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1화. 약점
로벨 로드릭 공국의 전함은 총 6척이었다.
푸른고래 호, 청새치 호, 백상아리 호, 가마우지 호, 청동인어 호, 바다사자 호로 사실 대부분 프란시스 가문의 소유였다.
“전쟁 배상금으로 받은 거잖아요. 적법하고 정당하게 우리 거죠.”
사실 페닝이 아니라 배를 뜯은 것은 프란시스 가문이 재기하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실제로 볼탄 반도 전쟁이 끝난 지 수년이 지났지만 장미성의 재정은 그대로였다.
“지금 움직일 수 있는 배가 몇 척이야?”
“푸른고래 호, 청새치 호, 청동인어 호 세 척이에요. 바다사자 호는 바다사자 남작이 가지고 있으니 청옥섬에 연락하면...”
“북해잖아.”
바다사자가 아니라 북해의 사자란 뜻인지, 인어해가 아니라 북해에 있으니 올 수 없다는 뜻인지 헷갈렸다. 아마도 후자일 것이다.
“시간이 없어. 우선 세 척을 준비해.”
이 시대 배가 다 그렇지만 전함이라고 전쟁만 하고, 상선이라고 교역만 하지 않았다. 애초에 전함과 상선의 구분이 불분명했다. 평소에는 이 바다 저 바다 오가며 장사를 하지만, 전쟁이 나면 징발되어 병사를 태우고 싸웠다.
그나마 바다사자 호 같은 범선은 측면의 함포 설계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전투성능에 차이가 있는데, 푸른고래 호 같은 갤리어스는 선수포 외에 설치할 수 없어 병사만 태우면 전함이 되었다.
어느 배가 좋은 배인지 따지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어느 배든 많이 가진 것이 좋았다. 로벨의 호출을 받고 온 이안 선장의 지론이었다.
“청새치 호는 말할 것도 없고, 푸른고래 호도 그리 큰 배가 아닙니다. 선창을 몽땅 비워도 한 척에 120명밖에 못 태웁니다.”
어린 집사는 자유도시연맹과 싸울 때를 생각하고 물었다.
“갑판 위에서 먹고 자면요? 훨씬 많이 태울 수 있잖아요?”
“...이 계절에 말이오?”
이안 선장이 경멸 비슷한 것을 보였다. 이른 봄이라지만 바닷바람을 밤새 맞으면 동사할 수 있었다. 한여름에 따뜻한 남쪽 바다로 갈 때와 달랐다. 로벨이 고심 끝에 결론 내렸다.
“울프 용병단 북군과 바위성의 사냥꾼만 갈 거야. 백상아리 호와 가마우지 호가 돌아오면 나머지 병사를 태워서 따라와.”
이안 선장의 지적에 기가 죽은 어린 집사가 우물쭈물 말했다.
“에르나 왕국의 해군은 유라피아 대륙 최강이래요. 정확한 숫자는 모르지만, 그 큰 포클랜드 항구를 봉쇄할 정도면 전함이 아주 많을 거예요.”
로벨이 아무리 싸움을 잘해도 전함을 대신할 수 없었다. 어린 집사의 걱정은 타당했다. 3척으로 급히 가봐야 티도 안 날 것이다.
“걱정 마. 죽기 살기로 싸울 생각 없으니까.”
“그럼요?”
칼 한 자루로 싸우는 족족 이겨서 머리에 왕관을 올린 기사는 자신감이 넘쳤다.
“갤리선의 약점이 뭔지 알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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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그비아 왕국과 에르나 왕국 모두 해상강국이라 불리는데, 두 나라의 함선은 지리적 특성상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거친 북해에서 외해로 뻗어가는 잉그비아 왕국은 선체가 높고 흘수선이 깊은 범선을 선호하지만, 잔잔한 인어해에서 활동하는 에르나 왕국은 전통적인 갤리선을 선호했다.
“갤리선은 장점도 많지만, 단점도 아주 많지. 대표적으로 노잡이 노예가 필요하다는 거.”
노잡이 ‘노예’라고 부르지만, 진짜 노예는 아니었다.
옛 신의 교리가 정착한지 천 년이었다. 신 앞에서는 모두가 평등하기에 고대왕국과 달리 노예 계급이 없었다. -기사나 농노나 교리상으로는 같은 종사(從士)다-
그러나 험한 뱃일 중에서 가장 험한 노잡이 일을 할 사람이 없으니, 범죄자, 거지, 취객 등을 잡아와 사면과 값싼 임금으로 노잡이 삼았다. 그 대우가 너무 처참하고 열악하여 노예라 부를 뿐이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잖수. 노예처럼 살면 노예인 거지. 그래서 노예가 어쨌단 거요?”
외팔이가 외팔이답지 않게 의미 있는 말을 했다. 펄프 대장과 애꾸눈이 살짝 감탄해서 쳐다보았다.
“저것도 나이를 먹으니까 영리해지네.”
