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9화. 귀환
진짜 마녀가 가짜 마녀를 치료했다.
잘 말린 보리를 곱게 갈아 미음을 만들고, 달맞이꽃을 우려내 해열제를 만들고, 오랫동안 피가 통하지 않은 팔다리를 주무르며 옛 신과 드루이드 신에게 기도했다. 이중 몇 개는 어린 집사의 몫이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기사님한테 시킬 수 없잖아요.”
“여기 주민은 손이 없나요?”
“그 사람들은 싫어요. 못 믿어요.”
어린 집사는 가짜 마녀의 팔을 주무르며 연신 투덜거렸다. 그래도 몸은 착해서 쉬지 않고 열심히 했다. 마녀 키르케는 그 모습을 곁눈질하며 배시시- 웃었다.
“늑대성에 가면 맛있는 거 해줄게요.”
“칫. 됐어요. 맛있는 것도 늑대성 재산이에요.”
“...쫌생이.”
“뭐라고 했어요?”
로벨은 티격태격하는 십년지기 친구들을 보고 슬며시 웃었다. 어린 시절처럼 깨물고 할퀴지는 않으니 나름 어른스러워졌다.
“두 사람, 언제 사귀어?”
“뭐, 뭐, 뭐라고요?”
“누가 사귀어요? 누가요? 누구랑요?”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반응이 격한 걸 보니 조만간 좋은 소식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는 기사님은요?”
“나?”
“호른 기사님을 어쩔 거예요?”
대단히 심각한 발언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의 시선이 빠르게 엇갈렸다.
‘저게 무슨 뜻이야?’
‘뭐죠? 뭐죠? 뭐에요?’
질문만 있고 대답이 없었다. 마녀 키르케가 리넨에 걸러진 풀뿌리를 짜내며 말했다.
“기사님도 호른 기사님도 지금껏 결혼 안 한 게 그 때문이잖아요. 옛 신의 사제님이랑 리암 수사님은 싫어하겠지만, 그래도 전 응원해요. 사람은 마음이 중요하니까요.”
“음... 저기, 키르케? 뭔가 오해하는 거 같은데...”
“자! 이걸 먹이세요! 열을 내리고 기운을 차리게 해줄 거예요.”
마녀 키르케는 로벨의 변명을 듣지 않았다. 그저 다 안다는 의미심장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을 얼마만큼 아는지 궁금하지만, 물어볼 용기와 타이밍이 없었다.
“으음... 으...”
약을 마신 가짜 마녀가 바로 눈을 떴다. 사실 깨어날 때가 되어서 깨어났지만, 로벨과 마을주민은 약효가 대단하다고 생각했다.
‘지, 진짜 마녀가 아닐까?’
‘설마... 기사 나으리 일행인데...’
가짜 마녀는 멍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정신을 잃은지 오래되어 상황을 파악하지 못했다.
로벨이 한쪽 무릎을 꿇고 가짜 마녀의 앞머리를 걷어주었다. 조금 전 거론된 기사가 보았으면 시샘할 만큼 다정한 행동이었다.
“괜찮아?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
가짜 마녀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로벨을 보았다. 백옥 같은 피부. 흑요석 같은 눈동자. 흙먼지가 묻긴 했지만 화려한 판금갑옷. 기사 중에서도 흔치 않은 현실감이 없는 기사였다.
“여긴... 천국인가요...? 혹시 천사님...?”
로벨은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천사도 인지의 존재니까 비슷하지 않을까 생각했지만,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깔깔 웃으며 구르는 것을 보니 아닌 모양이다.
“천사는 아니고, 그냥 평범한 왕이야.”
“...왕이요?”
“응. 이 땅의 왕.”
나중에 생각하니 천사보다 현실감이 없는 자기소개였다. 간신히 정신을 차린 가짜 마녀가 다시 혼절했다.
“어? 왜 그래? 키르케, 이것 봐! 죽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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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 마녀가 다시 깨어나 것은 반나절 뒤였다. 이번에는 어린 집사가 나서서 차근차근 상황을 설명했다.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로벨이 자신을 구해주었다는 것은 확실히 깨달았다. 가짜 마녀는 거듭 감사하다 인사하면서 이름과 가문을 밝혔다.
“제 이름은 로자니아에요. 로자니아 우드니.”
성(姓)만으로 많은 것을 알 수 있는 시절이었다.
“숲지기의 딸인가요?”
“숲지기의 아내였어요.”
“아, 결혼하셨구나.”
