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400화 (400/605)

400화. 종군상인

‘겁쟁이’ 데비의 별명은 아이러니했다.

물론, 겁쟁이가 소심하고 소극적이며 자주 주눅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겁쟁이가 다루는 것은 보통 용병은 엄두도 못 낼 것이었다.

“조, 조심해서 옮겨! 엉? 죽고 싶어?!”

자칫 위협이나 협박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지금은 진솔한 의미였다. 22파운드짜리 화약 상자를 떨칠 뻔한 신참 용병이 새하얗게 질려서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천천히 해! 어차피 포신이 식어야 하잖아!”

겁쟁이 데비는 울프 용병단의 초창기 멤버이자 유일한 포병 소대장이었다. 겁쟁이 명령에 45명의 포병과 15문의 팔코넷이 움직였다.

“좋아! 장약 투입! 조심해서 넣어! 조심하라고!”

울프 용병단의 대포는 모두 청동제였다. 잉그비아 왕국제 주철대포에 비하면 내구성이 우수하지만, 쏘고 또 쏘다 보면 결국은 깨지게 되어 있었다. 심지어 그것이 지금일지 다음일지 알 수 없었다.

“포탄 장전! 포탄 장전!”

시한폭탄 같은 포신 옆에서 포병을 지휘하고 포각을 관측하는 겁쟁이는 사실 겁쟁이라 할 수 없었다.

‘옛 신이시여! 제발 폭발만 참아주소서!’

겁쟁이 데비는 능숙하게 성호를 긋고 지휘봉을 휘둘렀다.

“점화!”

겁쟁이와 심정이 다르지 않은 포병들은 기도문을 외우고 점화구에 불을 붙였다. 후대 사람이 보면 기겁할 원시적인 방법이었다. 기술이 좀 더 발전했으면 화승줄이나 부싯돌 장치의 방아쇠줄을 썼을 것이다. 그러면 이렇게 심장이 떨리지 않았을 것이다.

콰콰과광-! 콰과쾅-!

옛 신이 보우하사 15문 모두 무사히 발사되었다.

겁쟁이 데비는 초고속으로 감사 기도를 올린 후 결과에 집중했다. 4.5파운드 무게의 쇠공이 이름 그대로 매(Falcon)처럼 날아갔다. 푸른 하늘에 점점이 뿌려지더니 중력에 힘입어 얼음성의 성벽을 두드렸다. 쿵! 쿵쿵! 와드드득-!

“우랏차! 좋았어!”

겁쟁이 아닌 겁쟁이와 소대원이 환호했다. 그러나 잠시 잠깐의 기쁨이었다. 재차 포격명령이 떨어지자 모두 울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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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른 경은 손 그늘 아래로 얼음성을 보았다.

성벽 곳곳에 포탄이 박히고, 일부는 황갈색 속살을 보이며 무너져 내렸지만, 전술적으로 볼 때 아직 건재했다.

“구포(臼砲)가 있으면 좋았을 텐데요.”

구포는 거대한 포탄을 곡사로 쏘아 성 안쪽을 공격하는 무기였다. 지금 같은 교착 상황에서 유용했다.

“그건 곤란하오. 민간인 피해가 나오잖소.”

로벨은 성가퀴 사이로 머리를 내밀고 악다구니 쓰는 수비병을 보았다. 용병인지 징집병인지 모르지만 화가 많이 난 듯했다.

호른 경은 다른 기사들이 듣지 못하게 목소리를 조금 낮췄다.

“하얀 숲의 대군이 22마일 앞까지 왔습니다.”

“나도 알고 있소.”

로벨은 새삼스레 왜 그러냐는 듯 흘겨보았다. 호른 경은 그 모습이 예쁘다 생각하다가 정신 차리고 한층 더 진지하게 충언했다.

“사흘을 지체했습니다. 이제 공격해야 합니다. 성벽보다 대포가 먼저 망가질 겁니다.”

로벨은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경은 여러 곳을 다니며 많은 경험을 쌓았지. 하지만 전쟁 경험만큼은 본인이 더 많을 것이오.”

“무슨 말씀이신지... 아.”

번데기 앞에서 주름잡지 말라는 완곡한 표현이었다. 호른 경은 한 박자 반 늦게 이해하고 얼굴을 붉혔다.

“고견이 있습니까?”

“경의 말대로 사흘이오.”

로벨은 잘 들리지 않는 오만가지 욕설을 쏟아붓다 동료들한테 끌려가는 얼음성 수비병을 감상했다.

“사흘간 포격을 했는데 조금도 대응하지 않고 있소.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겠소?”

호른 경은 머리를 쥐어짜서 간신히 대답했다.

“싸울 생각이 없다...?”

“싸울 의지가 없는 것이오.”

