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1화. 보필
가을 추수가 끝나지 않았는데, 추수제 분위기는 빠르게 무르익었다.
추수 이후에 준비하면 시간이 부족한 탓도 있고, ‘추수제’란 이름의 도시 축제가 된 탓도 있었다. 어린 집사가 로벨을 대신해 추수제 예산을 승인하며 말했다.
“영지 인구의 7할이 도시민이니까 어쩔 수 없죠. 옛날처럼 농사지어서 먹고 사는 게 아니잖아요.”
“그것 때문이 아닌 거 같은데...”
로벨은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성 안팎을 오가는 인파가 상당했다. 대부분 낯선 얼굴이었다.
“펄프 대장이 고생 좀 하겠어.”
정말 그러했다. 펄프 대장 이하 울프 용병단은 추수제 분위기에 적응 못해 이리 채이고 저리 채였다. 명성과 명예를 모두 가진 무적무패의 기사가 상시 거주하지만, 그 외 기사들은 좀처럼 볼 수 없는 곳이 늑대성이었다.
“오늘 같은 날이 아니면 말이야.”
어린 집사가 쏘아 올린 작은 공, 아니, 작은 상납요구 때문이었다. 예년보다 많은 기사가 예년보다 일찍 찾아와 시가지를 점령했다. 여관과 술집의 술을 동내는 것으로 모자라 성 밖 농가와 양조장까지 찾아가 술을 타왔다.
“저거 말려야 하지 않소?”
“누가? 우리가? 농담이지?”
술도가의 치안을 담당하는 울프 용병단이 손을 놓았다. 그래도 차마 직무태만이라 말할 수 없었다. 난쟁이 광대가 산더미처럼 쌓인 맥주잔을 빙글빙글 돌았다.
“외해의 거친 파도를 넘어온 푸른 눈의 야만 기사 나마르 아자르 경! 에르나 왕국의 명예로운 챔피언 기사 호킨 페럿 경! 우리의 왕을 도와 용의 가죽을 벗겨낸 북풍의 기사 고르크 슐츠 경! 폭풍을 지배하는 폭풍탑의 주인 조단 랭스터 경!”
3파운드짜리 맥주잔을 11개나 비운 기사들이었다. 이들 말고도 기사와 기사 종자가 십여 명이 더 있었는데, 이제 없었다.
“우오옷! 열두 번째! 열두 번째 잔이 나왔습니다!”
적국에서 외로이 자존심 지키는 호킨 페럿 경이 허세를 부렸다.
“벌써 취했소? 끄윽-! 역시 볼탄 반도 기사들은 약해 빠졌군.”
누가 봐도 허세였다. 시뻘게진 얼굴에 파란 입술이 당장에라도 위장에 쌓인 것을 쏟아낼 것 같았다. 반면, 슐츠 경은 아무 말 없이 새 맥주잔을 잡았다. 그랜드 챔피언 기세에 눌려서도, 상종하는 게 한심해서도 아니었다. 입을 열면 맥주가 흘러나올 것 같아서였다. 그때, 새로운 낙오자가 생겼다. 쿵-!
“앗! 랭스터 경! 랭스터 경이 쓰러졌다!”
폭풍성의 수행원이 우르르 몰려나와 거품 문 주인을 수습했다. 당사자는 괴롭고 슬프고 안타깝지만, 구경하는 시민들은 테이블과 옆 사람을 두드리며 즐거워했다. 평소라면 무엄하다 질타할 일이나, 축제에는 많은 것이 용납되었다.
“이제 남은 기사 나으리는 셋! 셋뿐입니다!”
누가 주도해서 벌인 술자리가 아니었다. 먼저 와서 술을 마시는 아자르 경을 보고 호킨 페럿 경이 시비를 건 것이 발단이었다. 아니, 그것까지도 괜찮았다.
“볼탄 반도에서는 이것도 술이라고 마시는군? 우리 왕국에서는 아홉 살짜리의 입가심도 안 된다오.”
에르나 왕국인 특유의 거만함이 깃든 말투였고, 볼탄 반도 출신이란 것에 자부심이 강한 조단 랭스터 경은 흘려듣지 않았다.
“뭐? 포도즙이나 홀짝이는 에르나 왕국 종자가? 우습군! 아주 우스워!”
자연히 술 대결 분위기가 조성됐고, 호승심 강한 젊은 기사와 재능기부에 관심 많은 어릿광대가 등장해 이 지경이 되었다.
“술이 들어간다! 술이 들어간다! 이얏호!”
맥주잔 바닥이 경쟁하듯 올라갔다. 그러나 세 기사 모두 한계였다. 목구멍으로 흘러들어가는 양보다 가슴을 적시며 흘러내리는 양이 많다고 생각될 때, 자존심 하나로 버티던 호킨 페럿 경이 벌러덩 자빠졌다. 쿠당-탕-!
