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19화 (419/605)

419화. 스승

왕이나 제후가 연회를 열면 기본이 2박 3일이고, 조금 호화롭게 꾸미면 4박 5일까지도 이어졌다. 그만큼 연회 준비도 거창해서 시장 상인부터 도시 밖 농민까지 호사를 누렸다.

애지중지 키운 돼지도 몇 마리 잡고, 집 지키라고 풀어둔 거위도 살금살금 유인해서 잡고, 겨우내 아껴둔 치즈와 소시지도 비싸게 팔았다. 크고 맛있는 부위는 성으로 가지만, 자투리 고기와 뼈, 저가의 비계 등은 온전히 농민의 몫이었다.

“근데 또 무슨 잔치라우?”

“전쟁에서 이겼잖은가.”

“우리 영주님이 이기는 것은 당연한데, 새삼스레 또 축하하고 그러남?”

“예끼! 이 사람아! 세상에 당연한 게 어디 있나?”

“아무러면 어떻소. 우리야 맛난 고기 먹으니 좋은 거 아닌가.”

연회에는 고기만 필요한 게 아니었다. 때깔 좋은 기름과 고급 양초-저품질은 냄새가 고약하다- 귀빈용 은잔과 은촛대, 기사 종자 및 수행원을 위한 나무잔과 나무그릇, 기사들의 말(馬)을 먹이고 재울 콩, 귀리, 건초 따위를 사들였다. 봄 추수와 맞물려서 비교적 싸게 구할 수 있었다.

“성에 무슨 일 있소? 뭐 이리 많이 사가시오?”

“공왕 폐하가 전승을 축하하는 연회를 연다고 하오.”

“오호? 소문이 진짜였구만? 역시 우리 영주님이야.”

덕분에 에르나&포비아 왕국 전쟁 결과가 도시 밖까지 널리 퍼지는 것은 물론이고, 전쟁에 참여한 기사들의 콧대도 한껏 높여주었다.

“아닛! 왜 우리 가문을 초대하지 않은 거요? 저 막돼먹은 메튜 가문은 초대하면서?”

“경의 가문은 이번 전쟁에 참가하지 않았잖소.”

“그, 그야 집안에 일이 있어서... 그 대신 방패비용을 지불했잖소? 그러면 된 것 아니오!”

“페닝이 의무는 대신할 수 있어도, 명예와 영광은 대신하지 못하오. 정 참석하고 싶으면 와도 되지만, 전공이 없으니 말석에 앉게 될 것이오.”

명예를 지상 최고의 가치로 아는 기사에게 적당한 상벌이었다.

시간이 조금 흘러, 연회에 초대받은 기사들이 하나둘 로드릭 시티로 찾아왔다. 시민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기사들은 경제개념이 낮고 흥정에 약해서 좋은 호구였다. 물론, 지나치게 벗겨 먹으면 칼부림이 날 수 있으니 적당히 해야 했다.

“헤헤, 보시다시피 손님이 많아서 빈방이 없습니다요. 억지로 방을 빼려면 기본 숙박료에 3페닝이 필요하지요.”

“3페닝? 하룻밤에 말이냐?”

“아이고! 그럴 리가요? 객실을 양보받는데 필요한 돈입니다요. 숙박비는 고정금액이지요.”

“흐음... 그렇다면 납득이 되는군.”

객실을 양보한 손님이 시내에 멀쩡한 집을 가진 시민이란 것을 알면 납득하지 않겠지만, 진실은 2페닝과 1페닝으로 갈라져 평생의 비밀이 되었다.

공왕 로벨 로드릭과 친분이 있는 기사들은 미리 성에 초대받기도 했다. 호른 경, 랭스터 경, 켈트 남작, 도너반 남작 등이었다. 이처럼 봉신도 같은 봉신이 아니고, 기사도 같은 기사가 아니었다. 자연히 자리배치가 문제되었다.

“상석은 당연히 공왕 폐하 자리고, 그 옆자리가 문제인데...”

로벨이 결혼을 했으면 처와 장남의 자리인데, 아직까지 혼자라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저요! 저! 제가 앉을 게요!”

마녀 키르케가 두 손을 번쩍 들고 자원했다. 어린 집사 이하 늑대성 식구들은 당연히 무시했다.

“주교 나으리도 없으니까, 리암 수사가 앉는 것이 어떻소?”

“아, 앗! 안 됩니다! 일개 수사가 폐하 옆에 앉으면 큰일 나요!”

리암 수사가 펄쩍 뛰었다. 로드릭 시티에서 영향력이 어느 도시의 주교 못지않으나 서품 받은 사제가 아니라 제약이 많았다.

“그럼 뭐 정해졌네요. 호른 경과 아자르 경으로 하죠.”

“호른 경은 상관없지만, 아자르 경은 야만... 아니, 외지인이라 말이 나오지 않겠소?”