식량과 식수만 있으면 성 안에서 몇 년이고 버틸 수 있다 생각하는 자칭 병법자가 많으나 사기(士氣)는 그렇지 않았다.

고립된 환경은 불안감과 초조함을 키운다. 공성병기가 성벽을 깎을 때마다 용기도 깎여간다. 성벽이 무너지기 전에 마음이 먼저 무너진다. 수개월 동안 수성한 도시가 승리하든 패배하든 전설로 전해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자성의 백작은 성급한 것이 흠이고, 얼음성의 백작은 소심한 것이 흠이오. 하루만 더 기다립시다.”

로벨은 느긋했다. 하얀 숲의 군대가 2, 3일 거리로 접근했는데도 개의치 않았다.

사실 둠 노릭스 후작의 정체를 알기 때문이지만, 호른 경과 기사들 눈에는 상대가 누구든 깨부술 수 있다는 자신감으로 보였다.

‘과연 나의 주군이다.’

로벨의 예상대로 하얀 숲은 22마일 밖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리고 외로이 홍역을 치른 얼음성은 닷새째 포격이 시작되는 날 성문을 열었다.

새하얀 백기가 보기 좋게 나부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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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의 모든 귀족이 두려움에 떨었다.

로벨이 이끄는 볼탄 반도 군대가 사자성의 돌체 백작군과 얼음성의 데이브 백작군을 연이어 격파했다는 소식 때문이다.

“제후들은? 제후들의 군대는 무엇을 하는 거야!”

포클랜드 지방의 반(反)로드릭 세력은 거의 와해되었다. 남은 것은 도시의 한줌짜리 수비대와 하얀 숲과 세 갈래 강의 군대였다.

“그들이라고 대단한 수가 있겠소. 몸을 사리는 중이지.”

“차라리 그게 낫소. 제후들마저 패하면 그때는 진짜 왕좌가 넘어가오.”

왕국을 쥐락펴락하는 포클랜드 귀족원에 침묵이 내려앉았다.

그래도 희소식이라면, 무시무시한 볼탄 반도 공작이 얼음성 점령 이후 남하를 멈추었다는 것이다. 수백 명의 기사와 수천 개의 창칼 때문이 아니라 식량 때문이었다.

“이런! 안심하지 마시오. 가을 추수가 금방이오. 곧 있으면 식량 문제가 해결될 테고, 다시 남하를 시작할 것이오.”

어느 날보다 즐거워야 할 가을 추수가 공포로 전해졌다.

“그럼 어찌하오?”

고민해도 답이 없었다. 용병을 사들이는 것은 한계가 있으며, 외국의 힘을 빌리는 것은 코미디였다. 그나마 가능한 수라면...

“휴전을 제안합시다.”

“미, 미쳤소?!”

“저 반란군이 무엇을 요구할 줄 알고!”

말이 좋아 휴전이지 사실상 항복이었다.

“무엇을 요구할지는 들어봐야 아는 것이지.”

“왕좌를 내놓으라 하면...”

“그 정도로 분별없는 사람이 아니오.”

체면을 중시하는 일부 기사가 격렬히 반대했지만, 그래 봐야 왕가의 체면이었다. 자신의 권리와 재산이 더 중요한 다수파가 합의를 이끌어냈다. 설령 협상에 실패해도 가을까지 시간을 벌 수 있으니 시도할 만했다.

“국왕 폐하를 설득하는 것이 문제인데...”

로벨 대공의 배신(?)으로 세가 약해졌다고 하나 왕은 왕이었다.

“본인이 말씀드리겠소. 폐하도 이제 어린아이가 아니니 이해할 것이오.”

“어린아이가 아니니까 문제요.”

누군가 아프게 중얼거렸다. 언제까지 어린아이였으면 의심도, 욕심도, 전쟁도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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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얼음성의 창고와 방어시설을 점검하고 가장 중요한 곳에 가장 신뢰할 수 있는 울프 용병단을 배치했다.

그 덕분에 무분별한 약탈과 방화는 일어나지 않았다. 여자와 아이들은 아성 깊숙한 곳에서 보호받았고, 기사들은 합당한 몸값을 내고 자유를 찾았다.

“사실 인질이지. 다시 덤비지 못하게.”

로벨이 자조적으로 말했다.

인근 영지에서 소집된 데이브 가문 기사들은 무기와 갑옷을 어깨에 짊어지고 성을 떠났다. 구심점이 상실되고, 가족이 인질로 잡혔으니 칼이 있어도 뽑지 못하고, 말이 있어도 오르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걸요?”

어린 집사가 심드렁하게 위로했다.

“영주님이랑 두 번 다시 싸우고 싶지 않을 거예요. 이렇게 풀어줬으니 그 핑계로 소환에 응하지 않겠죠. 가족도 그래요. 기사들이 많이 죽었어요. 용병 패거리가 몰려다녀서 치안이 엉망이죠. 영주님 보호 아래 있는 게 백 배 안전할 걸요. 기사가 모두 성(城)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니까요.”

