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21화 (421/605)

421화. 필연

기사 일행을 털려고 한 간 큰 도적무리는 2.5파운드 철구 아래 후회와 교훈을 배웠다.

죽은 자는 후회하지 못하니, 바꿔 말하면 아직 살아있다는 뜻이었다.

투구 비슷한 것도 쓰지 않은 가난한 도적무리였다. 작정하고 후두려패면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자비로운 볼탄 반도의 왕 로벨 로드릭은 무지한 부랑민의 사정을 깊이 헤아렸다. 어깨와 팔, 갈비뼈 따위를 부숴서 진압했다.

“윽... 차라리 한방에 보내주지...”

“우리 나으리도 은근히 잔인하다니까.”

쇄골이 박살나고 팔꿈치가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 도적들은 숨 쉬는 것만으로 자지러졌다. 저 꼴로 만들면서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으니 과연 살인과 폭력의 프로페셔널이었다.

“항복! 항복입니다!”

“으아악! 살려주세요!”

세 번째 도적을 때려잡고, 도주하는 네 번째 도적을 쫓아가 박살내자 얼마 안 남은 도적들은 무기를 버리고 납작 엎드렸다.

사방으로 흩어져서 도망가면 아무리 모닝스타라도 전부 잡지 못할 텐데, 거기까지 계획을 세우지 않은 듯했다.

‘그렇게 치밀한 놈들이면 애초에 기사 일행을 노리지 않았겠지.’

허풍쟁이가 코웃음 쳤다. 교수대에 걸린 고깃덩어리 중 사연 없는 고기는 없었다. 저 도적들이 운이 좋아 농부 일가나 상인 가족을 만났으면 신나게 약탈을 자행했을 것이다. 지금 불쌍해 보이는 것은 ‘운이 나빠’ 기사 일당을 건드렸기 때문이다.

로벨은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플레일을 안장 아래에 늘어트리고 도적무리를 굽어보았다. 신체 일부가 망가진 도적은 물론이고, 사지 멀쩡한 도적도 쇠사슬이 철컹거릴 때마다 움찔해서 머리를 조아렸다.

“화전민이야?”

로벨의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겁을 먹고 움츠린 탓도 있지만, 그보다 현실감이 없었다.

“누구...”

“내가 묻잖아. 화전민이야?”

사람을 닥치는 대로 때려눕힌 강철의 악마가 청아한 목소리를 내었다. 자상한 귀부인이 음식을 권하는 느낌이었다. 그러나 무시 받은 로벨 입장에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매가 부족한가?’ 중얼거리며 플레일을 당겼다. 즉시 반응이 나왔다.

“예! 예이! 그렇습니다! 이 하찮은 것들은 허락 없이 불을 놓고 흙을 파먹는 버러지이옵니다! 주제를 모르고 나으리 앞을 막았습니다! 목숨만! 목숨만 살려주십시오!”

흰머리의 연장자가 땅바닥에 이마를 찍으며 외쳤다. 볼탄 반도 사람에게 익숙한 광경이 아니었다.

“호른 경? 집사?”

로벨이 곤란한 얼굴로 도움을 청했다. 기사와 집사가 차례로 대답했다.

“머리를 숙인다고 죄가 사라지진 않습니다. 처형하시지요.”

“저 꼴로는 도적질도 못 할 텐데, 그냥 보내주죠?”

마녀 키르케가 신기한 눈으로 호른 경과 어린 집사를 보았다. 평소 성격을 생각하면 반대로 말해야 했다. 로벨도 이상한지 선뜻 결정하지 못했다.

“어디서 왔어?”

“예, 예? 예예?”

계속 한 번에 대답하지 않아 짜증났다. 원활한 대화수단(=마상용 플레일)을 꽉 쥐고 다시 물었다.

“고향이 어디야?”

“뒤, 뒤, 뒤셀 마을입니다! 뒤셀 남작님이 다스리는 뒤셀 마을이요!”

“...아르센 뒤셀 남작?”

로벨이라고 수백 개가 넘는 볼탄 반도 가문을 낱낱이 알지는 못하지만, 뒤셀 가문은 최근에 들어 알고 있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첫째 딸이 시집간 가문이었다.

“너무 공교로운데? 우연일까?”

호른 경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눈을 감고 말했다.

“반쯤은 필연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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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다스리는 볼탄 반도 남부 지방은 근 100년 이내 가장 평화로운 시기를 누리고 있었다.

로벨의 권위에 도전할 만한 기사들은 동부평야에서 까마귀밥이 되었고, 힘이 남아도는 신참 기사들은 계속되는 원정전쟁과 전리품에 만족하여 집안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그러나 땅과 권리를 잃은 북쪽 지방은 달랐다.

