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화. 자신감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은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 그리고 검은 숲으로 이어지는 길목이었다.
샘 포클 이후 세 지방이 통일되고, 인어해의 바닷길이 열려서 중요성이 떨어졌지만, 오늘날은 또 달랐다.
“파이크맨! 전진!”
최소 10피트 길이의 장창을 쥔 사내들이 보폭을 맞춰 전진했다.
전쟁에도 유행이 있었다. 나팔소리와 함께 우르르 뛰어가 난잡하게 무기를 휘두르는 전쟁은 200여 년 전에 끝났다. 지금은 창으로 만든 방벽과 중장기병의 돌파력을 겨루는 시대였다.
“적의 우익이 앞으로 나옵니다.”
“측면을 노리는가?”
기사들과 맨앳암즈 기병이 깃발을 휘날리며 움직였다. 햇빛을 받아 보석처럼 빛나는 갑옷과 말초적인 근육이 꿈틀거리는 전투마가 장엄했다.
“너무 뻔하군. 중장기병을 전진시켜.”
사자성의 돌체 백작은 정석대로 움직이는 볼탄 반도 군대를 보며 크게 비웃었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아주 노래를 부르기에 얼마나 대단한가 했더니, 고작 저 정도인가?”
마음에 없는 소리였다. 수백 기의 기마대를 보고 비웃는 사람은 전쟁을 글로 배운 샌님이거나 정신이상자였다. 돌체 백작은 둘 다 아니었다. 하지만 겁먹은 휘하 기사들과 눈치 살피는 고참 용병들에게 용기를 심어줘야 했다.
“선두의 깃발은 호른 가문입니다.”
“단풍나무 숲의 호른 경?”
“자작나무 숲입니다.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의 장창병이 20야드 거리로 가까워졌다. 몇 걸음만 더 나가면 창과 창이 부딪칠 것이다. 그 순간,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을 필두로 한 볼탄 반도의 기사들이 박차를 가했다.
“Charge...!”
반 마일의 거리가 무색하게 돌격외침이 울려 퍼졌다. 무쇠로 된 빗방울이 쏟아지듯 땅이 흔들리고 수십만 파운드의 질량이 대기를 압박했다. 300여 명의 중장기병이 가진 힘이었다.
“저지해라! 돌격! 돌격!”
돌체 백작은 맨앳암즈 기마대에게 돌격을 명령하고 적의 좌익을 살폈다. 기사들을 전부 우익에 배치했으니 상대적으로 좌익의 수비는 약할 것이다.
“우리쪽 기사들을 돌격시키시오!”
“저, 적의 대포가 그대로 있습니다.”
“고작 20문이오! 산개해서 뚫을 수 있소! 아군의 용병이 버티는 동안 로벨 로드릭을 잡아야 하오!”
돌체 백작의 조카이자 사자성의 부관인 돌체 자작이 입을 꾹 다물었다. 다른 기사들도 비슷했다. 돌체 백작은 답답해서 크게 소리쳤다.
“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그... 로벨 로드릭이 문제입니다.”
우익의 기사들을 이끄는 게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면, 무적무패의 기사 로벨 로드릭은 아직 적진에 있었다.
“영약한 자입니다. 약점을 보일 리 없습니다. 부, 분명 함정을 파놓고...”
“이런 평야에서 무슨 함정! 로벨 로드릭이 그리도 무서운 것인가!”
돌체 백작은 겁 많은 포클랜드 기사들을 징계하고 싶었다. 시간이 있으면 그랬을 것이다. 중앙의 장창병이 엇갈리며 피와 비명이 쏟아졌다. 그와 거의 비슷하게 기사와 기마 용병이 충돌했다. 피를 뿌리는 것은 비슷하지만, 비명은 들리지 않았다. 쇠와 쇠가 부딪치는 굉음만 가득했다.
“아, 아군이 밀립니다!”
기사와 용병의 차이일까, 아니면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이란 자가 소문 이상으로 대단한 작자일까. 볼탄 반도의 기사들은 마주 달려온 포클랜드 중장기병대를 쐐기꼴로 갈랐다. 쇠를 자르는 쇠의 모습이었다.
“저것들이 어떻게...!”
볼탄 반도의 기사가 용맹하다고 하나 저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기마전은 질량의 싸움이었다. 비슷한 숫자에서 일방적으로 밀릴 수 없었다.
“호른 경이 아니야! 호른 가문의 깃발이 아닙니다!”
