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2화. 자리
마녀 키르케 지론에 따르면 세상의 모든 축제는 고기, 술, 음악 3요소로 구성되어있다. 이 중 하나라도 빠지면 진정한 축제가 아니었다.
딩- 딩딩- 팅-! 팅- 티틱-!
류트(Lute)의 현이 차례로 튀어 오르며 뾰족한 소리를 내었다. 그러자 리코더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합류하고, 이어서 물소 가죽으로 만든 탬버린이 무거운 소리로 박자를 넣었다.
생김새와 원리가 제각각 다르지만 숙련된 악공 손에서 신나는 무곡(舞曲)이 되었다.
“와하하하하!”
“레이디, 한 곡 추실까요?”
음악에 이끌린 연인들이 과장된 동작으로 춤을 신청했다. 비단옷을 입은 젊은 기사와 부유한 상인의 딸도 있고, 농사짓는 청년과 돼지치는 처녀도 있고, 새집머리 소년과 어리광쟁이 소녀도 있었다. 신분도, 나이도 제각각 다르지만 웃음과 몸짓은 비슷했다.
“악사를 부르길 정말 잘한 것 같소.”
로벨은 춤추는 커플을 보며 보일 듯 말듯 웃었다.
로드릭 시티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늑대성에서도 추수제 기념 파티가 한창이지만, 왕과 왕의 기사는 낡은 꼬뜨와 값싼 후드를 쓰고 거리로 나왔다.
변장은 제법 그럴듯했다. 왕이 거리에 있다는 것을 알면 크고 작은 소란이 일어날 텐데 아직까지 조용했다. 짝이 없는 처녀들이 추파를 던지는 걸 보면 확실했다.
‘저와 한 곡 추시겠습니까?’
호른 경은 근질근질한 혓바닥을 엄히 통제했다. 로벨을 알아보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것보다 칼을 차고 후드를 눌러쓴 사내 둘이 춤을 추는 것이 정상은 아니었다.
“호른 경, 저쪽으로 가 봅시다.”
로벨이 호른 경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 혹여 놓칠까봐 그런 거지만, 숫총각 얼굴은 저녁노을처럼 붉어졌다.
“돼지고기? 양고기야?”
정신을 차리니 화로를 여러 개 두고 고기꼬치를 굽는 상인 앞이었다. 외지에서 온 상인은 로벨의 칼자루를 힐끔 보고 싹싹하게 굴었다.
“어서 오십시오, 나으리! 2살배기 새끼 양고기입니다요!”
새끼 양치고 누린내가 심했다. 발육이 굉장히 좋은 양이거나 거짓말일 것이다.
어린 집사나 펄프 대장이면 부모의 부모의 부모까지 모욕하며 상인을 혼내겠지만, 로벨은 그렇지 않았다. 오늘은 좋은 날이었다. 사소한 일로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두 개 줘.”
로벨이 은화를 꺼내자 호른 경이 재빨리 막았다.
“제가 계산하겠습니다.”
그래 봐야 1페닝도 안 되지만, 마음이 중요했다.
왕과 왕의 기사는 사이좋게 양꼬치를 뜯으며 다음 골목으로 넘어갔다.
“바로 그 순간! 위대한 정복왕 샘 포클 폐하가 칼을 빼들고 외쳤다!”
“이 사악한 마귀야! 옛 신의 가호를 받은 내게 마법이 통할 줄 알았더냐! 나의 백성을 대신해 널 벌하겠다!”
악사들의 연주가 희미해질 무렵 새로운 소리가 나타났다. 연극배우들의 크고 과장된 목소리였다.
“위대한 정복왕 폐하가 칼을 찌르자! 오오! 사악한 마녀가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데!”
로벨과 호른 경은 자연스럽게 걸음을 멈추고 연극을 구경했다. 샘 포클 역을 맡은 잘생긴 배우가 고깔모자를 쓴 허수아비를 찔렀다. 몰입한 관객들이 비명을 질렀다.
“배우가 부족한가? 왜 마녀가 허수아비지?”
12기사 역할의 배우들이 무대 구석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것을 보니 인력난은 아닌 듯했다. 호른 경이 목소리를 낮춰 설명했다.
“옛 신의 교단과 기사단이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어째서? 연극이잖소?”
로벨은 이해를 못했다. 신앙심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볼탄 반도 출신이기 때문이다. 교회의 입김이 강한 에르나 왕국이나 아이란드 왕국 출신이면 바로 납득했을 것이다.
