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17화 (417/605)

417화. 새해

시간이 지나자 하나둘 기시감을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잊지 못할 아이언베어 요새 전투와 너무 똑같았다. 그때도 페럿 경이었고, 지금도 페럿 경이었다.

“결과까지 같으면...”

대적자가 늑대의 이명(異名)을 가진 볼탄 반도 기사란 것도 같았다.

로벨은 롱소드를 어깨 뒤로 당기며 칼날을 힐끔 보았다. 과장이 아니라 톱으로 써도 될 만큼 이빨이 빠져있었다.

‘좋은 칼인데...’

반나절 유흥에 사용하기 아까운 무기였다. 칼날을 갈아도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지 못할 테니 아예 녹여서 다시 만들어야 할 것이다.

덤으로 본의 아니게 고백했는데, 유흥이었다.

“후욱... 후욱... 후우욱...”

호킨 페럿 경의 숨소리가 태풍처럼 들렸다. 벼락처럼 날아들던 도끼가 맥없이 휘청거렸다. 로벨은 칼을 쓸 필요조차 못 느껴 한쪽 컨틀렛으로 쳐냈다. 무기가 튕겨나가고, 주인이 비틀거렸다.

“이제 보니... 흐읍... 인간이 아니었군...”

로벨의 칼이 멈칫했다. 지금까지 공격 중 가장 날카로운 공격이었다.

“내 형제를 죽인 자처럼, 그대도 괴물이었어.”

“그럴지도 모르오.”

로벨은 우울하게 대답했다. 백 번의 칼부림보다 한마디 말이 괴로웠다.

“우습군. 참으로 우스워. 형제가 모두 괴물에게 죽는 건가? 이 먼 동쪽 땅에 와서? 옛 신이시여! 우리 가문에 무슨 원한이 있나이까!”

로벨은 이 빠진 롱소드를 아래로 내렸다. 호킨 페럿 경이 패배를 시인했다. 이제 오해를 바로 잡아야 했다.

“잠깐. 잠깐 기다리시오. 경을 죽인다고 안 했소.”

“...뭐라?”

전쟁 중이라 비장해진 감이 있지만, 한쪽이 반드시 죽어야 끝나는 것은 아니었다.

“경을 포로로 잡을 것이오. 에르나 왕국군이 포클랜드를 떠나면 풀어줄 것이오.”

로벨은 평화적이지 않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호킨 페럿 경은 동의하지 않았다.

“그런 치욕을 줄 바에 차라리 죽이시오!”

포로는 괜찮지만, 인질은 불명예였다. 기사가 아니면 이해하기 힘든 사고인데, 천만 다행히 로벨은 기사였다.

“경의 목숨으로 흥정하는 것이 아니오. 명예로운 기사들에게 회군을 요구할 생각도 없소.”

“그럼 어찌...!”

“경이 없으니 포비아 왕국이 승리할 것이오. 예정된 미래에 결과를 밝힌 것뿐이오.”

호킨 페럿 경도 기사였다. 조금 어려운 말이 나오자 두 눈을 껌벅였다.

“이만큼 싸웠으면 그랜드 챔피언으로서 자존심은 지킨 셈이오. 아쉬움이 없지는 않으나, 이만 끝을 낼 때가 되었소.”

로벨은 이 빠진 롱소드를 땅에 꽂고 흐룬팅 손잡이를 잡았다.

“무기를 드시오.”

“이제 와서...”

“후회를 남기고 싶소?”

호킨 페럿 경은 비명 지르는 근육을 억지로 당겨 창을 세웠다. 그 순간, 로벨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호킨 페럿 경은 로벨의 마지막 말을 이해했다. 애당초 승산이 없었다. 할버트가 부러지고 흉갑이 사선으로 쪼개졌다. 경이로운 힘과 칼솜씨였다.

“난 늑대의 왕이 아니오. 그와 다른 길을 갈 것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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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백 명의 피로 가리지 못한 승자와 패자가 정해졌다. 로벨은 최후의 일격으로 기절한 호킨 페럿 경을 모닝스타 엉덩이에 실었다. 거구의 기사가 아니라 어린아이, 솔직히 말하면 어린 사냥감을 다루는 모습이었다.

에르나 왕국 기사들은 지휘관이자 그랜드 챔피언이 포로로 잡혀가게 둬야 하는지, 아니면 정당한 결투 결과에 승복해야 하는지 갈등하다가 시간을 낭비해 달려 나오지 못했다. 반면 포비아 왕국 기사들은 고민 없이 승전을 기뻐했다. 심사가 뒤틀린 기사조차 압도적인 무력 앞에 감히 트집 잡지 못했다.

로벨은 관심을 받아 신난 모닝스타를 진정시키며 포비아 국왕과 기사들 앞으로 다가갔다. 서먹서먹한 축하와 찬사가 날아왔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로벨은 볼탄 반도 공왕인 동시에 포클랜드 후작이었다. 여기저기에 작위를 가진 기사가 워낙 많아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없지만, 그래도 명목상 로벨의 승리는 포비아 왕국의 승리고, 로벨의 영광은 포비아 왕국의 영광이었다.

