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6화. 도망자
볼탄 반도 북쪽 끝 외진 땅에도 여름이 찾아왔다.
게으른 농부와 깔끔한 숙녀와 추억이 많은 노인은 비록 싫어하나, 햇살과 비구름을 좋아하는 산간초목의 짐승들은 목 놓아 기쁨의 노래를 불렀다. 맴- 맴- 매앰- 찌르륵- 찌륵-
“아, 시끄러! 시끄러! 저것들은 겨울에 죽지도 않나?”
“전 여름이라 죽겠어요...”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를 부채 삼아 연신 휘둘렀다. 안 그래도 손목과 발목을 덮는 두꺼운 꼬뜨인데, 누가 마녀 아니랄까봐 색깔도 까맸다.
“그렇게 더우면 벗어요!”
“어머멋? 집사님 그렇게 안 봤는데...”
“아, 아니, 갈아입으라고요!”
사실 복장으로 보면 가장 갑갑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강철로 된 옷을 입은 로벨이었다.
“기사님, 기사님은 안 더워요?”
“으응?”
어린 집사가 ‘기사님이 아니라 공왕 폐하...’ 어쩌고 했지만, 은근히 고집이 있는 마녀 키르케는 듣지 않았다.
“그거 무겁고 답답하지 않아요? 햇볕을 오래 쬐면... 앗! 뜨거라!”
마녀 키르케가 갑옷에 손가락을 대고 호들갑을 떨었다. 과장된 행동이지만 빈말은 아니었다. 판금은 창칼을 튕겨내도 햇살은 고스란히 빨아들였다. 더욱이 갑옷 안에는 솜을 채운 비단옷을 겹겹이 입었다. 지금 날씨를 생각하면 열사병을 앓아야 정상이다.
“난 괜찮은데?”
“...정말요?”
“조금 덥긴 하지만, 못 참을 정도는 아니야.”
로벨은 거짓말을 못한다. 설령 거짓말을 해도 어린 집사를 속이지 못한다. 고로 괜찮다는 말은 진심이었다.
“작년에는 땀으로 목욕을 했잖아요?”
“...그 정도는 아니었어.”
“올해는 왜 이리 멀쩡해요? 저 몰래 몸에 좋은 거라도 잡쉈어요?”
로벨은 최근에 뭘 먹었나 기억을 더듬었다. 대단한 것은 없었다. 그렇다면 아마도...
“아마도 마도의...”
로벨은 말을 하다가 말았다. 어린 집사가 알아서 좋을 것 없었다. 걱정이 몇 배로 늘어날 테니 말이다.
“어엇! 마을이다!”
때마침 해안 길 저편에 마을이 나타났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당나귀 엉덩이를 두드려 달려갔다. 그래봐야 모닝스타가 조금 빨리 걷는 속도였다. 로벨은 코웃음 치는 애마의 옆구리를 가볍게 차서 쫓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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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마을 전경을 쭉 훑어보고 물었다.
“여기가 바다뱀 마을이에요?”
“바다뱀 마을이 아니라 갯바위 마을인데... 여기가 아니야.”
“그럼 또 잘 못 왔군요?”
“아무튼 마을이잖아요. 그럼 됐어요. 제대로 온 셈 치자고요.”
마녀 키르케가 혓바닥을 길게 내밀고 말했다.
“찬물 한 바가지 뒤집어쓰고 시원한 맥주를 마실 수 있으면 악마한테 영혼을 팔겠어요.”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쪽이 그렇게 말하면 큰일 나요.”
“왜요?”
“직업이 직업이잖아요.”
로벨 일행은 시시덕거리며 이름 모를 마을로 들어갔다. 나지막한 돌담 너머로 양배추가 심어진 텃밭이 보이고, 굽이진 오솔길 저 아래에 장대와 그물이 보였다. 햇살이 좋으니 말려서 수선하려는 모양이다.
“청옥성에서 그 난리를 쳤는데, 여긴 평화롭네요.”
어린 집사가 심술부리듯 말했다. 하지만 로벨의 생각은 달랐다.
“청옥성에서 해적을 막아주니까 평화로운 거야.”
“음. 듣고 보니 그렇군요.”
북해를 지킨다는 말은 농담도, 과장도 아니었다. 청옥성의 중요성을 새삼 되새겼다.
돌담을 빙 돌아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사람이 하나둘 보였다. 계절을 난 횟수가 한 자릿수인 꼬마와 배가 남산만큼 부른 부인과 지팡이의 도움이 절실한 노인 등이었다.