“사실 폐하 탓도 좀 있어요.”

“나? 난 왜?”

“볼프 사트로 후작을 무릎 꿇리고 북부대로의 이권을 강탈했잖아요. 검은 성의 권위가 예전 같지 않으니까 아랫것들이 날뛰는 거죠.”

“크흠! 그게 왜 폐하의 잘못이냐.”

로벨은 시무룩해져서 모닝스타의 갈기를 꼬았다. 호른 경이 어린 딸을 달래듯 자상히 말했다.

“최근 뒤셀 가문이 과하게 세금을 올리고 징발을 자행하고 있습니다.”

“청옥성 때문에?”

“다른 이유는 찾기 힘듭니다.”

로벨은 끙끙거리는 도적무리를 한번 보고 고민에 잠겼다.

농민이 고향을 떠나 화전을 일구고, 그마저도 빼앗겨 강도짓을 할 정도면 안 봐도 장편 서사시였다. 고난과 역경이 훤했다.

“푸센 가문과 하이델 가문은?”

“비슷합니다.”

세 딸이 시집간 세 가문 모두 욕심이 가득했다. 어린 집사와 용병들이 한탄했다.

“전쟁 영웅도 집안은 엉망이네요.”

“아들이 살아있었으면 이런 일 없... 웁스! 죄송합니다.”

지난 잘못이 거론되자 한층 더 시무룩해졌다.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눈치 없는 발가락을 좌우에서 공격했다. 그때, 허풍쟁이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저희 입장에서는 잘 된 거 아닙니까요?”

시선이 한곳에 몰렸다. 발가락의 옆구리를 열심히 찌르던 마녀가 되물었다.

“왜요? 왜 잘 되요?”

“어차피 누군가는 청옥성을 다스려야 하잖습니까. 그렇다면 기사 나리, 아차! 공왕 폐하에게 우호적인 가문을 골라 지원하면 좋지 않습니까요?”

용병치고 날카로운 견해였다. 로벨을 따라다니며 견문을 쌓은 가락이 보였다. 호른 경이 미소로 칭찬했다.

“저들도 그리 생각할 겁니다.”

“누구 말이오?”

“뒤셀 남작, 푸센 남작, 하이델 남작 말입니다. 공왕 폐하의 지지를 받을 수 있다면 간과 쓸개도 꺼내놓을 겁니다.”

로벨은 조금 생각한 후 말했다.

“장남이 재산을 상속받으나, 아들이 없으면 장녀의 장남이 상속받소. 맞소?”

“왕국법에 따르면 그렇습니다만, 교회법과 관습법으로는...”

로벨은 법리학자가 아니었다. 자잘한 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럼 뒤셀 남작을 만나러 갑시다.”

표정이 다채롭게 변했다. 그중에서 도적들의 표정이 인상적이었다.

“그거 좋네요. 처음부터 한쪽을 지지하면 싸울 필요 없죠. 마침 선물도 한 보따리 생겼고요.”

선물들이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자상한 마녀와 호기심 많은 모닝스타 외에는 귀담아듣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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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셀 가문은 과거 로드릭 가문과 비슷했다.

샘 포클의 정복전쟁 시절 12기사였던 모리츠 사트로 후작을 따랐으며, 후에 봉토를 하사받아 볼탄 반도에 정착했다. 최근까지 흔하디흔한 시골 영주였으나 미망인 전쟁에서 작은 공을 세워 남작에 봉해졌다.

“우리 공왕 폐하하고 비슷하군요?”

발가락 슈미츠가 신기한 듯 추임을 넣었다. 그러자 사방에서 반발이 날아왔다.

“어딜 봐서? 어딜 봐서?”

“이 사람이 어디 비교할 게 없어서...”

“당장 취소해욧!”

로벨이 비정상적인 성공 신화를 세웠을 뿐, 아르센 뒤셀 남작도 대단한 기사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첫째 딸을 시집보냈으니 길게 말할 것도 없었다.

“연인과 함께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데요... 로 끝나면 참 좋을 텐데요.”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까요. 우리 폐하만 빼고요.”

로벨이 ‘에헴! 에헴!’ 거리며 자랑스러워했다. 칭찬 같지 않지만 기분이 좋으니 되었다.

호른 경이 자꾸 뒤처지는 포로를 끌며 말했다.

“저기가 뒤셀 남작의 마을입니다.”

모닝스타 엉덩이를 살짝 때려 앞으로 나갔다. 북부 특유의 침엽수 숲을 등지고 100여 가구 남짓한 집들이 모여 있었다. 흙과 통나무로 지은 오래된 집에서는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고, 오물투성이 길에는 빼빼 마른 돼지와 닭이 무리 지어 다녔다.

