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9화 (409/605)

409화. 스튜

겨울이 깊어지자 하얀 눈이 소리 없이 찾아왔다. 해맑은 어린아이와 풋풋한 연인과 먹고 살만한 낭만주의자 외에는 환영하지 않는 겨울밤의 불청객이었다.

어스름한 달빛에 숨어 처마 위에 한 덩이, 창문 틈새에 한 움큼, 굴뚝 속에 한 꼬집 내려앉았다. 여름 햇살에 바짝 마른 장작이 타닥- 탁- 소리를 내며 화를 내었다. 어여쁜 눈송이는 서글픈 눈물이 되어 한 방울 두 방울 흐르다 원망으로 뾰족해졌다.

“이놈의 고드름! 그만 좀 생겨라!”

어린 집사가 빗자루로 원망을 쓸어냈다. 창틀의 고드름이 늦가을 은행처럼 우두둑- 떨어졌다.

“봄이 오면 녹을 거야. 그냥 둬.”

“지나가는 외팔이 머리통에 꽂힐까봐 그렇죠!”

왜 하필 외팔이인지는 모르지만, 크기를 봐서 누군가 다칠 가능성은 있었다.

어린 집사가 성을 내며 창틀과 처마를 쓸어내는 동안, 로벨은 한가로이 벽난로의 냄비를 휘저었다. 고기 냄새가 짙어질수록 아야와 이야카의 꼬리 회전이 빨라졌다.

펄프 대장은 왕이 고기 스튜를 젓게 놔둬야 하는지, 왕이 하는 일을 감히 빼앗아야 하는지 고민했다. 쓸데없는 고민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살랑살랑 흔들리는 늑대 남매 꼬리에 정신을 빼앗겨 신경 쓰지 않았다.

늑대성 식구가 작은 집무실에 옹기종기 모인 것은 오랜만이었다. 옛 추억에 젖어서도, 공국의 미래를 결정하기 위해서도 아니었다. 궁상맞지만 땔감을 아끼기 위해서였다. 지난번 화재로 비축한 장작의 절반이 사라졌다.

사실 로벨이 원하면 시장에서 구입하거나 농가에서 징발할 수 있지만, 마른 나무가 귀한 계절이라 그러지 않았다. 징발은 말할 것도 없고, 페닝을 주고 사도 필연적으로 장작값이 올라 가난한 도시 노동자는 힘들었다.

“이렇게 아끼면 봄까지 버틸 수 있어.”

로벨이 나무 그릇을 챙기며 말했다. 어린 집사와 펄프 대장이 차례로 투덜거렸다.

“공왕쯤 됐으면 적당히 사치도 하고 해야죠.”

“...겨울에 장작 태우는 게 사치일 줄은 몰랐소.”

말은 그렇게 해도 크게 싫은 눈치는 아니었다. 어린 집사는 어른 집사가 되고, 중년 용병은 늙은 용병이 되고, 철부지 마녀는 정숙한 마녀가 되었지만, 이들의 분위기는 10년 전하고 같았다.

“끼잉... 낑...”

“그래. 너희도.”

로벨은 뼈다귀를 건져 입김으로 식인 후 아야와 이야카에게 주었다. 가장 많이 변한 것은 늑대 남매였다. 바구니 속에서 낑낑거리던 새끼 늑대가 이제는 늙어서 하얀 털이 듬성듬성 자랐다. 야생 늑대였으면 겨울을 버티지 못하고 죽거나 다른 포식자에게 잡아먹혔을 것이다.

로벨은 늑대성의 진짜 주인이 오래오래 살기를 바라며 목을 긁어주었다.

“어이구, 대장, 집사 양반, 다들 여기 있었수?”

그때, 외팔이 더치가 외팔이 눈사람 몰골로 집무실을 찾아왔다. 덩치가 큰 탓에 달고 온 것도 큼직했다. 모자를 벗고 어깨를 털자 주먹만한 눈덩이가 후두둑- 떨어졌다. 로벨이 인상을 찌푸렸다.

“집사, 고드름 그냥 둬.”

마녀 키르케가 킥킥! 웃었다. 그러나 앞에 대화를 알지 못하는 외팔이는 서운하지 않았다. 로벨에게 정중히 목례한 후 다시 말했다.

“저 아래 손님이 왔는데 눈 때문에 못 올라오고 계십니다요. 얘들을 시켜서 급하게 치워야 하는데, 대장이랑 집사가 아니면 다들 말을 안 듣습니다요.”

“손님?”

겨울에 찾아오는 손님은 흔하지도, 반갑지도 않았다. 기별 없이 찾아온 손님이라면 더욱 그러했다.

“이 멍청아! 손님이 누군지부터 말해야지!”

펄프 대장이 숟가락으로 호통쳤다. 외팔이는 덩칫값 못하고 움찔했다.

“수, 수도에서 온 무슨 궁정 나리라고 하오. 거, 높으신 양반은 이름이 어려워서 잘 모르겠수다.”