“이리하여 위대한 정복왕은 북부를 구원하고 왕국의 기틀을...”
마녀를 쓰러트리는 것으로 클라이맥스가 끝난 듯했다. 극중 상황을 해설하는 사회자가 마무리를 멘트를 할 때, 콧물자국이 선명한 관객이 기습적으로 물었다.
“샘 포클 폐하랑 우리 폐하가 싸우면 누가 이겨요?”
주위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엄마랑 아빠 중 누가 더 좋아요?’ 등으로 괴롭힌 당한 지난날의 복수일 지도 모르겠다. 연극을 설명하는 사회자가 숨을 들이켰다. 눈알이 빠르게 굴러갔다.
“정복왕 폐하는, 그 뭐시냐, 330년 전의 영웅이시고, 무적무패 폐하는 지금 볼탄 반도의 영웅이신데, 거시기, 그것이, 비교가 힘들지 않나 생각을...”
“우- 우우-”
야유가 쏟아졌다. 공연비를 받아야 하는 타이밍이라 좋지 않았다. 선택해야 했다. 샘 포클이냐, 로벨 로드릭이냐.
“제 생각에 포비아 왕국을 통일한 샘 포클 폐하가...”
관객들의 눈초리가 사나워졌다. 유랑극단을 이끌며 눈칫밥을 먹어온 사회자는 즉시 관객의 니즈를 알아챘다.
“...아무리 대단해도! 우리의 무적무패 왕만 하겠습니까? 로벨 로드릭 폐하 만세! 로드릭 시티 만세!”
관객들은 그제야 만족하고 빵과 은화를 던졌다. 그중에는 호른 경도 있었다. 무려 20페닝어치 은화를 뿌리며 칭찬했다.
“저 광대가 뭘 좀 아는군요. 실로 진실된 자입니다.”
“그만... 그만하시오...”
로벨이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소매를 당겼다. 천하의 로벨도 우상인 샘 포클과 비교되면 부끄러운 듯했다. 호른 경은 그 모습이 사랑스러워 10페닝 은화를 하나 더 던졌다.
축제 분위기는 광장부터 골목 구석까지 가득했다. 부도덕한 성인들을 위한 창관촌도 있고, 걸음마가 어려운 갓난쟁이들을 위한 인형극도 있었다. 그리고 어디나 술과 음식과 음악이 가득했다.
로벨은 고기꼬치로 배가 안 차 파란 사과와 말린 생선포, 꿀 바른 비스킷을 사 먹었다. 호른 경은 주머니를 넉넉하게 하고 나오길 잘했다 생각하며 미소 지었다.
“폐하? 입가에...”
“응?”
“잠시만 그대로 계십시오.”
사심 가득한 호른 경은 별로 묻지도 않은 비스킷 가루를 털어주었다. 턱을 올리고 얌전히 닦아주길 기다리는 모습이 사랑스러워 반대쪽도 한번 훑었다.
‘이런 분이 수천 명의 적을 때려잡는 기사 중의 기사라니... 누가 믿을 수 있을까.’
호른 경 빼고 다 믿을 거 같지만, 굳이 알려줄 필요는 없었다. 로벨은 깨끗해진 입에 비스킷을 물고 새로운 곳을 가리켰다.
“이제 저쪽으로 가봅시다.”
전장에서 계절을 보내고 해를 보내느라 도시가 변해가는 것을 하나하나 살피지 못했는데, 오늘에서야 제대로 보았다. 골목과 골목에 젖은 빨래가 나풀거리고, 병아리 삼형제가 어미 닭을 쫓아 뒤뚱뒤뚱 달려가고, 소매치기 소년과 부랑자 소녀가 빵조각을 나눠 큰 쪽을 양보하며 싸웠다.
“매년 보내는 추수제지만...”
구석구석 걷다 보니 어느새 인적이 뜸한 북문 근처까지 왔다. 현악기의 들뜬 소리와 관악기의 웅장한 소리가 모두 아련하게 들렸다.
“...올해는 조금 다른 것 같소.”
로벨은 자신의 목소리에 살짝 당황했다. 평소보다 가늘게 느껴졌다. 수줍어하는 듯도 했다. 호른 경은 가슴을 펴고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습니다. 폐하 덕분이지요.”
“본인이? 본인이 왜?”
로벨의 까만 눈동자가 반짝였다. 10피트의 괴물과 1,000명의 적 앞에서도 물러섬이 없는 호른 경이지만, 지금의 로벨은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시선을 하늘로 돌렸다. 오후 햇살이 따사롭게 반짝였다.