어린 집사 얼굴에 아쉬움이 보이자 마녀 키르케가 옆구리를 꼬집었다.
가짜 마녀 로자니아의 남편은 깁스 자작령의 사냥터 관리인이었다. 오래된 장원의 직업이 대개 그렇듯 대를 이어온 숲지기 집안이었다. 그 일이 아니었으면 로자니아의 아들, 그리고 아들의 아들이 계속 숲지기 일을 도맡아 했을 것이다.
“남편은 4년 전 전쟁터에 불려가서 죽었어요.”
숲지기와 방앗간 관리인은 영주 직속의 사용인이라 어지간해서 징집되지 않는다. 영지의 관리인을 동원할 전쟁이면 아주 큰 전쟁이었을 것이고, 십중팔구 로벨과 관계있을 것이다.
“그리고 깁스 자작님이 떠나면서 저희 가족도 쫓겨났어요. 새로운 영주님은 남자가 없는 저희 집안을 숲지기로 쓰지 않았고, 그래서 여동생이 시집온 이 마을에 왔지만...”
그 여동생 내외도 전쟁 중에 행방불명되었다. 이곳은 사트로 가문과 옛 프란시스 가문 경계선이라 전쟁의 참화가 두드러졌다. 그리고 불안정한 민심은 강자보다 약자를 향할 때가 많았다.
가족이 없는 외지인, 그것도 젊고 아름다운 미망인은 쉽게 표적이 되었다.
“제가 항상 말하잖아요. 순박하다고 착한 게 아니라고요. 사람은 근본적으로 악해요. 절대 믿어서 안 된다고요.”
어린 집사가 툴툴거렸다. 무지(無知)는 죄가 아니지만, 죄의 발단이 된다. 이곳 주민을 용서할 수 없었다. 반면, 로벨은 자신의 죄를 생각했다.
로자니아의 남편이 징집된 것도, 깁스 마을이 도너반 마을이 된 것도, 여동생 내외가 행방불명된 것도 로벨과 관련이 있었다.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없으나 일종의 부채감이 느꼈다. 그래서 멋대로 제안했다.
“내 성에서 일할래?”
“기사님... 왕님(Sir King)의 성이요?”
로벨은 참신한 호칭에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공왕 폐하(Your Majesty)라 불러.”
“아... 폐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로벨은 어린 집사를 힐끔 보았다. 비밀이 많은 성이라 사람을 들이는 일에 민감했다. 역시나 못마땅한 표정이었다.
“성에 머물지 않으면 뭐... 아니면 울프 용병단 요새 관리를 맡겨도 좋고요.”
용병은 '사내다움'을 최고의 매력으로 아는 거친 남자들이다. 그래서 솔직히 걱정했다.
“그래도 괜찮을까? 화낼 거 같은데?”
군(軍)과 전(戰)의 달인인 로벨의 첫 오판이었다.
울프 용병단 일동은 세기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처럼 기뻐했으며, 젊고 아름다우며 가슴 아픈 사연을 가진 미망인은 울프 용병단의 아이돌(종교적 숭배대상)이 되었다.
“제가 있는데 새삼스럽게 아이돌이라니요? 저기요? 안 들리세요? 이봐요?”
진짜 마녀만 빼고 모두가 행복해지는데, 그것은 조금 나중의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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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멋대로 마녀 사냥한 마을주민을 처벌하지 않았다.
아무리 왕이라도 대대로 이 마을을 통치한 주인이 따로 있으니 ‘벌’을 내리는 것은 월권행위였다-차라리 명예를 들먹이며 그냥 죽이는 쪽이 해명하기 쉽다- 로벨 입장에서는 이곳 영주에게 ‘불쾌함’을 표시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영주가 제정신이면 왕을 불쾌하게 한 책임자를 채찍으로 다스리고 벌금을 물릴 거예요.”
주인의 위용을 자랑하는 거라 즐겁게 떠들다가 조금 뒤에 아차! 했다.
“음. 로자니아 씨가 볼 때 처벌이 가볍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그래도 채찍에 맞으면 골병이 들고...”
“아니에요. 저들의 잘못이 아닌걸요. 주제넘은 말이지만, 가능하면 채찍형은 하지 말았으면 해요.”
모포를 세 겹으로 두르고 당나귀에 탄 로자니아가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감탄했다.
“저렇게 착한 사람을...”
“정말 못된 마을이에요!”
한편, 관심 없는 척 앞서 가던 로벨은 마음이 복잡했다.
‘저런 과부가 더 있겠지...’
