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13화 (413/605)

413화. 핏줄

에르나 왕국이 자랑하는 초대형 갤리선-오베리아 갤리선이 뱃머리를 돌렸다. 볼 때마다 생각하지만 너무 커서 현실감이 없었다. 마치 산이나 호수가 움직이는 것 같았다.

기함을 호위하는 중소형 갤리어스 7척도 일정한 간격으로 반원을 그렸다. 굉장한 광경이었다.

사람이 두 발로 열을 맞춰도 쉽지 않은데, 수백 개 노와 타륜으로 그걸 해냈다. 뱃일을 모르는 울프 용병단이 기가 죽을 정도였으니 저게 얼마나 힘든지 아는 선원들은 공포마저 느꼈다.

“3개 바다를 장악한 에르나 왕국의 무적함대가 저런 것이군.”

배의 숫자는 엇비슷하지만, 배수량을 따지면 10배 이상 차이 났다. 오베리아 갤리선이 워낙 커서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일 뿐 가장 작은 호위함이 푸른고래 호 크기였다. 게다가 제대로 훈련받은 선원과 해전전문 용병이 타고 있었다.

에르나 왕국 출신의 전직 해적두목 이안 선장이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필사적으로 싸우면 두어 척 정도는 가라앉힐 수 있을 겁니다.”

로벨은 가정에 호기심이 붙였다.

“우리쪽 피해는?”

이안 선장의 얼굴 흉터가 지렁이처럼 꿈틀거렸다.

“혹시 수영할 줄 아십니까?”

“좋아. 이해했어.”

로벨이 무적무패라 해도 혼자서 성(城)과 싸울 수 없었다. 다시 말해 저것은 움직이는 성(城)이었다

“거리를 유지하고 항구를 공격할 때만 다가가.”

저 큰 갤리선도 함포는 선수에만 있었다. 동시에 양쪽을 공격할 수 없었다. 울프 용병단 북군 중대장 애꾸눈이 안대를 만지며 물었다.

“저희를 먼저 공격하면 어찌합니까?”

로벨은 어깨를 펴고 당당히 말했다.

“물론 도망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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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에서는 전술적으로 유리하나 전략적으로 불리한 경우가 종종 있었다. 지금의 에르나 왕국 함대가 그러했다.

에르나 왕국 제1함대장 브루노 다빗 남작은 포클랜드 항이든 볼탄 반도 함대든, 혹은 두 세력의 연합이든 싸우면 이길 자신이 있었다. 싸울 수 있다면 말이다.

한쪽은 거북이마냥 웅크리고 있고, 다른 한쪽은 노질하는 시늉만 해도 외해로 도망갔다. 버티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느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맥주가 가장 먼저 바닥났고, 이어서 식수마저 부족해졌다.

하루 종일 아무것도 마시지 못한 노잡이 노예 사이에서 폭동의 조짐이 보였다. 쇠사슬로 단단히 묶어놨으니 상부갑판으로 뛰쳐나올 일은 없겠지만, 이대로 전투가 벌어지면 힘 한번 못 쓰고 당할 것이다.

코흘리개 사관 시절부터 함께한 부관이 조언했다.

“후퇴해야 합니다.”

브루노 남작은 조금도 불쾌하지 않지만 불쾌한 기색을 보였다. 왕명을 수행하는 기사로서 최소한의 도리였다.

“국왕 폐하께서 내린 임무를 포기하란 말인가?”

“함장님의 책임이 아닙니다. 물자수송에 실패한 세바스찬 백작의 책임입니다.”

그리 생각하니까 마음이 조금 편했다. 아주 조금이었다.

“차라리 볼탄 반도 함대를 조지는 것이 어떤가?”

품위를 중시하는 에르나 왕국 기사답지 않은 단어였다. 뱃사람 기질은 직위와 출신으로 가려지지 않았다. 부관은 희미하게 미소 짓다가 얼른 지웠다.

“세상 끝까지 도망칠 겁니다. 그리고 아시다시피 추격전은 불가능합니다.”

싸움 걸면 도망가고, 딴데 보면 덤비는데, 배고파서 버티기도 힘들었다. 브루노 남작은 결국 인정했다. 외통수였다.

“그러나 너무 낙담하실 필요 없습니다. 소기의 목적은 달성했습니다.”

“하긴, 30일이 지났으니... 그 페럿 경이라면...”

브루노 남작은 제3차 포비아 왕국 정벌 전쟁의 총사령관을 떠올렸다. 길고 복잡한 소감을 한마디로 줄이면, 괴물보다 괴물 같은 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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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왕 폐하! 폐하! 백기입니다요! 백기가 걸렸습니다요!”

로벨은 새로 생긴 무구를 손질하다가 고개를 들었다. 당연히 그럴 거라 생각해서 크게 기쁘거나 놀랍지 않았다. 손수건을 펼쳐서 움푹 파인 숫돌과 기름주머니를 챙겼다. 하지만 승전에 들뜬 허풍쟁이는 위대한 왕이자 소중한 고용주가 가는귀 먹었나 의심하며 구체적으로 보고했다.

