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30화 (430/605)

430화. 상납

늑대성 식구가 모처럼 모두 모였다.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애꾸눈 볼포스, 외팔이 더치, 허풍쟁이 제이콥, 리암 수사, 헨리 상회장, 페리 행정관, 그람 형제, 그리고 호킨 페럿 경이었다.

어린 집사는 익숙지 않은 얼굴이 불편해 슬금슬금 눈치 보다가 리암 수사 귓가에 빠르게 속삭였다.

‘몸값협상이 안 되었어요? 왜 아직도 여기 있어요?’

옛 신의 가르침 아래 숨길 것도, 무서울 것도 없는 리암 수사였다. 왜 속삭이는지 이해 못해 크게 답했다.

“안 그래도 그것부터 보고하려고 했어요. 어험. 험. 공왕 폐하, 에르나 왕국 페럿 가문에서 연락이 왔었습니다.”

로벨은 호킨 페럿 경을 아쉬운 눈으로 보았다. 그동안 정이 제법 들었는데 헤어질 시간이었다. 성급한 판단이었다. 호킨 페럿 경의 표정이 영 안 좋았다. 리암 수사가 아무렇지 않게 이유를 밝혔다.

“가문의 자금 사정이 안 좋아 호킨 페럿 경이 약속한 몸값을 지불할 수 없다고 합니다.”

가벼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건실한 농가나 부르주아 가문에서도 부끄러운 일인데, 그랜드 챔피언을 연달아 배출한 기사 가문이면 부끄러움을 넘어 치욕이었다. 호킨 페럿 경이 시뻘게진 얼굴로 소리쳤다.

“전장에 나오기 전에 토너먼트를 두 개나 뛰었는데! 그때 받은 상금이 2만 2천 페닝인데! 뭐? 자금이 부족해?”

어린 집사는 1만 페닝 이상 주는 토너먼트가 여러 개란 사실에 한 번 더 놀랐다. 에르나 왕국이 부유하긴 부유했다.

“몸값을 못 내면... 음... 어쩌죠?”

“내 갑옷을 담보로 잡지 않았나! 그거면 충분하겠지!”

“그 찢어진 갑옷이요? 수리비가 만만치 않은데...”

피도 눈물도 없는 어린 집사가 가엾은 그랜드 챔피언을 핍박했다. 자비롭고 명예로운 로벨이 새로운 제안을 내놓았다.

“몸값을 낮춰서 다시 협상을 제안해.”

호킨 페럿 경 얼굴에 가을이 찾아왔다. 이마부터 붉게 물들었다. 어린 집사가 악의 없이 상처를 쑤셨다.

“소용없어요. 정말 구하고 싶으면 빚을 내서라도 몸값을 마련했겠죠. 저들은 페럿 경을 구할 생각이 없어요.”

그리고 안쓰러운 눈초리를 보였다. ‘평소에 친하게 좀 지내시지...’ 조롱과 멸시보다 더한 수치심을 주었다. 이웃 나라 챔피언이 폭발하기 전 간신히 다음 보고로 넘어갔다.

“울프 용병단 북군과 남군 모두 무사히 귀대했습니다. 소모된 물자와 비용은 페리 행정관이 처리했습니다.”

메인 홀의 시선이 조용한 행정관에게 모였다.

“추수제 예산을 일부 사용했습니다. 허락 없이 집행한 불경을 용서하십시오.”

“아니야. 아니야. 아주 잘했어.”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최선을 다해 설명한 것도 있겠지만, 페리 행정관의 판단력과 행동력도 남달랐다. 예정에 없고 전례에 없는 하계 전술 어쩌고가 일종의 무력시위란 것을 캐치하고 최우선으로 실행한 것이다. 머리가 나쁘거나 몸을 사리는 평범한 행정관이 아니었다.

“그럼 추수제는 어떡하나요?”

마녀 키르케가 새로운 문제를 거론했다. 천 명 가까운 용병을 움직인 탓에 막대한 지출이 생겼다. 늑대성의 기둥이 흔들리거나 물가폭등이 생길 정도는 아니지만, 성대한 추수제를 진행하기 걱정스러울 수준이었다.

“별걱정을 다합니다요. 상인들한데 세금을 더 뜯으면 되지 않습니까요? 축제라고 좋아라 몰려오는데 기존 세금에 2%만 올려도...”

그람 형제가 그람 형제다운 발언을 했다. 로벨이 인상을 찌푸리고, 어린 집사와 리암 수사가 화를 냈다.

“그걸 말이라고 해요? 우리 시장의 가장 큰 장점이 낮은 관세인데?”

“세금을 올리면 물가도 올라갑니다. 상인보다 농민이 먼저 힘들어져요.”

늑대성의 실세와 옛 신의 대리인이 반대하자 그람 형제는 쭈그러들었다.