랜스와 랜스가 엇갈리고, 흙먼지와 피보라가 시야를 어지럽히는 가운데 새로운 깃발이 올라갔다. 창끝이 피에 젖어 축 처졌는데, 억지로 창대를 휘둘러 문장을 과시했다.
“로드릭! 로벨 로드릭! 대공의 깃발입니다!”
“이... 이놈들이 비열하게 깃발을 속이다니...!”
우스운 소리였다. 로벨이 이끄는 기사들이었으면 싸우지 않았을 거란 자백이니까. 돌체 백작은 번뜩 정신 차리고 재차 명령했다.
“적진이 비었다! 지금이라도 돌격해! 적의 좌익을 분쇄하고 배후를 친다!”
“느, 늦었습니다! 로드릭이 옵니다!”
로벨 로드릭 대공이 이끄는 300기의 기마대가 포클랜드의 좌익을 찢어발기고 곧장 중앙으로 달려왔다. 이쯤 되면 마술(馬術)이 아니라 마술(魔術)이었다.
“이쪽으로 온다! 으아앗-!”
돌체 백작과 휘하 기사들도 보고 있었다. 볼탄 반도의 풀을 먹은 말은 800야드를 달려도 지치지 않는지 기세가 무시무시했다.
‘싸워야 한다고?’
흥분한 채 생각해도, 침착하게 다시 생각해도 미친 짓이었다. 애초에 로벨 로드릭과 회전을 벌인 것이 실수였다. 얼음성의 데이브 백작 말대로 수성했어야 했다.
“빌어먹을... 후퇴해라! 후퇴!”
이럴 때는 솔선수범의 자세가 되어 있었다. 말머리를 돌리고 냅다 동쪽으로 달렸다. 백작을 보필하는 자작과 수행기사들은 황당해 하는 한편, 이해도 하였다.
“후퇴하라! 후퇴하라! 백작님을 따라라!”
지휘부가 붕괴되자 간신히 버티고 있는 중앙군과 칼 한번 뽑지 않은 우익의 기사들은 저절로 와해되었다.
사람과 말의 시체, 버려진 병장기가 가득한 포스트 포레스트 평야에 백마를 탄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만 남았다. 승리.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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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보름 동안 3번 싸워 모두 승리했다.
그중 가장 큰 승리는 사자성의 돌체 백작이 이끄는 포클랜드 북부 연합군 격파였다. 이로서 로벨 로드릭 군은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을 완전히 장악했다. 그러나 아직 갈 길이 멀었다. 포클랜드의 옛 국경 요새인 얼음성이 앞을 막고 있었다.
“워. 워. 괜찮아. 괜찮아.”
로벨은 지휘막사 앞에 묶여있는 모닝스타를 다독였다.
전쟁은 거칠고 험한 일이다. 뛰어난 기사도 아차하는 순간 죽을 수 있고, 우수한 전투마도 작은 상처에 병들 수 있었다.
로벨은 모닝스타의 네 다리를 꼼꼼하게 살폈다. 부러진 화살이 박히지는 않았는지, 편자가 빠지지는 않았는지, 뼈가 부러지거나 상하지는 않았는지 철저히 확인한 후 주머니에서 각설탕을 한 움큼 꺼냈다.
“착하다. 착해. 이거 먹고 쉬어.”
모닝스타는 입술을 뒤집고 푸릉! 푸릉! 소리 내어 울었다. 옆의 전투마들이 군침을 흘렸다. 설탕은 귀한 향신료라 전투 직전에 각성제로 먹이지 로벨처럼 아무 때나 먹이지 않았다.
“주군, 기사들이 기다립니다.”
호른 경이 막사 밖으로 나와 로벨을 찾았다. 로벨은 짧은 휴식이 끝났음을 깨닫고 한숨 쉬었다.
“지금 가겠소.”
로벨은 설탕에 취한 모닝스타와 작별한 후 무거운 발을 옮겼다. 연전연승한 기사답지 않은 무게였다.
“제자리에 앉으시오. 주군께서 오셨소.”
삼삼오오 모여서 떠들던 기사들이 로벨을 보고 자리에 앉았다. ‘잘 쉬었소?’ 따위의 인사는 필요 없었다. 로벨 로드릭 군은 지금 2시간째 작전회의 중이었다.
“검은 숲은, 제임스 가문은 소식이 없소?”
“아직이오.”
