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1화 (401/605)

401화. 자각

로벨의 최고 관심사는 자금이고, 로벨 로드릭 군의 최대 관심사는 식량이었다. 얼핏 들으면 같은 것 같지만, 접근 방법과 의도가 사뭇 달랐다.

“가을 추수가 끝나면 곡식을 징발할 거예요. 그러면 연말까지 버틸 수 있겠죠.”

“음... 난 내키지 않아. 병사들은 좋아하겠지만...”

수염 덥수룩한 병사들이 어린아이 사탕 좋아하듯 좋아하는 게 물자징발이었다. 당하는 쪽 용어로는 약탈 내지 강탈이라 할 수 있었다.

로벨을 비롯한 명예로운 기사들은 최대한 평화적으로 꼭 필요한 물자만 징발하고자 하지만, 기왕지사 민가에 들어간 병사들은 가급적 폭력적으로 필요 이상으로 물자를 긁어모았다.

고향에서는 성실한 아버지고 선량한 아들이나 전쟁터에서는 야만적이고 탐욕적인 군인이었다. 그들의 본성이 사악해서가 아니었다. 죽고 죽이는 전쟁의 스트레스와 옳고 그름을 무시하는 군중심리 때문이었다. 그것은 전설적인 왕 샘 포클이 환생해도 막기 힘들었다.

“호른 경과 도너반 경, 그리고 아자르 경을 같이 보내세요. 그들은 믿을 수 있잖아요?”

“응. 그게 좋겠다.”

로벨은 죄 없는 농민들의 원망을 사고 싶지 않았다. 로벨의 마음을 잘 이해하는 호른 경과 명령에 충실히 따르는 아자르 경이라면 병사들의 과잉징발을 막아줄 것이다.

“그럼 문제는 페닝이에요.”

로벨이 가장 싫어하는 문제였다.

“사자성이랑 얼음성 기사들의 몸값이 있잖아?”

“그건 울프 용병단 전쟁 수당이랑 화약값으로 다 나갔어요. 열흘 뒤에 봉신들한테 줄 부대유지비가 문제에요.”

“그, 그래?”

물론, 기사들도 융통성이 있고 배려심이 있으니 전쟁 중에 당장 금과 은을 내놓으라 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계속 지급을 미루면 의무종군일을 핑계로 하나둘 부대를 떠날 것이다. 기사나 용병이나 돈 잡아먹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역시 빚을 내야 할까?”

“에휴... 로드릭 가문의 유일한 자랑이 빚이 없는 거였는데...”

“유일하다니? 너무하잖아?”

“그럼 뭐가 또 있는데요?”

“...내 입으로 말하기 곤란해.”

로벨과 어린 집사는 평소처럼 티격태격하다 그만두었다.

“내년부터는 크레타 시티에서 세금이 들어올 거예요. 기존에 없던 수익이니까 용병단을 줄이지 않아도 빚을 갚을 수 있어요.”

“벌써?”

“마틴 행정관이 계속 보고서를 보냈는데, 한 번도 안 읽었군요?”

인어의 바다를 오가는 거상과 거함의 세금은 소금광산의 짜디짠 소출이나 북부대로의 가난한 통행세하고 비교되지 않았다.

“그걸로도 안 되면 알루미늄을... 아니지! 이건 잊으세요!”

로벨의 얼굴이 환해졌다. 아무튼 페닝이 나올 곳이 있으니 큰 걱정을 덜었다.

로벨의 심경변화를 눈치챈 어린 집사가 정색해서 덧붙였다.

“그래도 오래 끄는 것은 안돼요! 최대한 빨리 끝내세요!”

“응!”

로벨은 자신 있게 대답했다. 근거가 있는 자신감이었다.

수일 뒤, 호른 경이 인근 농가에서 식량을 징발하고 손님과 함께 돌아왔다. 포클랜드 시티에서 온 국왕의 대리인이었다.

@

얼음성은 구(舊)포클랜드 시절 북방을 지켜온 오래된 성이었다. 기원을 따지면 고대왕국 시절까지 거슬러가야 했다. 그 시절에는 흙과 나무로 지었으니 외형이 지금 같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희미하게 남은 천 년의 향취는 백 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에게 강렬했다.

“데이브 고른 데오니스 폰 포클랜드 국왕 폐하를 대신하여 포비아 왕국의 로벨 로드릭 대공을 뵙습니다.”

반란군 수괴를 대하는 것치고 대단히 정중했다. 심지어 대공의 직함을 그대로 불렀다. 서두만으로 방문목적을 짐작할 수 있었다. 승리에 취한 기사들이 거만하게 웃었다. 하지만 로벨은 웃지 않았다.

“국왕 폐하는 어찌 지내시오?”

“평소와 똑같으십니다.”

“구체적으로?”

