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22화 (422/605)

422화. 상처

시골 영주의 식탁은 거기서 거기였다. 갓 잡은 암탉, 삶은 계란 두어 개, 거르고 걸렀지만 건더기가 떠 있는 맥주와 이름 없는 수도원의 포도주 따위였다.

뒤셀 남작은 유라피아 대륙에서 가장 유명한 기사이자 근 300년 만에 등장한 볼탄 반도의 왕을 대접하기에 너무 초라하다 걱정했다. 그러나 진짜 걱정해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영지 사정이 몹시 안 좋은 모양이오.”

옛 신이 로벨을 점지할 때 재능을 쌈박질에 몰빵한 게 분명했다. 그러니 연기에 소질이 없었다.

로벨 딴에는 지나가듯 물었지만, 뒤셀 성의 사람들은 작정하고 조사, 혹은 추궁하는 거로 이해했다. 뒤셀 남작이 긴장된 목소리로 말했다.

“봄 농사를 망치고, 도적떼가 기승을 부려서, 여러모로 좀 힘듭니다.”

“정말이오?”

종결어미가 의문문이지만 진짜 궁금한 것은 아니었다. 일곱 명의 도적을 직접 잡아왔으니 어설픈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다. 뒤셀 남작은 눈치를 보다가 말했다.

“시절이 하도 수상하여 아내와 아이들을 지킬 용병을 몇 명 고용했습니다.”

그때, 자리를 비운 호른 경이 돌아왔다. 대단히 심각한 얼굴로 뒤셀 남작을 노려본 후 로벨 귓가에 속삭였다.

‘계란이 아니라 오리알입니다. 껍질을 벗겨서 내온 이유가 있었습니다.’

객관적으로 생각해도 중요한 정보는 아니었다. 그러나 ‘중요해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로벨이 웃음을 참기 위해 헛기침하자 뒤셀 남작의 표정이 초 단위로 바뀌었다.

‘저자는 자작나무 숲의 패트릭 호른 경... 그 사이 뭔가 알아낸 건가?’

지금 로벨이 의미심장한 질문을 하면, 뒤셀 남작은 지레짐작하고 정보를 토해냈을 것이다. 그러나 거듭 말하듯 로벨은 연기에 소질이 없었다. 그쪽으로 오래 끌지 않았다.

“그 용병들을 볼 수 있겠소?”

“어찌해서...”

“본인도 작은 용병단을 운영하고 있소. 그래서 다른 용병은 어떻게 일하는지, 혹시 본인이 아는 용병이 있는지 궁금해서 그렇소.”

여기저기 흩어진 부대를 합치면 천 명 가까운 울프 용병단이 ‘작은’ 용병단인지 알 수 없지만, 조금도 궁금하지 않은 얼굴로 궁금하다 말하니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용병들은 여기 없습니다.”

“그럼 어디에 있소?”

“개인적으로 시킨 일이 있어... 잠시 자리를 비웠습니다.”

로벨의 눈초리가 가늘어졌다. 장인이 죽자마자 재산을 탐하는 것은 도덕적으로 비난받을 일이지만, 장손의 정통성이 있으니 불법적인 일은 아니었다. 또한 로벨이 왕이라 하나 뒤셀 남작의 상급자가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숨기는 게 이상한 일이었다. 호른 경이 다시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 보니 닭고기도 의심스럽습니다. 새끼 오리가 아닐까요? 웃지 말고 일어나십시오.’

로벨은 다시 헛기침했다. 어지간해서 웃지 않는데, 진지한 얼굴로 자꾸 헛소리하니까 참기 힘들었다.

로벨은 조언대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가 난 듯 벌떡 일어날지, 손님답게 얌전히 일어날지 고민했지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뒤셀 남작 일가도 당황해서 따라 일어났다.

“폐, 폐하? 어찌하여... 음식이 입에 안 맞으십니까?”

미각이 둔한 로벨에게는 닭인지 오리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솔직히 말했다.

“아니오. 아주 맛있게 먹었소. 다만 자리가 불편해서 먼저 일어나오.”

뒤셀 남작의 표정이 볼만했다. 역시 걱정할 것은 따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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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뒤셀 성 앞마당으로 나가 일행과 합류했다.

호른 경의 정보는 뒤셀 남작의 반응을 살피기 위한 위장이고, 진짜 정보는 성 밖의 사용인을 회유-혹은 협박-한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가져왔다.

“3개 소대, 그러니까 60명쯤 되는 용병은 고용했는데...”

