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4화. 벗
국왕의 무례함은 볼탄 반도 기사들의 인내심보다 길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좋은 쪽으로나 나쁜 쪽으로나 참된 기사인 켈트 경, 랭스터 경 등은 ‘나의 왕’을 기다리게 한 보답으로 철군을 생각 중이었다. 시종이 15분만 늦게 왔어도 포비아&볼탄 반도 연합군의 전력이 크게 줄었을 것이다.
“고의요. 고의가 분명하오.”
폭풍성의 랭스터 경이 콧김을 뿜었다. 비슷한 과의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이성적인 호른 경이 재빨리 물을 끼얹었다.
“아쉬운 쪽이 일부러 무례를 범하겠소? 서부 지방이 엉망이라 하니 그 일 때문일 거요.”
“흠. 흠흠.”
로벨은 등 뒤에서 수군거리는 기사들이 못마땅해 헛기침했다. 눈치가 아주 없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때맞춰 데이브 고른 데오니스 폰 포클랜드 국왕이 알현장에 들어왔다.
국왕에게 충성하는 포클랜드 기사들은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주종계약이 사라진 로벨과 볼탄 반도 기사들은 가볍게 목례만 했다. 이쪽 관례를 모르는 아자르 경만 남들 따라 무릎 꿇으려다 어린 집사와 아만다 경에게 제지당했다.
“로벨 로드릭 대공...”
국왕의 얼굴에 언짢음이 스쳐 갔다. 그러나 호른 경 말대로 ‘아쉬운 쪽’이라 금방 사라졌다.
“어려울 때 잊지 않고 도우러 와준 대공의 우정이 참으로 감동스럽소. 맨발로 뛰쳐나가 대공을 맞이하고 싶었으나, 전황이 너무나 깊고 어두워 그러지 못하였소.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주시오.”
서기관이 써준 대사가 분명했다. 한 호흡에 전부 내뱉는 거 봐서 급하게 외운 듯했다. 로벨은 머리를 좀 더 깊이 숙였다.
“로드릭 가문은 고른 왕가의 오랜 벗입니다. 응당 도와야 할 일입니다.”
기사에서 벗으로 바뀐 관계가 불만스러운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대부분은 흡족해했다. 말로만 우정을 논하는 겁쟁이 제후들보다 백배, 천배 나았다.
“술잔을 기울이며 지난 추억을 이야기하고 싶지만, 비열한 에르나 왕국의 군사가 우리의 서쪽 땅을 침범했으니 우선 그에 대해 의논하고자 하오.”
환영식은 치우고 작전회의부터 하자는 뜻이었다. 체면을 명예로 생각하는 나이 든 기사들이 불쾌해 했다. 하늘이 무너져도 직위에 맞는 대접을 받아야 하는데, 적이 아직 오지도 않은 상황에서 연회를 생략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제가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나 가장 직위가 높은 로벨이 적극 동의하니 불만을 꺼낼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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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과 고른 왕가도 손가락 빨며 놀지는 않았다.
패전한 기사들을 수습하고, 검은 숲 이하 각 지방의 제후들을 소집했으며, 용병대장을 골라 300명 가까운 병력을 추가했다.
“고작 300명?”
“항구가 막힌 상황에서 최선일 거요.”
정탐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침대 시트로 써도 될 만큼 커다란 포클랜드 지도에 적을 상징하는 붉은 깃발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군사학에 어두운 어린 집사도 한눈에 불리함을 알 정도였으니, 두 가지 의미로 대단했다.
“평야를 피해서 하얀 숲 경계로 이동 중이야. 제법 영리한 걸?”
“예? 평지를 걷는 게 편하고 빠르지 않나요?”
“포비아 왕국은 기사의 나라니까. 전면전에 불리하고, 유격전의 위험부담이 있어. 그리고 이 계절에는 농가를 털어도 먹을 것이 많지 않아. 해가 지면 춥기까지 하고. 차라리 숲이 나아.”
“치킨 페럿 경이란 자가 똑똑하군요?”
“호킨이잖아. 호킨 페럿 경.”
로벨과 어린 집사가 속닥거리자 전황을 설명하는 국왕의 기사가 온갖 제스처로 눈치를 줬다. 로벨은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두 번째로 대단한 것은 이 사실을 정확히 짚어낸 포클랜드 기사였다. 욕심 많고 의심 많은 자들이 위기가 닥치니까 능력을 발휘한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샘 포클을 따라 정복전쟁을 치른 위대한 기사들의 후예였다.
“이 정도 정보를 모았으면 대응책도 있겠지.”
전쟁이라고 나름대로 갑옷을 갖춰 입은 국왕이 피곤한 얼굴로 긍정했다.
“이곳 가을성에서 싸울 것이오.”
전쟁사를 보면 괜히 천 년 전에 싸운 곳에서 백 년 전에 또 싸운 게 아니다. 수천, 수만의 병사가 싸울 수 있는 전장은 한정돼 있었다. 가을성도 그중 하나였다.