“여기가 우리 수도야! 공국이 된 지가 언젠데 아직도 저러냐?”

한 세대가 바뀌기 전에는 쉬이 바뀌지 않을 것이다. 늑대성이 왕성치고 부실한 탓도 있었다.

“포클랜드 시티에서 기사가 왔다고?”

바닷길로 왔으면 로드릭 항의 호른 경이 기별을 주었을 것이다. 아무 소식이 없다는 것은 육로로 왔다는 것인데, 계절을 생각하면 심상치 않았다.

“대충 짐작이 가는군요.”

펄프 대장이 허연 수염을 만지작거렸다. 정치력이 부족하기로 소문난 늑대성에서 그나마 정치 감각이 있는 게 펄프 대장이었다. 사람과 짐승의 시선이 집중되자 담담히 웃었다.

“에르나 왕국 사절이 로드릭 항에 머물고 있지 않습니까?”

“으응... 호른 경하고 아주 친한 거 같아. 요즘 통 오지 않거든.”

로벨이 씁쓸하게 말했다. 마녀가 입을 가리고 다시 웃었다. 본인은 인정하지 않겠지만 시기와 질투였다. 펄프 대장이 두 팔을 살짝 벌리고 말했다.

“그럼 뻔하지 않습니까? 두 왕국 사이가 매우 안 좋은 겁니다.”

그게 왜 뻔한지 이해하는데 시간이 좀 걸렸다. 어린 집사가 조심스레 반박했다.

“아이언베어 요새 이후 이렇다 할 싸움이 없었잖아요?”

“바꿔 말하면 그때 이후 좋아진 것도 없소. 그랜드 챔피언의 전사와 물자소모로 후퇴했을 뿐, 정식으로 휴전한 것이 아니잖소.”

“아무리 그래도 그게 몇 년 전인데...”

“원래 왕이란 작자들은 원한을 오래 간직하오. 아, 우리 폐하는 아니십니다.”

로벨은 미소로 용서했다. 본인도 왕이란 자각이 없었다.

“그래도 왜 하필 지금요?”

“그것도 당연한 것 아니오. 볼탄 반도가 독립했잖소.”

로벨이 다스리는 지방은 볼탄 반도 북서쪽에서 남동쪽으로 포비아 왕국 전체의 1/5이었다. 이 큰 땅덩어리가 하루아침에 떨어져 나갔으니 가만 생각하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난리가 나도 진즉에 났어야 했다.

“에르나 왕국은 동쪽에서 포클랜드를 공격할 우호세력을 원하고, 포비아 왕국은 그것을 피할뿐더러 예전처럼 도움을 줄 우방을 원할 겁니다.”

로벨이 수백 년 역사의 두 왕국을 쥐고 흔들었다. 타고난 정치가나 야심가라면 지금의 상황을 즐길 것이다. 하지만 로벨은 둘 다 아니었다.

“간절한 쪽이 어디야?”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포비아 왕국이라 생각했다. 자칫하면 샘 포클의 300년 묵은 꿀단지가 깨질 수 있었다. 하지만 허전한 정수리에 지혜와 처세를 채워 넣은 펄프 대장은 그리 말하지 않았다.

“폐하께 더 많은 것을 주는 쪽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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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성의 언덕길은 철저히 군사적인 입장만 반영하여 높고 가팔랐다.

사람과 말은 그래도 무리해서 오를 만하지만, 바퀴 달린 것은 보통 곤욕이 아니었다. 오늘처럼 눈이 내린 날은 더욱 그러했다.

“하필 이딴 곳을 왕성으로 삼다니, 소문대로 뼛속까지 무골이오.”

포클랜드 시티 출신의 궁정대신 퍼클 맥 백작은 한 시간째 제자리걸음인 수레를 보고 혀를 찼다. 마음 같아서는 팽개치고 몸뚱이만 가뿐히 가고 싶지만 그럴 수 없었다. 혹독하기로 유명한 볼탄 반도 겨울에 갖은 고생을 하며 가져온 왕의 하사품이었다.

물론, 로벨 앞에서 ‘하사(下賜)’ 어쩌고 할 생각은 없었다. 아쉬운 것이 많은 포클랜드 입장에서 무적무패의 공왕을 기분 상하게 할 수 없었다. 로드릭 왕가를 돕는 리암 수사란 자가 위로하듯 말했다.

“공왕 폐하의 병사들이 길을 치우고 있으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퍼클 맥 백작은 빗질하는 병사들을 무심한듯 무심하지 않게 관찰했다. 체격이 하나같이 좋은 게 징집해서 굴리는 농민병이 아니었다. 볼탄 반도 최정예 용병이라는 울프 용병단이 분명했다.

‘성도 그렇고, 성을 지키는 병사도 그렇고, 확실히 위협적이야.’

