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0화. 조약
포비아 왕국 궁정대신 퍼클 맥 백작은 대단히 혼란했다. 과장 좀 보태서 하루에 열두 번씩 음모와 모략이 피어나는 왕성의 관료였다. 그러나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어서 드시오. 따뜻할 때 먹어야 맛있소.”
복잡하고 미묘한 대인관계 기술 중 최고 난이도를 자랑하는 외교술에는 일부러 대접을 소홀히 하여 제안을 거절하는 방법이 있다. 예의 바른 방법은 아니지만, 훗날 책임을 덜 수 있는 영리한 방법이었다.
‘저걸 보면 아닌 것 같은데...’
에르나 왕국식이나 아이란드 왕국식의 호화로운 식탁은 바라지 않았다. 그래도 최소한 빵 그릇에 고기 한 덩이는 나올 줄 알았다. 천박한 나무 그릇에 걸쭉한 죽사발은 상상하지 못했다.
“평소에도... 이렇게 드십니까?”
아니, 먹는 것은 백번 양보할 수 있었다. 원래 수도사가 되려고 했던 공왕이니 검소하고 소탈할 수 있다. 인간과 짐승의 시선이 집중되었다.
“왜 그러시오? 무슨 문제 있소?”
“기사님도 참... 양이 너무 적잖아요.”
“기사님이 아니라 공왕 폐하!”
“아, 그런 것이오? 하긴, 먼 길 왔으니 배가 많이 고프겠지. 외팔이, 거기 큰 그릇을 가져와.”
머리가 좋은 어린 집사와 세상살이에 민감한 허풍쟁이는 뭐가 문제인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제와 지적하는 것은 아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무지한 자와 무지한 척하는 자 사이에서 퍼클 맥 백작은 버클러 크기의 그릇이 호의인지 적의인지 고뇌해야 했다. 어쨌든 왕의 식탁이라 할 수 없었다. 이것은 시골 농가의 식탁이었다. 그것도 먹을 것이 다 떨어진 초봄의 가난한 식탁이었다.
로벨은 나이프를 꺼내 뼈다귀에 붙은 고기를 긁어내며 말했다.
“백작이 왜 왔는지 알고 있소. 불편한 이웃 때문이지.”
대단한 추리도 아니거니와 그조차도 펄프 대장이 귀띔해준 것인데, 소박한 공왕은 우쭐해서 똑똑한 척했다.
퍼클 맥 백작은 죽사발을 뜨는 시늉 하다가 치우고 허리를 꼿꼿이 폈다. 반쯤 떠밀려서 온 사절행이지만, 그래도 구국의 사명감이 있었다.
“사소한 의견 차이로 잠시 다퉜다고 하나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는 300년의 동반자입니다. 샘 포클의 영광스러운 깃발 아래 하나 되어 북쪽과 남쪽, 서쪽과 동쪽의 적에 맞서 서로의 등을 지켜주었지요.”
역시 전통적인 기사가 아니었다. 서두가 너무 장황했다. 로벨 일당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쇳덩이와 말똥에만 관심 있는 기사들을 상대하다 보니 ‘자칭’ 교양인이 적응 안 되었다.
“저기, 음. 백작? 우리끼리 있으니 하는 말인데, 좀 쉽게 말해주겠소?”
전쟁이 너무 길었다. 오랜 세월 싸우다보니 기사 가문 사이에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원한이 많았다. 기사 중의 기사를 상대하는데 기사를 보내지 못한 고른 왕가의 고충도 클 것이다. 기사가 아닌 기사 퍼클 맥 백작은 대단히 어색하게 내용을 요약했다.
“쉬, 쉽게 말씀드리면, 고른 왕가와 로드릭 왕가가 동맹을 맺어서, 그 뭐라고 하지, 같이 싸우자는 겁니다.”
쉬운 말이 더 어려운 것은 궁정관료의 직업병이었다. 로벨은 비로소 알아듣고 기뻐했다.
“적은 에르나 왕국이오?”
“최근 국제정황을 보면 확률적으로 높은...”
“한마디로 줄이시오.”
“예. 맞습니다.”
마녀 키르케가 ‘두 마디잖아요’ 중얼거렸지만 화내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공왕은 교양이 부족하고 상식에 얽매이지 않지만, 전쟁에 관해서는 누구보다 뛰어났다.
“어느 정도 규모라 생각하시오?”
지금부터가 진짜 외교였다. 퍼클 맥 백작은 굵은 침을 삼켰다. 공개해도 되는 정보와 아닌 정보를 자력으로 추려야 했다.