“샘 포클과 초대 제임스 공작이 싸운 곳...”
기사로서 교양-칼 손질, 갑옷 닦기, 말 씻기기 등등-을 쌓은 자라면 모를 수 없는 곳이었다.
“그때는 공작이 아니라 야만인 족장이었지만, 뭐, 그렇소. 그곳이라면 검은 숲도 외면하지 못할 것이오.”
지형만으로 선택한 전장이 아니었다. 포비아 왕국의 정통성과 검은 숲의 역사적 의미가 있었다. 로벨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한때 충성한 주인을 보았다. 왕이 되기 싫다고 울먹거리던 작은 꼬마가 어느덧 장성하여 정치와 명분을 휘둘렀다.
‘그만큼 난 늙었나?’
어린 집사나 마녀 키르케가 들으면 펄쩍 뛸 것이다. 아직 30대 초반으로 한창때였다. 그리고 외모는 20대라 해도 믿을 정도였으니 ‘늙었다’나 ‘나이 들었다’ 한탄하면 이상했다.
“언제 출발합니까?”
“돌체 백작군이 오는 즉시 출발할 것이오. 이르면 모레 아침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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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시민은 일찌감치 장사를 접고 대문을 걸어 잠갔다. 어린아이들은 세상에서 가장 안전하다 믿는 침실에서 창문을 열고 거리를 내다보았다. 극성스러운 어머니가 창밖을 보지 못하게 끄집어 내렸지만, 그런 어머니조차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수시로 힐끔거렸다.
왕국 각지에서 몰려온 군대가 대로를 지나 북쪽으로 행진하고 있었다. 발소리와 병장기 소리가 가득했다.
“바다가 잠잠하니까 육지에서 난리구만.”
세상풍파를 겪을 대로 겪은 할아버지는 밖을 보지도 않고 중얼거렸다. 집 밖에 안 나간 지 스무날이 되었지만 풍문은 곰팡이처럼 벽 틈으로 스며들었다.
국경을 지키는 영주들이 차례로 패전하여 수도로 도망오고, 작년까지 으르렁거리던 볼탄 반도의 공작이 군대를 이끌고 찾아왔다. ‘왕국’이란 말을 ‘세상’이란 말로 착각하는 풋내기들은 모르지만, 여러 번 위기를 겪은 노인은 피부로 느꼈다.
“자칫하면 나라가 망할 수 있어.”
“에이, 아버님도 참... 이 나라가 왜 망해요?”
“옛 신과 샘 포클 폐하가 지켜줄 거예요.”
노인은 철부지 아들과 속 좁은 며느리가 답답했으나 혼잣말로 삼켰다.
“오래전에 떠난 분들이야. 우리를 지켜줄 분이 아니야.”
주름살로 쳐진 눈두덩을 억지로 올렸다. 얇디얇은 판자벽 너머로 기사의 말발굽 소리가 전해졌다.
“그런 위대한 분이 있다면, 저곳에, 바로 저곳에 있을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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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살짝 당겼다. 잘 훈련된 말이라면 기수의 신호를 이해하고 정지할 것이다. 그러나 모닝스타는 훈련 이상의 것을 하는 말이었다. 고개를 돌리고 왜 그러냐는 듯 콧김을 뿜었다.
로벨은 도로 한켠의 2층 집을 쳐다보았다. 옆집과 별 차이 없는 평범한 도시의 집이었다.
“날 부른 거 같은데...”
“누가 불렀다고요?”
어린 집사가 신이 난 조랑말을 통제하며 물었다. 유지비 등의 이유로 말보다 당나귀를 좋아하지만, 공왕의 체면을 위해 말을 타고 쫓아왔다.
“아니야. 아무것도.”
로벨은 무시하지 말라고 항의하는 모닝스타는 다독이고 앞을 보았다. 자신도 모르게 긴장한 모양이다. 이만한 군대가 움직이는 것은 잉그비아 왕국 정벌 이후 처음이었으니 그럴 만했다.
포비아 국왕이 이끄는 포클랜드 군사 2,200명. 로벨 로드릭 공왕이 이끄는 볼탄 반도 군사 1,500명. 제임스 공작 이하 제후들이 이끌고 온 군사 3,000명. 합쳐서 6,700명이었다. 성 안에서 합류한 병사는 그 절반이 안 되지만, 그것만으로도 도로가 가득 찼다.
“우리쪽 병사가 너무 적지 않아요?”
“어쩔 수 없어. 바다를 지켜야 하니까.”
“배를 지키는 게 아니고요?”
“그게 그거야.”
에르나 왕국 함대를 물러나게 했지만, 직접적인 피해를 주진 않았다.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었다. 항구를 지킬 최소한의 병력은 남겨둬야 했다. 울프 용병단 북군과 바위성 병사가 제외되었다.
“적은 1만 2천 명이라면서요?”
“응.”
“아군의 두 배잖아요? 이길 수 있을까요?”
