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12화 (412/605)

412화. 보급품

에르나 왕국 보급선의 불길이 눈에 띄게 커졌다.

그물망에 붙은 불이 돛에 옮겨붙었다. 사람 손이 닿지 않는 곳이라 물도 모래도 끼얹지 못했다. 올바른 대처는 돛줄을 잘라내는 거지만, 사방에서 쫓아오는 볼탄 반도 전함 탓에 그러지 못했다. 바람이 제 역할을 못하는데, 노잡이까지 지쳐갔다. 채찍질도 한계가 있었다.

로벨은 선교에서 선수로 자리를 옮겼다. 2인 1조로 쉼 없이 화살을 쏴대는 용병을 하나씩 제지하고 뒤따라오는 이안 선장에게 명령했다.

“측면에 바짝 붙여.”

“박치기 안 합니까?”

“그럼 우리 배도 상하잖아.”

동력을 잃은 배에게 굳이 충각을 쓸 필요 없었다. 이안 선장은 손수 채광창을 열고 노예장에게 소리쳤다.

“좌현 접안! 미속 전진! 신호하면 노를 치워!”

이안 선장이 고용한 노예장이었다. 고용주만큼이나 걸쭉한 욕을 퍼부으며 노잡이 노예를 닦달했다. 차이점은 채찍과 물벼락이 일상으로 쓰인다는 점이다.

기함 푸른고래 호의 의도를 읽은 청새치 호와 청동인어 호가 속도를 높여 적함의 앞과 오른쪽을 차단했다. 늑대가 사냥감을 몰아넣는 순간이었다.

로벨은 선수 난간에 한 발 올리고 흐룬팅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햇살에 번쩍번쩍 빛나는 금속 갑옷만 아니면 해적선장으로 오해할 자세였다. 진짜 해적선장 출신이 ‘위험하니까 발 내리시지요’ 말했지만 듣지 않았다.

“기선을 제압해야지.”

적함의 거리가 20야드로 줄었다. 선원의 표정이 보였다. 겁에 질린 표정이 반이고, 악에 받친 표정이 반이었다. 그리고 양쪽 다 장전된 쇠뇌를 가지고 있었다.

“파비스 앞으로!”

“방패 올려!”

“쏴라! 쏴!”

양쪽 배에서 쿼럴이 오고 갔다. 고슴도치가 가시를 쏘아대는 듯했다. 갑옷이 부실한 선원 중 일부가 가시에 찔려 허우적거리다 떨어졌다.

울프 용병단이 쓰는 쿼럴과 적함 선원이 쓰는 쿼럴은 조금 달랐다. 용병들은 갑옷을 뚫기 위해 쇠못 모양의 뾰족한 촉을 쓰는데, 선원들은 돛줄을 자르기 위해 끌 모양의 넓적한 촉을 사용했다. 그만큼 관통력이 약해서 로벨의 갑옷에 흠집 하나 내지 못했다.

“먼저 갈게. 따라와.”

“아, 앗! 선주님!”

선체와 선체가 닿기 직전, 로벨은 난간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잘못된 표현이 아니었다. 족히 5피트는 뛰어올랐으니 난다고 해도 무방했다. 전신에 두른 판금갑옷과 허리에 찬 대여섯 개의 칼을 생각하면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쿠궁-!

적함 갑판에 착지하자 바닥이 움푹 파였다. 포탄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쇠뇌를 장정하던 주변 선원들이 놀라서 자빠졌다.

“뭐, 뭐야!”

“나, 날아왔다!”

로벨은 착지자세에서 몸을 일으키며 양손으로 칼을 뽑았다.

평소에도 칼을 2~3개 씩 가지고 다니지만, 오늘은 특히나 가지고 나온 게 많았다. 소드 벨트가 부담될 정도로 칼집이 주렁주렁 달려 있고, 그것도 모자라 어깨에 두 자루를 더 매었다. 그중에 평범하게 생긴 칼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 오른손에 쥔 것은 시미터고, 왼손에 쥔 것은 코피스였다.

저 칼을 선물한 포비아 국왕도 장식용이 아니라 실전에서 쓸 줄은 몰랐을 것이다.

“하, 한 놈이잖아! 겁먹지 마!”

“다른 놈이 건너오기 전에 죽여!

선원들이 용기를 쥐어짜서 대거를 뽑았다. 커틀러스를 꼬나든 고참 선원도 여럿 있었다. 로벨은 긴말 하지 않고 두 팔을 활짝 벌렸다. 기사끼리면 결코 하지 않을, 언제든지 공격하라는 도발이었다. 그 의미를 아는지 모르는지 용감한 선원 하나가 달려들었다.

“뒈져라!”

그 선원은 필히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다 일에 평생을 바쳐온 선원일 것이다. 기사나 맨앳암즈가 싸우는 것을 한 번이라도 보았다면 그런 무모한 짓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로벨은 상체를 비틀며 시미터를 휘둘렀다.