“오전에는 공무를 보시고, 오후에는 기사들과 어울리며, 저녁에는 왕비님과 산책을 하시지요.”

진실인지 허세인지 알 수 없었다. 오전에는 이를 갈아 어금니가 아프고, 저녁에는 두려움에 떠느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로벨은 믿어주었다.

“강건하시다니 다행이오.”

이제 국왕의 대리인이 의심할 차례였다. ‘왕의 군대를 수차례 격퇴한 역도가 왕의 건강을 걱정하디니...’ 그러나 차마 비꼴 수 없었다. 얼음성은 그 이름처럼 차갑고 거대했다. 천 년의 세월 때문인지, 아니면 천 년의 역사를 깔아뭉개고 새 역사를 쓰는 로벨 로드릭 때문인지 알기 힘들었다.

“가져온 것이 있소?”

로벨이 부드럽게 물었다. 잠시 딴생각한 국왕의 대리인은 허둥지둥 대답했다.

“국왕 폐하께서 친필로 쓰신 편지가 있습니다. 이곳에서 읽어드릴 수...”

“이리 주시오.”

글자를 아예 모르거나 어려운 문장을 이해 못하는 기사가 종종 있었다. 다행히 로벨은 아니었다. 국왕의 대리인은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상석에 올라왔다. 호른 경이 칼자루를 보이며 위협해서 한층 더 조심스러워졌다. 하지만 로벨은 무심히 손을 내밀었다.

‘와, 비싼 종이네.’

면직물을 삶아 만든 고급 종이였다. 마(麻)로 만든 거친 종이만 쓰다가 매끄러운 종이를 만지니 이상했다.

로벨은 왕가의 인장을 확인하고 봉인줄을 풀어서 편지를 꺼냈다. 호른 경 이하 의심 많은 기사들은 끝까지 긴장했다. 편지는 유서 깊은 암살도구였다. 종이 사이에 독침을 꽂아두거나 봉투에 독가루를 넣는 것은 애교고, 페스트 환자 침대에 사흘쯤 넣어뒀다가 보내는 경우도 있었다. 로벨이 사라지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는 포클랜드 입장에서 시도할 만한 짓이었다.

“휴전 제안이오.”

그 정도로 벼랑에 몰리지는 않은 듯 평범한 편지였다.

로벨은 편지 내용을 한마디로 요약했다. 호른 경은 한숨을 쉬었다. 편지가 평범한 편지라서 한 번, 그리고 편지 내용에 한 번 더.

“으하핫! 국왕 폐하가 아주 큰 결심을 하셨소!”

평소처럼 아무 생각 없는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크게 웃었다. 비슷한 과의 기사들은 질 수 없다는 듯 더욱 크게 웃었다. 하지만 공개적으로 발언하기 전에 한 번쯤 검토해 보는 평범한 기사들은 신중했다.

“대공, 조건이 있습니까?”

“지금 점령한 영토를 로드릭 가문의 봉토로 하사하고, 볼탄 반도의 자치권을 인정하겠다고 하오.”

상상 이상으로 통 크게 나왔다. 전쟁 배상금이나 거론할 줄 알았던 기사들은 화들짝 놀랐다.

“그, 그 말씀은...”

“공왕(公王)이 되라는 말 아닙니까?”

직접적으로 ‘왕’을 거론하진 않았으나 비슷한 내용이었다. 어려운 선택이었다.

“잠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오.”

왕실에서 엄선해 보낸 대리인은 현명했다. 로벨의 고민을 이해했다.

“국왕 폐하의 뜻은 진실 되고 확고합니다. 좋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

마녀 키르케는 이해가 안 되는 듯 아랫입술을 당겼다.

“공작보다 공왕이 좋은 거 아니에요? 와! 왕이다! 왕이 가장 높잖아요?”

로벨은 순진무구한 마녀가 귀여워 무심코 머리를 쓰다듬을 뻔했다. 정숙한 숙녀의 머리를 만지는 것은 크나큰 무례라 참았다. 사흘은 안 감은 떡진 정수리 때문이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왜요?”

“그건 그러니까... 음... 어린 집사가 말해줄 거야.”

“당연히 그렇겠죠.”

어린 집사는 한 손으로 뒷짐 지고 한 손으로 헛기침했다. 가정교사의 기본자세 느낌이었다.

“공왕은 왕이 아니에요. 고른 왕가에게 작위를 받았으니까 종속관계가 이어지죠. 백 년쯤 지나면 네일 공국처럼 완전히 독립할지도 모르지만, 지금은 볼탄 반도 공작이나 공왕이나 별 차이 없어요.”

“그래도 왕인데...”

“물론 기존에 없는 권리가 생겨요. 매년 포클랜드에 보내는 세금을 없앨 수 있고, 왕국법을 새로 만들어서 영주들에게 강요할 수 있죠. 옛 신의 교단에 요청해 추기경을 모실 수도 있고요.”