“며칠 전에 전부 떠났다고 합니다. 페닝이며 식량이며 전부 주어 마을 꼴이 저 모양이지요.”

로벨도 작은 용병단을 운영해서 용병이 얼마나 잘 먹는지 알고 있었다. 로벨처럼 소금광산이라도 가진 게 아니면 6, 700명 남짓한 영지의 생산량으로 감당하기 힘든 숫자였다.

“그래서 먼저 보낸 걸까?”

로벨이 중얼거리자 허풍쟁이가 손을 들고 말했다.

“저기, 용병놈이 할 말은 아니지만, 용병놈이 뭔 짓을 할 줄 알고 저들끼리 보내겠습니까요?”

“그건 그렇네.”

로벨이 순순히 인정하자 이상하게 상처가 되었다. 나름대로 신뢰를 쌓았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그들이 울프 용병단도 아닌데 어떻게 믿겠어?”

로벨이 뒷말을 붙이자 그제야 활짝 웃었다.

“게다가 방향도 이상합니다요.”

“응? 청옥성으로 보낸 게 아니야?”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청옥성은 북쪽에 있지 않습니까요?”

“게다가 배를 타야 하지요. 여기 나으리께 미안하지만, 쓸만한 배를 가졌을 것 같지 않습니다.”

두 용병이 신이 나서 떠들었다. 영주 밑에서 오래 일한 베테랑 용병들답게 빈약한 정보로 그럴듯한 추리를 내놓았다.

“이동방향과 출발시간을 따져볼 때 하루 한나절 거리의 푸센 남작령입니다요.”

로벨과 호른 경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선수필승이란 말이 있지만, 이건 좀 빨랐다.

“선전포고도 없이 다짜고짜 이웃 영지를 공격하면...”

“사트로 가문과 주변 영주들이 가만있을 리 없습니다.”

“싸우러 간 게 아니면요?”

모닝스타의 갈기를 예쁘장하게 땋아주던 마녀 키르케가 끼어들었다.

“싸우러 간 게 아니면...?”

“적의 적은 친구다! 음... 적이 누군지 모르지만, 싸우지 않고 힘을 합칠 수 있잖아요?”

싸움밖에 모르는 기사와 용병이라 미처 생각 못했다. 호른 경이 정보를 제공했다.

“푸센 남작은 막내딸의 사위입니다.”

“와! 폐하랑 결혼할 뻔한 레이디요?”

기억력 좋은 어린 집사가 옛날 일을 끄집어냈다. 덕분에 호른 경과 마녀 모두 불쾌해 했다.

“아, 아무튼, 3살짜리 막내 손자는 정통성이 약해요. 감기만 들어도 급사할 수 있는 나이구요. 그럴 바에 장손과 손잡고 권리를 나누는 게 현명하죠.”

“뒤셀 남작과 푸센 남작이 손을 잡고 하이델 남작을 친다?”

가능성이 있었다. 어디까지 가능성이었다.

“그걸 폐하께 숨길 이유가 있습니까?”

가장 의아한 것은 뒤셀 남작의 반응이었다. 로벨이 하이델 공자의 후견인도 아닌데 전전긍긍하는 게 수상했다.

“정치모략이 당당한 게 아니잖아요. 신앙심 깊은 기사라면 부끄러워할 만하죠.”

“그런가...”

“뒤셀 공자는 멕켈런 가문의 장손입니다. 자신의 자리를 찾는 게 부끄러운 일이 아닌데 숨길 필요 있습니까?”

“그 말도 맞고...”

로벨은 어린 집사와 호른 경 사이에서 갈등했다. 마침내 갈기를 다 땋은 마녀가 ‘으라차찻!’ 소리 내며 구유통에서 뛰어내렸다.

“알아낼 방법은 두 가지에요. 푸센 남작을 만나서 추궁하거나 하이델 남작을 만나서 귀띔하거나.”

기사와 집사와 용병은 어느 쪽이 쉽고 안전할지 깊이 고찰했다. 그러나 왕은 달랐다.

“그럴 필요 없어.”

“예? 그럼요?”

“우리 목적지는 청옥성이잖아. 청옥성으로 가자.”

세 딸과 사위도 결국 청옥성으로 올 것이다. 그때가 되면 누가 누구 편인지 저절로 밝혀질 것이다.

“역시 우리 폐하예요!”

“...칭찬이지?”

“그럼요! 그럼요!”

