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8화. 유리
로벨은 흐룬팅을 끌어당겼다가 도로 내렸다. 상황이 참 애매했다.
‘우리가 구면이라지만 허락 없이 침실에서 볼 사이는 아니잖소? 마침 내 손에 칼이 한 자루 있는데, 이걸로 무례를 물어도 되겠소?’ 의 의미를 어찌 전달할까 고민하다 한 단어로 줄였다.
“방화범!”
“...오해가 있군. 저 불은 내가 한 짓이 아닐세.”
“그렇게 주장하겠지!”
“지, 진짜 아니라니까. 난 그저 자네를 보려고... 내 말을 좀 들어보게!”
둠 노릭스 후작은 펄쩍 뛰었다. 좀도둑에게 살인죄를 물은 듯한 반응이었다. 요약해서 현세의 신분이 신분이라 당당하게 찾아올 수 없어 몰래 왔는데, 먼저 온 불청객이 있어 쫓아냈다고 설명했다.
“진짜 범인이 따로 있다고?”
“그렇다니까! 내가 이래봬도 겔몬 족의 족장이고, 드루이드의 수장이며, 자네의 조상뻘되는 12기사의 일원일세! 남의 집에 와서 불장난을 치겠는가?”
로벨은 고지식한 기사라 명예로운 신분을 들으니 차마 화를 낼 수 없었다. 말투가 조금 점잖아졌다.
“그 말을 어떻게 믿소?”
“크흠! 어려운 질문이군. 반대로 어찌해야 믿겠나?”
로벨은 조금 생각한 후 흐룬팅을 칼집에 밀어 넣었다. 둠 노릭스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칼날이 칼집 주둥이에 닿을 듯 닿지 않고 칼끝에서 정확히 빨려 들어갔다. 정신수양을 강조하는 동방대륙의 칼잡이라면 극찬할 납도술이었다.
‘기사의 왕이라...’
둠 노릭스 후작은 새로운 마도의 수호자를 진귀하게 관찰했다. 수백 년 만에 등장한 ‘신입’은 현세와 마도에 모두 발을 담그고 있었다.
“나를 모욕하는 목적이 아니라면, 무슨 목적이 있어 찾아왔소?”
둠 노릭스 후작은 의심이 풀리자 비로소 여유롭게 말했다.
“자네가 아직도 인간인지 보려고 왔네.”
“난 인간이오. 예나 지금이나.”
로벨이 확신을 담아 답하자 둠 노릭스 후작은 미소 지었다. 저 순수한 왕에게 진실을 알려줄 때가 되었다.
“우리 중에 아주 큰 영성을 가진 자가 있었네. 그 이름이 천 년이 지난 지금도 전해지고 있으니 얼마나 큰지 짐작할 수 있을 걸세.”
“난 모르는 자요.”
“자네도 잘 아는 자일세. 바로 옛 신이지.”
잘 알긴 하는데 뒷담화를 할 만큼 친하지 않았다. 로벨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옛 신이 마도의 수호자라고?”
“왜 그리 놀라나? 당연하지 않은가?”
천사도, 악마도, 요정도, 괴물도 인간이 빚어낸 상상 속의 존재였다. 당연히 옛 신 또한 인간이 만든 인지의 존재였다.
이성은 어렴풋이 알고 있었지만 감성이 인정하지 않았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이 시대에 태어난 인간은 모두 모태신앙이 있었다. 로벨 역시 성경을 자장가 삼은 이 시대 주민이었다.
“아니, 당연하지만, 음, 그렇지만...”
옛 신을 실제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옛 신하고 동년배인 둠 노릭스 후작은 신참 수호자의 오해를 바로잡았다.
“그건 불가능하네.”
“어째서?”
“옛 신은 현세를 떠났으니까. 그러니 ‘옛’ 신이잖은가.”
“주, 죽었다고?”
로벨의 단순한 머리를 너무 얕보았다. 둠 노릭스 후작은 차분하게 정정했다.
“죽은 게 아니라 떠난 걸세. 자신의 의지로 현세에 모든 고리를 끊었지. 괘씸하면서 훌륭한 일이야.”
그 말을 하는 후작의 표정을 알 수 없었다. 사랑과 증오가 함께 있고, 자랑스러움과 후회스러움이 함께 있었다. 로벨은 백 년 단위로 계획을 세우고 천 년 단위로 추억을 헤아리는 괴물의 삶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옛 신을 왜 거론하는 거요?”
조금 이른 판단이었다. 옛 신 이야기를 좀 더 하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우리 중에 자네를 신으로 만들려는 자가 있네.”