“1만 명은 넘을 거라 확신합니다.”
“올해라고 생각하시오?”
“이르면 봄이고, 늦어도 초가을입니다.”
“제후들의 준비는 어떻소?”
“외적 앞에서 뭉치는 것이 우리의 자랑이지요.”
어린 집사가 뒤에서 한숨 쉬었다. 대충 알만했다. 볼탄 반도는 아예 떨어져 나갔고, 검은 숲은 잉그비아 왕국 사건 이후 왕실과 서먹서먹했다. 포클랜드와 세 갈래 강 제후들은 로벨에게 호되게 당해 힘이 약해졌고, 하얀 숲은 언제나 그랬듯 침묵했다. 국왕이 소환장을 뿌려도 아이언베어 요새 때보다 적게 모일 것이다.
‘그런 꼴을 아니까 도발하는 거겠지.’
로벨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정병(精兵)입니다.”
“얼마나?”
“많으면 많을수록 좋습니다.”
동방대륙의 유명한 장군이 한 말과 비슷했다. 고사를 아는 것은 아니지만 솔직한 답변에 미소 지었다.
“저쪽 왕국에서도 사절이 왔소.”
“...알고 있습니다.”
퍼클 맥 백작은 숨을 깊이 들이마신 후 여러 조건과 대우를 말했다. 기사 한 명당 금화 몇 개, 농민병 한 명당 은화 몇 개, 식량과 무기의 제공 범위, 공국의 직위 향상, 로드릭 왕가의 이권 보장 등등... 어린 집사가 로벨을 대신해 몇 가지 캐묻고 기록했다. 반면, 로벨은 깨끗하게 발라진 고기를 마녀 키르케에게 주고 나이프를 잘 닦아서 칼집에 넣었다.
“국왕 폐하와 백작의 뜻을 이해했소. 며칠 쉬었다가 포클랜드 시티로 돌아가시오.”
“고, 공왕 폐하?”
백작이 겁을 먹고 엉거주춤 일어났다. 누가 봐도 부정적인 의미였다. 그러나 사람의 말은 끝까지 들어야 했다.
“갈 때는 뱃길로 가시오.”
어리둥절한 표정이 점차 환해졌다. 로드릭 항에는 에르나 왕국 사절이 머물고 있다. 그들의 눈치를 보지 말라는 것은 명백한 호의였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로벨 로드릭 폐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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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정해진 결과였다.
공국으로 갈라섰다고 하지만, 절대다수 볼탄 반도 주민은 자신이 포비아 왕국인이라 생각했다. 포클랜드 시티를 수도라 부르는 외팔이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내부적으로 투닥거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외국과 손을 잡아 왕국을 팔아넘기는 것은 껄끄러웠다. 그런 이유로 기사들을 소집하면 불만이 쏟아질 것이다.
명분이 아니라 실리로 따져도 에르나 왕국은 아니었다. 우호관계인 잉그비아 왕국과 네일 공국 모두 에르나 왕국이라면 치를 떨었다. 에르나 왕국과 손잡으면 두 나라의 의심을 받을 것이다. 간신히 안정된 북방에서 다시금 전쟁이 터질 수 있었다.
에르나 왕국 자체도 문제였다. 안 그래도 인어해와 외해 대부분을 장악한 군사강국이 포클랜드의 비옥한 평야까지 차지하면 아무도 막을 수 없었다. 로벨도 자신이 없었다.
“순망치한이란 거군요.”
“순망... 뭐라고 했어?”
“입술을 도려내서 이빨을 차갑게 하는 동방대륙의 고문법이에요. 아주 잔인한 짓을 뜻하죠.”
“아니, 걔네는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풍문으로 전해지는 동방대륙의 일상은 항상 괴기했다. 아무튼, 에르나 왕국의 제안은 기각하고, 포비아 왕국 사절에게 임시 조약서를 들려서 청새치 호에 태워 보냈다. 어린 집사는 에르나 왕국 사절이 가져온 막대한 재화가 아쉬웠지만 욕심내지 않았다.
“그래도 뭐, 포클랜드의 뇌물이 있으니까.”
로벨과 어린 집사는 퍼클 맥 백작이 남기고 간 선물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굴뚝 요정이 주고 간 선물상자를 뜯는 기분이었다.
“칼이에요.”
첫 번째 선물은 칼날이 날렵하게 휘어진 남부의 장도였다.