“그럼 어쩝니까요. 옛날처럼 모닥불 피우고 춤만 춥니까요?”

“난 그것도 좋...”

로벨이 반색하자 어린 집사가 재빨리 허리를 잘랐다.

“부족한 예산이야 빌리면 그만이죠. 로드릭 상회에 남는 은화가 꽤 있지 않아요?”

시선이 늙은 피터에게 돌아갔다. 로드릭 가문과 근 20년째 거래 중이며, 맥주 전매권을 받은 뒤로 사실상 늑대성의 가신이 된 헨리 피터 상회장은 난색을 표했다.

“뉴-뉴 로드릭 마을에 양조장을 짓고 자유도시연맹에 지부를 설치하느라 더 이상 여유가 없습니다.”

“뉴-뉴 로드릭 마을이 뭐야, 이상하잖아.”

“그게 중요한 게 아닌 것 같은뎁쇼...”

허풍쟁이가 한숨처럼 말했다.

“페럿 가문에서 몸값을 내면 전부 해결되는데...”

다시 처음으로 돌아왔다. 호킨 페럿 경의 얼굴에 두 번째 단풍이 들었다. 로벨은 새로운 친구를 위해 다시 화제를 돌렸다.

“지나간 일을 자꾸 말해 뭐해?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

사실 ‘왕’ 타이틀이 있으니 원한다면 다른 상회에서 페닝을 빌릴 수 있었다. 빚이 없는 왕과 제후가 드물기에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그러나 ‘쫌생이’ 어린 집사는 이자를 내는 게 싫어 최후의 최후 수단쯤으로 생각했다. -헨리 상회장한테 빌려도 이자는 내야 하지만, 세금 명목으로 상당부분 회수가 가능했다-

“해적을 잡아올까?”

로벨이 알루미늄 왕관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악명 높은 인어해 해적을 옆집 창고 털듯이 말하는 게 인상적이었다. 펄프 대장 이하 용병들 표정이 어두워졌다. 백전노장이고 역전의 용사지만 바다는 여전히 싫었다. 다행히 어린 집사가 만류했다.

“아셔요. 그 일 이후 볼탄 반도 앞바다가 깨끗해졌어요.”

“그, 그래?”

“이안 선장이 30년 물질에 이렇게 쾌적한 바다는 처음이라고 좋아하던데요.”

발레아 제도의 해적, 자유도시연맹의 해군, 그리고 에르나 왕국의 무적함대까지 연거푸 격파했으니, 지성이란 게 있으면 볼탄 반도 해역에서 무력행사를 할 리 없었다.

“바다에서 싸워 이긴 것은 얼마 안 되지만...”

“중요한 것은 볼탄 반도의 왕이 이겼다는 거지요!”

“역시 무적무패의 왕! 육해공을 가리지 않고 오직 승리! 승리뿐입니다요!”

그람 형제가 기회다 싶어서 손바닥을 비볐다. 로벨은 기사 중의 기사답게 반응했다.

“응! 역시 난 대단해!”

용병과 상인과 수사가 어색한 표정을 지었지만 감히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그리고 가까이서 매일 보니까 위엄이 없을 뿐,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면 대단함을 부정할 수 없었다. 무려 ‘왕’이 된 사람이었다.

“그래서요? 그래서 추수제는 어쩔 거예요!”

마녀 키르케가 답답한 듯 소리쳤다. 마녀를 졸래졸래 따라다니는 아야와 이야카가 덩달아 으르렁거렸다. 이빨이 약해도 맹수였다. 그람 형제가 입을 다물었다. 결국, 해결책은 어린 집사가 내놓았다.

“해적도 안 되고, 상인도 안 되고, 옆 나라 포로도 안 되면, 방법은 하나뿐이네요.”

옆 나라 포로 빼고 모두가 관심을 기울였다.

“그게 뭔데?”

“뭐긴요. 남은 계급이 하나밖에 없잖아요.”

힌트가 쉬웠다. 로벨 이하 늑대성 식구들이 동시에 대답했다.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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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추수제 준비에 앞서 몇 가지 공문을 돌렸다.

옛 신의 축복 아래 성공적인 가을 추수를 바란다는 영양가 없는 문장에 청옥성의 승리를 자축하는 문구와 에르나-포비아 왕국 전쟁의 장기화를 우려하는 문구를 넣었다. 눈치코치 없는 기사들이 알아들을 수 있게 두 번씩 강조했다.

“이게 무슨 뜻이야?”

진짜 눈치 없는 왕이 도리어 물었다. 어린 집사는 ‘세 번 강조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며 대답했다.

“알아서 성의 표시 좀 하라고요.”

이런 식의 상납요구는 기사들의 충성심을 흔들 수 있어 자주 하면 안 되었다. 어린 집사도 그 정도 생각은 있어 적어도 내내년까지는 반복하지 않을 것이다.