로벨은 할 말을 잃었다. 둠 노릭스 후작이 이해한다는 듯 반복해 말하자 그제야 입술을 떼었다.
“겨우 왕이 되었는데, 이제 신이 되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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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 노릭스 후작은 세월에 짓눌려 추억의 가닥을 더듬는 노인처럼 말했다.
“옛 신이 있던 시절에는 지금과 많은 것이 달랐네. 아침 정원에서는 요정들이 이슬을 가지고 싸우고, 저녁 아궁이에서는 난쟁이들이 빵을 가지고 싸우고, 늦은 밤이 되면 몽마가 찾아와 잘생긴 남자를 두고 싸웠지.”
“...왜 죄다 싸우는 거요?”
“삶이란 게 원래 투쟁의 연속 아닌가.”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이 안 갔다. 로벨은 진짜 방화범이 부순 창문으로 성 아래를 보았다. 어린 집사가 막 도착해서 비명을 질렀다.
“괜찮수. 괜찮수. 목재창고만 조금 탔수.”
“그게 왜 괜찮아요! 으악! 저게 다 얼마야!”
로벨은 비뚤어진 창문을 힘으로 닫았다. 한결 조용해졌다.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은 것이오? 그래서 영성이란 것을 가지려는 것이고?”
“난 그러지 않았으면 하네.”
로벨의 생각과 다른 대답이 나왔다. 둠 노릭스 후작의 목소리가 조금씩 커졌다.
“귀여운 아이도 자라면 두 발로 서야지. 언제까지 꿈속에서 달콤한 젖을 물고 있을 수 없는 법이네. 옛 신이 현세를 떠난 것도 그 때문이야.”
“나는 젖이...”
로벨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둠 노릭스 후작은 못 들은 척하고 열변했다.
“이제 눈을 떠야 할 때가 왔네. 굴뚝 속의 난쟁이도, 침대 밑의 괴물도 더 이상 존재해서 안 되네. 창문을 열고 진실된 세상을 맞이해야 할 때가 된 것일세.”
로벨은 천 년을 산 노인이 이처럼 정열적일 수 있다는데 감탄했다. 그래서 진지하게 호응했다.
“저기, 공용어로 말해주겠소?”
“......”
둠 노릭스 후작이 살던 시절하고 약간 달랐다. 우수한 웅변으로 시민을 움직이는 것은 고대 왕국 시절에나 통했다. 무식한 기사와 욕심 많은 장사치의 시대에는 좀 더 단순해야 했다.
“영성을 가지지 말게.”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니잖소.”
“노력은 해야지.”
로벨은 앞에 내용을 싹 지운 후 후작이 원하는 것을 정리했다.
“본인을 죽이고 영성을 가지려는 수호자가 있었소.”
“인간이라고 모두 한마음은 아니잖은가. 우리 수호자 또한 마찬가지네. 자네가 말한 늑대의 왕은 스스로 영성을 쌓아 신이 되고자 했네. 수많은 강자를 꺾어 명성을 떨쳤지. 허나 칼로 세운 명성은 오래가지 못하는 법이니 잘못된 판단이었네.”
“그래서 옛 신을 만들려는 것이오?”
“그것이 흡혈귀 군주의 뜻일세. 그도 처음에는 늑대의 왕과 같은 생각을 했을 걸세. 괴물이 왕이 되면 괴물을 위한 세상을 쉽게 열 수 있으니까. 하지만 괴물은 괴물일 뿐이야. 인간의 인지에는 피를 탐하는 악당이지 옛 신을 대체할 수 없네. 그 가엾은 흡혈귀도 뒤늦게 깨달았지.”
이쯤 되면 신학에 무지한 로벨도 궁금했다.
“신이 된다는 게 무엇이오?”
“한마디로 정의할 수 없으나, 마도의 개념으로 보자면 천 년이고 만 년이고 인간들의 추앙을 받는 존재일세. 옛 신처럼 말이야.”
“나보고 그런 것이 되라고?”
“의심한 적 없는가?”
“무엇을?”
“자네가 지나온 길은 찬란한 영광의 길이지. 언제나 정의로운 왕이고, 언제나 명예로운 기사일세. 일국의 왕이 되면서 어찌 그럴 수 있었을까.”
“그야 어쩌다 보니까... 헤.”
로벨은 명예로운 기사란 칭찬에 쑥스러워했다. 둠 노릭스 후작은 ‘이 멍청이가 진짜 신이 될 수 있을까’ 의심하다가 참았다.