그때, 저돌적인 돌체 백작이 큰 소리로 외쳤다.

“지금이 기회입니다! 국왕 폐하, 공격을 명하소서!”

기사로서 옳은 판단이었다. 하지만 기사 중의 기사 로벨은 동조하지 않았다.

“적은 이대로 철수할 것이오. 굳이 피를 볼 필요 없소.”

“그게 무슨 말이오? 우리 땅을 침범한 적을 고이 보내자는 것이오?”

“1만 2천 명이오. 지난 전투로 조금 줄었어도 1만 명 이상 남아 있소.”

“그래 봤자 지휘관이 없는 잡병들이오! 무적무패의 기사가 겁이 난 것은 아닐 테고, 알량한 자비요?”

로벨을 잘 모르고 하는 소리였다.

“1만 명을 모두 죽여 이곳에 묻을 수 있다면 본인이 앞장서서 돌격할 것이오. 저 나라에 좋은 교훈이 될 테니까.”

높낮이가 없는 말이었다. 돌체 백작은 공왕이 진심이란 것을 깨닫고 움찔했다.

“하지만 불가능하오. 수백 명의 목을 쳐서 전공은 세울 수 있겠지. 그러나 수천 명은 이곳에서 벗어나 왕국 곳곳에 흩어질 것이오.”

“그게 뭐 어쨌다는...”

“지금은 춘궁기요. 겨울이 막 지나 먹을 것이 부족하오. 수천 명의 패잔병이 돌아다니면 민가의 피해가 극심하오.”

마을을 지키는 기사들이 대부분 죽거나 도망쳐 힘이 없었다.

“국경까지 물러나게 두시오. 정녕 원한을 갚아야 한다면 우리 땅이 아니라 저들의 땅에서 싸우시오. 에르나 왕국을 공격하시오.”

돌체 백작은 입술을 오물거리다가 그만뒀다. 에르나 왕국은 강대국이었다. 차마 공격하자는 말이 안 나왔다. 저번 전투 이후 말수가 줄어든 국왕이 동의했다.

“대공의 말이 옳소. 기세가 꺾였다고 하나 아군의 2배요. 싸우면 우리쪽 피해도 만만치 않을 터. 협상을 제안하겠소.”

“국왕 폐하, 저들이 시간을 끌어 다시 공격하면 어찌합니까.”

“저들도 대공의 위용을 보았는데, 누가 감히 덤빌 수 있겠소?”

로벨이 결투를 신청하면 죽거나 망신인데 누가 지휘권을 잡을까.

“실로 영민하십니다. 그럼 전령을 보내서...”

“그럴 필요 없소.”

얼음성의 데이브 백작이 웃음을 기침으로 감추고 말했다.

“벌써 후퇴하고 있소.”

회의를 너무 오래한 모양이다. 에르나 왕국군이 가을성의 황량한 땅에서 물러나고 있었다.

“저놈들이 도망간다!”

“적이 후퇴한다! 우리의 승리다!”

“로벨 로드릭 만세! 로벨 로드릭 만세!”

전쟁에서 승리한 병사들이 병장기와 투구를 흔들며 환호했다.

로벨의 이름이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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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심 없이 ‘전쟁이 끝났다’ 말하지만, 정식으로 평화협정을 맺거나 항복문서를 받은 것은 아니었다. 포비아 왕국 기사들은 에르나 왕국군을 쫓아가면 틈틈이 싸움을 걸었다. 잔 주먹으로 툭툭 치는 수준이나 맞는 쪽은 가볍지 않았다.

더욱 열 받는 것은 볼탄 반도 기사들이 로드릭 가문의 깃발을 들고 다닌다는 것이었다. 호킨 페럿 경을 무참히 꺾은 사상 최강의 기사 탓에 기사나 병사나 몸을 사렸다.

간이 배 밖에 나온 조단 랭스터 경은 적 주둔지 150야드 앞에서 불을 피우고 고기를 구워 먹었다. 그래도 에르나 왕국 기사는 늑대성이 무서워 덤비지 않았다.

“이거 원, 시시하군. 시시해. 재미가 없소.”

조단 랭스터 경은 말과 달리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구나 그렇듯 이기는 싸움을 좋아했다.

“경, 너무 늦었소.”

“저놈들한테 큰 똥을 먹이느라 그랬소. 으하핫!”

“긴말 하지 말고 앉으시오.”

먼저 온 볼탄 반도 기사들이 눈치를 주었다. 랭스터 경은 왜 그러느냐는 몸짓을 하다가 로벨과 눈을 마주쳤다. 이번 전쟁을 승리로 이끈 주인공인데,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느, 늦게 와서 화나셨나?’