로벨은 고삐를 손목에 감고 허리를 뒤로 살짝 젖혔다. 권장할 자세는 아니지만, 숨쉬기가 한결 편했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숫자가 아니야. 왜인 줄 알아?”
“그거 책에서 봤어요. 병력보다 중요한 것이 사기와 보급이죠?”
로벨은 머리를 저었다. 귀재 앞에서 자랑할 수 있는 유일한 분야가 군사학이었다.
“실제로 싸우는 병사는 10분의 1이 안 되기 때문이야.”
“...예?”
“100명이 모여도 실제로 싸우는 것은 10명이 안 되고, 1,000명이 모여도 실제로 싸우는 것은 100명이 안 돼. 나머지는 생각 없이 뒤따를 뿐이야.”
어린 집사도 참전경험이 꽤 되었다. 지난 전쟁들을 떠올리며 어느 정도 이해했다. 수천 명을 데리고 가도 실제 싸우는 것은 울프 용병단을 비롯한 극소수일 때가 많았다.
“기세라고 해도 좋고, 흐름이라 해도 좋은데, 대개 첫 접전에서 승패가 결정돼. 수십 명이 수천 명을 무찌르는 말도 안 되는 전투가 가능한 게 그 때문이야.”
“그럼 대군이 의미가 있나요? 정예 수백 명만 이끌고 싸우죠.”
“전투와 전쟁은 다르니까. 전선이 길어지면 소수의 정예로 못 막잖아. 그리고 병력이 많으면 기세를 잡는데 유리해.”
“어떻게요?”
“방금 집사가 말했잖아. 아군의 2배인데 이길 수 있냐고.”
군사학은 수학이 아니었다. 지리학, 역사학, 그리고 심리학이었다.
“그럼 우리가 이기는 거죠?”
“아니.”
로벨은 상쾌하게 부정했다.
“...지금까지 한 말은 뭔데요?”
“병력이 적어도 이길 수 있는 것은 맞아. 그런데 '반드시' 이기는 것은 아니잖아? 조건은 적들도 같아. 힘든 싸움이 될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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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성의 이름은 여타 성과 달랐다. 보통 성의 이름은 성의 특색이나 성주의 별명으로 지어지는데, 가을성은 그렇지 않았다. 이름만 듣고 풍요로운 밀밭이나 과실수를 떠올린 사람은 낭패를 겪었다.
“샘 포클과 초대 제임스 공작이 싸운 계절이 가을이기 때문에 가을성이야.”
포비아 왕국 역사에 어두운 외팔이 더치가 껄껄 웃었다.
“이번 전쟁이 끝나면 봄성으로 바뀝니까요?”
“샘 포클의 정복전쟁보다 의미가 깊으면 그렇겠지.”
포비아 왕국 기사에게 샘 포클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면 그럴 일은 없었다. 그리고 역사적 의의를 제외하면 굳이 새로운 이름을 지어줄 만큼 가치있는 땅이 아니었다.
시야가 확 트인 평지지만 땅이 거칠었다. 큰 바위는 없으나 어린아이 주먹만한 돌과 자갈이 사방에 깔려 있었다. 오래전에 벼락 맞고 죽은 상수리나무가 이정표로 있을 뿐, 황량하고 삭막했다.
가을성은 성이라고 하지만 임시로 세운 목책보다 못했다. 영주는 한 세대 전에 블랙우드 시티로 이주했고, 몇 안 남은 영지민은 어쩌다 찾아오는 상인과 여행자를 상대로 입에 풀칠만 하고 있었다. 그마저도 갑자기 찾아온 도합 2만의 군사에 놀라 집을 버리고 도망갔다.
에르나 왕국군 1만 2천 명, 포비아&볼탄 반도 연합군 6천 7백 명이 자갈투성이 황무지를 사이에 두고 마주 섰다.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이 자리한 곳은 좌익이었다. 꼭 그래야 하는 법은 없지만, 일반적으로 수비역할을 하는 곳이었다.
“이것도 의도적이군.”
조단 랭스더 경이 수염을 쥐어뜯으며 말했다. 이번에도 호른 경이 변명했다.
“저들도 자존심이 있지 않겠소? 우리에게 중추역할을 맡기고 싶지 않겠지.”
“이해하오. 내가 국왕이라도 그럴 테니까. 그냥 그렇다는 것이오.”
국왕이 중앙을, 검은 숲과 포클랜드 기사들이 우익을 맡았다. 첫 전투는 저들이 치를 것이다.
로벨은 적의 포진에 집중했다. 에르나 왕국 기사들의 깃발이 요란하게 걸려있는데 알아볼 수 있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그랜드 챔피언을 연이어 배출한 명문 페럿 가문의 깃발이었다.
“호킨 페럿 경이라...”
입이 근질근질한 호른 경이 슬쩍 끼어들었다.
“호아-킨입니다.”
“호아-킨 페럿 경이라...”
어째 긴장감이 떨어지는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