“여기 안 좋은데요.”

“왜요?”

“이 시간에 불을 피우잖아요.”

어린 집사의 통찰력은 대단했다.

“초여름 오후에 귀한 장작으로 난방하지는 않을 테고, 아침 겸 점심 겸 저녁거리로 먹을 것을 만드는 모양인데, 빵 굽는 화덕을 쓰지 않잖아요.”

“빵 만들 재료가 없나 보죠.”

마녀 키르케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어린 집사는 가슴을 한번 두드리고 마을 옆 논밭을 가리켰다.

“저기가 춘경지인데, 보이죠? 작물을 싹 거뒀어요. 그런데 곡물이 없다고요?”

초봄이나 늦여름에는 먹을 것이 부족해서 귀리죽과 보리죽으로 끼니를 때우지만, 추수가 끝난 직후에는 마을 광장의 공용화덕에서 빵을 구웠다.

“봄 농사가 그리 나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곡식이 떨어진 것은...”

도적 중 하나가 할 말이 많은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러나 호른 경은 발언을 허락하지 않았다.

“배불리 먹을 곳이면 저들이 도망 나와 화전을 일구지 않았겠지.”

결국 그 말인 듯 도적이 입을 다물었다. 마녀 키르케가 고깔모자를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럼 수확한 곡식은 전부 어디 있나요?”

물으나 마나한 질문이었다. 로벨은 마을 동쪽에 외로이 떨어진 성을 보았다.

“뒤셀 남작과 부인을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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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의 집을 방문할 때처럼, 남의 영지를 찾아갈 때 예의와 절차가 있었다.

우선 시종을 보내서 출신과 가문을 밝히고 양해를 구해야 했다. 어지간히 죄진 게 많은 기사가 기쁘게 맞이했다. 그것이 기사 가문의 명예-혹은 허세-였다.

“공왕 폐하의 방문이면 말할 것도 없죠. 맨발로 뛰쳐나올 걸요.”

그 말 그대로였다.

허풍쟁이가 로드릭 가문 깃발을 들고 찾아간 지 15분 만에 성문이 활짝 열리고 뒤셀 가문 일가족이 옹기종기 마중 나왔다.

남작 일가는 생각보다 어리고 고운 로벨 외모에 당황했으나, 허풍쟁이가 위세 좋게 로벨의 작위와 업적을 소개하자 금방 공손해졌다. 로벨의 소문 중에는 ‘동안’과 ‘미남’이 있으니 금방 납득했다.

그러나 로벨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아랫마을을 지나면 본 영지민 때문이었다.

사람은 물론이고, 개와 돼지까지 삐쩍 골아있었다. 죽은 것을 먹었는지 죽여서 먹었는지 모르지만 가축의 뼈가 여기저기 굴러다녔다. 어쩌면 사람 뼈도 섞여 있을지 모른다.

“고, 공왕 폐하, 누추한 가문에 친히 방문해주시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사실 뒤셀 남작은 사트로 후작의 봉신이라 로벨에게 무릎 꿇을 필요 없었다. 그러나 로벨의 명성 탓인지, 아니면 청옥성이 어지간히 가지고 싶은지 대뜸 무릎을 꿇었다.

진짜 로벨의 봉신이면 충성의 증거로 손가락에 키스를 받겠지만, 남의 가문, 남의 기사라 그럴 수 없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남작을 일으켜 세웠다.

“갑자기 찾아온 이웃에게 예가 과하오. 편히 대해주시오.”

뒤셀 남작은 겸연쩍게 웃었다. 로벨은 깊은 눈으로 남작을 살폈다. 40대 후반의 중장년 기사. 전성기가 지났지만 열심히 단련하는지 몸이 다부졌다.

“오랜 친우를 배웅하고자 청옥성으로 가는 중에 뒤셀 부인과 공자의 소식을 들어 잠시 들렸소.”

고개를 살짝 돌려 뒤를 보자 30대 초반의 귀부인이 보였다. 주드 멕켈런 남작의 장녀이자 아르센 뒤셀 남작의 부인이었다. 올해 11살이라는 장남은 보이지 않았다. 나이가 있으니 다른 가문의 시동으로 보내졌을 것이다.

“청옥성에 가신단 말씀입니까?”

아르센 뒤셀 남작이 복잡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로벨은 최대한 편안하게 말했다.

“염치없지만 한 끼 얻어먹어도 되겠소? 값은 저들로 치르겠소.”

한 끼 식사가 된 도적들이 아우성쳤지만, 정의는 차갑고 엄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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