“그리되도록 음지에서 움직이는 자들이 있네. 흡혈귀 군주도 그중 하나일세.”
로벨은 얼음성에서 나눈 대화를 떠올리고 얼굴을 굳혔다. 로벨이 원한 것은 아니지만, 로벨이 공작이 되고 왕이 되도록 손쓴 것은 사실이었다.
“그래서 나한테 바라는 것이 무엇이오?”
“진실을 밝히게.”
“...진실?”
둠 노릭스 후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벨에 비하면 작은 체구인데 이상하게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겔몬 족의 위대한 족장이자 하얀 숲의 드루이드 수장이 말했다.
“로벨 로드릭이란 존재하지 않는 영웅을 죽이게. 사람들의 잘못된 신앙을 막게. 그리하여 인간 ■■ ■■■으로 살아가게.”
로벨은 당황했다. 죽으라는 무서운 말 때문이 아니었다. 신앙이란 허황된 말 때문도 아니었다. 자신의 진짜 이름이 낯설고 이상해서 할 말을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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둠 노릭스 후작은 올 때처럼 소리 없이 사라졌다.
뱀파이어 군주와 동방의 마녀도 그러했지만, 천 년을 산 마도의 수호자는 신기한 능력이 많았다.
‘실제로 하는 말도 이해가 잘 안 되고...’
인간의 세상에 마도의 수호자는 필요 없으니 인간으로 살아가라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선제조건이 빠졌다. 로벨은 ‘인간으로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얼음성에 군대를 끌고 나타난 것도 그 때문일까? 내가 왕이 되는 것을 막으려고?’
중간에 마음을 바꾼 것은 뱀파이어 군주를 포함한 다른 마도의 수호자가 끼어들었기 때문이다.
‘으음... 일단 고민하지 말자. 당장 할 일이 산더미잖아.’
로벨은 실로 기사답게 복잡한 것을 싫어했다. 어쩌면 현명한 자세였다. 지금 급한 일이 아니니 시간을 두고 천천히 생각하는 것이 옳았다. 그리고 둠 노릭스 후작이 장황한 소리만 남기고 간 것은 아니었다.
“제기랄! 젠장할! 놓쳤어요!”
어린 집사가 성난 물소처럼 로벨의 침실을 찾아왔다. 허풍쟁이 이하 울프 용병단 30명이 모두 허탕치고 돌아왔다. 산전수전 다 겪은 베테랑 용병들이 자기 안마당에서 범인을 놓친 것이 볼썽사나웠다. 어린 집사가 얼마나 쪼아댔는지 수염 무성한 사내들이 풀이 죽었다.
“쉽게 잡힐 거면 숨어들지도 못했을 거야.”
“그치만! 그치만요! 이래서는 어떤 놈이 영주님을, 아니! 공왕 폐하를 노리는지 모르잖아요!”
“악마 추종자야.”
둠 노릭스 후작은 방화범을 목격한 증인 중 하나로 단서도 남겼다. 퍽 신뢰할 만했다.
“아, 악마 추종자요? 설마 류트 프란시스 공자가?”
“류트 공자는 아닐 거야. 관계가 아주 없지는 않겠지만.”
마법은 신비한 만큼 무서웠다. 마법사를 자처하는 마녀 키르케와 마법의 본질 같은 마도의 수호자가 바로 옆에 있어도 겁에 먹을 만큼 말이다.
“걔네는 잉그비아 왕국이잖아요? 볼탄 반도에 또 왜 왔어요? 흑태자 에드워드는요? 흑태자가 전부 때려잡은 거 아니에요?”
그때 억지로 닫아놓은 창문이 삐그덕- 소리 내면서 열렸다. 어린 집사가 움찔해서 뒷걸음쳤다.
돈 많은 상인과 교회는 유리판을 여러 개 이어 붙여 창문으로 쓰는데, 짠내 나는 늑대성은 아직도 나무로 된 창문을 사용했다. 외풍이 심하고 햇빛이 안 들어와 한낮에도 어두컴컴했다. 이번 기회에 유리창을 설치하는 것도 좋을 듯했다.
“새로운 것이 항상 나쁜 것은 아니니까...”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에요? 악마 추종자가 왜 나타났냐니까요? 새로운 거요? 저 몰래 뭐 샀어요? 그래서 악마 추종자가 노리는 건가요?
어린 집사는 둠 노릭스 후작과 달리 현실에 충실했다. 로벨이 전후사정을 이야기하자 다짜고짜 유리창 견적부터 뽑았다.
어린 집사와 함께 있으면 현세의 일을 잊을 일은 없을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