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4화. 쐐기
로벨 로드릭 군과 반(反)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견고한 성곽과 잘 만든 진지를 놔두고 잡초 무성한 휴경지에서 마주 섰다. 함정도, 속임수도 없었다. 여러 의미로 기사다운 광경이었다.
“500명 대 1,500명인가?”
“기사의 숫자는 비슷하오.”
지형이나 날씨에 따라 다르지만, 일반적으로 기사를 포함한 중장기병 하나가 경보병 1개 소대(Platoon, 20~30명)를 상대한다. 양쪽 다 기사가 70여 명, 맨앳암즈 기마병과 기사 종자를 포함하면 150여 명이었다. 기사들끼리 승부를 보면 남은 부대는 시간문제였다. 애초에 기사들이 데려온 용병과 징집병이었다. 고용주가 없으면 싸울 이유가 없었다.
“펄프 대장, 본진에서 적을 막아.”
“버티기만 하면 됩니까?”
“응. 할 수 있지?”
펄프 대장은 지팡이를 앞으로 짚고 적진을 보았다. 쇳덩이를 두른 용병도 조금 있지만, 대부분은 무기조차 변변치 않은 농민병이었다.
“실은 자신이 없습니다.”
“응?”
“영주님이 오시기 전에 승리할 테니까요.”
로벨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말년에 누구를 닮아 가는지 자신감이 대단했다. 덕분에 안심하고 기사 무리를 지휘할 수 있었다.
“호른 경, 오른쪽을 지키시오. 아자르 경, 랭스터 경, 켈트 경, 왼쪽으로 가시오. 바이란 경, 조나단 경. 두 사람이 중심이오. 거리를 유지하시오. 메튜 경, 도너반 경. 후미의 기사 종자를 챙기시오.”
로벨은 수천 명의 대군을 지휘하는 총사령관의 자질 또한 갖췄으나, 적성은 소수의 정예 기사를 이끄는 기병대장이었다.
로벨의 지시를 받은 기사들은 군말 없이 자리를 바꿨다. 아무렇게나 떠드는 것 같아도 대단히 섬세한 배치였다. 창 다루는 솜씨, 갑옷과 말의 상태, 오른손잡이와 왼손잡이까지 고려하였다. 그 결과 쇳덩이를 모아놓은 듯한 돌격대형이 한 자루의 창처럼 바뀌었다. 전장을 꿰뚫는 로벨 로드릭의 창이었다.
“죽이는 것은 시작입니다.”
아자르 경이 12피트 길이의 ‘진짜 랜스’를 수평으로 들고 말했다. 힘이 보통이 아니었다. 평소 남다른 완력을 자랑하던 기사들이 호승심을 불태웠다.
로벨이 기사들을 재배치하는 사이 에드가 리히터 경은 사비로 고용한 용병을 움직였다. 잉그비아 롱보우맨이었다. 기사 작위를 주사위로 따지는 않았는지 괜찮은 부대 운영이었다. 기선제압에 일제사격만한 것이 없었다. 상대가 잉그비아 왕국 원정을 다녀온 울프 용병단이 아니라면 말이다.
“방패 앞으로!”
“방패 앞으로!”
최대 300야드를 날아가는 롱보우는 경험 부족한 지휘관과 병사에게 공포였다. 그러나 충분한 지식과 준비만 있다면 막을 수 있었다. 파비스의 각도를 낮추고 바클러를 위로 올렸다. 선두에 선 병사들은 맨앳암즈 중에서도 특히 중장병이었다. 직격만 당하지 않으면 화살을 튕겨냈다.
“온다!”
“막아랏!”
쏴아아아-!
100여 발의 화살비가 쏟아졌다. 사거리가 안 닿아 앞쪽에 떨어지는 게 절반이고, 간신히 닿은 것도 파비스에 가로 막혀 피해를 주지 못했다. 그래서 로벨은 서두르지 않았다.
