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18화 (418/605)

418화. 가치

볼탄 반도로 돌아가는 바닷길은 평화로웠다.

기사와 기사 종자는 고향 사람에게 자랑할 무용담을 3배쯤 부풀리며 히죽히죽 웃었고, 울프 용병단은 전쟁수당과 포상금을 떠올리며 세상만물을 축복했다. 계절풍을 타고 미끄러지듯 가니 노잡이 노예조차 행복한 표정이었다. 근심이 있다면 술 취한 외팔이가 푸른고래 선수상에 매달려 돼도 않는 노래를 부른다는 것뿐이었다.

“고향~ 내 고향~ 아름다운 나의 고향~ 이 몸이 찾아가오~”

외팔이와 달리 ‘아직’ 제정신인 풋맨 소대가 오만가지 쌍욕을 하며 뜯어말렸다. 정말 화가 난 고참 용병은 내가 죽이기 전에 실수로 떨어져 죽지 말라고 악을 썼다.

반면, 크로스보우맨과 맨앳암즈들은 햇살 좋은 상부갑판에 앉아 느긋하게 관람했다.

“저 친구 네일 공국 출신 아니었수?”

“야야. 신경 쓰지 마. 머리털 빠져.”

고향에서 농사지은 햇수보다 떠돌아다니면 칼질한 햇수가 더 많은데, 가장 오래 칼질한 곳이 볼탄 반도라 고향이라면 고향이었다. 비단 외팔이뿐만 아니라 칼밥 먹은 지 오래된 용병들은 비슷비슷했다.

“아! 진짜! 공왕 폐하가 식사하시는데 왜 이렇게 시끄러워요!”

어린 집사가 해치를 열고 머리를 내밀었다. 자고로 용병은 반짝이는 것에 충성한다. 반짝이는 것을 나눠주는 어린 집사가 갑이었다.

“저 돼지 멱따는 소리 막지 않으면 포상금 한 푼도 없을 줄 알아요!”

불합리한 처사였다. 전공을 세우고 받은 정당한 포상에 흥정이 있어서 안 된다. 울프 용병단은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났다. 정의와 소원하고 불의를 잘 참는 용병의 기개였다.

“어익후! 당장 조용히 시키겠습니다!”

“야! 뭐 하냐! 그냥 던져버려!”

“그러고 싶은데 이 자식이 손을 안 놔!”

“도끼 가져와! 잘라버리게!”

어린 집사는 용병들의 호들갑을 뚱하니 보다가 해치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나 아래쪽도 평화롭지는 않았다.

로벨의 선실에서는 로벨을 비롯한 높으신 기사 나리들이 식사 중이었다. ‘기사’란 단어가 중요했다. 영웅소설이나 로맨스 소설과 달리 기사=페닝이 많은 야만인이었다. 그 증거로 진짜 야만인 출신도 있었다.

기사로-그리고 그렉 페럿 경의 동생으로- 식사자리에 초대 받은 호킨 페럿 경이 맨손으로 훈제 닭을 찢어먹는 푸른 눈의 야만인을 보았다.

“저자는 외해 원주민이 아니오? 저런 미개인하고 같이 식사하다니...”

듣는 미개인 기분 나쁜 소리였다. 아자르 경은 악력으로 닭갈비를 으깨고 으르렁거렸다.

“예의 바른 외국인! 전부 죽는다! 아니면 내가 죽어라!”

펄프 대장은 고기파편을 피해 돌아서며 투덜거렸다.

“저 나으리는 ‘죽어라’만 또박또박 발음을 잘하오.”

“진짜도 잘한다! 죽어라!”

아자르 경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호킨 페럿 경은 눈알을 부라리고 레슬링 자세를 취했다.

교양과 품위를 갖춘 사람에게는 험악한 광경이지만, 기사, 용병 대장, 해적출신 선장에게는 아니었다. 칼 정도는 뽑아야 ‘어? 진짜 싸우네?’ 여길 것이다.