“이건 모나카 왕국의 기사들이 쓰는 샴쉬르(Shamshir)야. 말 위에서 휘두르기 좋아. 그쪽 지역은 너무 더워서 갑옷을 얇게 입거든. 그래서 굳이 찌를 필요가 없어.”
어린 집사는 혹시 금이나 보석이 박혀있나 살핀 후 멀리 치웠다. 그런 게 없으면 그냥 쇠붙이였다.
“이것도 칼이잖아?”
두 번째 선물은 칼날이 S자로 휘어진 괴도(怪刀)였다. 로벨이 손뼉을 치면 좋아했다.
“고대왕국 시절의 코피스(Khopesh)야! 이걸 잘 쓰면 방패 뒤에 적을 벨 수 있어! 한번 볼래?”
“아니요!”
세 번째, 네 번째 선물도 길고 짧은 특이한 칼이었다. 공인 소드 마스터인 로벨이 모르는 아주 먼 이국의 칼도 있으니 보통 선물은 아니었다. 수신자의 취향을 제대로 노린 선물이었다. 무작정 금은보화를 보낸 에르나 왕국과 비교하면 정보의 차이가 있었다.
“뭔 죄다 칼이야! 차라리 햄이나 소시지를 보내지! 그건 먹을 수라도 있잖아!”
허나, 늑대성의 진정한 실세 어린 집사를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두 나라 모두 마찬가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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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왕국의 전쟁소식이 알음알음 퍼져나갔다.
징집 당할 수 있는 농민 사내들은 불안해했고, 물가상승을 우려한 도시 상인들은 곡물과 철을 매수했다. 눈이 녹고 새싹이 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전쟁의 먹구름은 빗방울을 뿌리기 전부터 마음을 얼려갔다.
그러나 정작 전쟁 결정권을 쥔 로벨은 태평했다. 평소에도 그랬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굳이 이유를 물으면 나름대로 생각한 게 있었다.
“우리가 포비아 왕국 편을 들면 전쟁이 안 날 수도 있어.”
“어라, 그런가요?”
“아이언베어 요새의 교훈의 잊지 않았다면 말이야.”
포비아 왕국과 볼탄 반도의 군대를 합치면 7, 8천 명이었다. 수비의 이점을 생각하면 1만 대군이라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공왕 폐하, 오랜만에 찾아뵙습니다. 그동안 무탈하셨습니까.”
어린 집사의 빗자루를 용케 피한 고드름이 정오 햇살을 못 이겨 방울방울 흘러내릴 때, 호른 경이 완전무장한 채 찾아왔다. 로벨은 로벨답게 갑옷에 집중했다.
“그거 못 보던 갑옷인데...”
호른 경은 낭만적인 기사였다. 프란시스 시티에서 광고를 보고 맞춘 최첨단 필드 아머를 숨김 없이 자랑했다.
“폐하의 갑옷을 만든 곳에서 주문 제작했습니다.”
어린 집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요즘 벌이가 좋은 모양이에요?”
“먼 곳에서 온 손님이 이것저것 많이 챙겨주었지.”
“적한테 뇌물 받은 게 자랑이에요?”
“적의 재물을 줄인 것이니 자랑할 일 아닌가?”
에르나 왕국인과 어울리더니 입담이 늘었다. 어린 집사는 ‘그런가?’하고 혼란에 빠졌다. 한편, 로벨은 자신의 갑옷과 파츠 하나하나 비교하며 이전과 다른 시기심을 보였다. 최신형이라 그런지 로벨의 갑옷보다 화려했다.
“어, 얼마주고 만들었소? 비싸오?”
“이잇! 안 돼요! 말하지 마요!”
어린 집사가 필사적으로 가격 공개를 막았다. 로벨이 유일하게 욕심부리는 것이 말과 갑옷이니, 가격을 알면 사달라고 12시간하고 3경 동안 쉴 새 없이 조를 것이다.
호른 경도 갑옷이나 자랑하려고 진창길을 달려온 것이 아니었다. 갑옷을 입을 만한 일이 일어났기 때문에 찾아왔다.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 계절에? 벌써 말이오?”
길가의 눈이 마르지 않았다. 지역마다 차이는 있지만 전쟁하기 좋은 계절이 아니었다. 사람과 말은 물론이고, 수레바퀴가 움직이지 않았다.
“육지가 아닙니다. 바다입니다.”
“인어해?”
에르나 왕국을 지칭하는 단어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해상강국’이었다. 지난 교훈을 아주 잊지는 않은 듯했다.
“포클랜드 항구가 봉쇄되었습니다. 공왕 폐하의 도움 없이 양면공격을 시도할 모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