“이번 전쟁에서 공왕 폐하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적을 해치운 기사에요. 전공으로 입을 막으면 돼요. 그리고 키르케도 그만해요. 귀부인이 아닌데 어떻게 연회에 참석해요?”

귀부인이 아닌 키르케가 입술을 삐죽였다. 허풍쟁이가 메인 홀의 의자 숫자를 헤아린 후 찾아왔다.

“볼탄 반도 전체에서 나으리들이 올 텐데, 자리가 부족하지 않수?”

“한 번에 몰려오지만 않으면 괜찮아요.”

기사도 사람이라 2박 3일을 내리 놀지 못했다. 첫째 날만 참석하거나 마지막 날만 참석하는 기사가 많았다.

“후원에도 자리를 만들 거니까 초대받지 않은 기사는 그쪽으로 보내세요.”

“그래도 되오? 기사인데?”

“주인의 소환에 응하지 않은 기사가 무슨 기사예요? 화장실에 자리를 마련해도 감내해야지. 지들이 어쩔 거야?”

“후원이 화장실 아니오...”

성 안에 지정된 변소가 있긴 하지만, 급하면 그냥 구석에서 해결했다. 어느 성이나 비슷하니 딱히 늑대성의 문제는 아니었다.

호른 경은 리암 수사를 통해 자리배치를 듣고 활짝 웃었다. 굴뚝 요정에게 강아지를 선물 받은 소녀가 저리 웃을까 싶은 수준이었다.

“공왕 폐하가 신임하는 어린 집사답다! 사리에 밝고 빈틈이 없으며 일 처리가 깔끔하군!”

“...무슨 말씀인지 모르겠지만, 승낙하신 것으로 알겠습니다.”

같은 시간, 같은 내용을 전달받은 켈트 남작 등은 동의하지 않았다.

“공왕 폐하를 가장 오래 모신 가문이 우리 켈트 가문이다! 어찌 나를 두고 근본 모를 야만인을 챙기는가!”

예상한 반응이라 심드렁했다.

“에릭 공작의 명령으로 충성한 거죠. 그리고 엄밀히 따지면 머를 브릭 경이 로드릭 가문의 첫 번째 기사에요.”

“네 이놈! 공왕 폐하의 후광을 믿고 할 말 못 할 말 가리지 않는구나!”

켈트 남작이 칼자루를 쥐고 호통쳤다. 아들과 기사 종자가 지켜보고 있기에 더욱 세게 나왔다. 어린 집사는 한숨을 삼키고 한발 물러났다.

“전공에 따른 자리배치에요. 전공이요. 켈트 남작님의 공도 작지 않지만, 폐하를 호위하면서 열세 명의 목을 벤 아자르 경의 전공이 조금 더 커요.”

켈트 남작이 세운 전공은 기사 하나 포함해서 총 네 명이었다. 핑계를 대자면 부대를 이끄느라 로벨과 함께 돌격하지 못했다. 그래도 열세 명을 벤 공훈에 맞설 수 없었다.

“켈트 가문의 변함없는 우정을 치하하며 따로 상을 내리실 거예요. 그러니 자리쯤은 양보해 주세요.”

“공왕 폐하께서 직접 포상하신다고?”

“그럼요. 그럼요.”

어린 집사는 성난 중년 기사를 간신히 달랜 후 한숨 쉬었다. 이 짓을 자칭 로드릭 가문의 기사마다 찾아가 해야 했다.

‘이래서 연회가 싫다니까.’

페닝은 페닝대로 나가고, 욕은 욕대로 먹고, 생산성이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로벨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로벨은 어렵고 귀찮은 일을 어린 집사에게 떠넘기고 시장으로 도망나왔다. 순시를 가장한 동네 마실이었다. 그 증거로 호킨 페럿 경과 아자르 경이 함께였다.

“좋은 날이오. 모두 웃으시오.”

“...난 포로요. 웃지 않는 게 내 역할이오.”

“난 웃음 있습니다! 명령은 충성입니다!”

호킨 페럿 경과 아자르 경이 극과 극의 입장 차이를 보였다. 로벨은 아무래도 좋았다. 도시 곳곳에서 웃음이 흘러나오고, 기사들이 자랑스러운 얼굴로 활보하니 덩달아 행복했다.

로벨이 지나가면 시민들은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시하고 어린아이들은 봄꽃과 과자부스러기를 선물했다. 로벨에게 코가 꿰여 따라 다니는 호킨 페럿 경은 어이가 없어 머리를 저었다.

“소문과 달라도 너무 다르군.”

“소문? 무엇이 소문이다?”

“적국에 퍼지는 소문이 무엇이겠소? 아아, 이해 못하면 묻지 마시오. 충복이 들어서 좋을 거 없으니.”

