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28화 (428/605)

428화. 마녀사냥

슐츠 가문의 갯바위 마을을 찾는 일은 요원했다.

북부대로를 따라가다 북해안 가까운 곳에서 방향을 바꿔 서쪽으로 가면 된다는 것은 알고 있는데, 정확히 어디서 어디로 가야 하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수년 전에 한 번, 그것도 슐츠 경의 안내를 받은 터라 혼자 찾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니까 뱀의 계곡에서 북쪽으로 가자니까요!”

“거기까지 가면 너무 멀잖아.”

“이렇게 헤매는 것보다 낫죠! 아니, 애초에 꼭 가야 해요? 꼭?”

주종관계가 뒤바뀐 자태지만, 로벨의 잘못이 명백하니 아무 말 하지 못했다.

북녘의 여름은 짧았다.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변했다. 그 말은 일년 중 가장 바쁜 추수기가 다가온다는 뜻이었다. 헌데, 볼탄 반도의 왕이자 로드릭 령(領)의 주인이 엉뚱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으니 실무를 담당하는 어린 집사 입장에서 화가 날만 했다.

“아야랑 이야카는 잘 지낼까요... 이빨이 약해서 딱딱한 고기 주면 안 되는데... 우리 귀염둥이들 보고 싶다...”

마녀 키르케조차 알게 모르게 눈치를 주었다. 이쯤 되자 로벨도 고집을 부리지 못했다.

“늑대성으로 돌아가자.”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쾌재를 부르다가 시무룩한 로벨 표정에 미안해졌다. 로벨을 로벨보다 잘 안다고 자부하는 두 사람이었다. 슐츠 경을 보고 싶은 이유를 모르지 않았다. 맥켈런 남작이 죽자 몇 안 남은 친구가 그리워진 것이다.

“정 그러면 올해 추수제 때 초대해요.”

“...그래도 돼?”

“그럼요. 공왕 폐하는 왕이니까 찾아가는 것보다 부르는 게 그럴듯해요.”

로벨의 기분이 조금 좋아졌다. 그래서 로벨을 따르는 짐승들도 기분이 좋아졌다.

늑대성은 갯바위 마을과 달랐다. 행상인을 붙잡고 갯바위 마을 위치를 물으면 하나같이 ‘그런 마을이 있었나?’ 반응이지만, 늑대성 위치를 물으면 거리와 방향, 찾아가는 길을 소상히 일러주었다. 불과 10년 전만 해도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젊은 나이에 격세지감을 느꼈다.

“우리 기사님 마을이 유명해졌죠.”

“기사님 아니고 폐하. 마을이 아니고 도시.”

“하지만 우리 집사님은 여전히 깐깐하죠.”

“누가 우리예요? 누가?”

“아... 그 부분이 화난 거예요?”

“부끄러워하는 거 같은데?”

“누, 누, 누, 누가 부끄러워요!”

고향 가는 길이라 그런지 몰라도 웃음이 헤프고 발걸음이 가벼웠다. 어린 집사의 틱틱거리는 잔소리와 모닝스타의 주인만 모르는 행패가 사라졌다. 감수성 풍부한 마녀 키르케는 꽃 한 송이에 까르르 웃기도 했다. 그러니까 북부대로에서 늑대도로로 갈아탈 때까지 말이다.

“잠깐... 저 마을은 분위기가 왜 저래?”

로벨 일행은 늑대도로 초입의 작은 마을에서 짐승을 세웠다.

로벨이 직접 다스리는 땅은 아니지만, 로벨에게 충성을 맹세한 기사가 다스리는 땅이었다. 관습법상 로드릭 왕가의 땅이며 볼탄 반도 공국의 마을이었다. 그런 곳에 심상치 않은 기운이 감도니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검은 연기잖아?”

사람 사는 곳에 불을 뗄 수 없으나, 검은 연기는 특별했다. 짚이나 나무를 태워서 나오는 연기가 아니었다.

“귀한 기름으로 불장난하는 것은 아닐 테고, 뭘까요?”

“잠깐 들릴까?”

“그게 좋겠어요. 얼른 가 봐요.”

고향이 가까워서일까, 아니면 가을바람 때문일까, 어린 집사가 모처럼 적극적이었다.

가축이 도망가지 못하게 촘촘히 엮어 놓은 울타리를 지나 오래된 창고와 오래전 버려진 오두막을 돌자 마을 주민이 나타났다.

“저기, 이봐요.”

어린 집사가 손짓을 하다가 멈칫했다. 숫자가 많고 표정과 몸짓이 흉흉했다. 그중 일부는 대형 낫과 쇠스랑, 횃불 따위를 쥐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수확철을 앞둔 농부의 모습이 아니었다.

“뭐야, 전쟁이라도 났나?”

어이가 없어서 한 말인데 얼추 맞았다. 적어도 이곳 주민에게는 전쟁이었다.