“세월의 힘이란...”
외팔이는 십년지기들이 갑자기 칭찬하자 우쭐해졌다. 원래는 멍청하다는 놀림인 줄 모르니 세월이 좀 더 필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진짜 뭐요? 노잡이가 있으면 약점이 생기오?”
“응. 생겨.”
로벨이 폴드런을 두드리며 갑판으로 올라왔다. 지고지순하신 공왕 폐하의 등장에 선원과 용병이 모두 머리를 조아렸다. 로벨은 계속 일하라고 손짓하고 펄프 대장이 있는 우측난간으로 다가갔다. 반마일쯤 떨어진 곳에 청새치 호와 청동인어 호가 보였다.
푸른고래 호를 기함으로 한 볼탄 반도 함대가 로드릭 항에서 출항한 지 사흘이 지났다. 이안 선장이 보고하길 북서풍이 강하게 부는 계절이라 엿새쯤 걸릴 거라 하였다.
‘그럼 절반쯤 온 건가?’
거리상으로는 반의반도 못 왔지만, 항해술을 알지 못하는 로벨은 대충 시간으로 가늠했다.
“저기, 기사 나리? 아차! 공왕 폐하?”
외팔이가 조심스럽게 로벨을 불렀다. 옛날에도 그랬지만, 왕이 되니 새삼 어려워했다.
“왜?”
“제가 너무 궁금해서 말입니다요. 갤리선의 약점이 뭡니까요?”
로벨은 도끼질 할 때 빼고 대체로 순박한 외팔이를 보며 미소 지었다.
“펄프 대장, 식량이 얼마나 남았어?”
펄프 대장은 뜬금없이 화살이 날아오자 당황했다.
“이제 겨우 사흘 지났습니다. 가져온 빵도 많이 남았습니다. 빌어먹을 쉽 비스킷과 염장고기는 손도 안 되었지요.”
“그래도 낭비하지 마. 입이 많으니까 순식간에 줄어들 거야.”
선원과 용병, 그리고 노잡이 노예까지 입이 200개였다. 다른 배도 비슷했다. 펄프 대장은 로벨의 말을 이해하고 마주 웃었다.
“신경 쓰도록 하겠습니다.”
로벨은 외팔이를 힐끔 보았다. ‘이제 알았지?’ 당연히 알지 못했다.
“먹을 거? 먹을 거 당연히 신경 써야지! 그게 뭐 어쨌다는 거요?”
펄프 대장과 애꾸눈은 아까의 발언을 취소했다.
“10년쯤 더 지나면 똑똑해지겠지?”
“그전에 답답해서 죽을 것 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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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프 용병단의 주력 병종은 애꾸눈이 훈련시킨 크로스보우맨이었다. 개개인의 사격 실력도 우수하고, 일제사격, 순차사격, 2인 1조 사격 등의 전술사격도 능숙했다.
“선수에 크로스보우를 두고, 좌측에 롱보우를 배치해. 오른쪽으로 돌면서 공격할 거야. 각자 위치에 익숙해지도록 신경 써.”
울프 용병단 북군 외에도 바위성에서 징집한 사냥꾼이 다수 있었다. 과거 정통성 전쟁 시절 울프 용병단을 괴롭힌 롱보우맨이었다. 크로스보우에 비하면 전투시간이 짧지만 사거리가 우수했다.
로벨은 간판을 앞뒤로 오가며 부대배치에 신경 썼다. 해전이 처음은 아니지만, 육상전에 비하면 아직도 낯설었다. 공간이 제한적이고, 병사와 별도로 ‘바닥’이 움직이는 것이 변수였다.
“갑판에 선원을 줄일 수 없어? 전투 중에는 어차피 노로 움직이잖아?”
“그래도 갑판원은 필요합니다. 견시(見視)도 해야 하고, 싸우다 보면 돛줄이 끊어지거나 닻을 내려야 할 때가 있습니다.”
전쟁 전문가 로벨과 해적출신 이안 선장이 의견을 조율하여 최종 점검을 끝냈다. 포클랜드 항으로 가는 동안 연습도 충분히 했다. 남은 것은 실전이었다. 적 함대와 조우하기 하루 전, 로벨이 주요 간부를 불러 모아 작전을 설명했다.
“우리 목표는 포클랜드 항구를 포위한 적 주력함대가 아니야.”
펄프 대장, 애꾸눈, 이안 선장 등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생김새부터 곰 같은 외팔이만 빼고 말이다.
“적 함대가 아니면, 어? 어디랑 싸웁니까요? 또 포클랜드랑 싸웁니까요?”
“...그럴 리가 있겠냐.”
펄프 대장이 한숨 쉬었다. 로벨은 설명하는 보람이 있다고 만류했다.
“우리 목표는 보급선이야.”
“엥? 저놈들한테 보급선이 있습니까요?”