호킨 페럿 경이 뚱하게 대답했다. 그래도 정중한 말투였다. 주먹질 좀 하더니 친해진 모양이다. 로벨은 두 기사의 변화까지 행복했다. 그러나 기분 좋게 하루를 마무리할 수 없었다.

로벨 일행 앞을 가로막은 기사가 있었다. 아자르 경이 강하게 경계했다. 로벨의 칼솜씨를 모르는 바 아니지만, 수행기사로서 방심할 수 없었다.

“공왕 폐하, 검은 숲 브릭 가문에서 온 기사 숀입니다.”

로벨은 기사의 얼굴을 면밀히 살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머를 브릭 경과 함께 몇 번 본 얼굴이었다.

“숀 경, 오랜만이오. 브릭 자작을 대신해서 연회에 참석하시오?”

그런 것치고 표정이 좋지 않았다. 평소 눈치가 부족한 로벨이지만, 이럴 때는 묘하게 감이 좋았다. 모닝스타에서 내려 가까이 다가갔다. 숀 경이 나직이 속삭였다.

“주드 맥켈런 남작이 죽었습니다.”

“북해의 사자가...?”

좋은 날에 그렇지 못한 소식이었다. 로벨은 깜짝 놀라 편지를 받았다. 브릭 가문의 인장을 건성으로 훑은 후 곧장 내용을 살폈다. 한발 뒤로 물러난 숀 경이 설명을 덧붙였다.

“자연사입니다. 지병을 조금 앓았으나 그것이 아니더라도 세월의 화살을 피하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군.”

웃음 가득한 거리가 한순간 조용해졌다. 로벨의 귀에 웃음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조용한 것과 마찬가지였다. 호킨 페럿 경이 예의상 편지에 관심 있는 척하고 위로했다.

“그 위대한 기사가 죽다니, 정말 안타까운 일이오.”

“에르나 왕국 기사가 주드 맥켈런 남작을 아오?”

“제1차 정벌 전쟁... 크흠! 에르나&포비아 왕국 전쟁 때 우리 군을 막은 적이었소. 본인은 너무 어려서 참전하지 못했으나 부친께 종종 이야기를 들었소.”

“그럴 것이오. 그럴 수밖에 없지.”

로벨이 우울하게 기뻐했다. 이상한 반응이었다. 호킨 페럿 경이 무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그자가 공왕의 봉신도 아닌데 왜 그리 슬퍼하시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의아할 만했다. 주드 맥켈런 남작은 볼탄 반도와 관계없는 청옥섬의 영주였다. 로벨은 세인이 이해하기 쉬운, 그러나 당사자가 아니면 무게를 알 수 없는 말로 설명했다.

“그는 나의 스승이자 몇 안 되는 친구였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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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날까지 들떴던 잔치 분위기가 당일 푹 꺼졌다. 주드 맥켈런 남작의 사망 소식이 전해지면서 승전 축하가 고인 위로로 바뀌었다.

기쁜 마음으로 찾아온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고, 기사 종자와 수행원은 그 유명한 리암 수사표 맥주를 앞에 두고 차마 마시지 못했다. 견디다 못한 옆자리의 호른 경이 조용히 속삭였다.

“공왕 폐하, 기사들을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웃으시지요.”

“본인은 본래 잘 안 웃소.”

“그야 그렇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로벨의 반응이 냉담하자 천하의 호른 경도 당황해서 횡설수설했다. 위로가 될지 모르지만, 그 모습에 마음이 조금 풀렸다.

“미안하오. 경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소.”

로벨이 평소 모습으로 돌아오자 호른 경이 억지로 미소 지었다.

“저는 괘념치 마십시오. 하지만 공왕 폐하를 위해 참석한 저들을 박대해서 안 됩니다.”

로벨도 동의했다. 주종관계는 쌍방관계였다. 무조건적인 충성을 강요하는 동방과 달랐다. 군주가 명예를 지켜주지 않으면 기사도 충성을 바치지 않았다. 로벨은 자리에서 일어나 은잔을 높이 들었다.

“술잔을 드시오.”

기다리고 기다리던 순간이었다. 기사들이 환한 얼굴로 따라 일어났다. 늑대성의 메인 홀이 우람한 사내들로 가득 메워졌다.

로벨은 어린 집사가 써준 축하연설을 떠올리려고 애 쓰다가 포기하고 생각나는 데로 외쳤다.

“볼탄 반도와 로드릭 가문, 그리고 충성스러운 경들을 위해 건배합시다. 건배.”

“건배!”

백 개의 술잔이 바닥을 높이 들었다. 그러나 로벨의 술잔은 그대로 있었다. 이 자리에 어울리지 않지만, 첫잔은 다른 곳에 바치고 싶었다.

‘나의 스승과 나의 벗을 위하여. 건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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