“늑대성에 도착하면 먼저 승전축하연회를 여는 것이 어떻습니까?”

호른 경이 로벨 귓가에 나직이 속삭였다. 로벨은 귓구멍이 간지러워 풋! 웃었다. 덕분에 분위기가 이상해졌다.

“어, 어흠, 어린 집사가 허락할지 모르겠소. 요즘 페닝 나가는 곳이 많다고 잔소리가...”

“또 뭐에요? 또 무슨 작당해요?”

“저거 보시오. 저거.”

에르나 왕국의 그랜드 챔피언과 불타는 산의 위대한 전사가 주먹을 교환한 후 뒤엉켜서 선실바닥을 굴렀다. 어린 집사는 그러거나 말거나 로벨을 추궁했다.

“전쟁 끝났다고 흥청망청 놀 생각하지 마세요. 지금 성 안에 밀린 일이 산더미에요.”

“내가 언제 흥청망청 놀았다고...”

“그럼 탱자탱자 놀았나요?”

로벨은 흥청망청과 탱자탱자 중에 어느 쪽이 나은지 고민했다. 호른 경이 둘 다 아니라고 변호할 때까지 계속 했다.

“그리고 전쟁의 승리를 축하하는 것도 왕의 역할이다. 기사들의 충성심만큼 값진 것은 없다.”

에르나 왕국 그랜드 챔피언 자리는 주사위로 딴 것이 아니었다. 호킨 페럿 경은 아자르 경의 괴력에도 밀리지 않았다.

“솔직히 까놓고, 기사들이 한 게 뭐 있어요? 우리 공왕 폐하가 다 했죠. 밥만 축내는 병사들은 안 와도 됐잖아요?”

“그거 대단히 무례한 발언이군.”

“참나! 호른 경도 마찬가지예요. 생색 좀 내지 마세요.”

로벨은 괴력의 기사들이 사투를 벌이는 것보다 사랑하는 두 남자가 말싸움하는 것에 안절부절 못했다. 동쪽에서 온 여행자가 보았다면 고부갈등 내지 장서갈등으로 묘사할 것이다.

한편, 선주의 초대를 차마 거절 못해 참석한 이안 선장은 뒤집어지는 탁자에서 술병을 지킨 후 소란에 놀라 찾아온 항해사에게 말했다.

“돛을 전부 펼쳐라! 최대한 빨리 볼탄 반도로 가자! 이 귀하신 분들을 치워야겠다!”

앞서 말했지만, 평화로운 항해였다. 사소한 근심은 외팔이가 기어이 미끄러져 난간에 매달렸다는 것과 두 기사가 더블카운터로 동시에 기절했다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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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고래 호의 귀항이 로드릭 항을 지나 볼탄 반도 곳곳에 퍼졌다. 이안 선장이 필요 이상으로 속도를 낸 탓에 전쟁 소식보다 빨랐다. 세상사에 관심이 많은 귀족과 상인이 로벨을 보기 위해 늑대도로로 나왔다.

“왜 벌써 돌아온 거지? 아직 싸우는 중이라 하지 않았소?”

“포비아 왕국의 전쟁이니 볼탄 반도가 계속 참전할 이유는 없지만...”

“혹시 공왕 폐하께 무슨 일이 생긴 거 아니오?”

로벨은 긴 항해에 심통이 난 모닝스타를 달래며 늑대성으로 향했다. 그 뒤로 희희낙락한 울프 용병단과 기사들이 따랐다.

“뭐야, 멀쩡하잖아?”

“그럼 전쟁이 끝난 건가?”

“이긴 거야, 진 거야?”

“어허! 우리 폐하가 질 리가 있나!”

용병들과 종군상인들이 전쟁소식을 전했지만 전파력이 낮았다. 술 취해서 떠드는 소리가 대부분이라 공신력을 의심하는 사람도 있었다. 육지에서 바다에서 수없이 이기고 왔으나 반응이 미지근했다. 결국 어린 집사가 항복했다.