로벨 일행은 짐을 싸서 출발 준비를 맞췄다. 뒤셀 남작은 퍽 아쉬워하며 어린 집사 머리만한 햄과 당나귀 한 마리를 선물했다. 훈훈한 결말이지만, 어쩐지 어색함을 떨칠 수 없었다.

“역시 이상해.”

“뭐가요?”

“도와달라는 말을 안 해.”

로벨이 다시금 생각에 잠기자 어린 집사가 대신 털어주었다.

“정말로 푸센 남작과 손잡았나 보죠. 그럼 공왕 폐하의 도움 없이 청옥성을 차지할 테니까요.”

로벨은 좀 더 생각한 후 동의했다. 그러나 성급한 결론이었다. 사트로 시티에 도착해 배를 구할 때쯤 깨닫게 되는데, 뒤셀 남작의 의도를 좀 더 깊이 파헤칠 필요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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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해는 인어해와 여러모로 달랐다.

수온 탓인지 수심 탓인지 까맣고 차갑고 거칠고 사나웠다. 다시 말해 땅에서 나고 자란 인간을 반기지 않았다.

“우욱...”

어린 집사가 입을 틀어막고 눈알을 굴렸다. 식사 중에 권장할 행동이 아니지만, 로벨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집사는 눈으로 고마움을 표시하고 선실 밖으로 뛰쳐나갔다. 잠시 뒤 갈매기와 물고기가 좋아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웨에엑- 발가락이 거북한 얼굴로 빵조각을 내려놓았다.

“북해에 배가 한 척 있지 않습니까요?”

“바다사자 호?”

“그걸 불러서 타면 뱃삯도 아끼고 좋지 않습니까요?”

큰 배라 멀미도 덜할 것이다. 로벨은 발가락의 본심을 모른 척했다.

“서른 명이 있어야 겨우 움직이는 전함이야. 이런 일로 오라 가라 하면 미안하잖아.”

“공왕 폐하를 모시는 일인데, 이런 일이라니요?”

로벨은 빙그레 웃었다.

“우리가 아니어도 한창 바쁠 거야.”

“우째서 말입니까요?”

로벨은 호른 경을 힐끔 보았다. 보통 때면 이쯤에서 대신 나서는데, 오늘은 아니었다. 호른 경도 어쩔 수 없는 육지 사내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북해의 사자야-바다사자 아니라고, 키르케- 해적의 천적이지. 그런 남작이 타계했으니까 자칭타칭 무법자가 어떻겠어?”

“아하, 청옥성을 지켜야 한다는 뜻이군요?”

발가락보다 허풍쟁이가 이해가 빨랐다.

“그러고 보니 큰일은 큰일이군요. 북해의 사자가 없으니 누가 이 바다를 지킵니까요?”

“후계자가 정해지면 괜찮을 거야.”

“11살하고 3살이 아닙니까요? 장성한다 해도 사자일지 고양이일지 모르고요.”

허풍쟁이의 걱정은 당장 현실이 되었다. 선실 밖에서 종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뭐야? 뭐가 이리 시끄러워?”

로벨 일행이 지금 탄 배는 네일 공국에서 만든 소형 코그(Cog)선이었다. 선원이 7명이고, 선실이 2개뿐이었다. 방귀만 크게 뀌어도 선수에서 선미까지 울릴 정도니 시끄러운 종을 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종을 친다면 아주 급한 일이 분명했다. 어린 집사가 후다닥 돌아와 소리쳤다.

“영주님! 해적이에요! 해적이 나타났어요! 우웁-!”

주드 맥켈런 남작의 빈자리가 바로 나타났다. 로벨은 반쯤 남은 빵을 꾸겨서 입에 넣고 일어났다. 속이 뒤집힌 호른 경과 용병들은 차마 흉내 내지 못했다.

“이 해역에서 해적이라니!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코그 선의 선장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그리 도움이 되는 말은 아니었다.

로벨은 직접 선교에 올라 해적선을 살폈다. 뱃사람이기에 상인인 선장은 기사를 막지 못했다. 해적이 코앞에 닥쳤으니 아쉬운 것은 선장과 선원이었다.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만지작거리다가 말했다.

“해적이 아니야.”

“아니라굽쇼? 졸리 로저가 걸려있는뎁쇼?”

“저게 해적이면 시대착오가 대단한 해적일 거야.”

전원 사슬갑옷과 비늘갑옷으로 무장했으니, 네일 공국 이전에 바이킹이거나 해적 흉내 내는 암살자일 것이다.

“여전히 모르겠어.”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세 딸의 가문은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싸울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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