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7화 (407/605)

407화. 화재

로드릭 영지가 자유민의 영향으로 상업화, 도시화 되었다고 하지만, 아직도 많은 것이 로드릭 가문의 개인소유였다. 예를 들어 농사에 꼭 필요한 물레방아, 북쪽 숲의 유일한 사냥터, 그리고 동쪽 언덕의 드넓은 목초지가 있었다.

이곳을 이용하는 영지민은 ‘세금’이 아니라 ‘사용료’를 지불하였다. 어차피 로벨-어린 집사-의 주머니로 들어가는 것은 같지만, 그래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다. 우선 눈치 볼 필요 없었다.

“언제는 눈치 봤어?”

“당연히 보죠! 예를 들어 술집은 모두 주류세와 장사세를 내잖아요? 그런데 공왕 폐하가 한 집만 꼭 집어서 세금 내지 말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어요?”

“음. 다른 집이 화내겠지?”

“그렇죠. 세금은 명목상 공정해야 하니까요. 하지만 여기 목초지를 보세요. 공왕 폐하가 허락한 양치기는 목초지 사용료를 내지 않아요. 그래도 주변의 농가는 불만이 없죠. 왜일까요?”

“여기가 내 땅이니까?”

로벨은 알기 쉬운 강의에 금방 납득했다. 어린 집사는 신이 나서 종알종알 떠들었다.

“어느 마을이나 방앗간지기, 숲지기, 양치기는 미움받아요. 직업 특성상 사람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기 때문이고, 영주의 앞잡이 노릇을 자주하기 때문이죠.”

“참 안 된 일이야.”

“그중에서 가장 안 된 게 양치기에요. 방앗간이랑 숲지기는 제법 권력이 있거든요. 곡식을 빻고 장작을 주워야 하니까요. 하지만 양치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마을 울타리를 제멋대로 넘나드는 게 수상하기도 하고요.”

로벨도 익히 아는 이야기지만 어린 집사의 목소리가 좋아 가만히 두었다. 그러는 사이 나지막한 언덕을 거의 올랐다. 구릉 머리 위로 양치기의 오두막과 여러 번 증축한 축사가 나타났다. 긴 장대에 양털이 한 아름씩 걸려있고, 그 아래 헐벗은 양들이 뭉쳐서 원망 가득한 울음소리를 내었다.

로벨은 호기심과 안쓰러움을 담아 물었다.

“왜 겨울에 양털을 자르는 거야? 봄에 잘라도 되잖아?”

어린 집사가 혀를 찼다.

“겨울에 양털이 비싸니까요. 제값을 받으려면 지금 팔아야죠.”

“그리고 지금 털을 밀어야 겨울에 가출하지 않고 저렇게 뭉쳐서 지냅니다.”

어린 집사가 경제적인 이유를 말하자 양치기가 생리적인 이유를 덧붙였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동시에 머리를 돌렸다.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밀짚모자와 나막신을 신은 청년이 있었다.

“오랜만이야.”

양치기는 코밑을 쓱쓱 긁었다. 로벨은 기억 못하지만 양치기는 성에 고기와 치즈를 가져가면서 종종 보았다. 그렇다고 일개 양치기가 공왕 폐하를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꾸벅 숙이는 양치기 모습에 살짝 놀랐다. 어릴 때는 어린 집사와 키가 비슷했는데, 성인이 되자 갑자기 커졌다.

‘5.5피트? 5.6피트?’

기사 중에서도 큰 편에 속하는 로벨하고 비슷했다. 어깨도 넓고 팔다리도 길어서 기사 가문의 장남이라 해도 믿을 듯했다.

로벨이 음흉하게 쳐다보자 양치기는 점점 불안해졌다. 상대는 이 땅에서 가장 위대한 분이고, 자기는 그 아래에 하찮은 양치기 소년이었다.

‘무, 무릎을 안 꿇어서 그러나? 그러고 보니 기사님들은 무릎 꿇고 손가락에 입을 맞추던데...’

다행히 오해가 길지 않았다. 로벨은 헛기침 한 번으로 말을 돌렸다.

“로시난테는 잘 지내?”

양치기는 새로운 질문에 난감함을 더했다.

“로시라면... 어느 로시를 말씀하는지...”

“내 친구 키르케가 좋아하는 소 말이야.”

“맛있게 잡아먹은 소이기도 하죠.”

양치기는 공왕 폐하가 정말 오랜만에 왔구나 생각하며 말했다.

“저쪽에 있는 소가 전부 로시난테입니다. 줄여서 로시라고 부르지요.”

“전부?”

“이 목장에서 태어난 소 전부입니다.”

“...왜?”

“리암 수사표 맥주처럼 우리 동네 명물이 될까 해서요.”