어린 집사의 말도 옳았다. 몸값을 내고 풀려난 기사 중에는 고마움을 표시하는 기사도 있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성벽을 따라 남쪽으로 걸었다. 문득 아래쪽을 내려다보니 대여섯 명의 병사들이 전리품을 늘어놓고 왁자지껄 떠들었다. 기사의 무구는 명예와 관련 있어 빼앗지 않았지만, 죽은 용병과 항복한 농민병의 것은 아니었다.

명검(名劍)과 명창(名槍)으로 눈이 높아진 로벨에게는 일괄된 잡동사니지만, 이빨 빠진 칼과 뭉툭한 창을 가진 농민병에게는 생존 가능성을 높일 좋은 기회였다.

“저들은 뭐야?”

“어... 음... 매튜 경의 병사들 같은데요? 저 염소수염 아저씨가 늪지성의 마구간지기에요.”

어린 집사가 놀라운 기억력으로 병사 하나를 알아봤다.

“그런데 왜 저기 있는 거야? 늪지성의 군영은 동쪽이잖아?”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울프 용병단이 성 전체를 수비하잖아요.”

“그래도 구역은 지켜야 해. 나중에 통제불능이 될 수 있어.”

로벨은 고민하다가 직접 계단을 내려갔다. 근무 외 시간에 농땡이를 피우던 늪지성의 징집병에게 청천벽력이었다. 로벨은 염소수염의 어깨를 툭툭치고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하기는? 보다시피 살려주십시오!”

태연하게 돌아보던 염소수염 병사는 큰 키에 판금갑옷을 보고 납작 엎드렸다.

“죽인다고 안 했어. 뭐하냐고 물었지.”

“저, 저희는 그냥... 거시기... 그러니까...”

기사가, 그것도 무려 대공이 묻는데 대답을 못하고 눈치를 보았다. 그냥 노는 중이라 하면 호통 한번 치고 돌려보냈을 텐데, 죄진 티를 팍팍 내니 안쓰러웠다. 어린 집사가 로벨 뒤에서 깝죽거렸다.

“사람은 여섯 명인데 창은 열두 개네요? 흐음? 누가 장사꾼이죠?”

역시 순진한 사내들이다. 심문할 것도 없이 시선이 한곳에 모였다.

“허가받은 상인이 아니면 영내 장사가 금지인거 몰라요? 종군상인이 괜히 세금 내고 쫓아오는 게 아닌데요? 무슨 배짱이세요?”

“그, 그냥 남는 물건이 있어서 나눠주는 중이었습니다! 장사가 아닙니다! 정말입니다!”

군대가 가는 곳에 상인이 따라오는 것은 당연했다. 그리고 그 ‘허가된’ 상인은 군대를 이끄는 영주와 긴밀한 관계였다. 영주가 병사들에게 페닝을 주면, 그 페닝이 상인에게 흘러가고, 상인은 세금으로 영주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새삼 비밀이라 할 것도 없는 군대운영 방법이었다.

로벨은 열두 자루의 창을 하나씩 살펴보았다. 로벨의 눈에는 차지 않지만 제법 쓸 만했다. 여러 독립부대가 모인 만큼 소통이 원활하지 않으니, 전리품이 남는 곳에서 싸게 사서 전공이 적은 부대에 파는 꼼수 장사를 하는 듯했다.

“머리가 좋아.”

“가, 감사합니다!”

“칭찬 아니야.”

로벨은 가장 좋은 창을 골라 늪지성 병사들에게 나눠주고 남은 것을 어깨에 올렸다. 자루가 짧은 숏 스피어지만 뭉치면 무게가 상당한데 무거운 기색조차 없었다. 장사꾼은 기사의 완력에 놀라 더욱 머리를 조아렸다.

“네 말이 맞으면 내가 가져가도 되지?”

“그, 그럼요! 당연합니다요!”

로벨은 늪지성 병사들에게 자리로 돌아갈 것을 명하고 장사꾼을 쫓아냈다. 어린 집사가 혀를 찼다.

“우리 영주님은 너무 착해서 탈이라니까. 저런 건 손목을 자르거나 하다못해 채찍으로 다스려야죠. 저렇게 보내주면 또 범죄를 저지른다고요.”

“그럴 필요 있어? 종군상인한테 전해.”

“아, 불법 장사꾼이 있다고요?”

“응. 그럼 알아서 단속할 거야.”

어린 집사는 ‘오!’ 소리 내며 감탄했다. 영주로 지낸 세월이 두 자리 해라 일을 떠넘기는 게 일품이었다. 그러나 어린 집사는 깨닫지 못했다. 로벨이 일을 떠넘기는 사람 중 가장 대표적인 사람이 어린 집사 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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