로벨이 모닝스타의 옆구리를 가볍게 때렸다. 영리한 말은 주인의 뜻을 바로 이해했다. 앞발을 높이 들고 인간이 낼 수 없는 영역의 소음을 발산했다. 히이이이잉-!

말 울음소리에 관심이 집중되었다.

“기, 기사 나으리?”

오랜 외지 생활로 지저분해졌지만, 그래도 기사와 기사의 수행원이었다. 장인의 손길이 묻어있는 풀 플레이트 아머는 농민이 평생 벌어도 가지지 못할 보물이었다.

“어이구! 나으리!”

나이 많은 농부들은 상대가 기사란 것을 알자마자 조아렸다. 패기와 배짱을 구분 못하는 젊은 농부들은 그런 어른들이 못마땅해 속삭였다.

“우리 영주님이 아니에요.”

“왜 엎드리고 그러세요?”

이곳 영주의 왕, 그러니까 주인의 주인이니 엎드리는 것이 맞지만, 구태여 거기까지 말하지 않았다.

“지나가다 검은 연기를 봤어. 무슨 소란이야?”

농부들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기사라 해도 외지인이었다. 배타적인 농촌 사회에서 함부로 마을의 일을 말할 수 없었다. 로벨은 실현 가능한 허세를 더했다.

“피를 봐야 말할 거야? 아니면 이곳 영주를 불러올까?”

배우지 않아도 아는 것이 있었다. 수천 년간 종(種)을 이어온 본능일지도 모른다. 고개 뻣뻣한 농부나 납작 엎드린 농부나 저절로 깨달았다. ‘저 기사를 화나게 해서 안 된다’ 횃불을 든 청년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마녀요! 마녀가 나타났어요! 아주 사악한 마녀요!”

로벨 일행의 시선이 마녀 키르케에게 집중되었다. 우연이겠지만, 모닝스타와 당나귀까지 함께 쳐다보았다.

“저, 저 이 마을 처음이에요!”

“이제 마녀라고 인정하는군요?”

“앗! 실수!”

누가 봐도 마녀처럼 차려입은 마녀 키르케에게 시선이 집중되었다. 혼란스러운 눈빛이 엇갈렸다.

“저런 마녀가, 아니, 저런 분이 아니라 진짜 마녀입니다! 진짜 마녀요!”

‘마녀’에 대한 통속적인 이해가 필요했다. 어린아이를 납치해 가마솥에 삶아 먹고, 악마를 불러내 지저분하게 동침하고, 사악한 힘으로 가뭄과 역병을 퍼트리는 것이 흔히 생각하는 마녀였다.

“그래서 마녀사냥이라도 하는 중이야?”

“그, 그렇습니다요! 저 사악한 마녀를 죽이지 않으면...!”

“죽이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데?”

“그, 그것이... 전염병이 생기고, 과일이 안 익고... 또...”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고 다시 물었다.

“여기 아픈 사람 있어? 아니면 올해 작황이 안 좋아?”

“그건 아니지만...”

진짜 마녀는 흔치 않았다. 마녀 재판에 오른 마녀들은 대부분 시기와 질투, 혹은 오해를 받은 평범한 여자들이었다. 어린 집사가 마녀 키르케를 힐끔보고 한 걸음 나섰다.

“마녀 사냥은 왕국법으로 금지되어 있어요. 왕국법을 그대로 계승한 볼탄 반도에서도 당연히 불법이죠. 위대한 무적무패 왕 로벨 로드릭 폐하의 나라법을 어길 생각인가요?”

로벨은 자기소개에 자신도 모르게 ‘엣헴!’ 기침하며 콧대를 높였다. 농부들은 저 기사가 왜 저러나 쳐다보고 즉시 변명했다.

“그렇지만, 나으리, 전염병이 돌고 작물이 시든 뒤에는 늦습니다요. 그때는 사람이 여럿 죽은 뒤인데 마녀를 태워서 무엇합니까요?”

로벨은 비웃지 않았다. 무지한 것은 비웃을 일이 아니었다.

“정 의심되면 사제를 불러서 시험을 받아.”

마녀사냥으로 악명 높은 교회지만, 아이러니하게 마녀로 모함받은 사람을 구원하는 곳도 교회였다.

“저기, 나으리, 송구하지만 저희 마을에는 교회가 없습니다요.”

“영주님 성에 사제님이 계시지만, 저희 같은 것들이 찾아뵐 수 없어요.”

“그, 그래도 시험을 할 줄 압니다요! 물에 던져서 뜨면 마녀고, 가라앉으면 사람이지 않습니까요?”

비웃지 않아도 한숨은 나왔다.

“그건 이단심문관도 제일 마지막에 하는 거야. 다짜고짜 물에 던지면 그냥 죽잖아.”

“아, 그렇습니까요?”