시대를 앞서 간 발상이었다. 사물의 가치를 직관적으로 받아들이는, 솔직하게 말하면 먹고 살기 바빠서 품질을 따지지 않는 현시대에 브랜드 가치란 웃기는 농담이었다.

약 320년 뒤, 로드릭 시티 근교 목장이 자기네 우유 브랜드를 ‘로시난테’로 채택하고, 그 유명한 로벨 로드릭 대공이 즐겨 마신 우유라 홍보하는데,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우유 남은 거 있어?”

“오늘 아침에 짠 우유가 있습니다.”

양치기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 요청하고 목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왜 나막신을 신었는지 알 수 있었다. 가축의 숫자가 늘어난 탓인지 오물이 가득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의 귀한 가죽신이 들어갈 곳이 못 되었다.

“...우유만 마시고 돌아가죠.”

“응.”

그러나 우유를 다 마시기까지 오래 걸렸다. 로벨의 위대함을 동음의 다른 뜻으로 이해했는지 아름드리 나무통으로 우유를 꺼내왔다. 한창때의 송아지도 다 마시지 못할 양이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가 말을 잃자 양치기는 또 다시 오해했다.

“작년에 담은 블루치즈도 있는데...”

“아니야. 아니야. 이걸로 충분해.”

“누구를 돼지로 아나.”

로벨은 주석잔으로 우유를 조금 떴다. 갓 짜낸 우유라 뿌연 거품에 투명한 기름이 둥둥 떠 있었다. 목장에 오지 않으면 마실 수 없는 우유였다.

로벨은 처음으로 말에서 내렸다. 입맛 다시는 모닝스타에게 먼저 맛을 보여주고, 이어서 울타리에 기대 느긋하게 우유를 음미했다.

“여기 참 좋아.”

늑대성 언덕에 비하면 낮고 완만한 구릉이었다. 새끼 양과 송아지가 뛰어놀기 좋았다. 로드릭 시티의 크지도 작지도 않은 성문이 보이고, 노스폴드 시티로 향하는 상인행렬이 개미행렬처럼 보였다.

“낮에는 도시를 구경하고, 밤에는 별자리를 구경합니다.”

“낭만적이야.”

“일할 때는 그렇지 않지만... 그렇게 보일 때가 있지요.”

‘그건 공왕 폐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라는 말은 삼켰다. 목초지보다 두 배는 더 높은 언덕에 커다란 돌로 쌓은 성을 가지고 뭇 기사들의 추앙을 받는 로벨의 삶은 가난하거나 명예롭지 못한 사람들의 이상이었다.

‘우유 한 잔으로 기뻐하는 저 사람이 이 땅을 지배하는 기사들의 왕이라니...’

한 잔 비우고, 두 잔 비우고, 세 잔째 뜰 때 어린 집사가 많이 마시면 배 아프다고 뜯어말렸다. 로벨이 남은 우유를 보고 아까워하자 양치기는 내일 아침 성으로 보내겠다고 굳게 약속했다. 그렇게 오늘의 순시가 끝났다.

이제 곧 있으면 서리가 내리고 눈이 쌓일 것이다. 월동준비에 들어가면 한동안 도시 밖으로 나오지 못했다. 그 사실을 일러주자 양치기가 몹시 좋아했다. 로벨은 갑자기 찾아와 우유를 뺏어서 그런가 반성하고 모닝스타에 올랐다.

“너무 어려워하지 말고 가끔 성에 놀러와.”

“제가 어떻게 감히...”

“괜찮아. 키르케가 좋아할 거야.”

왕과 양치기로 보이지 않는 훈훈한 작별이었다. 얼마나 따뜻한지 불 냄새가 났다. 진짜였다. 저 멀리 늑대성에서 연기가 치솟았다. 화톳불하고 비교가 안 되는 커다란 불이었다.

“화, 화재다! 불이 났어요!”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로벨도 적잖이 놀라 모닝스타의 고삐를 비틀었다.

“검은 연기... 그냥 불이 아니야.”

건초와 나무가 타면 하얀 연기가 나온다. 검은 연기는 기름을 태운 것이다. 방화일 가능성이 높았다.

“나 먼저 갈게. 집사는 천천히 와!”

“앗! 영주님! 같이 가요!”

상황이 급하니까 옛날 호칭이 나왔다. 사실 폐하(Majesty)는 발음이 길어서 힘들었다.

“모닝스타가 싫어해!”

로벨의 말대로 모닝스타가 코웃음쳤다. 어린 집사가 ‘저 괘씸한 말...’ 어쩌고 욕했는데 끝까지 듣지 못했다. 로벨과 모닝스타는 이미 늑대성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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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옥의 대부분이 나무로 지어지고, 옆집에서 재채기하는 횟수를 기록할 수 있을 만큼 따닥따닥 붙어 있는 건축 특성상 화재는 재앙 중의 대재앙이었다. 그래서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성과 마을에는 ‘소화반’이 필히 있었다. 늑대성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뭣하냐! 건초창고로 옮겨붙잖아! 허물어!”