“쿨럭! 쿨럭!”
물에 빠진 조난자가 물을 게워내듯 맥주 거품을 게워냈다.
“아앗! 에르나 왕국 챔피언! 끝내 침몰합니다! 칼싸움과 술싸움은 역시 다르군요?”
이제 남은 것은 외해의 야만 기사와 북해의 깡촌 기사 두 사람이었다. 열두 번째 술잔이 바닥을 보이며 테이블로 내려왔다. 마상시합장에서도 흔히 볼 수 없는 환호가 터져 나왔다.
“세상에! 옛 신이시여! 기어이 다 마셨습니다! 얼마나 마신 거지? 3, 3, 3파운드... 아, 아무튼 제 몸무게만큼 마셨습니다!”
양조장 주인이 어이없는 얼굴로 열네 번째 잔을 가져왔다. 슐츠 경은 고릴라처럼 트림한 후 손잡이를 잡았다. 그러나 경기(?) 전부터 계속 달린 아자르 경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기요, 야만인 나으리? 나으리?”
어릿광대가 이상한 낌새를 알아채고 다가갔다. 얼굴 앞에 손바닥을 흔들고, 어깨와 가슴을 꾹꾹 찔러보았다.
“히이익-? 주, 죽었나?”
죽은 것은 아니고, 그대로 잠이 들었다. 평범한 사람이 이해할 수 없는 주사였다.
“우, 우승자가 나왔습니다! 북극의 찬바람을 몰고 온 용맹한 기사! 로드릭 시티 맥주의 학살자! 진정한 술꾼! 보리와 누룩의 가호자! 고르크 슐츠 경!”
어린 집사가 평소의 뚱한 얼굴로 물었다.
“페닝을 버는 방법이 술내기였어요?”
수많은 부상자가 나온 양조장 주투(酒鬪)의 한 줄 평이었다.
슐츠 경은 죽어가는 얼굴로 한숨을 쉬었다. 그때마다 술냄새가 진동했다.
“나도 술 마실 줄 아는데...”
로벨은 자기를 쏙 빼고 술판을 벌인 것이 화난 듯 주먹을 꽉 쥐었다. 마녀와 수사가 선대의 갈등을 이겨내고 한마음으로 뜯어말렸다.
“페닝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아직도 결정하지 못했소?”
슐츠 경이 지근거리는 머리를 잡고 물었다. 축제 이야기가 아니라 사업 이야기였다.
로벨은 사업 전문가 어린 집사를 가리키고 한발 물러나는 시늉했다. 어린 집사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즉시 응했다.
“슐츠 경이 가져온 은이면 울프 용병단 2개 소대를 빌려줄 수 있어요.”
슐츠 경도 늑대성의 분위기를 파악했다. 실무자이며 실권자인 어린 집사를 무시하지 않았다.
“본인에게 필요한 것은 병사가 아니오.”
“그렇죠. 그렇겠죠. 그래서 문제에요.”
슐츠 경의 제안은 분명 페닝이 되었다. 값싼 비유가 아니라 진짜 ‘페닝’이었다.
“뱀의 계곡은 존 도너반 자작의 까마귀 성 영지요. 그리고 로벨 로드릭 공왕은 도너반 가문의 주인이지. 무엇이 문제란 말이오?”
“몰라서 묻는 게 아니죠? 거긴 검은 숲이에요. 도너반 가문의 땅인 동시에 제임스 가문 일파의 땅이라고요.”
“명분은 힘을 따르는 법이오. 금(金)이오. 그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소.”
“가치가 아니라 가능성이겠죠. 금광이라고 전부 가치가 있는 것은 아니거든요.”
볼탄 반도와 검은 숲의 경계인 뱀의 계곡에서 금이 발견되었다. 사실 놀라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오래전부터 계곡에서 사금 채취가 이뤄졌고, 어딘가에 금맥이 있을 거란 소문이 전설처럼 떠돌았다. 그러나 험한 지형과 영주들의 불화 탓에 조사가 진행되지 않았는데, 어느 용감한 모험가가 1년 반을 헤매어 마침내 금맥을 찾아냈다.
“공왕 폐하는 도너반 가문의 주인이고 제임스 가문과 친분이 있지 않소. 그리고 본인도 인근 지역에서 영향력이 있소. 북해안 영주들 사이에서 용살자 슐츠로 통하오.”
‘푸풉-! 용살자래요!’
‘와... 본인 입으로...’
마녀와 수사가 다 들리게 속닥였다. 슐츠 경도 내심 부끄러운지 헛기침했다.
“늑대성이 도와주면 금광을 차지할 수 있소. 수익은 7대 3, 아니, 6대 4로 나눠주겠소.”
어린 집사는 숫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우리 폐하가 4는 아니겠죠?”