“해요. 해. 승전축하인지 저주인지 하자고요.”

로벨이 박수치며 좋아했다. 아무리 점잖아도 기사였다. 유사 직업 종사자를 모아놓고 무용담을 자랑하고 싶었다. 어린 집사는 상반기 예산에 연회비를 추가한 후 말했다.

“폐하가 나포한 배 중 한 척은 전쟁수당 메꾸는데 쓰고요, 한 척은 크레타 시티 정기 연락선으로 쓸 거예요. 에르나 왕국 해군이 보면 눈이 뒤집힐 지도 모르니까요.”

“응. 집사가 알아서 해.”

“제가 알아서 해도 폐하는 들어야 해요. 전 순진한 꼬마가 아니라고요. 제가 부정 비리를 저지르면 어쩌려고 그래요?”

군권을 제외하면 실질적인 권력은 어린 집사에게 있었다. 아니, 울프 용병단의 예산을 집행하는 만큼 군권도 일부 장악하고 있었다. 로벨이 가진 것은 기사들의 충성과 펄프 대장을 비롯한 고참 용병들의 신뢰뿐이었다.

“그래도 상관없어.”

“...뭐라고요?”

로벨은 열여섯 살 무렵의 순진한 눈으로 친구를 보았다.

“난 집사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늑대성의 재산을 가져가서 행복하다면 그래도 좋아.”

“그, 그건... 음... 예상 못한 답이네요.”

어린 집사는 당황해서 우물거렸다. ‘난 집사를 믿어!’ 혹은 ‘내 집사가 그럴 리 없잖아?’ 등의 대답을 예상했는데, 그것보다 더 큰 감동을 주었다. 거짓말이나 연기를 못하는 로벨이라 더욱 그러했다.

“하지만 나도 먹고살아야 하니까... 조금은 남겨주고 가져갈래? 펄프 대장한테 줄 급료도 좀...”

뒤에 말만 하지 않았으면 오랫동안 감동했을 것이다.

“안 가져가요! 안 가져가! 어휴! 이런 영주님을 어떻게 그냥 두고 가요!”

마녀 키르케가 옆에 있었으면 ‘영주님이 아니고 공왕 폐하요’하고 흉내 냈을 것이다. 그리고 어린 집사는 귀가 빨개서 듣지 못했을 것이다.

“그럼 이 일은 제가 알아서 하고, 영주님은 연회준비를 하세요.”

“응? 내가?”

“봄 추수가 끝나면 봉신들을 초대하세요. 그전에 고기랑 술이랑 사면서 승전 소식을 퍼트리고요. 이건 헨리 피터 상회장한테 맡기세요.”

기분이 좋은 어린 집사는 통 크게 연회비를 올려주었다. 로벨도 덩달아 기분이 좋아져서 당장 상회로 나갈 채비했다.

“아, 맞다! 호킨 페럿 경을 데려가도 되지?”

“엥? 포로잖아요?”

“친구의 동생이라니까.”

“그쪽은 그렇게 생각 안 한다니까요. 아, 몰라! 알아서 하세요. 그쪽도 명예를 알면 도망가거나 하지 않겠죠. 도망쳐봐야 볼탄 반도 안이고.”

“응!”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아자르 경이나 외팔이를 대동하세요. 배에서 사고 친 게 있으니 군말 없이 따를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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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으로 모욕 받은 아자르 경과 기사 울렁증이 있는 외팔이 더치 중 누구를 데려갈지 선택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현명한 공왕 로벨 로드릭은 공정한 결정을 내렸다.

“명색이 왕이란 자가 고기 사고 술 사는데 직접 가시오?”

호킨 페럿 경이 임시로 돌려받은 칼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로벨은 공왕의 위엄을 위해 변명했다.

“직접 사는 것은 아니고, 시키러 나온 것이오.”