“물! 물 더 가져와!”

“멍청아! 거기가 아니야! 이쪽에 뿌려! 저건 그냥 타게 내버려 둬!”

울프 용병단은 크고 작은 전쟁으로 단련된 베테랑 용병단이었다. 그리고 전쟁과 불은 뗄 수 없는 죽마고우였다. 전쟁의 전문가는 불을 다루는 전문가이기도 했다.

로벨이 늑대성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불길이 잡혀 있었다. 전부 꺼진 것은 아니지만, 더 이상 확대되지 않게 꼼꼼히 차단했다.

“워! 워!”

로벨은 불 앞에 모닝스타를 세우고 훌쩍 뛰어내렸다. 물동이를 나르던 용병들이 고용주를 알아보고 눈인사했다.

“인사가 아니라 상황을 설명해야지.”

저래 봬도 왕이라 말을 걸기가 어려운 모양이다. 로벨은 펄프 대장을 찾다가 외팔이를 먼저 발견했다. 외팔이는 역시 외팔이였다.

“기사 나리! 아이고! 기사 나리 오셨습니까요!”

“기사 나리 아니고 공왕... 아니야. 무슨 일인지 말해.”

“치, 침입자입니다! 침입자가 헛간에 불을 질렀습니다요!”

로벨은 쉬엄쉬엄 물을 끼얹는 화재현장을 돌아보았다. 급한 불이 꺼져서 한결 여유로웠다. 어린 집사가 오면 다시 시끄러워지겠지만.

“직접 봤어?”

“제가 아니라 허풍쟁이 놈이 봤습니다! 영주님을 뵈러 아성에 들어갔다가 이상한 놈을 보았다는데...”

정체를 수상히 여겨 쫓으니 불을 지르고 도망갔다는 이야기였다. 허풍쟁이답게 긴박한 와중에도 자세히 떠들었다.

“제이콥은 어디 있어?”

“그놈을 잡는다고 얘들 몇 명 데리고 나갔습니다요.”

로벨의 고운 미간이 꾸겨졌다. 성에 잠입할 정도면 보통 실력자가 아닐 것이다.

“몇 명이나 데려갔는데? 아니, 아니다. 불 끄는 얘들만 남기고 전부 따라가.”

“저, 전부 말입니까요?”

로벨은 두 번 말하지 않고 아성으로 향했다. 자세한 것은 허풍쟁이가 돌아와야 알겠지만, 아성의 구조와 불이 난 곳을 볼 때 대략적인 동선이 나왔다.

‘2층에서 뛰어내렸어. 저긴 내 침실인데...’

도둑이라면 간이 배 밖에 나온 도둑이고, 암살자라면 머리가 텅 빈 암살자였다. 초저녁도 되지 않았는데 로벨이 침대에 있을 리 없었다.

‘도둑도 아니고, 암살자도 아니면... 첩자일까?’

뜻밖의 이유로 왕이 되었다는 것이 실감됐다.

로벨은 병장기를 챙겨 성 밖으로 나가는 울프 용병단을 뒤로 하고 텅 빈 아성에 들어갔다. 밖은 불과 물과 사람으로 소란스러운데, 성 안은 숨소리 하나 없이 고요했다. 마녀 키르케는 아직 병원에 있을 테고, 아야와 이야카는 화재에 놀라 도망간 듯했다. 2층 계단 끝에 이르자 사과 바구니가 떨어져 있었다.

‘허풍쟁이가 가져온 건가?’

여기서 침입자를 발견한 모양이다. 로벨은 허풍쟁이의 시선을 따라갔다. 역시 침실로 이어졌다. 로벨은 숨을 짧게 마시고 흐룬팅을 뽑았다. 스르릉- 칼날 스치는 소리가 살을 에었다.

‘아직 있을 리가 없지만...’

15살 이후 매일 같이 먹고 잔 공간인데 이상하게 낯설었다. 한 걸음, 그리고 한 걸음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오른손으로 흐룬팅을 늘어트리고 왼손으로 방문을 쓰륵- 밀었다.

“역시 감이 좋구만.”

대뜸 휘두를 뻔했다. 로벨은 튀어나가려는 오른손을 간신히 억제했다. 남의 집, 남의 방에 주인처럼 자리한 사람이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다.

“...둠 노릭스 후작?”

샘 포클을 도운 하얀 숲의 기사이자 인간에게 우호적인 마도의 수호자였다.

“지금은 옛 드루이드 족장일세. 또 다른 마도의 수호자로 만나러 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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