조단 랭스터 경은 재빨리 빈자리에 앉아 다른 기사들처럼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로벨은 랭스터 경에게 화난 것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하면 화난 것도 아니었다.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생리적 현상에 불쾌할 뿐이었다.

“에르나 왕국군은?”

로벨이 입을 열자 기사와 용병 대장은 안도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뭐라도 말을 하는 것이 나았다.

“어제와 같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행군하고 해가 높이 뜨면 진지를 쌓아 방어합니다.”

“지금 속도로 계속 가면 열흘 후 국경을 넘을 겁니다.”

“국경이 가까워지면 속도를 낼 테니 이레에서 여드레 사이일 거요.”

로벨은 눈을 지그시 감고 포비아 왕국 국경선을 그렸다. 북쪽과 남쪽으로는 원정을 다녔지만, 서쪽으로는 국경을 넘은 적 없어 정보가 부족했다.

“우리 역할은 끝난 것 같소.”

“예? 예?”

“갑자기 무슨 말씀입니까?”

기사들이 일제히 물었다. 로벨은 자세를 고치고 말했다.

“하루 더 추이를 살핀 후 볼탄 반도로 돌아가겠소.”

전공으로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기사들은 물론,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도 좋아하지 않았다.

“여기까지 와서 회군이란 말씀입니까?”

“갈 땐 가더라도 챙길 것은 챙겨야죠! 국왕이랑 포클랜드 귀족들한테 받을 게 있잖아요?”

“저 말이 맞습니다. 국왕이 서운해할 겁니다.”

로벨의 눈썹이 가운데로 모였다. 어린 집사를 제외한 모두가 움찔했다. 그랜드 챔피언을 꺾은 그랜드 챔피언이 두려운 것은 적만이 아니었다.

“전공은 충분히 세웠소. 경들의 공을 높이 사서 포상할 것이오. 그리고 집사. 전쟁 배상금은 당연히 받을 거야. 호킨 페럿 경의 몸값이면 부족하지 않잖아.”

로벨이 고용한 용병이고, 로벨의 소환에 응한 기사였다. 로벨이 철수하는데 혼자 남아서 싸울 수 없었다.

“포클랜드 기사들이 아무리 부실해도 여기서 패하지는 않겠지요.”

호른 경이 제일 먼저 로벨의 명령을 받았다. 켈트 남작, 바이란 남작, 도너반 남작 등도 차례로 동의했다.

“보리가 익으면 못된 것들이 꼬이니 슬슬 돌아가야 하오.”

“본인은 마누라가 걱정이오. 보석이며 비단이며 마구 사들이니 기둥 뽑히기 전에 가야지.”

“그거 꼭 내 자식 놈을 보는 것 같군.”

켈트 남작의 장남을 아는 기사들은 웃음을 참으며 위로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한결 밝아졌다.

“그럼 그리 알고 준비하시오. 아, 참.”

로벨은 잠시 말을 끊었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로벨은 애써 웃으며 말했다.

“늦었지만 새해를 축하하오. 고향에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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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의 철군이 전해지자 일부는 의심하고, 일부는 걱정했으나, 대부분은 크게 기뻐했다. 로벨의 활약 탓에 공을 세우지 못한 기사들이 기회로 삼았다.

에르나 왕국군은 최악의 적이 전장을 떠났다는 소식에 기뻐하다가 악귀처럼 달라붙는 포클랜드&검은 숲 기사들에 울상을 지었다. 병력에서 여전히 우위지만, 기세가 꺾인 탓에 반격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로벨의 말대로 숫자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죽고 죽이는 전쟁터를 떠난 볼탄 반도 병사들은 따뜻한 봄바람이 부는 남쪽 도시에 도착했다. 포클랜드 항에 주둔 중인 울프 용병단 북군과 합류하여 사나이의 우정을 나눈 후-‘이 자식들! 여기서 꿀을 빨다니!’, ‘꼬우면 크로스보우 중대 하던가’- 볼탄 반도로 출항을 준비했다.

어린 집사가 나포한 에르나 왕국 전함을 가리키며 물었다.

“저 배들도 가져갈 거죠?”

“응. 그럴 거야.”

“호킨 페럿 경은요?”

외국의 포로는 왕실에 넘겨서 미리 몸값을 받을 수 있었다. 외교적으로 복잡해지는 것보다 그편이 나았다.

로벨은 한결 좋아진 몸을 풀며 말했다.

“우리가 데려가는 게 좋겠지? 몸값도 높여 받을 수 있고.”

어린 집사가 좋아했다. 왕이 되니까 페닝 귀한 줄 안다고 칭찬 아닌 칭찬도 했다.

“꼭 그래서는 아니야.”

로벨은 칭찬에 우쭐하다가 금방 우울해졌다.

“친구의 동생이잖아. 보살펴 줘야지.”

당사자는 싫어할 것 같지만, 친구가 얼마 없는 공왕 폐하는 사소한 것에 개의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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