그중에는 로벨이 죽인 기사와 병사의 가족도 있을 것이다.
전장에서 적을 죽인 게 잘못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남겨진 고아와 미망인은 돕고 싶었다. 죄책감이 아니라 책임감이었다.
‘어린 집사는 반대할 게 뻔하고... 리암 수사랑 이야기해야겠다.’
로벨 로드릭의 이름으로 수도원을 만들 때가 되었다. 옛 신의 교단에 기부 좀 해서 리암 수사를 수도원장으로 삼고, 갈 곳 없는 여자와 아이들을 받아들여 돌볼 것이다.
볼탄 반도 특유의 완만한 구릉을 몇 개 넘자 숲과 개울에 둘러싸인 로드릭 시티가 보였다.
상주인구 3천 8백 명, 성 밖의 농민과 수시로 오가는 상인을 합치면 4, 5천 명이 북적대는 대도시였다. 어린 집사가 감탄하는 로자니아 앞에서 으쓱댔다.
“저래 봬도 볼탄 반도의 수도라고요. 3년쯤 지나면 페르젠 시티보다 커지고, 10년쯤 지나면 프란시스 시티보다 커질 거예요.”
젊은 로벨과 마녀 키르케에게 까마득한 세월이었다. 그리고 다른 두 도시를 본 적 없는 로자니아도 어색한 표정을 지었다.
늑대도로를 따라 성문 가까이 가자 인파가 늘어났다. 로드릭 항에서 노스폴드 시티와 사트로 시티로 가는 상인들이었다.
“볼탄 반도 남부와 북부를 잇는 교역도시로 성장했어요. 바닷길이 아무리 좋아도 북해까지 가려면 오래 걸리니까요. 해적도 말썽이고요.”
“육지에도 도적이 있지 않나요?”
“사트로 가문 땅은 몰라도, 우리 폐하가 다스리는 공국에는 없어요. 무적무패 왕과 용병단이 있는데 어느 도적이 날뛰겠어요?”
치안 좋고, 도로 좋고, 경유하는 도시와 마을이 여럿이라 상인 입장에서 안 지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이 바치는 세금은 늑대성의 군자금이 되었다.
“가끔 전쟁비용으로 휘청거릴 때가 있지만, 대체로 안정적이에요. 소금광산, 식품공장, 북부대로 통행세와 자유도시의 상납금까지 있으니까요. 그 덕분에 천 명 가까운 울프 용병단을 거느릴 수 있죠.”
보리 팔아서 십여 명 겨우 고용한 시절을 생각하면 놀라운 발전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서로를 칭찬하는 눈빛을 나눴다. 정작 설명을 들은 로자니아는 ‘아, 그런가요?’ 하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그 울프 용병단이란 분이... 제가 모시게 될 분인가요?”
“아니요! 로자니아 씨가 모시는 분은 우리 폐하 한 분이고, 울프 용병단은 그냥 같이 일하는 사이죠.”
당연한 말이지만, 용병의 이미지는 용병 포함하여 모두에게 좋지 않았다. 로자니아의 걱정은 타당했다. 울프 용병단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 말이다.
“우아아아앗!”
“뭐야? 왜 그래?”
성문을 지키는 울프 용병단 북군 소속 병사가 자지러졌다. 행인을 통제하는 문지기로서 권장할 태도는 아니지만, 왕의 귀환을 목격한 초병으로서 이해되는 태도였다.
“기사 나리가 오셨다! 기사 나리가 오셨다!”
“기사 나리가 아니라 공왕 폐하라고!”
“잠깐, 누구라고?”
“공왕! 공왕 나으리가 오셨다!”
“기사 폐하가 오셨어?”
성 안 곳곳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눈에 보이지 않는 불이 번져가는 것 같았다. 로벨을 사랑하고 존경하는 수백 명의 용병과 수천 명의 시민이 모여들었다.
“기사 공왕 나으리 폐하 만세!”
울프 용병단도, 로드릭 시티도 처음인 로자니아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정답은 아니지만 ‘왕’이란 이름이 어떤 이름인지 알 것 같았다.
헌데, 로벨의 명예를 자기 명예처럼 자랑하는 어린 집사는 기분이 안 좋았다. 아는 만큼 보이고, 보이는 만큼 부끄럽기 때문이다.
“저놈의 호칭들은... 날 잡아서 제대로 교육 좀 해야겠어요.”
아무튼, 볼탄 반도의 왕이 돌아왔다. 뜨거운 환대가 오랫동안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