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25화 (425/605)

425화. 별

수천 파운드의 전함이 뒤엉켜 싸우는 해전은 장엄하고 장대하여 장관이었다.

파도가 들이칠 때마다 용머리가 들썩이고, 대포가 불을 뿜을 때마다 바다 저편에서 물기둥이 치솟으며, 수 십 개의 노가 부딪쳐 깨지고 부러지다 마침내 선체가 충돌해 세상이 뒤집혔다.

“지금이다! 던져라!”

“제대로 잡아! 어어? 잡으라고!”

뱃전 너머로 수십 발의 쿼럴이 오고 가고, 갈고리 달린 밧줄이 상대방 난간을 향해 날아들었다. 드넓은 바다 위에서 서로를 부둥켜안는 광경이 처절했다.

“이 빌어먹을 해적놈! 배때기를 갈라주마!”

“영감! 고기잡이에 질렸어? 그럼 물고기 밥이나 되지?”

청옥성 병사와 해적이 짤막한 날붙이를 들고 부딪쳤다. 어떻게든 상대방 몸뚱이에 담그려고 애를 쓰는데, 바닥이 쉼 없이 흔들리고 바닷물이 자꾸 쏟아져 쉽지 않았다. 치명상 없이 자상만 늘어갔다.

“제발 좀 죽어라!”

그 바람은 엉뚱하게 이루어졌다. 해적선의 9.5피트 선체가 토끼 울타리로 보일 만큼 거대한 배가 밀어닥쳤다.

“바, 바다사자 호!”

잉그비아 왕립 해군의 최신예 전함이었다. 크기도 크기지만 무게가 대단했다. 수면에 잠긴 충각이 해적선의 하부갑판을 박살내고 용골을 쪼갰다.

말 그대로 ‘물밀 듯이’ 물이 들어왔다. 쇠사슬에 묶인 노잡이 노예들이 비명을 질렀다. 안타깝지만 대부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이런 미친...!”

해적의 욕지거리는 짧았다. 바다사자 호 갑판에서 쿼럴이 날아와 해적의 오른쪽 눈을 꿰뚫었다. 충각 충돌로 흔들리는 배에서 쏘았다고 믿기지 않는 솜씨였다. 숨을 헐떡이던 청옥성의 영감이 경이로운 눈으로 쿼럴의 주인을 보았다.

‘저 사람은 볼탄 반도의 왕이 데려온...’

경이로운 허풍쟁이 제이콥이 빈 쇠뇌를 발가락에게 주며 중얼거렸다.

“가슴을 노렸는데, 하필 저기 맞네.”

“당연히 그렇겠지.”

발가락 슈미츠는 새로 장전한 쇠뇌를 건네주고 빈 쇠뇌의 등자를 밟아 시위를 당겼다.

해적선이 가라앉자 청옥성 함대 병사들은 밧줄을 풀기 위해 달라붙었다. 자칫하면 물귀신처럼 끌려갈 수 있었다. 백병전을 위해 건너온 해적들은 망연자실해서 가라앉는 모함을 보았다. 숫자도 적은데 의지마저 꺾여서 싸울 생각이 없었다.

“이걸로 세 척 격파!”

어린 집사가 바닷물에 젖은 머리를 좌우로 털며 소리쳤다. 불기둥과 물기둥이 솟구치고, 쇠촉이 사방으로 날아드는데 이상하게 상쾌했다.

“이기는 쪽은 원래 그래.”

그러했다. 압도적인 체급으로 상대를 찾지 못한 바다사자 호는 발이 묶인 해적선을 골라 수장시킬 수 있었다. 그렇게 박살낸 배가 세 척이었다. 청옥성 전함과 맞붙은 해적은 모두 가라앉힌 셈이다.

“저기! 저기 또 한 척이 와요!”

“저건... 좀 큰데?”

해적선 중에도 덩치가 좋은 해적선이 있었다. 지금까지 참전하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저건 해적이 아니야.”

“예? 그럼요?”

“세 남작의 전함이야.”

청옥성 함대가 연이어 해적을 격파하자 참지 못하고 나온 듯했다. 하긴, 입장 바꿔 생각하면 초조할 만했다. 이대로 해적들이 격퇴되면 청옥성이 로벨에게 넘어갈뿐더러 백 명의 기사와 천 명의 용병이 적이 되어 나타날 것이다. 그때는 검은 성도 보호해주지 못할 것이다.

“해적에게 죽은 왕이 되어야겠지.”

마녀 키르케가 입술을 삐쭉였다.

“그런 이야기는 시시해서 인기가 없어요.”

“동의해.”

로벨은 눈을 가늘게 뜨고 폼멜을 만지작거렸다. 저들을 잡으면 기세가 꺾인 해적들은 알아서 흩어질 것이다. 더불어 세 남작의 작당을 추궁할 증인도 확보할 수 있었다.

