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0화. 불경
승전축하연회는 2박 3일 동안 별 탈 없이 진행되었다. 사소한 농담에 술기운이 더해져 서로 결투를 신청하거나 늙은 아야와 이야카를 골리다가 안 좋은 부위를 물리는 일 정도는 탈이라 할 수 없었다.
“정말 야만적인 파티로군! 아주 야만적이야!”
호킨 페럿 경은 싱글벙글 웃으며 맥주를 위장에 부었다. 부르주아 문화에 영향 받지 않은 순수한 기사 연회가 몹시 만족스러운 듯했다. 그중에서 특히 만족스러운 것은 목 넘김이 좋은 황금빛 맥주였다.
그러나 시끌벅적한 웃음 뒤에는 정세를 가늠하는 복잡한 눈짓이 있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없으면...’
‘누가 청옥성의 주인이지?’
청옥성(靑玉城). 이름과 달리 작고 가난한 북해 연안의 섬이었다. 청어잡이가 유일한 수입이며, 영주가 힘이 없을 때는 해적소굴이 되기도 했다. 물론, 과거형이다. 로벨이 가져온 잉그비아 왕국 관세 철폐 협정 이후 북해 무역이 활성화되었고, 청옥성은 바다의 심장이 되었다.
‘후계자가 있지 않소?’
‘아들이 하나 있었으나 검은 성에서 봉변을 당했소. 그 외에는 시집간 딸만 셋이오.’
‘방계쪽은?’
‘권리를 주장할 만큼 가까운 핏줄은 없소.’
메인 홀 기둥마다 수군거리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결론은 비슷했다. 세 딸이 시집간 세 가문의 전쟁이었다. 얼큰하게 취한 호킨 페럿 경이 의문을 표시했다.
“포비아 왕국은 살리카 법을 따르지 않소? 그 법에 의하면 여자는 작위와 땅을 상속받을 수 없을 텐데?”
“핏줄은 끊어지지 않으니, 외인이라 해도 손자는 상속이 가능하오.”
호른 경이 지긋지긋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세 딸 모두 아들이 하나씩 있었다. 가장 나이 많은 첫째 딸의 장남은 11살이고, 최근에 시집간 막내딸의 장남은 2살이었다.
“그거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재미없소. 지저분하고 볼썽사납지.”
호른 경은 3일간 계속된 음주로 살짝 맛이 간 로벨을 살폈다. 호킨 페럿 경은 그런 호른 경을 의미심장하게 보았다.
“그래서 볼탄 반도의 왕과 무슨 상관이오?”
“응? 뭐라고 했소?”
“청옥성의 새 주인이 누가 되든 경의 주인과 무슨 상관이냐고 물었소.”
호른 경은 외국인에게 말해도 되는 일인지 고민하다가 골치 아파서 고민을 포기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장남을 죽인 것이 공왕 폐하요.”
“호오?”
“공왕 폐하를 음해하려는 자들의 함정이었소. 자세한 것은 어린 집사나 펄프 대장에게 들으시오.”
“그 이야기도 흥미롭지만, 그래서 뭐요? 죄책감 때문에 맥켈런 가문이 망하는 것을 두고 볼 수 없다는 거요?”
“공왕 폐하의 성품상 그럴 것이오. 그리고 볼탄 반도 입장에서도 두고 볼 수 없소.”
호킨 페럿 경은 에르나 왕국의 기사였다. 곧잘 알아들었다.
“북해 무역의 알짜배기 땅이 탐이 난다?”
“청옥성은 군사적 요충지요. 공왕 폐하의 전함이 상시 주둔하는 곳이오. 잉그비아 왕국의 사략해적과 네일 공국의 무법자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청옥성이 반드시 필요하오.”
“어렵게 말하지 마시오. 그러니까 세 딸의 전쟁에 개입하겠다는 것이잖소.”
“세 딸의 전쟁이라...”
때로는 말(言)이 현상을 지배하기도 한다. 입 밖으로 꺼내니 정말 전쟁이 날 것 같았다.
“지금은 알 수 없소. 다만, 공왕 폐하의 마음이 좋지 않아 걱정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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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가 끝났다.
숙취에 쓰러진 기사들은 하루쯤 정양한 후 떠나겠지만, 대부분은 푸짐한 포상금을 안고 기분 좋게 고향으로 출발했다.
잔치를 돕기 위해 모인 성 밖 아낙들도 남은 음식을 싸들고 집으로 돌아갔다. 한동안 고기냄새와 웃음꽃이 가득할 것이다.
한나절이 지나 오후가 되자 성에 남은 것은 로벨과 로벨의 측근들, 그리고 숙취로 죽어가는 호킨 페럿 경뿐이었다.
“으으... 누가 꿀물 좀 타오시오. 아니면 설탕물도 좋소.”
“그런 거 없어요! 설탕 같은 소리하네! 아니, 무슨 포로가 저리 당당한 거야? 지금이라도 감금시키죠?”