동서고금 막론하고 쌍검의 평은 안 좋았다. 한 손으로 칼을 휘두르면 살은 베어도 뼈는 자르지 못한다. 수비에 사용해도 같은 무게의 방패만 못했다. 가벼운 결투나 무용(舞踊)이 아니면 쌍검을 쓰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물론, 평범한 인간일 때 말이다. 써겅-!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진 곡도(曲刀) 시미터는 베는데 특화되어 있었다. 칼날의 곡선을 따라 매끈하게 살이 갈라졌다. 팔힘에 허리힘이 더해지자 갈비뼈와 척추까지 끊어졌다. 이윽코 사람이 가로로 두 동각 났다. 지금 광경을 보면 ‘한손검은 쥐는 힘이 부족해서...’ 어쩌고 하는 검술가 모두 입을 다물 것이다.

“히이익-!”

피와 함께 내장이 왈칵! 쏟아졌다. 작두로 잘라도 이보다 깔끔하게 자르지 못할 듯했다. 간신히 쥐어짠 용기가 빠르게 증발했다.

“항복해. 그럼 살려줄게.”

로벨은 피 묻은 시미터를 휙휙 돌리며 말했다.

“고작 한 놈한테! 저리 비켜!”

외팔이만큼 덩치 좋은 선원이 난간에 설치된 파비스를 뽑아 달려왔다. 힘과 몸무게로 찍어 누르는 작전이었다. 나쁘지 않았다. 발딛음이 안 좋은 배에서 방패로 밀어붙이면 속절없이 당할 기사가 많을 것이다.

“훌륭해. 하지만 어설퍼.”

로벨은 힘으로 맞서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코피스를 수직으로 휘둘렀다. 로벨이 가져온 무기 중 가장 기형적인 무기였다. S자로 휘어진 칼날은 얼핏 칼보다 도끼에 가까웠다. 칼끝과 손잡이의 깊이가 두 뼘 이상 차이 나 거리를 잘 재면 방패 너머의 적을 쪼갤 수 있었다.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지만, 말보다 쉽게 실천하는 기사가 여기에 있었다. 퍽-! 정말 도끼로 친 것처럼 머리가 쪼개졌다.

로벨은 죽은 후에도 관성으로 밀려오는 방패를 발로 막아 슬쩍 밀었다. 시체가 된 덩치는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정말 항복 안 해?”

기사 한 명에게 선원과 병사 60명이 얼어붙었다. 칼질 두 번으로 전함 한 척을 제압했다.

“공왕 폐하! 공왕 폐하!”

“이 자식들아! 빨리 빨리 넘어가!”

때맞춰서 푸른고래 호가 접현했다. 원래라면 난간 위로 창과 칼이 부딪치고, 갈고리와 판자가 이어졌다가 끊어지기를 반복해야 하는데, 로벨이 먼저 와 깽판을 친 탓에 머쓱할 만큼 저항이 없었다.

허풍쟁이는 쭈뼛거리는 적과 무안해진 칼을 번갈아 보다가 간신히 소리쳤다.

“이놈들! 항복해라!”

“...이미 한 거 같은데?”

외팔이가 한숨처럼 말했다. 허풍쟁이가 소리치기 전에 이미 무기를 버리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기록에 남지는 않았지만, 해전사에 유례없는 전적이었다. 아군 사상자 0명. 그리고 적군 사상자 2명으로 갤리선 한 척을 나포했다. 적함이 일부러 찾아와 항복해도 이보다 많은 피해가 나왔을 테니 기록을 남겨도 믿지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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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함대의 활약은 그 뒤로도 엿새간 이어졌다. 그 사이 나포한 배가 2척이고, 대포와 불화살로 쫓아낸 배가 3척이었다.

포클랜드 항을 포위한 에르나 왕국 함대의 보급을 완전히 끊은 것과 더불어 엄청난 양의 전리품을 확보했다. 천 명이 넘는 함대에 보급할 무기와 식량이었으니 당연했다.

“비스킷 380상자, 염장고기 122자루, 맥주 77통, 포도주 35상자, 쿼럴은 아직 집계되지 않았으나 어림잡아 2천 발쯤 되며, 화약도 120파운드 확인되었습니다.”

“허어, 우리 용병단이 1년간 사용할 물자군요.”

나포한 두 척에서 나온 물자였으니, 놓친 보급선까지 생각하면 엄청난 양이었다.

“뱃놈들은 원래 이렇게 많이 먹나? 무슨 놈의 비스킷이 저리 많아?”

“바다에는 농장이 없으니까. 자급자족이 안 되잖아.”

“자급자족이 아니라 약탈과 징발이겠지.”