선대로부터 백작위(Count)를 받았으나 지방(County)을 다스리는 호족은 아니었다. 처음부터 궁정관료로 지낸 집안이라 신분만 기사지 칼 쓰는 법은 몰랐다. 그 때문에 전장에서 로벨 로드릭과 마주한 적도 없었다. 사절로 보내진 것은 그런 이유였다. 적어도 원한은 없으니까.

잠시 뒤, 외눈 안대를 낀 용병과 무어라 대화한 수사가 머쓱한 얼굴로 돌아왔다.

“아무래도 안 되겠습니다. 경사진 곳에 빙판이 생겨서 자칫 수레가 굴러 떨어지겠습니다.”

“그럼 어찌하오? 이것은 국왕 폐하가 공왕 폐하께 친히 보낸 선물인데...”

“등짐으로 옮겨야지요. 특별히 무겁거나 조심해야 할 것이 있으면 알려주시지요.”

“여기 있는 것은 전부 특별한 것이오.”

솔직히 말하면 근본 없는 용병 패거리를 믿을 수 없었다. 짐을 나르면서 몰래몰래 빼돌릴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외국의 사절이 가져온 것이고, 험한 길을 지나온 것이니 은장식 몇 개쯤 사라져도 찾을 수 없었다.

“아, 저기 펄프 대장이 오는군요. 저분에게 맡기시지요.”

“펄프 대장? 기사요?”

“울프 용병단을 이끄는 용병대장입니다. 공왕 폐하의 최측근이죠. 저 사람은 믿을 만합니다.”

속마음을 읽은 듯한 발언이었다. 퍼클 맥 백작은 헛기침으로 무안함을 털었다.

“내 종자를 붙여줄 테니 조심해서 옮기시오. 본인은 공왕 폐하를 먼저 알현하겠소.”

사람 좋은 수사는 사람 좋게 웃으며 조언했다.

“공왕 폐하는 좋은 분입니다. 두 손이 가볍다고 화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기사의 명예를 정치가나 장사꾼의 욕심으로 오해하면 크게 다칠 수 있습니다.”

기사가 아닌 기사 퍼클 맥 백작은 선뜻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진지한 수사의 얼굴에 따져 물을 수 없었다.

“충고 고맙소. 내 명심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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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알루미늄으로 만든 왕관을 쓰고 시 서펜트 가죽으로 만든 망토를 두른 후 왕좌에 앉았다. 생각해보니 진짜 왕좌(王座)였다. 지미와 루시는 결혼세로 바친 나무의자가 왕좌가 될 줄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으... 춥잖아...”

“땔감 아낀다고 홀에 화로를 죄다 치웠잖아요.”

어린 집사가 타박했다. 왕좌뿐만 아니라 왕도 위엄이 부족했다. 왕을 모시는 소꿉친구 집사의 최대 고민이었다. 그래서 로시난테 7세-혹은 8세- 뼈다귀에 집중한 아야와 이야카를 잡아왔다.

“왜 밥 먹는 얘들을 괴롭혀?”

“지금 밥이 중요해요? 국왕이 보낸 사신이잖아요. 위엄을 갖춰야죠.”

어린 집사는 낑낑 거리는 늑대들을 엄하게 혼낸 후 왕좌 좌우에 앉혔다. 송곳니가 멋진 팔걸이라 위엄이 조금 생겼다. 때맞춰 허풍쟁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포클랜드 시티의 퍼클 맥 백작이 알현을 요청합니다!”

오늘 찾아올 사람이 저 사람뿐이지만, 그래도 왕가라고 할 건 다 했다. 아성의 문이 활짝 열리고,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느라 땀을 한 바가지 흘린 궁정대신이 들어왔다. 어린 집사는 내심 안도했다. 로벨보다 품위가 없는 사절이라 흠 잡힐 일은 없었다.

“위대한 볼탄 반도의, 위대한 공왕 폐하, 로벨 로드릭 폐하를 뵙게 되어, 무한한 영광이라, 이와 같은...”

“식사는 하셨소?”

“...기쁨을 표현할 말이 예?”

기쁨을 표현하는 말치고 좀 짧았다. 2층에 숨어서 지켜보는 마녀와 외팔이가 ‘풉!’ 웃었다.

로벨은 친절한 마음으로 요식행위를 중단했다. 어린 집사는 못마땅하겠지만, 난방이 안 된 홀에 땀투성이 사절을 오래 세워둘 수 없었다.

“식전이면 같이 듭시다. 그러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겠소.”

험상궂게 생긴 늑대들이 꼬리를 흔들며 좋아했다. 퍼클 맥 백작은 혼란에 빠졌다. 무적무패의 공왕은 소문하고 달랐다.

“소고기 스튜 좋아하오?”

“예?”

“국물이 졸아서 걱정이오.”

“...예?”

리암 수사의 조언이 조금 부족했다. 공왕 폐하는 분명 좋은 분인데, 이상한 쪽으로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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