로벨은 뺨을 긁적이고 못 들은 척했다. 꼭 그렉 페럿 경의 형제라서가 아니었다. 몸값을 지불하기로 약속한 기사는 포로이기에 앞서 손님이었다. 물론, 숙취를 호소하며 설탕물을 요구하는 손님이 정상은 아니었다.
“북쪽으로 사람을 보내자.”
로벨이 입술을 떼자 으르렁거리던 어린 집사와 호킨 페럿 경이 쳐다보았다.
“북쪽이면... 청옥성이요?”
“응. 위로금을 보내고 싶어.”
어린 집사는 ‘페닝이 썩어나요? 오만 곳에 다 쓰네요?’ 소리를 꾹꾹 눌러 삼켰다. 첫째는 로벨이 주드 멕켈런 남작을 어찌 생각하는지 알기 때문이고, 둘째는 청옥성의 분위기를 알아서 나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누구를 보낼까요?”
“아무래도 기사가 가는 게 예의겠지?”
아자르 경이 눈을 반짝였다. 최근 기사란 계급에 자각이 생긴 듯했다. 그러나 로벨 일당은 철저히 외면했다. 저 기사는 출신 이전에 심각한 문제가 있었다. 호른 경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할 수 없군요. 제가 다녀오겠습니다.”
“경이? 왜?”
어감이 조금 이상했다. 호른 경은 마음을 다잡고 물었다.
“저 말고 누가 또 있습니까?”
켈트 남작, 바이란 남작 등은 나이가 있어 심부름시키기 곤란하고, 랭스터 경, 메튜 경 등은 너무 멀리 있어 부르기 곤란했다.
“혹시 몰트 도너반 남작을 보내시려고...”
“아니오. 남작은 정착한 지 얼마 안 돼 영지를 다스리기 버거울 것이오. 먼 길 보낼 수 없소.”
“그럼 누가 있습니까?”
로벨은 어깨를 펴고 콧대를 살짝 올렸다. 어린 집사 이하 늑대성 식구 얼굴에 불안감이 스쳤다. ‘설마?’, ‘에이, 설마요?’ 로벨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여기 있잖소. 본인 입으로 말하기 민망하지만, 볼탄 반도 역사상 최고의 기사요.”
엄지손가락으로 가슴을 가리키며 당당히 말했다. 화가 나는 것은 반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영주님이 거길 왜 가요! 북해가 얼마나 위험한데!”
“영주님이 아니라 공왕...”
“공왕이고 나발이고! 얌전히 좀 지내라고요!”
“오오! 불경한 거 보쇼?”
호킨 페럿 경이 박수치며 좋아했다. 어린 집사의 남자다움을 높이 샀다. 로벨과 어린 집사의 관계를 잘 아는 펄프 대장은 한숨만 쉬었다. 오늘 하루 시끌시끌할 것이다. 어쩌면 내일까지 시끄러울 것이다. 그리고 모레 아침 로벨의 뜻대로 출발할 것이다.
“호위할 놈들을 추리겠습니다.”
“허풍쟁이랑 발가락이 좋아. 청옥성에 다녀온 적 있으니까.”
“그걸 왜 추려요! 가지 말라니까요!”
어린 집사가 길길이 날뛰었지만, 결국은 펄프 대장의 예상대로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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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치 분위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튿날 아침. 세상사에 초탈한 허풍쟁이를 마부석에 앉히고, 경험이 부족해 미련이 많은 발가락을 달래서 행장을 꾸렸다. 로벨이 지정한 사람 외에 몇 명 더 있었다.
“내가 제명에 못 죽지. 진짜.”
어린 집사가 툴툴거리며 마차 뒷좌석에 앉았다. 먼저 와있던 마녀 키르케가 투덜거렸다.
“왜 여기 앉아요? 좁잖아요!”
“이 마차가 그쪽 거예요? 꼬우면 그쪽이 딴 데 가세요.”
“와! 와! 말하는 것 좀 봐! 그러고도 신사에요?”
로벨은 모닝스타 등에 안장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이가 참 좋아. 그렇지?”
모닝스타는 조금도 동의하지 않았지만, 가벼운 여행용 안장에 기분이 좋아 콧김을 뿜었다.
로벨은 안장끈을 매듭지어 잘 처리한 후 고삐를 잡아끌었다. 모닝스타는 발을 통통 굴리며 재롱 피우다 먼저 나온 짐말과 당나귀를 보고 눈알을 부라렸다. ‘푸르르릉...’ 늑대남매도 꼬리를 말고 도망치는 모닝스타였다. 초식동물은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너도 초식동물이잖아.”
로벨은 황당한 짐승계(界)에서 눈을 떼 인간을 살폈다. 호른 경이 애마에 무기를 잔뜩 매달고 다가왔다. 로벨은 참다못해 한마디 했다.
“싸우러 가는 거 아니오.”
호른 경은 어색한 표정으로 갑옷을 두드렸다.
“작은 집사의 말대로 북해는 위험한 곳입니다. 무엇보다 사트로 가문의 땅을 가로질러야 하지 않습니까.”
로벨이 볼탄 반도의 왕이라 하지만, 실제 다스리는 땅은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3분지 2가 조금 안 되었다. 북해와 맞닿은 땅은 12기사 가문 중 하나인 사트로 가문의 봉토였다.