“평보로 전진.”
로벨은 흥분한 모닝스타를 살살 달래며 천천히 이동했다. 로벨을 쫓아 150여 기의 기병이 움직였다. 가을바람에 노랗게 물든 잡초밭 너머로 적진의 기사가 보였다. 250야드가 조금 넘었다. 아직 돌격거리가 아니었다. 맹수가 맹수를 상대하듯 느리게 거리를 좁혔다.
중장기병의 적절한 돌격거리는 100~120야드였다. 하지만 마주 달려오는 기병을 상대로는 조금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로벨은 거리가 150야드가 되자 해비 랜스를 수평으로 기울였다. 로벨을 따라 150여 개의 창이 아래로 내려왔다. 울창한 숲이 한순간 평지로 바뀌었다. 숨 막힐 듯 장엄했다.
“옛 신과 성 마르틴의 이름으로...”
로벨은 짤막하게 기도하고 모닝스타의 아랫배를 때렸다. 평보에서 속보로 속도를 올렸다. 심장이 함께 빨라졌다. 좌우의 기사가 속보로 올릴 때 한발 먼저 구보로 달렸다. 이제 이동이 아니라 돌격이었다. 좌우의 기사가 구보로 쫓아올 때 로벨과 모닝스타는 단숨에 습보로 질주했다. 말굽에 땅이 파이고 먼지가 일어났다. 바람에 깃발과 갈기가 나부꼈다.
호른 경과 아자르 경이 로벨을 쫓아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스타트가 느린 만큼 따라잡지 못했다. 설령 따라잡을 수 있어도 그러면 안 되었다. 로벨을 꼭짓점으로 완벽한 쐐기대형이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랴! 이랴앗!”
“히야아앗!”
두두두두... 두두... 두...
올 한해 얼고 녹기를 반복한 무른 땅이 흔들렸다. 에드가 리히터 경을 비롯한 적 기사들도 마침 돌격을 시작했다. 양측의 숫자는 도합 312명. 전원이 중장기병이었다. 순수한 질량만 42만 파운드였다.
로벨은 눈 깜짝할 사이 가까워지는 상대편 기사를 향해 해비 랜스를 고정했다. 마상시합이 아니라 창 길이를 알 수 없었다. 본능적으로 판단해야 했다.
‘짧아!’
로벨은 창받침에 고정된 손잡이를 앞으로 쭉 뺐다. 순간적으로 길이가 두 뼘 늘어났다. 자신의 랜스를 과신한 적 기사는 변칙적인 공격에 선수를 빼앗겼다. 그리고 후공은 없었다. 속빈 버드나세에 맞아도 낙마하는 기사가 속출하는 로벨의 창이었다. 해비 랜스에 맞고 버틸 기사 따위 없었다.
“커어억-!”
로벨의 창에 맞은 기사가 안장에서 붕 떠서 5피트쯤 날아갔다. 굉장한 장면이지만 감상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전투는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다. 로벨의 충돌 후 2초도 되지 않아 2차, 3차 충돌이 일어났다. 창과 창이 부딪쳐 부러지기도 하고, 말과 말이 부딪쳐 함께 나자빠지기도 했다. 순식간에 두 자릿수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리고 승패가 보이기 시작했다.
똑같은 재질의 바위라도 빈틈없이 짜맞춘 성벽과 마구잡이로 쌓은 돌무더기는 다른 법이다. 로벨을 따르는 기사들은 쓰러진 기사의 자리를 곧장 메우며 돌파력을 유지했다. 더불어 로벨, 호른 경, 아자르 경으로 이루어진 창끝이 유난히 날카로웠다. 선봉을 꺾은 후에도 예기를 잃지 않았다.
“핫! 타핫!”
로벨은 창날이 부러진 해비 랜스 대신 아론다이트를 휘둘렀다.
