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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427화 (427/605)

427화. 은괴

로벨은 적잖이 곤란했다.

선의로 돕는 것은 좋은데, 그 방법이 문제였다. 어린 집사가 정수리를 마구 긁으며 히스테리 부렸다.

“애초에 법을 어긴 범죄자 마을이잖아요? 왜 도와야 돼요? 이곳 영주한테 꼰질러서 교수대에 줄줄이 널어놓지 않은 것만도 충분한 자비죠!”

“그렇게 말하지 마. 불쌍하잖아.”

“진짜 불쌍한 사람은 법대로 끌려가서 불귀의 객이 된 사람들이거든요?”

어지간해서 화내지 않는 마녀 키르케도 몸짓으로 동조했다.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밥 한 끼 얻어먹으려다 기약 없이 발이 묶이면 화가 나는 게 당연했다.

“그냥 못 하겠다 말하고 늑대성으로 가요.”

“한 입으로 두 말 하라고?”

“두 말 좀 하면 어때요? 세상 사는 게 다 그런 거죠.”

어린 집사라고 명예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이 경우는 두 말이 아니라 세 말, 네 말 해도 되었다.

“농담이 아니에요. 어디 사는지 모르는데 어떻게 담판을 지어요.”

촌장의 부탁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마을 주민을 협박하는 기사를 만나서 ‘설득’하라는 것뿐이다. 옛 신이 선물한 3인치 혀든 어린 집사가 말한 3피트 칼이든 자신이 있었다. 일단 만나면 말이다.

“이제 올 때가 되었다잖아.”

“이제가 언젠데요? 오늘? 내일? 모레? 글피?”

손님이 불만과 짜증이 가득하니, 주인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제가 괜한 부탁을 드렸군요... 저희는 괜찮으니 그만 가시는 길...”

“아니야. 아니야. 조금 더 기다릴게.”

나중에는 촌장이 두 말 했지만 로벨이 고집을 부렸다. 그 결과 촌장도 죽을 맛이고, 어린 집사도 죽을 맛이고, 매일 같이 고기와 계란을 바쳐야 하는 마을 주민도 죽을 맛이었다. 허나,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어제처럼 불편한 아침 식사를 하고, 그제처럼 하루를 무엇으로 보낼까 고민할 때였다. 이상하게 사람 발길이 뚝 끊긴 촌장집에 모처럼 마을주민이 찾아왔다.

“초, 촌장님! 배, 배가 들어와요! 배가 와요!”

촌장은 안 그래도 심기 사나운 기사, 정확히는 기사의 젊은 종자를 눈치 보며 버럭! 소리쳤다.

“어허! 매일 들락거리는 게 배인데 웬 호들갑인가!”

“그냥 배가 아니라! 해골! 해골배가 와요!”

배와 해골을 연관 지으면 나오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해적이 나타났다고?!”

촌장이 놀라서 집 밖으로 달려나갔다. 평소에는 지팡이 짚고 느릿느릿 다니더니 급할 때는 잘만 뛰었다. 로벨 일행은 서로를 한 번 보고 일어났다.

“오라는 기사 양반은 안 오고...”

“청옥성 앞바다에서 도망친 해적일까?”

“에이, 도망갈 거면 외국으로 가야죠. 무슨 배짱으로 코앞에 해변 마을을 털어요?”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있잖아요.”

“등잔을 하나만 켜는 가난한 집 이야기죠.”

로벨과 마녀 키르케는 가만히 생각하고 납득했다. 늑대성만 해도 횃불, 촛불, 호롱불, 화톳불 등등을 여러 개 밝혔다.

“가난한 해적인가보다.”

추리 과정이 이상하지만, 결론은 대강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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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청년의 말대로 졸리 로저를 매단 소형 갤리어스가 부둣가에 정박했다.

“먹을 것을 가져와! 먹을 거!”

“고기 대령해라! 안 그러면 네년들을 삶아 먹겠다!”

바닷바람에 녹슨 창칼을 휘두르며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을 부수고 깨트리는데, 이마에 ‘나 해적’이라고 써놔도 어색하지 않을 자태였다.

“무슨 해적이 다짜고짜 고기 타령이야...”

“꼬라지를 보니까 사나흘 굶은 거 같은데요?”

로벨은 삐쩍 골은 해적보다 마을 사람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여자와 아이들을 뒤에 두고 보잘것없는 생활도구를 무기라고 꼬나든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저런 범죄자면 용서할 수 있지 않아?”

“자기 가족이랑 자기 재산 지키는 건 당연한데 뭘 용서해요.”

어린 집사는 여전히 시니컬했다. 그래도 아침에 비하면 한결 부드러웠다.

“어떡해! 어떡해요? 기사님! 저 사람들 어떡해요?”

마녀 키르케의 경우 발을 동동 굴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착한 아이들이었다.

“음. 서른 명이 조금 안 되네. 괜찮겠다.”

로벨은 편히 지내려고 풀어놓은 폴드런과 스커트를 주섬주섬 엮었다. 어린 집사는 습관적으로 보조하다가 한 박자 늦게 걱정했다.