“...금을 캐도 실제 관리하는 것은 본인이잖소. 본인이 모든 비용을 감당하니 최소 6은 받아야 하오.”
“그걸 포함해도 5대 5로 해야죠. 뱀의 계곡이면 슐츠 가문의 땅도 아니잖아요? 존 도너반 자작한테 따로 수익을 떼 줄 건가요?”
“조, 좋소. 그럼 5대 5로 하겠소.”
“아뇨? 5대 3대 2로 해야죠.”
“어째서?”
“땅 주인이 바본가요? 수익의 30%는 줘야 뒷말이 안 나오죠.”
“그럼 본인이 20%란 말이오?”
“슐츠 경의 일은 광산 관리뿐이에요. 그 정도면 충분하죠.”
어린 집사 말대로 가능성이었다. 매장량이 많으면 20%로 충분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투자금만 날리게 된다. 고민은 길어도 결정은 빨랐다.
“좋소.”
“좋아요?”
“그렇소. 좋소.”
슐츠 경은 머리에서 손을 떼었다. 이럴 때 하는 게 아니지만, 왠지 지금 해야 할 것 같았다. 로벨이 손을 내밀고, 슐츠 경이 맞잡았다.
“다시 함께하게 되어 반갑소.”
“용보다 어려운 상대군. 고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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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걷이가 시작될 무렵 울프 용병단 2개 소대와 소금광산에서 단련된 숙련된 광부 한 무리가 북쪽으로 떠났다. 그러나 술에 취하고 분위기에 취한 시민은 알지 못했다.
“모닥불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불이 없으면 분위기가 안 사는데...”
“불이 나면 당신이 못 살게 될 걸요.”
어린 집사는 수백 명의 농민과 상인 조합원과 술 취한 기사와 수행원을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들 대부분은 어린 집사가 공왕의 친구이며 로드릭 시티의 최고 행정관이란 것을 알기에 함부로 말하지 않았지만, 가끔 생각이 부족한 기사나 부르주아가 시비를 걸기도 했다.
“일개 시종 주제에 감히...!”
그런 사람을 위해 굳이 로벨이 나설 것 없었다. 아자르 경이 눈알을 부라리고 칼집을 툭툭 치면 분노는 빠르게 사그라졌다.
“에이잇! 이렇게 바쁠 때 폐하는 어디 간 거야!”
물론, 로벨이 왕좌에 앉아있으면 어린 집사나 아자르 경이 열심히 일할 필요 없었다.
로벨은 공무를 어린 집사에게 넘기고 사적인 일에 집중하고 있었다.
“제가 없는 사이에... 어찌해서...”
“그런 것이 아니오. 정말 아니오.”
어느 때라면 가장 먼저 왔을 기사가 올해는 가장 늦게 도착했다. 로벨의 명령으로 사트로 시티에 체류한 자칭 제1기사 패트릭 호른 경이었다.
“공왕 폐하는 저의 유일한 주인이고, 저는 보잘것없는 칼토막이나, 세월의 깊이가 있기에 우정만큼은 믿어왔습니다.”
호른 경은 지저분한 거리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렸다. 무대에 올려도 될 만큼 자못 비장했다. 지나가는 시민들이 무슨 일인가 싶어 주위를 기웃거렸다. ‘공왕 폐하 아니신가?’, ‘저 기사는 누구야?’, ‘로드릭 항의 기사 나으리 같은데... 무슨 일이지?’ 호른 경은 비통하게 울부짖었다.
“어찌하여, 어찌하여 본인만 초대하지 않을 수 있습니까!”
“그, 그거야 경은 당연히 올 거니까, 그러니까 굳이 초대하지 않았소. 그리고 그 편지는 본인이 쓴 게 아니오. 어린 집사가 쓴 거요. 딱히 좋은 내용도 아니고... 저, 정말이오!”
어린 집사가 보낸 편지에 호른 경이 빠져 있었다. 로벨의 명령으로 고향에 없는 것을 알거니와 최측근인 만큼 상납을 면제해 준 것인데, 그런 사정을 알 리 없는 호른 경은 단단히 삐져서 나타났다.
“사람들이 쳐다보잖소. 그만 일어나시오.”
“제가 부끄러우십니까?”
“아니, 그런 뜻이 아니잖소.”
로벨은 사랑스러운... 아니, 충성스러운 기사를 어찌 달래야 할지 고민했다.
“추수제가 끝날 때까지 본인을 보필해 주시오.”
“...저 혼자 말입니까?”
호른 경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로벨은 제안이 통하자 기뻐서 외쳤다.
“그렇소! 추수제 기간 동안 함께 해주시오! 경을 위해 시간을 내겠소.”
어린 집사의 비명이 귓가에 감돌았지만, 호른 경의 미소로 금방 잊혀졌다.
“목숨을 바쳐 공왕 폐하를 모시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