전설의 검이라도 열처리된 강철갑옷을 찢을 수 없었다. 두 발로 땅을 딛고 혼신의 힘을 다하면 혹 모르지만, 말 위에서 한 손으로 휘둘러 갑옷을 베는 것은 불가능했다. 하지만 피를 안 본다고 충격이 없지는 않았다.
로벨은 타고난 무골이라 안 그래도 장사(壯士)인데, 마도의 수호자가 되면서 나날이 힘이 좋아져 과거 늑대의 왕과 비견될 정도가 되었다. 쇠를 두드릴 때마다 비명이 흘러나왔다. 안 좋은 곳에 맞은 기사는 그대로 낙마하기도 했다.
로벨 역시 몇 차례 두드려 맞았다. 하지만 장인의 숨결이 녹아든 필드 아머와 강인한 정신력으로 무장한 로벨을 쓰러트리지 못했다. 치고, 막고, 때리고, 두드리고, 소리치다 어느 순간 끝이 났다. 로벨 앞에 더 이상 적이 없었다. 적진을 완전히 돌파한 것이다.
“워! 워워-!”
로벨은 거친 숨을 몰아쉬는 모닝스타를 진정시키고 말머리를 돌렸다. 그리고 소리 없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호른 경을 비롯해 많은 기사가 살아남았다.
“전열을 갖추시오! 전열을 갖추시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머리 위로 휘둘렀다. 새하얀 칼날이 눈에 잘 들어왔다. 기사들은 부러지고 휘어진 병장기를 바꿔서 첫 대열로 돌아갔다. 흥분한 기사와 겁먹은 기사 종자, 일부러 굼뜨게 행동하는 기마 용병 탓에 완전히 전열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시간이 없었다. 지금 숨통을 끊어야 했다.
“Charge!”
쓰러진 기사와 발버둥치는 전투마를 향해 다시 돌격했다. 반(反)로벨 로드릭 연합군의 기사들은 아직 전열을 수습하지 못했다. 용감한 기사가 먼저 돌격하고, 상황판단이 빠른 기사가 뒤따랐지만, 볼탄 반도 기사들에 비하면 난잡하고 중구난방이었다.
로벨은 모닝스타가 알아서 달리게 고삐를 놓고 아론다이트를 양손으로 잡았다. 허리를 오른쪽으로 비틀고 어깨와 팔을 목 뒤로 당겼다. 그리고 가장 용감한 기사를 향해 힘껏 휘둘렀다. 까강-!
칼이 칼을 부러트리고 흉갑을 때렸다. 그냥 맞아도 죽을 만큼 아플 텐데 마주 달리는 말 위에서 카운터로 맞았다. 상체가 뒤로 젖혀지더니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뒤따라오는 호른 경 이하 볼탄 반도 기사들에게 짓밟혔다. 십중팔구 즉사했을 것이다.
그 뒤로도 무수히 많은 기사가 땅에 떨어졌다. 첫번째 충돌하고 비슷한 사상자가 나왔다. 차이점은 전부 연합군의 기사들이란 것이다.
말 위에 앉아있는 숫자가 줄자 하나하나 관찰할 여유가 생겼다. 그것은 상대쪽도 마찬가지였다. 운이 좋은 건지 실력이 좋은 건지 끝까지 살아남은 에드가 리히터 경이 로벨을 알아보았다.
“너, 너는 로벨 로드릭!”
“로드요.”
“뭐, 뭐?”
“로드 로드릭이라 부르시오.”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친절히 호칭을 알려주었다. 철가면 뒤로 눈알 굴러가는 것이 보였다. 에드가 리히터 경은 무례하긴 해도 정신병자는 아니었다. 승패가 가름난 상황에서 어찌 처신해야 할지 알았다.
“하, 항복하면 살려주시겠소?”
“기사를 죽이는 것은 명예롭지 못하오.”
“그, 그렇소! 경은, 아니, 대공은 명예로운 기사요!”
“전장에서는 아니지만.”