“그게 그거 아니오. 보통은 상인을 불러서 시키지 찾아가지 않소. 그리고 인재가 부족하오? 저 천한 것들은 왜 데리고 나온 것이오?”

천한 것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말이 다수다! 주인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닥치라 요구한다!”

“전 네일 공국의 자유민입니다요! 아, 아니, 뭐, 나으리에 비하면 천하지요. 예, 예.”

로벨은 담소를 나누는 다국적 일행을 보며 흐뭇해했다.

“금방 친해졌군. 보기 아주 좋소.”

“...어딜 봐서?”

로벨의 눈에는 외국에서 온 친구와 믿음직한 수행원이지만, 객관적으로 볼 때 무시무시한 패거리였다. 볼탄 반도의 왕이자 무적무패의 기사인 로벨만 해도 감히 눈을 마주칠 수 없는데, 그런 로벨이 왜소해 보일 만큼 덩치 좋은 외국계 전사가 셋이었다. 로벨을 호위하기 위해 일렬로 서자 마차가 다니는 광장대로가 꽉 막혔다.

“누가 길을 막고 지랄이야!”

간혹 항의가 들려왔지만, 외팔이와 아자르 경이 쳐다보면 금방 오해가 풀렸다.

“과, 과일장수! 너 말이다! 왜 여기서 장사를 하는 거냐! 길이 좁잖아!”

“나, 난 3년째 여기서 장사...”

로벨은 자리다툼이 심한가 보다 생각하며 페리 행정관에게 일을 맡겨야겠다고 생각했다. 뜬금없이 구역정리를 하게 된 행정관과 상인 조합원은 봄 추수 내내 절규하는데, 로벨 이하 기사 패거리가 알 바 아니었다.

로드릭 상회는 안 본 사이 한층 커졌다. 리암 수사표 맥주가 바다 건너 자유도시연맹까지 유통되면서 막대한 페닝을 벌었다. 옆 건물을 사들이고, 창고도 새로 지었다.

“공왕 폐하의 선견지명 덕분이지요.

“응? 나?”

“뉴-로드릭 마을의 농지가 크게 늘어나지 않았습니까. 해서 올해부터 맥주의 생산량을 두 배로 늘릴 생각입니다.”

거기까지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칭찬이 싫지 않아 콧대를 높였다. 호킨 페럿 경은 보리와 홉만으로 담근 리암 수사표 맥주를 한 모금 마시고 연신 감탄했다. 입맛 까다로운 에르나 왕국인이 저리 좋아하는 것을 보면 확실히 상품가치가 있었다.

“그럼 판로를 더 넓히는 게 어때?”

로벨이 어린 집사를 대신해 야심차게 물었다. 그러나 헨리 상회장은 난색을 보였다.

“그건 좀 곤란합니다.”

“왜?”

“와인과 달리 맥주는 금방 상합니다. 장거리 무역에 좋지 않죠. 그리고 영주와 수도원의 반발이 큽니다. 볼탄 반도와 크레타 시티는 공왕 폐하의 영토라 괜찮지만, 외국으로 나가면 과세가 엄청나지요.”

“음... 그런 문제가 있네.”

문외한의 참견은 오래가지 못했다. 로벨은 장사 문제를 치우고 본론을 꺼냈다. 승전축하 연회에 쓸 고기와 술이 필요했다. 헨리 상회장은 어린 집사가 내어준 예산과 로드릭 가문의 봉신 숫자를 얼추 맞춘 후 고개를 끄덕였다.

“이 정도면 문제없습니다. 과연 늑대성의 귀재군요.”

“우리 집사가 똑똑하긴 해.”

호킨 페럿 경이 신기하게 쳐다보았다. 당연히 로벨이 짜온 예산이 아니라 생각하는 상회장이나 그걸 불쾌하게 여기지 않는 로벨이나 이상했다.

‘생각보다 재미있는 동네군.’

패전한 기사 입장에서 우스운 일인데, 승전축하 연회가 자못 기대되었다. 특히 이곳의 맥주는 그럴 가치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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