“그것은 제가... 제가 감히 폐하를...”
호른 경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목소리도 가늘게 떨렸다.
로벨은 혀끝이 가려운 이상한 기분이 되었다. 심장이 빨라지고 손가락 발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어색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언젠가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착각일 것이다.
“...제가 감히 폐하를...”
어느 순간 웃음소리도, 악기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로벨은 두 눈을 감았다. 이유는 모르지만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부, 불이야! 불이야!”
“우아앗! 비켜! 비키라고!”
당연한 말이지만, 시간이 멈출 리 없었다. 웃음과 음악이 끊긴 것도 착각이 아니었다. 상황이 긴박하면 웃을 수 없었다.
“불이라고?”
로벨은 칼자루를 쥐고 골목 저편을 보았다. 사람들이 우르르 뛰어가는 게 보였다.
“왜 하필 지금!”
호른 경이 버럭! 화를 냈다. 화난 이유가 남과 다른 듯한데, 아마 오해일 것이다.
“저쪽은 아까 고기 굽던...”
“사고가 난 모양입니다. 폐하, 자리를 피하시지요.”
호른 경이 앞을 막으며 말했다. 별일 아닐지도 모르지만, 사랑하는 왕을 위험에 처하게 할 수 없었다. 물론, 로벨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그게 무슨 소리요? 내 도시고, 내 사람이오.”
로벨은 호른 경을 살짝 밀치고 사람들이 향하는 곳으로 달려갔다. 사내로서, 기사로서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공왕 폐하!”
호른 경은 다시 하늘을 보았다. ‘옛 신이시여. 이쯤 되면 작정한 거 아닙니까?’ 옛 신은 항상 그랬듯 말이 없었다. 결국 로벨을 뒤쫓아야 했다. 생각해 보면 이것도 항상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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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설하고 말하면 큰 화재는 아니었다.
고기 굽는 화로가 주저앉아 연극 자재에 불똥이 튀었다. 순찰을 핑계로 축제를 즐기던 울프 용병단이 병장기로 무대를 부숴 불이 번지는 것을 막았고, 용감한 시민들이 물동이를 날라 빠르게 진화했다. 마지막 불씨를 발로 밟아 끌 때까지 30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어린 집사가 알면 게거품 물겠군...”
“어떤 놈이 사고 친 거야! 어엉? 네놈이야?”
큰일을 치를 뻔한 용병들이 화가 나 책임자를 찾았다. 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으니 마땅히 체포해야 했다. 크고 우악스러운 병장기가 번뜩이자 시민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다친 사람 없잖아. 그럼 됐어. 제자리로 돌아가.”
로벨이 겁먹은 시민들을 비호했다. 그런데 변장을 너무 잘한 탓일까, 아니면 불티에 눈이 뒤집힐 탓일까, 고용주를 알아보지 못했다.
“넌 또 뭔데 돌아가라 마라야? 어디 기사 나으리라도 돼?”
“...기사 맞아.”
“기사 나으리라고? 으하핫! 그럼 난 공왕 폐하다!”
용병을 나무랄 수 없었다. 직위와 명성이 있는 기사들은 늑대성에 초대되어 파티를 벌이고 있었다. 성에 초대받지 못한 기사라면 맨앳암즈와 별반 다를 것 없었다. 위대한 공왕의 병사가 존중할 신분이 아니었다.
“그럴 리가.”
“그럴 리가?”
로벨은 호른 경을 힐끔 보았다. 아쉬움이 교차했다. 추수제는 내일도, 모레도 계속 되겠지만, 두 사람의 축제는 이제 끝낼 때가 되었다.
로벨은 허름한 후드를 벗고 흐룬팅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연극배우처럼 과장하지 않아도 왕의 품위가 있었다. 특히 왕을 자처한 용병에게 강렬했다.
“내가 왕인데, 또 왕이 있을 리가.”
침묵 속에서 입술이 점차 벌어졌다. 로드릭 시민은 그래도 종종 보았지만, 먼 곳에서 온 상인과 농민은 처음이었다. 이 땅에서 가장 높은 분을 뵙게 되었다.
“고, 공왕 폐하 만세!”
“무적무패 왕 만세!”
한 사람이 무릎 꿇자 너도나도 무릎을 꿇었다. 연극이면 가장 절정인 장면이지만, 왠지 한숨이 나왔다.
“호른 경, 그만 돌아갑시다.”
왕의 자리로, 그리고 ‘로벨 로드릭’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