“식량을 잔뜩 실어온 우리도 보름이면 바닥나. 그럼 우리보다 선원과 노잡이가 많은 에르나 왕국 전함은 어떻겠어?”
“아, 앗! 그런 것이군요!”
오베리아 갤리선의 경우 노잡이만 100명이 넘었다. 2, 30명으로 운영이 가능한 잉그비아 범선과 비교하면 물자소모가 대단했다.
“노잡이한테 뭐 대단한 것을 준다고... 비스킷 두어 개 주면 되는 거 아니오?”
“그렇게 주면 전투 중에 힘을 못 써. 빵은 굶겨도 물은 먹여야 하는데, 100명분의 식수만 해도 양이 엄청나지.”
채찍질로 움직이는 것도 하루 이틀이었다. 안 그래도 땀이 증기가 되는 노잡이인데 물을 주지 않으면 하루도 버티지 못했다.
“포클랜드 항을 봉쇄한지 벌써 25일이 지났어. 가져온 물자는 진작에 바닥났을 테고, 보급선을 운영하는 게 확실해.”
“그 보급선은 에르나 왕국에서 올 테지요. 거리가 상당하니 여러 번에 걸쳐 보낼 겁니다.”
바다는 보이는 것과 달리 텅 빈 공간이 아니었다. 계절 따라 지형 따라 길이 있었다.
이안 선장은 본래 에르나 왕국 해역에서 해적질하던 해적선장이었다. 에르나 왕국 바다에 훤했다.
“항로를 거슬러 가면 반드시 마주치게 되어 있습니다. 군수물자를 실은 배가 공해를 가로지르지 않을 테니까요.”
“보급선을 지키는 병사가 많으면...”
“많지 않을 거야.”
이번에는 전쟁 전문가가 장담했다.
“포비아 왕국의 해군력은 뻔하잖아. 왕실의 전함이라 해도 몇 척 되지 않는데, 그마저도 항구를 지키는데 발이 묶였어.”
로벨은 말을 잠시 멈췄다. ‘노가 묶였다고 해야 하나?’ 쓸모없는 고민이었다.
“그리고 이건 양면작전이야. 육로로도 공격을 시도할 거야. 에르나 왕국이 병사가 많다 해도 위험이 적은 보급선에 많이 두지는 않았을 거야.”
여기까지 설명하자 표정들이 씰룩거렸다. 승산이 있었다. 그것도 제법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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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고래 호 이하 볼탄 반도 함대는 포클랜드 해역을 지나쳐 서쪽으로 나아갔다.
앞서 말했지만, 이 시대의 배는 전함과 상선이 구분되지 않았다. 푸른고래 호를 목격한 배가 여럿 있었지만, 그것이 볼탄 반도의 정예 용병을 태운 무장함대일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포클랜드 시티에 교역하러 왔다가 에르나 왕국의 어마어마한 오베리아 갤리선 함대에 겁먹고 도망치는 거라 여겼다.
오베리아 갤리선의 젊은 선장은 서쪽으로 사라지는 볼탄 반도 함대를 보며 뿌듯했을 것이다. 항구를 봉쇄한 성과였으니 말이다. 그 착각은 사흘이 지나고 닷새가 지나고 이레가 지나서 비스킷 상자에 가루만 남았을 때 뼈아프게 다가올 것이다.
“불화살 준비!”
“야! 어떤 멍청이가 기름헝겊을 풀었냐!”
“횃불 가져와! 횃불!”
로벨은 한 손으로 선교 난간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로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내렸다. 포클랜드 항구를 지나 이틀이나 더 헤맨 끝에 마침내 에르나 왕국 보급선을 발견했다.
사실 바다에 어두운 로벨은 그냥 지나칠 뻔했지만, 해적경력이 어디가지 않은 이안 선장은 배의 구조와 흘수선 깊이로 보급선임을 알아챘다.
“쏴라!”
“일제발사!”
퉁-! 투퉁-!
롱보우의 시위 소리는 크로스보우보다 둔탁했다. 그리고 날아가는 화살도 무거웠다. 포물선을 그리지 않으면 쿼럴이 날아가는 거리의 반도 날아가지 못할 것이다. 기름을 잔뜩 먹인 헝겊에 불이 붙어 한낮에 떨어지는 유성 같았다. 아니, 유성우였다. 세 척의 배에서 쏘아 올린 서른 발의 화살이 사냥감을 쫓았다.
“적함에 명중!”
전투발발 3분 만에 꽁무니를 뺀 에르나 왕국 보급선에서 가늘게 연기가 피어올랐다. 돛이나 그물망에 불화살이 꽂힌 모양이다.
“좋아! 계속 쏴!”
“이안 선장! 노를 저어! 전속력으로 쫓아!”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잡았다. 노잡이만으로 오래 항해할 수 없다. 돛이 다 타면 금방 따라잡을 수 있었다.
“이 전쟁은 우리가 이길 거야.”
예언에 가까운 선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