혹시 전화에 휩싸여 청년이 부족한 ‘흔한’ 볼탄 반도 마을인가 싶어 유심히 살폈는데, 겨우내 쓰고 남은 장작과 얼마 전에 수리한 지붕 등을 보니 아니었다.
“젊은 사람은 일하러 갔나 봐요.”
어린 집사도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속삭였다. 덕분에 마음이 편했다. 이런 마을이면 한두 끼 얻어먹어도 큰 민폐가 아닐 것이다. 물론, 마을 주민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다.
“어엇? 외지인이... 앗! 기, 기사 나으리께서 이 벽촌에 어인 일이십니까?”
어린 시절 사제나 수도사를 따라다니며 공부 좀 했을 노인이 기겁해서 달려왔다. 벽촌(Backwater)이란 고급스러운 표현을 쓴 것이 그 증거였다. -보통은 가난한 마을(Poor-village)이라 표현한다-
“촌장이야?”
“예, 예. 제가 이 보잘것없는 마을의 촌장입니다요.”
배운 만큼 알고,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다. 촌장은 으리으리한 갑옷과 어마어마한 전투마를 타고 사악한 마녀를 끌고 다니는 기사가 어떤 기사인지 알아챘다. 결론부터 말하면 오해지만, 로벨이 왕이란 것을 생각하면 그 오해조차 가벼운 편이었다.
‘공왕 폐하란 말은 하지 말까요?’
‘그게 좋겠어요.’
기사라 생각해도 저리 두려워하는데, 그런 기사를 세 자릿수나 거느린 왕이란 것을 알면 기절할지도 모른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입을 맞춘 뒤 꾹 다물었다.
“일과 중에 미안한데, 잠시 쉬었다 갈 수 있을까? 내 말이 더위에 지친 듯해서.”
모닝스타가 아니란 듯 콧김을 뿜고 머리를 휘저었다. 당나귀들이 원망 가득한 눈빛으로 대장을 올려다보았다. 그러나 짐승의 말을 모르는 촌장은 신경 쓰지 않았다.
“무, 물론입니다. 누추한 곳이지만 성심성의껏 모시겠습니다.”
얼굴에는 싫은 기색이 가득한데, 몸짓과 말투로 환영했다. 역시 배운 촌장이라 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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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집단의 마음이 일치했다. 첫 번째는 안도였고, 두 번째는 만족이었다.
로벨 일행은 벽촌치고 그럴듯한 음식과 술에 만족했고, 촌장 이하 주민들은 기사치고 예의 바른 태도에 안도했다. 결과적으로 양쪽 다 푸짐하게 웃을 수 있었다.
“저 청년들은 왜 저기 모여 있어?”
“아... 그것이... 귀, 귀한 분이 와서 한번 뵈려고 기웃거리나 봅니다.”
“손에 뭘 잔뜩 쥐었는데, 작살? 몽둥이? 저건 손도끼인가?”
“어이구! 일하다 와서 그렇지요! 제가 당장 돌려보내겠습니다!”
촌장이 노쇠한 몸으로 절뚝절뚝 뛰쳐나갔다. 로벨은 연기 빠지라고 열어둔 나무창으로 그 모습을 구경했다. 촌장이 삿대질하며 혼내자 청년들의 딱딱한 얼굴이 밝아졌다. 기이한 일이었다.
“알만하네요.”
어린 집사가 닭다리를 옆으로 뜯으며 말했다. 마녀 키르케가 남은 닭다리에 눈독들이자 재빨리 가로채서 로벨 손에 쥐여주었다.
“공왕 폐하가 무슨 행패 부릴까봐 몰려온 거죠.”
“내가? 왜?”
“그야... 기사니까요?”
한 시대를 대표하는 기사로서 무척 억울했다.
“그런 표정 짓지 마요. 솔직히 자비로운 기사보다 잔인한 기사가 많고, 3인치 혀보다 3피트 칼로 관계를 쌓는 기사가 많잖아요.”
마녀가 혓바닥을 내밀고 3인치인지 재는 동안, 로벨은 닭다리를 한입 물고 청년들을 구경했다. ‘북쪽 숲’의 숲지기 오두막보다 나을 것이 없는 촌장집을 힐끔거리며 하나둘 흩어졌다. 이상할 만큼 크게 안도했다.
“아무리 그래도 몽둥이 들고 찾아오는 게 정상이야?”
“글쎄요... 예전에 기사한테 크게 덴 적이 있나 보죠.”
“아니면 지금도 데여지고 있거나요.”