“에르나 왕국 함대가 철수합니다요! 포클랜드 시티의 포위를 풀고 서쪽으로 도주한다고요!”

로벨은 귓가에 소리치는 부하가 못마땅해서 얼굴을 찌푸렸다.

“나도 알아. 그만 떠들어.”

로벨이 시큰둥하자 신이 나서 뛰어온 허풍쟁이까지 시무룩해졌다.

로벨은 무기를 하나하나 챙기고, 숫돌질에 쓴 물까지 비운 뒤 일어났다.

“이안 선장은?”

“선교에서 지휘 중입니다요. 적의 기만작전일지도 모른다고요.”

“진짜 철수하는 거야. 의심할 필요 없어.”

보급을 받아서 다시 올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한계가 분명했다. 이틀 전부터 대포를 쏘지 않았으니 확실했다.

“적함이 수평선을 넘으면 청새치 호만 남기고 포클랜드 항으로 들어가자.”

“드디어! 드디어!”

로벨의 명령이 상부갑판으로 전해지자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드디어 육지를 밟을 수 있었다. 아닌 게 아니라 뱃멀미로 고생하는 용병이 여럿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난 괜찮네?’

로벨도 뱃멀미를 자주 하는 편인데 이상하게 이번 항해에는 아무렇지 않았다. 바다에 익숙해진 탓인지, 아니면 현실에서 벗어난 ‘무언가’ 된 탓인지 알 수 없었다.

로벨이 매끈한 이마에 주름을 그릴 때, 선실 아래에서 채찍질 소리가 나오고 노가 움직였다. 바다에는 익숙해졌어도 배는 여전히 껄끄러웠다.

잠시 뒤, 이안 선장이 직접 선실로 찾아왔다.

“선주님, 포클랜드 항구입니다.”

험상궂은 얼굴에 뿌듯함이 가득했다.

“선주님을 기다리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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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 시티에 주민이 많은 것은 알지만, 이렇게 많을 줄은 몰랐다. 푸른고래 호가 정박한 1번 부두 양옆의 부두까지 인파로 가득 찼다. 족히 2, 3천 명은 될 듯했다.

“와우...!”

외팔이의 감탄사는 외팔이도 듣지 못했다. 수천 명의 시민이 내지르는 함성이 집어삼켰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볼탄 반도 공왕 폐하 만세!”

엄밀히 따지면 외국의 왕이었다. 하지만 300년 동안 하나의 나라로 지냈고, 그랜드 토너먼트 등으로 인기를 쌓은 로벨을 외국인으로 생각하는 시민은 없었다. 설령 외국인이라 지적해도 애국주의나 민족주의 개념이 없는 자유민은 ‘그게 뭐? 어쩌라고?’하는 반응을 보일 것이다. 물론, 왕과 기사들은 아니었다.

“국왕 폐하는?”

로벨은 혹시 왕성에서 사람이 찾아 왔는지 물었다. 잘 들리지 않아 두 번 더 물어야 했다. 펄프 대장이 마주 소리쳤다.

“깃발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저 지경이면 마중 나오기도 힘들겠지요!”

그야말로 영웅의 등장이었다. 풍문으로 전해 들은 막연한 영웅이 아니라, 내 앞에서 내게 피해를 주는 적을 물리친 실감 나는 영웅이었다. 포클랜드 시민의 환호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볼탄 반도의 영웅! 포비아 왕국의 영웅!”

“꺄아아아-! 대공 폐하! 사랑해요!

로벨이 뭔가 보여주기 전에 그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로벨은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 어색하게 손을 들었다. 잘한 짓인지 알 수 없었다. 함성이 세 배쯤 커졌다.

와아아아아아아-!

우와아아-! 와아아아-!

돛을 미리 접어서 다행이었다. 까닥하면 푸른고래 호가 함성에 밀려날 뻔했다.

“여기 있으면 항구가 마비되겠군요.”

“에르나 왕국의 무적함대도 하지 못한 일을 선주님이 해낸 겁니까?”

펄프 대장과 이안 선장이 악 쓰듯이 대화하고 껄껄 웃었다. 로벨도 일부 동의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여기 있으면 안 되었다.

“왕성으로 가자. 외팔이, 길을 열어.”

그러나 자신을 좋아하는 사람을 미워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로벨은 우물쭈물하다가 몇 마디 덧붙였다.

“사람들이 다치지 않게. 조심해서 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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샘 포클의 왕성에도 사람이 가득했다. 부두와 다른 것은 강철옷을 입고 꼬챙이를 하나씩 찼다는 것이다. 포클랜드 지방의 콧대 높은 기사들이었다.

기사 공포증이 있는 외팔이가 덩치에 안 맞게 주눅이 들었다.

“표, 표정들이 좋지 않은데요?”

“얼마 전까지 치고받은 사이잖아.”