“마지막은 별로에요.”

마녀는 아랫입술을 놓고 좀 더 생각했다.

“그러니까 지금보다 자유로워지잖아요?”

“자유는 달콤하지만 차갑지요.”

“왜요?”

“주종관계는 계약관계에요. 권리를 받으면 의무가 생기죠. 가령 잉그비아 왕국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북쪽 해안에 상륙하면...”

“에이, 10만 명은 너무 했다.”

로벨이 태클을 걸었지만 어린 집사는 무시했다.

“우리 힘으로 막을 수 없죠. 그럼 국왕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 있어요. 국왕은 충성을 맹세한 봉신을 보호할 의무가 있으니 각지의 군대를 모아 도우러 와야죠.”

“우리가 독립하면 도울 이유가 없군요?”

“기사와 농민도 마찬가지잖아요. 세금을 내고 노역을 하는 대신 보호를 받죠. 기본적인 거예요.”

어린 집사의 말은 원론적이었다. 마녀 키르케는 고개를 끄덕이며 납득했다. 하지만 로벨의 고민은 조금 달랐다. 권리니 의무니 하는 것보다 순수했다.

‘내가 왕이라고?’

그냥 믿기지가 않았다.

기사조차 될 수 없는 몸으로 태어나 제후가 되고 공작이 되어 끝내 왕까지 되려고 한다.

‘이게 말이 돼?’

로벨은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오래 전부터 느껴온 이질감이었다.

“난 모르겠어.”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가 동시에 로벨을 보았다. 어린 집사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고, 마녀 키르케는 고민을 나눌 수 없어 안타까워했다.

“쉬운 일이 아니죠. 천천히 생각해 보아요.”

로벨은 정말 천천히 생각했다. 무려 닷새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

로벨의 갈등이 길어지자 기사들이 초조해했다.

호른 경 이하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은 로벨을 왕으로 모셔야한다 강력히 주장했지만, 페르젠 가문과 헤르만 가문 등은 내키지 않아 했다.

국왕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앉히는 것을 생각했지, 대공을 왕으로 받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300년의 종속관계를 끊는 것은 300년의 질서를 무너트리는 것이었다. 가진 것이 많은 제후에게 부담되었다. 물론, 예외는 있었다.

“왕이 되시오.”

강철성의 도반 도트넘 백작이 찾아와 대뜸 말했다. 로벨은 수많은 기사 중 하필 가짜 기사가 찾아와 언짢았다. 자신도 가짜 기사라 화내지 못하는 것이 더욱 그러했다.

“악마가 간섭할 일이 아니야.”

로벨은 손짓으로 축객령을 내렸다. 하지만 괴물 백작은 따르지 않았다.

“그렇지 않소. 나는 권리가 있소.”

“인간도 아니고 봉신도 아닌데 무슨 권리?”

“대공을 이 자리에 앉힌 권리요.”

로벨의 손끝이 멈췄다. 며칠 째 계속된 위화감이 구체화되었다.

“대공의 용기와 지혜를 폄하하는 것은 아니오. 여자의 몸으로 왕좌에 도달한 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하지만 대공 혼자 해낸 것은 결코 아니오.”

“너희가 나를 도왔다는 거야?”

“그야 물론이오.”

로벨은 집무를 위해 잠시 풀어둔 흐룬팅을 끌어당겼다. 허튼소리를 하면 가만두지 않을 작정이었다. 하지만 도반 도트넘 백작은 진지했다.

“하몬 가문과 깁스 가문의 영지를 가질 수 있게 도와준 것이 누구 같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에릭 프란시스 공작에게 이단 혐의를 씌워 백작 가문이 돕지 못하게 만든 것이 누구 같소?”

“...청동사자 호?”

“그리고 지금 볼탄 반도의 군대를 집결시키고 국왕의 의심을 끌어낸 것이 누구 같소?”

“......”

로벨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사실은 알고 있었다. 확신은 못해도 의심은 하고 있었다. 로벨의 극적인 성공 뒤에는 항상 뱀파이어 군주가 있었다.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그때마다 구울이 나타났으니까. 심지어 죽은 자의 왕과 싸울 때는 직접 찾아와 경고까지 했다.

“그게 날 위해서였다고?”

도반 도트넘 백작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길고 뾰족한 송곳니가 인상적이었다.

“우리를 위해서요. 실체할 수 없는 우리 마도의 수호자 말이오.”

로벨은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전장을 휘저으며 용맹을 과시할 때도, 창에 찔려 죽었다 살아났을 때도 자각하지 못한 것이 몇 마디 말로 확실해졌다.

로벨은 저 괴물과 같은 마도의 수호자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