마녀가 아쉬운 대로 닭날개를 찢으며 말했다. 어린 집사가 인상을 찌푸리고 물었다.
“무슨 뜻이죠?”
“이 마을 이름이 뭐예요?”
로벨과 어린 집사가 서로를 보았다. 그러고 보니 마을 이름을 듣지 못했다.
“이런 작은 마을은 원래 이름이 없어요. 영주 이름을 따서 누구네 마을이라 부르죠.”
“그럼 영주님 이름이 뭘까요?”
둔하디 둔한 기사와 집사도 무슨 뜻인지 이해했다.
“이 마을 이름을 알 거 같아.”
“어? 정말요?”
“응. 아마 맞을 거야.”
로벨은 촌장이 돌아오자 생각한 바를 말했다. 촌장이 받은 교육 중에는 거짓말이나 시치미가 없는 듯했다. 방금 돌려보낸 청년들을 다시 불러오고 싶어 했다.
“도, 도, 도망자 마을이요?”
로벨은 닭다리를 우적우적 씹으며 말했다.
“전쟁이 끝난 지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장성한 사내가 너무 많잖아.”
“저, 저희 마을은 운이 좋아서 지, 징발을 피했습니다. 그래서 그것이...”
“세상에는 피할 수 없는 것이 두 가지 있어. 부모님의 잔소리와 징수관을 징발이지. 몇 명이야?
“그게 무슨...”
“여기 주민 중 호적이 있는 자가 몇 명이야?”
촌장은 물론이고,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조차 감탄해서 로벨을 보았다. 이래봬도 14년 차 영주이자 일국의 왕이었다. 마을 사정을 모를 리 없었다.
촌장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다가 로벨의 밤하늘 같은 눈을 보고 포기했다.
“아이고! 나으리! 살려주십시오! 저희는, 저희는 그러려는 게 아니라...”
“...난 죽인다고 안 했는데?”
‘도망자 마을’이라고 불렀지만, 주민 모두가 불법적인 도망자는 아니었다. 전시 징발을 피해 아들과 남편을 숨기는 일은 원래 흔했다. 그래 봐야 헛간 지하나 뒷산 동굴이고, 약간의 폭력을 동원해 이웃을 심문하면 금방 밀고하기에 찾기가 쉬웠다. 하지만 이곳은 바닷가였다. 배를 타고 도망치면 잡기가 불가능했다. 가까운 섬에 ‘진짜’ 도망자 마을이 있을 것이다.
“난 이곳의 기사가 아니야.”
로벨이 오해를 풀어주었다. 허나, 오해가 아니었다. 촌장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청년들을 쫓아냈을 것이다.
“영주한테 세금을 안 내지?”
“그, 그것이... 장부상 노인과 아이만 있어서...”
“그래서 궁금해졌어.”
로벨은 아닌 척하면서 구경하는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를 쳐다보고 말했다.
“기사가 오면 숨어야 할 젊은 남자들이 왜 무기를 들고 나타났을까?”
촌장은 주름진 두 눈을 질근 감았다. 기사는 무식하다는 편견을 예순다섯 해 만에 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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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장문의 한탄을 한 줄로 요약했다.
“떠돌이 기사가 수시로 찾아와 페닝을 요구한다고요?”
“수시로는 아니고... 수확철이 되면 한 번씩 찾아오긴 합니다.”
“비밀을 지켜주는 대가로 여자와 재물을 요구하고요?”
“여자는 아니고... 주로 페닝을 요구하지요.”
생김새나 행동이나 평범한 시골 기사였다. 마녀 키르케가 ‘여자와...’ 부분에서 ‘어머나!’ 하다가 내심 실망했다. 오랜 편견과 달리 기사는 대부분 신앙인이었다. 그리고 어지간해서는 볼품없는 시골 아낙을 탐하지도 않았다.
“세금을 엉뚱한 곳에 내네요.”
“그걸 세금이라 할 수 있나...”
로벨은 오해가 풀리자 편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큰마음 먹고 비밀을 털어놓은 촌장 이하 마을주민은 달랐다. 차라리 모른 척 하룻밤 묵고 떠났으면 모를까, 사정을 밝힌 이상 그냥 보낼 수 없었다.
“기사 나으리께서 도와주실 수 없습니까?”
“내가? 왜?”
“그것이... 기사니까요?”
기사의 의미가 참으로 다양하게 쓰였다. 그러나 우습게도 ‘기사 중의 기사’를 자처하는 로벨에게 은근히 잘 통했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도와줄까?”
어린 집사가 이마를 짚었다. 이래서 주인을 혼자 둘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