저들의 심정도 이해는 되었다. 포스트 포레스트 평야에서 포로가 된 기사가 대다수고, 죽거나 불구가 된 기사의 가족도 일부 있었다. 시선이 고우면 옛 신의 교단에서 성자로 모셔갈 것이다. 결과에 수긍하는 기사의 미덕과 더 큰 적을 앞에 둔 위기의식 때문에 참을 뿐이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기사 전부가 탐탁지 않은 표정은 아니었다. 기사 무리 중 일부가 환한 얼굴로 로벨을 반겼다. 키가 훤칠하고 잘생긴 기사가 제일 먼저 보였다.

“호른 경? 언제 여기 왔소?”

호른 경 뿐만 아니라 소위 ‘로드릭 가문의 기사’라 불리는 전우들이 모두 모였다. 켈트 남작이 목례를 하고 대답했다.

“공왕 폐하께서 출항한 다음날 육로로 따라왔습니다.”

“그렇게 빨리?”

“제가 아자르 경을 보냈거든요. 하도 답답해서 직접 찾아왔다나 뭐라나?”

쇳덩이 사이로 어린 집사가 삐져나왔다. 로벨이 안 입은 브리간딘을 입고 숏소드와 헌팅소드를 한 자루씩 찼다. 키가 제법 커서 어색하진 않은데, 어깨 좋은 기사들 사이에 있으니 다소 볼품없었다.

“그것이 아니다. 해냈다. 전령입니다.”

아자르 경이 억울하다는 제스처로 말했다. 덕분에 설득력이 있었다.

“이것도 이해했어.”

잔잔한 웃음이 번졌다.

로벨은 기사들이 웃고 떠들게 놔두고 호른 경과 어린 집사를 가까이 불렀다.

“국왕 폐하는 어디 계서?”

사이가 안 좋아도 우방국의 왕이 군대를 이끌고 왔는데 얼굴을 안 비추는 것은 예의가 아니었다. 호른 경이 못마땅한 표정의 포클랜드 기사들을 살피며 말했다.

“이해해주시지요. 지금 정신이 없을 겁니다.”

“무슨 일 있소?”

“아이언베어 요새가 함락되었습니다.”

왕성의 무거운 분위기를 이해했다. 로벨은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가 놓았다.

“역시 양동작전이었군. 그래도 너무 빠른데?”

전쟁이 시작된 지 30일이 지났다. 첫 전투는 해전이었으니 육지의 싸움은 20일이 채 되지 않았다. 시골 영주의 작은 성도 아니고, 국경을 지키는 요새가 함락되기에 너무 일렀다.

“국경은 이미 뚫렸고, 바트랑 남작을 비롯한 서부 영주 다수가 전사했습니다.”

“적의 규모가 얼마나 되오?”

“영주들이 보낸 정보가 제각각 다르지만, 신뢰할 수 있는 것을 추리면 1만 2천에서 1만 5천 사이쯤 됩니다.”

“그렇게나 많소?”

국왕이 안 보이는 것도 이해됐다. 제후들에게 애걸복걸하느라 정신없을 것이다. 총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300년 역사의 샘 포클 왕국이 산산조각 날 위기였다.

“제후를 통솔하기 힘든 것은 저쪽도 마찬가지일 텐데... 지휘관이 누군지 아시오?”

에르나 왕국 기사에 대해 잘 모르니 이름을 들어도 도움이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알아 둘 필요는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 로벨이 아는 이름이 나왔다.

“호킨 페럿 경입니다.”

“호킨 페럿? 페럿 가문이오?”

“사실 호킨이 아니라 ‘호아-킨’이라는데... 그쪽 발음은 영 이상해서...”

“에잇! 호킨인지 치킨이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아요!”

어린 집사가 짜증을 부렸다. 오크 멱을 서너 개씩 따고 온 듯한 흉흉한 기사들 사이에서도 참 용감했다. 로벨은 익숙한 이름으로 바꿔 물었다.

“그렉 페럿 경하고 무슨 사이요?”

“친형제입니다.”

친구의 핏줄이지만 마냥 반가워할 수 없었다.

“에르나 왕국의 새로운 그랜드 챔피언이며, 복수의 칼을 가는 볼탄 반도의 적입니다.”

“으응? 왜 하필 볼탄 반도요?”

로벨이 어이없어 하자 어린 집사가 근질근질한 얼굴로 속삭였다.

“그렉 페럿 경을 참살한 것이 볼탄 반도의 기사잖아요.”

“늑대의 왕? 그자는 강철성 소속이었으니까 사트로 가문쪽인데?”

“외국인이 그걸 아나요. 그냥 볼탄 반도인가보다 하죠.”

로벨은 세상 억울했다. 가문을 떠나서 애초에 인간도 아니었다. 그러나 정치와 군사는 사적인 것이 아니었다.

“공왕 폐하가 동맹 제안을 거절한 것도 이유 중 하나입니다. 볼탄 반도가 가장 큰 걸림돌이 될 거라 판단하고 복수의 명분을 가진 페럿 가문 기사를 지휘관으로 삼았겠지요.”

“그랜드 챔피언인걸 보면 실력도 꽤 있을 거예요.”

이래저래 싸움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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