로벨의 기사 중 로벨의 마음을 가장 잘 아는 것은 호른 경이었다. 워 해머로 리히터 경의 뒤통수를 때렸다. 헬름이 찌그러지고 ‘억!’ 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번에 죽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워 해머를 높이 들고 연거푸 때렸다. 말 아래로 굴러 떨어져 대자로 뻗었다.
호른 경은 간간히 저항하는 적 기사들을 향해 소리쳤다.
“세 갈래 강의 에드가 리히터 경이 죽었다!”
죽은 건지 기절한 건지 모르지만 상관없었다. 본보기를 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반 로벨 로드릭 연합군은 통일되지 않은 군대라 지휘관 하나 항복한다고 끝나지 않았다. 싸울 의지를 꺾어야 했다.
“리히터 경이?”
“제기랄! 뭐 어쩌라고!”
그러거나 말거나 죽기 살기로 싸우는 기사도 있지만, 슬그머니 도망가는 기사도 여럿 있었다. 로벨은 호른 경에게 뒷일을 맡기고 펄프 대장이 지휘하는 본진을 보았다.
노장은 확실히 노련했다. 롱보우는 숙달된 사수라도 20발 이상 쏘기 힘들었다. 화살비가 뜸해지자 방패를 앞세워 착실히 거리를 좁혔다. 적 지휘관은 거듭되는 사격에도 흔들림이 없자 도리어 당황했다. 우악스러운 병장기에 겁먹은 농민도 많았다. 창이 닿기도 전에 와해되는 부대가 나왔다.
“...끝났어.”
로벨은 폐에 고인 낡은 숨을 내쉬었다. 국왕 폐하와 포클랜드 귀족원에 좋은 메시지가 될 것이다. 소식이 전해지는 대로 사절이 올 테니, 볼탄 반도로 돌아가 왕관을 쓸 일만 남았다.
“주군! 저쪽을 보십시오!”
호른 경이 호들갑스럽게 외쳤다. 로벨은 잠시 올려둔 바이저를 내렸다. 파나케아의 신묘한 힘이 시야를 확장시켰다. 해가 넘어가는 서쪽 땅에서 수백의 그림자가 일렁거렸다. 기분 탓인지 역광 탓인지 마치 악마의 군대 같았다.
“노릭스 가문의 깃발입니다! 하얀 숲의 군대입니다!”
로벨은 축 늘어진 아론다이트를 끌어올렸다.
‘드루이드 족장 둠 노릭스...’
승리했다고 하지만 피해가 적지 않았다. 기사와 용병 모두 휴식이 필요했다. 지금 하얀 숲과 싸우는 것은 악수였다.
“주군, 성으로 돌아가시지요!”
“그건 안 되오.”
로벨은 지원군에 힘입어 거세게 저항하는 적을 보았다. 둠 노릭스 후작이 저들을 흡수하면 전쟁이 길어질 것이다.
“펄프 대장이 잔당을 처리할 때까지 시간을 벌어야 하오. 전열을 정비...”
“주, 주군, 조금 이상합니다.”
호른 경이 목소리가 가늘게 흔들렸다.
“저쪽 지원군이... 아닌 모양입니다?”
“어?”
로벨이 걱정한 두 번째 전투는 없었다. 둠 노릭스 후작-으로 추정되는 그림자-은 피투성이 전장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기사들이 뒤를 따르고, 창을 어깨에 걸친 병사들도 반원을 그리며 회군했다. 긴장이 절로 풀렸다.
“쟤네는 왜 온 거야?”
“누가 이기나 보러 왔나?”
그 답은 한 사람만 알았다. 아니, 괴물만 알았다.
워낙 많은 기사가 모인 탓에, 그리고 정신없이 뒤섞여 싸운 탓에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이 안 보인다는 것을 깨달은 사람이 없었다. 평소에 친하게 지낸 기사가 없는 탓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