마녀 재판 중 가장 악명 높은, 그래서 가장 유명한 것이 ‘물의 시험’이었다.

마녀로 지목된 여자를 꽁꽁 묶어 강이나 호수에 던지는데, 가라앉으면 그대로 익사하는 거고, 뜨면 악마가 구해준 것이라 여겨 화형에 처했다.

그러나 대다수 성직자는 배운 사람이라 이게 미친 짓이란 것을 알고 있었다. 물의 시험은 여론에 못 이겨 죽이기로 작정했을 때 하는 사형선고지, 진실을 밝히는 시험이 아니었다.

보통은 ‘진짜 시험’을 치르는데, 눈물을 흘리면 무죄인 눈물의 시험, 바늘로 찔러서 피가 나오면 무죄인 바늘의 시험, 불 위를 걸어서 살아나오면 무죄인 불의 시험 등이었다.

“불 위를 어떻게 걸어요? 그것도 죽으란 거잖아요?”

“진짜 불 위를 걷게 두지 않아요. 불 위에 올라가라 했을 때 겁먹고 울거나 못하겠다고 떼쓰면 무죄로 여겼어요. 첫 번째 시험을 통과한 거니까요.”

“와... 사제님들도 대단하네요.”

울어보라고 다그쳐서 울지 못하는 경우를 위한 상황극이었다. 이걸 보면 짐작할 수 있듯 교회가 주도하는 마녀 재판은 꽤 합리적이었다. 그럼에도 마녀 재판이 악명 높은 것은 겁먹은 마을주민이나 광신적인 기사단원이 다짜고짜 불로 태웠기 때문이다.

“저스티스 기사단이 그쪽으로 악명 높았죠. 쳇! 진짜 기사도 아닌 것들이...”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의 잡담은 잠시 제쳐두고, 로벨은 성난 주민들이 피운 불구덩이를 살폈다. 기름을 얼마나 부었는지 판금 너머로 열기가 전해졌다.

“여기에 여자를 던질 생각이었어?”

“사, 사실 장대에 묶어서 태우려고 했는데, 아무도 마녀를 만지고 싶어 하지 않아서...”

“그런 질문이 아니야. 하지만 답이 되었어.”

로벨은 '마녀 의심자'를 데려오라 명령했다. -로벨이 누군지 모르니-명령을 따를 이유가 없는 마을 주민이지만, 칼자루에 올라간 손을 보고 세상 둥글게 살기로 결심했다.

“이 여자입니다! 이 여자가 바로 마녀입니다!”

마녀가 어지간히 무서운지 장대와 밧줄로 끌어왔다. 전쟁터를 구르며 못 볼꼴을 많이 본 로벨도 눈살을 찌푸릴 만큼 몰골이 엉망이었다. 며칠을 굶었는지 피골이 상접했고, 꽉 묶은 새끼줄이 피부로 파고들어 피딱지가 생겼으며, 생리형상을 해결할 시간조차 주지 않은 듯 치마 아래 오물로 된 얼룩이 가득했다. 굳이 불구덩이에 던지지 않아도 내일이나 모레쯤이면 알아서 죽을 상황이었다.

“이 여자는... 마녀가 아니야.”

로벨은 진짜 마녀를 상대한 적이 있었다. 그것도 꽤 여러 번이었다. 그런 로벨이 볼 때 저 여자는 지극히 평범한 시골 아낙이었다.

‘사실은 내가 마녀 비슷한 거 아닌가?’

로벨은 정체성의 혼란으로 잠시 침묵했다. 그것을 오해한 마을 주민은 안절부절 못했다.

“나으리, 나으리? 저희가 뭘 잘못 했습니까요?”

“배운 것이 없는 무지렁이라 그렇습니다요! 한 번만 용서해 주세요!”

마녀 키르케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사람을 저 지경으로 만들어 놓고... 정말인지...”

마녀 키르케가 화내는 것은 어린 집사가 자선하는 것보다 드물었다. 허나, 그 사실을 알 리 없는 농부와 농부의 가족들은 로벨에게 굽신거렸다.

“키르케, 저 여자를 치료해.”

“치료도 치료지만, 우선 음식을 먹여야 해요.”

“고기?”

“미쳤어요? 죽을 쑤어야죠!”

화난 마녀를 처음 본 로벨과 어린 집사는 어찌해야 할지 몰랐다. 그래서 엄하지 않은 곳에 화살을 돌렸다.

“다들 들었지? 당장 죽을 만들어.”

“귀리 말고 보리로 만들어요! 뭐? 보리값이요? 핏값을 잘못 말한 거죠?”

어린 집사가 칼을 두 마디쯤 뽑자 농부들은 식겁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애물단지로 취급한 헌팅 소드가 가끔은 쓸모 있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가엾은 아낙에게 다가갔다.

“진짜 악마는 따로 있는데...”

그 말뜻을 이해한 사람은 안타깝게 아무도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