“잠깐? 서른 명인데요? 정말 괜찮아요?”

“며칠 전에도 저만큼 상대했잖아.”

“그때는 호른 경이랑 허풍쟁이가 있었잖아요.”

물론, 싸운 것은 로벨 혼자지만, ‘아군이 있다’는 것 자체가 큰 힘이었다. ‘쟤 하나만 잡으면 끝이야’와 ‘저 뒤에 몇 명 더 있잖아’는 아주 달랐다.

“여기도 같이 싸울 사람이 있어.”

어린 집사는 가죽끈을 고리에 걸어 매듭지은 후 돌담 너머를 보았다. 부지깽이를 들고 부들부들 떠는 젊은 사내가 있었다.

“소리만 크게 질러도 항복할 거 같은데요?”

로벨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기세를 올릴 거야. 두고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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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폭력이란 점에서 얼핏 비슷하지만, 자세히 살피면 전혀 다른 것이 결투와 전쟁이었다.

일대일 결투는 공정함을 최우선으로 하여 개인의 힘과 기술로 깔끔하게 승부가 난다. 그러나 두 자릿수 이상이 싸우는 전쟁은 무기, 지형, 분위기, 소속감, 목적의식 등 변수가 많았다. 개개인의 힘과 기술은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전쟁 전문가인 기사 또한 마찬가지였다.

“기사님은 혼자서 백 명을 상대하잖아요?”

“...백 명은 무리야.”

로벨은 컨틀렛의 손목끈을 이빨로 당겨 쪼인 후 말했다.

“전투마와 갑옷이 있으니까 용감하게 싸우는 거야. 맨몸이면 성난 농민한테 맞아 죽을 수 있어.”

기사도 사람이라 칼 맞으면 피나고 많이 나면 죽었다. 결코 무적이 아니었다.

“그래서 항상 말하잖아. 기세가 중요해.”

“투구보다요?”

“...투구만큼 중요해.”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눌러 썼다. 얼굴 빼고 전신이 보호되었다.

“피를 뿌릴 거야. 보기 흉할 수 있어.”

어린 집사는 새삼스럽게 왜 그러냐는 듯 뚱한 표정을 지었고, 마녀 키르케는 두 눈을 가리면서 손가락 사이로 빤히 보았다.

로벨은 바이저를 내리고 아론다이트와 흐룬팅을 동시에 뽑았다.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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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용적인 의미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온몸에 강철을 두른 기사가 한걸음에 3~4피트씩 달려와 동료의 목을 날렸다.

갑작스럽고 뜬금없어서 머리가 잘린 당사자조차 멀뚱멀뚱 두 눈을 뜨고 있었다. 피가 분수처럼 치솟고 주인 잃은 몸뚱이가 힘없이 허물어지는 순간에도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몇 초쯤 지났을까, 젊은 아낙이 비명을 지르고 코흘리개 꼬마가 울음을 터트리자 그제야 현실이 되었다. 두 쪽 난 당사자 외에 모두가 자지러졌다.

“기, 기사다! 기사가 있다!”

로벨은 숨을 깊이 들이마시고 무호흡으로 움직였다. 어설프게 방어하는 두 팔을 자르고, 그 옆에 무방비한 해적 가슴을 찔렀다. 칼을 회수할 시간이 아깝다. 어깨로 밀어붙이며 뒤에 해적까지 같이 꿰뚫었다. 하프 파이크를 치켜드는 해적 턱 아래로 흐룬팅을 찔러넣고, 꼬치처럼 꿰인 해적들을 발로 밀어 아론다이트를 회수했다.

여기까지 들숨 한 번이었다. 반 호흡만에 해적 넷이 전투불능이 되었다.

“제길! 제기랄! 저건 또 뭐야?”

해적들은 약탈한 식량과 귀중품을 팽개치고 똘똘 뭉쳤다.

기습의 효과는 네 명을 처치하는 거로 끝났지만, 기선제압의 효과는 계속 되었다.

“괴물을 피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또 괴물이야!”

그 괴물이 이 괴물이란 것은 모를 것이다. 어찌 보면 참 불쌍한 무리였다. 하필 도망친 곳이 이곳이니 말이다.

해적이 두려움에 떠는 만큼 마을 주민의 용기가 차올랐다. 무리지어 사냥하는 짐승의 본능이었다. 기세를 타면 걷잡을 수 없었다.

“이 빌어먹을 해적놈이! 너희 먹이려고 뼈 빠지게 일하는 줄 알아!”

“청옥성의 백작님이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이제 로드(Lord)가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로벨의 위세에 마을 주민의 사기가 더해지자 몰리는 것은 해적이었다. 살인과 약탈을 직업으로 삼은 잔혹함이 무서울 뿐, 신체능력만 보면 며칠 굶은 해적이 어부의 상대가 될 리 없었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두 자루 칼을 앞뒤로 세웠다.

“기사도 밥값하느라 고생인데, 범법자가 무전취식할 수 있을 거 같아?”

“이런 제기랄...”