애꾸눈은 금화, 은화, 은장식 가구, 장서 등등 값이 나가는 소량의 전리품까지 보고한 후 의자에 앉았다. 수다를 떨던 외팔이와 허풍쟁이도 입을 다물었다. 푸른고래 호 선장실에 침묵이 앉았다.

로벨은 탁자에 둘러앉은 측근들은 쭉 보고 물었다.

“우리 배에 다 못 싣지?”

“억지로 실으면 실을 수 있겠지만, 얘들이 불평할 겁니다. 안 그래도 발냄새 맡아가며 자는 중이니까요.”

“무게 때문에 속도가 떨어지는 문제도 있습니다.”

펄프 대장과 이안 선장이 경고했다. 로벨은 전문가에게 조언을 구했다.

“해적들은 보통 어떻게 해?”

“값나가는 것은 챙기고, 나머지는 배에 구멍을 뚫어 그대로 수장시킵니다.”

“배를 버린다고?”

“이런 배의 선주는 보통 왕이나 영주, 혹은 자유도시의 거상입니다. 배를 가져가면 꼬리가 밟혀 현상수배에 오릅니다. 위험이 너무 크지요.”

말년까지 살아남은 해적의 지혜라 그럴 듯했다.

“우린 그럴 걱정이 없어. 그럼 가져가도 되지?”

이안 선장은 상처투성이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예. 물론입니다.”

“두 척 모두 움직일 수 있어?”

“선원과 노잡이가 대부분 무사하고, 예비용 돛이 있으니 가능합니다. 물론, 감시할 필요는 있습니다.”

그걸로 수송문제는 해결되었다. 전리품을 통째로 볼탄 반도에 보낼 것이다. 허풍쟁이가 모처럼 제대로 된 질문을 했다.

“그 말씀은... 이제 보급품 사냥을 안 하는 겁니까요?”

“보급품 사냥?”

“아차, 저희끼리 그렇게 하는 말입니다요. 공왕 폐하 덕분에 전투가 전투 같지 않아서요. 으헤헤!”

로벨은 칭찬인가 아닌가 고민하다가 그냥 잊었다.

“백상아리 호와 가마우지 호가 출발했을 거야. 적보다 먼저 합류해야지.”

“그럼 이후에 올 보급선은 어쩝니까?”

“닷새 전에 놓친 배가 에르나 항에 도착했을 거야. 이제 보급선은 기다려도 안 오거나 와도 세 척 이상의 함대로 올 거야.”

외팔이를 제외한 모두가 혀를 내둘렀다. 체스로 말하면 두 수나 세 수쯤 앞으로 보고 있었다. 참고로 외팔이는 체스를 둘 줄 모른다.

“오늘이 지나면 이레가 돼. 이 정도면 충분해. 포클랜드 항을 포위한 기사는 머리털이 꽤 빠졌을 거야. 고향에 문제가 생긴 게 아닐까. 고립된 것은 자기들이 아닐까.”

“그래도 끝까지 버티면 어쩝니까요?”

로벨은 입술을 올려 송곳니를 보였다. 기분 탓인지 진짜 늑대처럼 뾰족했다.

“우리가 쫓아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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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말은 진담 반 허세 반이었다. ‘바다 위의 요새’ 오베리아 갤리선과 정면 대결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하지만 지금 이끄는 세 척과 추가로 합류할 두 척, 그리고 나포한 적함 두 척을 합치면 총 7척이었다. 식량과 무기가 부족한 에르나 왕국 함대에 위협을 주기 충분했다.

“적 함대입니다! 적 함대가 나타났습니다!”

“뭐라고?!”

에르나 왕국 제1함대장 브루노 다빗 남작은 견시병의 보고에 일단 화를 냈다. 충분히 그럴 만했다.

이틀에 한 번 꼴로 항구를 공격했지만 포클랜드 시티는 끄덕하지 않았다. 부둣가에 대포와 장궁병을 배치하고 거북이처럼 버텼다. 기사가 많이 죽어서 엉망이라 들었는데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오랜 내전으로 단련된 기사와 병사들은 일당백이었다. 특히 로벨에게 한 수 배운 기사들은 어지간해서 겁을 먹지도 않으며, 위험천만한 공명심을 보이지도 않았다.

반면, 초반에 기세를 올린 에르나 왕국 함대는 점차 초조해졌다. 이레가 지나 여드레째 소식이 끊긴 보급선에 선원들은 물론이고 노잡이들까지 불안해했다.

“어디서 온 놈들이야! 깃발! 깃발을 확인해라!”

브루노 다빗 함장은 적이 아니기를, 견시병이 잘못 보았기를 내심 빌었다. 지금 상황에서 앞뒤로 포위되면 큰일이었다. 무적의 함대라도 버티지 못한다. 그러나 옛 신은 함장의 편이 아니었다.

“로드릭... 로벨 로드릭 공국의 함대입니다! 볼탄 반도에서 온 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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