며칠이 지나자 기대한대로 공물이 들어왔다.

“켈트 가문에서 모피 35장, 메튜 가문에서 양 22마리, 맥기 가문에서 포도주 10통이랑 맥주 29통... 이 양반이? 우리 도시 특산물이 맥주인 걸 모르나?”

기사답게 금은화보다 현물이 많았는데, 어차피 축제에 써야 할 것들이라 나쁘지 않았다.

로벨만큼 눈치가 없어서, 혹은 영지의 사정이 안 좋아서 빈손으로 찾아오는 기사도 있었다. 어린 집사는 그 가문을 하나하나 꼼꼼하게 기록했다. 다음번에 축하할 일이 있거나 하사품을 내릴 때 제대로 차별해줄 생각이었다.

“역시 쫌생이...”

“어허! 인간적이라고 해주세요.”

반대로 아주 귀한 보물을 가지고 찾아오는 기사도 있었다. 로벨 다음으로 부유한 랭스터 가문은 동방비단과 계피로 가득 찬 상자를 가져왔다. 로벨 덕분에 가문이 종속되고, 폭풍성의 주인이 되었으니 이 정도 충성심은 당연했다. 그런데 의외의 가문도 있었다.

“고르크 슐츠 경!”

로벨은 반가운 마음에 왕좌 아래로 두어 걸음 내려갔다. 먼저 와 있던 기사들이 당황했다.

‘슐츠? 어디에 있는 가문이지?’

‘이름을 봐서 어디 시골의 기사 같은데...’

나름 쟁쟁한 가문의 기사들이 모인 자리라 북해안 구석의 작은 마을 기사를 모를 수 있었다. 게다가 로벨이 격하게 반긴 탓에 질투와 시기심이 앞섰다. ‘폭풍성의 주인이 값비싼 비단을 펼쳐 보일 때도 심드렁하던 왕이 저리 반색하다니...’

“공왕 폐하, 오랜만에 뵙습니다.”

슐츠 경이 목례와 함께 경의를 표시했다. 로벨은 잠깐 멈칫했다가 미소 지었다.

“경답지 않게 왜 그렇소? 아무튼 와주어서 고맙소.”

슐츠 경은 무뚝뚝한 얼굴로 종자를 불러 진상품을 보였다. 용을 함께 잡은 전우가 반갑긴 하지만, 선물은 크게 기대하지 않았다. 갯바위 마을 사정을 뻔히 알기에 청어 몇 두름만 가져와도 기쁘게 받아줄 생각이었다. 헌데, 상자를 내려놓자 묵직한 소리가 났다. 쿵-!

“그게 무엇이오?”

슐츠 경은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대답했다.

“은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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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조금 이상했다. 깜짝 놀랐다가 깔깔 웃다가 갑자기 정색했다. 항상 생각하지만 표정이 참 다양했다.

“내 저럴 줄 알았다니까요. 그래서 우리 폐하가 하사한 것을 그대로 뺏어왔어요?”

“그것보다 ‘떠돌이 기사’가 진짜 슐츠 경이라니...”

로벨이 기운 빠진 듯 중얼거렸다. 그러나 슐츠 경도 할 말이 있었다.

“뺏은 게 아니라 정당하게 받은 거요.”

“세상의 모든 강도가 그렇게 주장하죠.”

“헛소리가 아니오. 생각해 보시오. 신원보증이 안 되는 범죄자가 은괴를 가지고 무엇하겠소? 혹여 소문이 세어 나가며 그곳 영주한테 걸려 치도곤 당하고 뺏기겠지.”

“그건... 그럴 수 있네요?”

어린 집사가 자신의 이마를 딱! 때렸다. 그때 저 생각을 했으면 은괴를 독차지할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슐츠 경은 당당히 권리를 주장했다.

“그래서 본인이 은괴를 사들였소.”

“슐츠 기사님이 무슨 돈으로요?”

마녀 키르케가 사심 없이 가난을 후벼 팠다. 슐츠 경은 정말 격의가 없는 소년소녀를 무시하고 끝까지 로벨만 보았다. 왠지 낯뜨거워지는 시선이었다.

“외상으로 샀소. 조만간 많은 페닝을 벌어 먹을 것과 입을 것으로 갚아줄 것이오.”

“그게 뭐야! 결국 뺏은 거잖아!”

어린 집사가 소리를 빽! 질렀다. 그러나 로벨은 부끄럼 없는 기사를 믿었다.

“페닝을 어찌 벌 생각이오?”

슐츠 경은 자신을 알아주는 젊은 왕에게 미소를 지었다.

“공왕 폐하의 도움이 필요하오. 볼탄 반도 입장에서도 그리 나쁜 이야기가 아닐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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