“새삼스럽게 별일이 있겠소?”
로벨은 걱정하지 않았다. 볼프 사트로 후작 이하 북쪽 영주들은 붉은 산 전쟁 이후 어떤 적대행위도 하지 않았다. 로벨이 공왕에 즉위할 때도 선물을 보내 축하해 주었다. 그러나 호른 경 생각은 조금 달랐다.
“공왕 폐하가 늑대성을 지킬 때는 몸을 낮추지만, 자신의 땅에 들어왔을 때는 어찌 나올지 모릅니다.”
로벨은 훌륭한 왕이었다. 자고로 훌륭한 왕은 충언을 새겨들었다.
“잠깐 기다리시오! 나도 무기를 가져오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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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추수가 끝나자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산간초목에 푸른 잎이 넘실거리고, 배부른 짐승이 사람 무서운 줄 몰라 도롯가에 어슬렁거렸다. 해님이 높이 올라 따사로운 햇살을 곳곳에 비추고, 솜털 같은 구름이 바람 따라 조용히 흘러갔다. 마녀 키르케가 입을 벌리고 햇살을 마시다가 불현듯 질문했다.
“태양은 무슨 색일까요?”
다들 심심했는지 즉각 대답했다.
“보면 몰라요? 노란색이잖아요?”
“엥? 빨간색 아니오?”
“저게 어떻게 빨간색이냐! 주황색이지!”
자연과학자나 인문학자가 보면 재미있어할 주제였다. 지역마다 태양의 색깔이 달랐다. 그러나 학문에 관심이 없는 로벨은 엉덩이 아래에 주의를 기울였다. 등나무로 만든 가벼운 안장이 주인의 무게를 못 이겨 삐그덕거렸다.
“너무 많이 가져왔나?”
흐룬팅과 아론다이트로 만족하지 못해서 크고 아름다운 무기를 몇 자루 더 가져왔다. 사람 하나 겨우 앉을 안장에 쇳덩이가 주렁주렁 달렸으니 말썽이 생기는 게 당연했다. 모닝스타가 입술을 뒤집고 불만을 표출했다. 여행 내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말에게 퍽 미안할 것이다. 로벨은 모닝스타에게 줄 뇌물-각설탕과 말린 사과 등-을 고르며 호른 경 탓으로 돌릴 준비를 갖췄다. 다행히 충성스러운 기사를 시험에 들게 할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멈춰라!”
가도(街道)라고 하지만 오래 방치되어 울퉁불퉁한 흙길이었다. 땅속에서 밧줄이 튀어나와도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우리 늑대도로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죠.”
도시사업에 자부심이 강한 어린 집사가 중얼거렸다. 다시 말해 길을 막고 험한 말을 쏟아내는 도적무리에게 겁을 먹지 않았다.
“뭐야, 노상강도야?”
“북쪽에 올라온 게 실감 나네. 우리 공왕 폐하 땅에서는 상상도 못할 일인데.”
“그, 그 정도는 아니야.”
“...쑥스러워할 타이밍이 아닙니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병장기를 주섬주섬 챙겼다. 꼬뜨 아래에 갑옷이 슬쩍 보였다. 각종 둔기와 날붙이를 지참한 로벨과 호른 경은 말할 것도 없었다. 평범한 일행이 아니었다. 그러나 사흘 굶주린 화전민 패거리는 뵈는 것이 없었다.
어린 집사가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도적떼를 쭉- 훑어보았다.
“가만 보자. 봄농사를 시원하게 말아먹고, 간신히 일군 땅도 영주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야지에 쫓겨나 며칠 굶었지요?”
“어, 어떻게...”
“댁들 같은 사람이 어디 한둘인가요? 우리 영주님 땅에도 몇 번 나타났었어요. 전부 까마귀밥이 됐지만. 그렇죠?”
로벨이 영주님이라 불리던 시절 이야기다. 허풍쟁이와 발가락이 잔인한 미소로 긍정했다.
“기왕 도적질을 결심했으면 무기라도 제대로 갖추지 그래요. 나무창에 나무망치가 뭐에요? 그건 몽둥이라고 가져온 건가요? 회초리 아니에요?”
어린 집사가 지적한 무기 주인들이 움찔했다. 기습받은 것은 일행인데, 반대로 기선을 제압했다. 어린 집사는 의기양양하게 마무리했다.
“허풍쟁이, 발가락, 두 사람 선에서 처리하세요.”
허풍쟁이가 양손에 클리버를 쥐고 일어났다가 도로 앉았다.
“...이미 늦은 거 같소.”
“이럇! 이랴앗!”
로벨이 마상용 플레일을 빼들고 돌격했다. 말을 붙잡기 위해 쳐둔 새끼줄은 아무 소용이 없었다. 모닝스타는 발정 난 수사슴처럼 사뿐사뿐 뛰어넘어 도적떼를 덮쳤다. 이어지는 것은 깨지고 부러지는 처참한 비명뿐이었다.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모으고 안쓰러운 듯 중얼거렸다.
“하필 털어도... 불쌍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