와 늑대 남매였다.
“에이, 우리 집사님 농담도 잘해.”
“컹! 컹!”
“...진담이에요. 제발 사고 치지 마세요.”
어린 집사의 걱정이 과한 감은 있었다. 로벨까지 기사만 4명이고, 중무장한 용병 30명에 젊은 수사와 활달한 마녀와 사납... 지는 않지만 무섭게 생긴 늑대가 두 마리였다. 가는 길에 자리한 영주들이 몸이 사릴 규모였다.
“겨울이 오기 전에 돌아오세요. 혹시나 기사들이 수작을 부리면 가시나무 성으로 피하고요.”
“까마귀 성이 아니라?”
“도너반 가문은...”
어린 집사는 말을 하다가 몰트 도너반 남작을 살폈다. 남의 집안 뒷담화라 조심스러웠다.
“...그 가문은 본래 제임스 가문 봉신이에요. 존 도너반 자작은 아예 혈연관계잖아요.”
로벨은 기우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어린 집사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검은 숲에서 믿을 수 있는 가문은 브릭 가문, 그러니까 머를 브릭 자작뿐이에요. 다른 사람은 믿지 마세요.”
로벨은 형제 같은 친구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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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여행은 항상 즐거웠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날씨에 먹을 것이 풍부했다. 곳간이 가득 찬 농부들은 인심을 후하게 썼고, 배부른 짐승들은 투정부리지 않고 부지런히 걸었다.
“이 못생긴 괴물아! 내 창을 받아라!”
마녀 키르케가 수레 위에서 랜스 차칭 자세를 잡으며 외쳤다. 마부석의 허풍쟁이가 하지 말라고 구시렁거리다 정수리를 맞고 으르렁거렸다.
“아우, 무거워라. 이런 걸 어떻게 들고 싸우는 거예요?”
수레 주위의 기사들이 미소 지었다. 사실 숙련된 기사도 해비 랜스를 오래 들지는 못했다. 말의 속도와 창받침에 의지했다.
마녀 키르케가 하는 일은 없어도 분위기는 잘 띄웠다. ‘마녀’에 편견이 없는 아자르 경과 모험을 함께 한 몰트 도너반 남작은 생기발랄한 마녀 키르케를 좋아했다. 허풍쟁이 제이콥 이하 울프 용병단도 아닌 척하면서 여동생처럼 잘 챙겨주었다.
“참, 로자니아는 어떻게 지내?”
“오! 오오! 로자니아 씨 말씀입니까요?”
허풍쟁이가 환한 얼굴로 이름을 재창했다. 싸움개 패거리가 귀를 쫑긋 세우고 끼어들 타이밍을 재었다.
“아주 잘 지냅니다요! 으하하핫! 미모만큼이나 음식솜씨가 끝내주지요! 성격도 좋고, 목소리도 나긋나긋하고, 저 짜리몽땅 못생긴 마녀랑 비교가 안... 크헉!”
여자와 여동생은 달랐다. 허풍쟁이 정수리를 고의로 두드리기 시작한 마녀 키르케와 세계 각국의 욕설을 퍼붓는 허풍쟁이를 보면 확실했다.
“정말 다행이야.”
로벨은 성의 없이 ‘폭력은 나쁜 겁니다. 아, 그냥 나쁘다고요’ 중얼거리는 리암 수사에게 관심을 돌렸다.
“어린 집사한테 따로 말하진 않았는데...”
“그럼 반대입니다.”
“...듣지도 않고?”
“어린 집사가 반대하는 일이면 저도 반대해야죠.”
로벨은 ‘왕의 권위가 이토록 떨어지다니!’ 한탄하는 대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수도원을 하나 지을까 해.”
“그럼 찬성입니다.”
“...반대했잖아?”
“옛 신의 이름으로 참회하나이다.”
리암 수사는 성호를 긋고 즉각 태세를 전환했다. 로벨은 한숨을 쉬고 차근차근 설명했다.
로벨이 볼탄 반도의 왕이라 하나 멋대로 수도회를 결성할 수 없다. 따라서 리암 수사를 통해 후원하는 형식을 취해야 한다. 자연히 리암 수사는 수도원장이 된다.
“제, 제가 수도원장이라고요?”
“내키지 않으면 나중에 새로 뽑아도 돼.”
“아뇨! 내키지 않는 것은 아니고요!”
세속의 신분으로 비유하면 봉토를 하사받은 기사가 되는 것이다. 기쁨과 걱정이 교차하는데, 아무래도 기쁨 쪽이 더 큰 듯했다.
“그런데 수도원은 왜요? 검은 바위 수도원을 후원하는 걸로 충분하지 않나요?”
로벨은 투닥 거리는 마녀와 용병과 거기에 끼어들고 싶어 안달이 난 늑대 남매를 보며 말했다.
“책임을 져야지.”
“무슨 책임이요?”
“과부와 고아를 만든 책임.”
공식적으로는 밝힐 수 없는 책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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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일행이 국경을 넘어 검은 숲으로 향한다는 소식이 돌았다.
국경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기사와 농민이 대부분이라 몇 마디 더 추가해야 했다.
“볼탄 반도의 왕이 검은 숲으로 온다고?”
로벨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이 없는 곳이었다. 반응이 사납고 뜨거웠다.
“기사는? 병력은?”
“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중 가장 불타는 곳은 당연히 뱀의 계곡 기사들이었다. 설마하니 무적무패 왕이 직접 나설 줄은 몰랐다. 엉덩이 무거운 기사들이 하루 만에 모여 긴급회의를 시작했다.
“주, 죽입시다.”
세 명이 모이면 멍청이가 하나 있고, 열 명이 모이면 멍청한 과격파가 하나 있었다. 뱀의 계곡 기사들은 생각이 모자란 동료를 한심하게 보았다.
“볼탄 반도와 전쟁하자는 소리요?”
“무적무패 왕은 후계자가 없소. 왕이 죽으면 분열될 것이오.”
“경의 희망사항이잖소. 그리고 누가 볼탄 반도를 차지하든 왕을 살해한 책임을 피할 수 없소.”
이럴 때 대세를 이루는 것은 중도파였다. 적당히 몸을 사릴 줄 아는 기사가 제안했다.
“존 도너반 자작에게 중재를 요청합시다. 아니면 알버트 제임스 공작에게 사람을 보내던가.”
“도너반 자작은 진즉에 무릎을 꿇었고, 제임스 공작은 볼탄 반도에 빚이 있어 나서지 못하오.”
“그러니까 중재를 요청하자는 거요! 설마 봉신을 내치기야 하겠소?”
여기서 진실을 짚고 가자면, 로벨은 이곳 기사들과 싸울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물론, 왕의 권위를 내세워 유리하게 협상할 의도는 있지만, 피를 뿌릴 생각은 1온스도 하지 않았다. 기사들이 겁을 먹은 것은 로벨 로드릭의 명성이 지나치게 높은 탓이었다.
“그러게 왜 로드릭 가문 사람을 건드려서...”
“이제 와서 그런 말 하면 무엇 하오?”
“계곡 하류의 농장이 사라진다고 소란을 피운 것이 경이잖소!”
기사들만 모아놓고 회의하는 것은 최악이었다. 그 사실을 기사들만 모르니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공왕도 명예가 있으니 다짜고짜 칼을 휘두르진 않을 것이오. 허나, 우리도 대비는 해야겠지. 병사와 무기를 혓바닥 성에 모으시오. 최악의 경우 공왕을 포로로 잡아야 하오.”
광산일이 쓸데없이 거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