해적들의 눈알이 바쁘게 움직였다. 저 괴물과 싸워서 이길 것 같지 않았다. 그럼 남은 길은 하나였다.

“배에 타라! 노예장! 노예장! 노를 저어! 빠져나간다!”

상황판단이 빠른 해적선장이었다. 그러니까 청옥성 앞바다에서 살아나왔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지만.’

누가 선장인지 알았으니 망설일 필요 없었다. 로벨은 발을 한 번 굴리고 황소처럼 돌진했다. 기세에 눌린 해적들은 뒷걸음치다 서로 얽혀 넘어졌다. 로벨은 망설임 없이 밟고 차며 적진을 돌파했다. 풀 플레이트 아머를 입었어도 위험한 짓이었다. 뒤에서 덮치거나 몸무게로 찍어 누르면 당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전쟁 전문가 로벨 로드릭은 믿는 구석이 있었다.

“기, 기사님을 따라가자!”

“해적들을 죽여라!”

용감한 청년이 한 걸음 내딛자 군중심리로 너도나도 뛰쳐나왔다. 도리깨로 머리를 깨고, 망치로 갈비뼈를 부수며 파도처럼 해적들을 집어삼켰다. 상황이 완전히 뒤바뀌었다.

“저게 기세구나.”

어린 집사는 로벨의 말을 비로소 이해했다. 전(戰)자로 시작하는 일에는 한 치 틀림이 없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놀랍다니까. 어릴 때는 저렇게...”

“기사님 어릴 때요?”

마녀 키르케가 여전히 두 눈을 가린 채 물었다. 어린 집사는 말실수를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딴소리가 바로 나왔다.

“안 보는 척하지 마요! 전쟁터도 잘만 따라다니면서!”

“칫! 집사님은 평생 기사가 못 되겠어요.”

“기사 같은 거 시켜줘도 안 하거든요?”

두 사람은 말싸움하면서도 로벨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왕이기에 앞서 친구고, 고용주이기에 앞서 가족이었다. 걱정이 되는 것은 당연했다. 그래서 해적선장을 붙잡아 바다에 던질 때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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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투는 일방적으로 끝이 났다.

해적들은 대부분 죽거나 곧 죽을 상태였고, 마을 주민은 한 명만 심하게 다쳤을 뿐 대부분 멀쩡했다.

“엉뚱한 곳에 힘을 썼네요.”

재미난 것은 해적선의 상태였다. 쉽 비스킷 한 장 없는 배에 은괴 상자가 나왔다. 선장의 일지와 서류를 살핀 결과 무려 서드 컨티넨트에서 운반해 온 은괴였다.

“신대륙이 정말 부유하긴 부유한가 봐요. 에르나 왕국도 그렇고, 잉그비아 왕국도 그렇고...”

어린 집사는 전공을 빌미로 은괴 소유권을 주장했지만, 공명정대한 로벨은 전투에 참전한 마을 주민에게 똑같이 나눠주었다. 어린 집사의 입술이 진짜 3인치쯤 튀어나왔다.

“그나저나요. 떠돌이 기사님이 올 때까지 계속 있어야 해요?”

로벨 얼굴에 살짝 그늘이 졌다. 해적과 싸운 것은 해프닝이었다. 얼굴 모를 기사 문제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러나 그 문제도 해결되었다.

해변이 정리되자 촌장이 찾아왔다. 아침까지 가득하던 후회와 부담이 사라지고 존경과 신뢰가 자리매김했다.

“일전에 드린 부탁을 철회하겠습니다.”

“왜, 왜요? 갑자기?”

어린 집사가 황당해서 되묻고 아차! 했다. 아무튼 떠날 수 있으면 잘 된 일이었다. 촌장은 개의치 않고 속마음을 말했다.

“오늘 일로 기사님의 보호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설마?”

“그분이 오시면 정중히 대접하고, 이 마을에 정착해 달라 부탁할까 합니다.”

“에이, 우리 기사님이 대단해서 그렇지, 보통 기사님은 어림... 웁! 우웁!”

마녀 키르케가 진실을 고하다 입막음 당했다.

“그럼 그냥 가도 되죠?”

“어떻게든 보답을 해드리고 싶으나... 가진 것이 나으리가 나눠준 은괴뿐이라...”

“그럼 그거 돌려줘도 되는데... 아, 농담이에요! 찌르지 마요!”

예정에 없는 체류가 끝났다. 로벨 일행은 촌장과 마을 주민이 성의껏 가져온 빵과 고기와 말린 청어를 당나귀에 나눠 싣고 가뿐히 출발했다. 사소한 의문이 발자국처럼 이어졌다.

“그런데 정말 누굴까요?”

“누구요? 떠돌이 기사요?”

“궁금하지 않아요?”

“전 별로... 폐하도 궁금하세요?”

로벨은 고삐를 놓고 팔짱을 끼었다. 운명이란 것을 믿지 않지만, 왠지 그 기사는 꼭 만날 것 같았다.

“설마 슐츠 경은 아니겠지?”

“에이, 설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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