“펠릭스 경, 맞서 싸우시오.”

세 남작의 전함은 3단 노의 갤리선이었다. 선체가 길어서 선회력이 떨어지지만, 순간적인 돌격속도는 어느 배보다 빨랐다.

“조타수! 좌로 60도! 돛 접지 마! 너무 늦다! 차라리 닻을 던져라! 포수장! 우현포 장약 최대로 장전해! 손이 남는 갑판원은 포수를 도와라!”

로벨의 명령 때문일까, 아니면 이게 최선이라 판단한 걸까, 펠릭스 경은 청새치처럼 달려오는 적함에게 옆구리를 보였다. 결투로 생각하면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전함은 사람이 아니었다. 옆구리에 무기가 가득했다.

“점화!”

“점화!”

바다사자 호의 함포가 일제히 불을 뿜었다. 강철포탄이 수면을 가르고 적 하부갑판을 꿰뚫어 막대한 피해를... 주면 좋겠지만, 물 위에서 쏘는 대포의 명중률이 그리 좋을 수 없었다. 아니, 애초에 적함을 노리고 쏘지도 않았다. 숙련된 포수들이 겨냥한 곳은 적함 바로 앞의 빈 바다였다. 8개의 물기둥이 치솟으며 거센 파도와 소나기를 만들었다. 호른 경이 다 죽어가는 얼굴로 감탄했다.

“과연... 해전 전문가입니다.”

아무리 커도 물 위에 떠 있는 나무였다. 수면이 흔들리면 배도 같이 흔들렸다. 적함의 속도가 현저히 떨어졌다.

“어? 어어? 어! 그래도 계속 오는데요?”

“충격에 대비해라!”

선장과 선원들은 포격만으로 돌격을 저지할 거라 생각하지 않은 듯 갑판 위로 몸을 던졌다. 아무 생각 없이 박수치며 좋아하던 로벨 이하 육지 사람들만 어버버하다가 봉변을 당했다. 우당탕-! 콰당-!

로벨은 선교 아래로 떨어질 뻔한 어린 집사를 왼팔로 붙잡고, 아기 새처럼 푸드덕대는 마녀 키르케를 발로 차서 안전하게 자빠트린 후 재빨리 상황을 살폈다.

“피해는?”

“후, 후미로 받았습니다! 멀쩡합니다!”

카락선은 기본적으로 선수와 후미가 크고 높았다. 특히 바다사자 호는 전함으로 개조되어 떡갈나무와 참나무로 장갑을 강화했다. 아슬아슬하지만 충격을 버텨냈다.

“해적놈들이 올라온다!”

그때, 갈고리와 사다리가 난간 위로 불쑥불쑥 솟아올랐다. 일부는 제자리를 찾지 못하고 도로 떨어졌지만, 일부는 난간과 대포 따위에 걸려 팽팽히 당겨졌다.

“밧줄을 끊어! 아니! 풀려고 하지 말고 끊으라고! 도끼 가져와!”

뱃사람이 용감하다 해도 전쟁 용병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적이 승선해서 난전을 벌이면 불리했다. 밧줄을 끊고 창과 쇠뇌로 싸워야 했다.

“내가 말했잖아.”

로벨은 송곳니를 보인 후 투구를 썼다. 마녀 키르케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항의했다.

“거짓말! 발로 찬다고 말하지 않았잖아요!”

“...그거 말고.”

아론다이트를 뽑아 두 손을 잡았다.

“공격이 최선의 방어라고.”

로벨은 밧줄을 끊기 위해 낑낑거리는 선원들을 지나 난간을 밟고 뛰어올랐다. 바다사자 호 선원들이 봐도 높이 뛴다 싶었으니, 저 아래쪽에 해적들이 볼 때는 새가 날아드는 것 같았다. 봄이 지나 남쪽에서 날아온 철새이자, 강철 깃털에 강철 발톱을 가진 철새였다.

쿵-!

적들 사이에 요란히 착지했다. 로벨을 잘 아는 사람은 휘파람을 불며 환호했고, 로벨을 잘 모르는 사람은 기겁해서 구조하려고 했다. 기쁨, 당황, 걱정, 분노, 한탄 등이 거세게 휘몰아쳤다. 그러나 로벨이 칼을 휘두르자 감정의 소용돌이가 뭉텅이로 잘려나갔다. 마지막에 남은 것은 ‘공포’ 하나뿐이었다.

“옛 신이시여... 저게 사람입니까?”

피투성이 왕이 승리의 함성을 지르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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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크고 가장 인원이 많은 ‘세 남작의 해적선’이 나포되자 기회를 엿보던 자잘한 해적선은 미련을 접고 뿔뿔이 흩어졌다.

피와 화약과 송진으로 얼룩진 청옥성 앞바다에는 본래 있어야 할 청옥성 함대와 나포된 배 비슷한 것만 남았다.

이날의 전투는 바람과 파도를 타고 북해 곳곳에 퍼져갔다. 새로운 영웅이 떠나간 영웅의 빈자리를 메우는 순간이었다.

“폐하의 짐작대로 푸센 남작의 용병입니다.”

“뒤셀 남작과 하이델 남작이 연루된 것을 확인했습니다.”

짐작대로 결과가 나오자 펠릭스 경을 비롯한 청옥성 기사들이 분개했다.

“주군께서 그리도 알뜰하게 살펴주셨거늘... 그 더러운 상인놈이...”

“옛 주군. 옛 주군이요.”

어린 집사가 조용히 정정했다. 로벨에게 충성맹세한 이상 로드릭 가문의 기사였다.

호른 경이 겨우 진정된 얼굴로 조언했다.

“검은 성의 봉신이니 마음대로 처벌할 수 없습니다. 귀족원 회의를 열어 재판에 부쳐야 합니다.”

“재판? 재판이요? 저쪽은 우리 폐하 목숨을 두 번이나 노렸는데요?”

두 번 다 별 위협이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거론하지 않았다.

“아니야. 호른 경 말이 맞아.”

로벨은 굴비처럼 줄줄이 엮인 세 남작의 용병을 보았다. 전사자에 비해 부상자는 많지 않았다. 로벨의 칼은 필살(必殺)이라 어중간한 실력으로 받아내지 못했다.

“차라리 잘 됐어. 호른 경, 검은 성으로 가서 청옥성의 이름으로 귀족원 회의를 요청하시오.”

“청옥성의... 말씀입니까?”

“그렇소. 청옥성의 주인 로벨 로드릭이오.”

공식적으로 청옥성의 소유를 인정받는 자리가 될 것이다. 또다시 배를 타야 하는 호른 경만 빼고 모두 표정이 밝았다.

“세 남작이 소환에 응하지 않으면요? 북쪽 영주들은 공왕 폐하를 좋게 보지 않잖아요?”

“그럼 힘으로 끄집어내야지. 허풍쟁이, 발가락, 늑대성으로 가서 울프 용병단을 준비해.”

“어, 음, 무슨 준비입니까요?”

“공식적으로는 하계 전술 훈련이야. 비공식적으로는... 펄프 대장이 알아서 할 거야.”

“하, 하계 전술 훈련입니까? 으하하핫! 저 남작놈들 똥줄 좀 타겠군요!”

늑대성의 신참 기사들은 늑대성의 일처리가 마음에 든 듯 껄껄 웃었다. 그러나 로벨의 10년 차 수행원 허풍쟁이는 걱정부터 보였다.

“그런데 저희가 가면 기사 나리, 아니, 공왕 폐하는 어쩝니까요?”

“왜?”

“폐하를 수행할 사람이 저기 저...”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십년지기 친구라 그런지 표정이 비슷했다.

“뭐요? 뭐?”

“우리가 뭐 어때서요?”

허풍쟁이는 할 말이 많지만 참는다는 듯 한숨지었다. 그래서 항의가 더욱 거세졌다. 로벨은 주먹질과 발길질하는 친구들 목덜미를 잡아당기며 안심시켰다.

“가끔 이럴 때도 있어야지. 응. 맞아. 옛날 생각나고 좋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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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경은 빌린 코그 선을 타고 하루 먼저 검은 성으로 출발했다.

볼프 사트로 후작을 만나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귀족원 회의를 개최했다. 공왕 암살 미수는 공왕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큰 사건이었다.

게다가 늑대성의 용병들이 옛 깁스 자작령-지금은 도너반 남작령-에 집결 중이란 소문이 돌자 북부 영주들은 제4차 볼탄 반도 전쟁을 우려했다. 제3차 볼탄 반도 전쟁-붉은 산 전쟁 이후 약화된 사트로 가문 일파에게 절망적인 소식이었다.

자연히 모든 책임은 로벨 로드릭 공왕을 습격한 세 남작에게 주어졌다. 아군은 어디에도 없었다.

“작위와 영지를 반납하고 수도원에 들어가 속죄해야지.”

“에이, 고작요?”

“고작이라니? 기사에게 둘도 없는 불명예야.”

수많은 북부 영주들을 떨게 만든 로벨은 북해안의 이름 없는 어촌을 지나 한가로이 여행 중이었다.

“아, 생각난 김에 슐츠 경네 놀러 갈까?”

“바다뱀 잡은 슐츠 경이요?”

“용이라니까.”

여름 끝자락에 걸친 북쪽 바다는 시원하고 화사했다. 북해의 사자는 별이 되었지만, 오랜 친구인 늑대가 빈자리를 지켜줄 것이다.

“뭔가 연극투인데...”

“에헤이, 신경 쓰지 마. 원래 그런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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