거리가 멀어서 ‘아직’이라 생각하는 기사는 없었다. 세 번에 나눠 보낸 전령이 모두 복귀했다.
“제길... 검은 숲마저 그렇다면 다른 제후들은 말할 것도 없겠군.”
“세 갈래 강의 군대와 하얀 숲의 군대가 이동 중이란 보고요.”
“뭣? 노릭스 가문이 국왕편에 섰다고?”
볼탄 반도의 용감한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사실 포클랜드‘만’ 상대하는 거면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이번의 적은 왕국이었다. 각지의 제후들이 돌을 쥐고 편을 갈랐다.
로벨에게 패한 적 있는 사트로 가문이 침묵한 것은 다행이나, 교분이 있는 제임스 가문까지 묵묵부답인 것은 충격이었다. 로벨은 웅성거림이 잦아들 때 뜬금없이 말했다.
“에르나 왕국은 우리 왕국이 동원 가능한 군사를 약 2만 명으로 보았소.”
과거 아이언베어 요새 전투 때 동원한 군사가 약 1만 명이었으니, 거기서 더 징집하면 2만도 충분히 가능했다.
“나를 따르는 볼탄 반도 군대가 5천 명이니, 1만 5천 명이 적이라 생각하면 편하오.”
“그게 그렇게...”
머리가 좀 도는 기사들은 어이가 없어서 실소했다. 허나, 수학천재 로벨은 이견을 받지 않았다.
“우리보다 ‘고작’ 3배 많소. 그렇지 않소?”
셈에 약한 기사도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다. 이미 격파한 적군이 2천이 넘고, 침묵하는 제후가 여럿 있었다. 로벨이 말이 사실이라면 3배가 될 수 없었다. 누군가 실없이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많지도 않은데?”
기사다운 발언이었다. 똑똑한 기사나 용감한 기사나 피식- 핏- 웃었다.
“얼음성을 점령하면 이 근방의 많은 영주들이 항복할 것이오. 혹여나 협상을 생각하는 자가 있다면 그때까지 마음속에 넣어두시오. 우리는 좀 더 이길 수 있소.”
그 뒤로 갤리선을 이용한 보급문제와 새로 고용할 용병문제가 거론되었으나 로벨이 간섭할 만큼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로벨은 몇 가지 결론과 몇 가지 유보를 확인한 후 차분히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소. 다들 돌아가서 말을 씻기고 배불리 먹이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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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탄 반도 대 포클랜드 전쟁에서 로벨이 하는 일은 기계적이었다. 행군, 휴식, 회의, 행군, 전투, 회의, 행군, 휴식, 전투, 회의... 4천 8백 명의 군사가 매일 같이 12마일을 전진했다. 전투가 있는 날은 그보다 좀 못 갔지만, 통상적으로 볼 때 엄청난 진격속도였다.
“그럴 수밖에... 식량이 없어.”
포클랜드의 기사들과 각지의 영주들은 로벨의 무시무시한 진격에 겁먹고 우왕좌왕했다. 그러나 로벨은 로벨 나름대로 고민이 많았다.
어린 집사가 백 플레이트를 벗기고 땀에 젖은 더블릿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붕대 감은 뽀얀 살결이 드러났다. 피 끓는 청춘 집사에게 너무... 너무 고약했다.
“윽! 냄새!”
“...나 지금 진지한 이야기 중이야.”
“그치만 냄새가 심한 걸 어떡해요!”
로벨은 억울했다. 갑옷을 벗기 힘든 전투에서는 오줌을 그대로 싸는 경우도 있는데, 로벨은 그 정도까진 아니었다.
“붕대 갈아드릴게요.”
어린 집사가 물수건과 린넨 붕대를 가져왔다. 목욕을 못 하니 물수건으로 대강 닦았다.
“붕대는 됐어. 한동안 갑옷을 벗지 않을 거야.”
부상 때문에 감은 붕대가 아니었다. 두꺼운 언더아머와 단단한 플레이트를 입으면 굳이 필요 없었다. 어린 집사는 ‘한동안’이란 말에 집중했다.
“얼음성을 공격할 건가요?”
“응. 거기를 점령해야 이 일대 영지를 장악할 수 있어. 그래야 식량 징발이 쉬워지고.”
로벨은 최고의 전쟁 전문가였다. 로벨이 세운 작전에 어린 집사가 왈가왈부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은요? 그다음은 어디를 공격하나요?”
“글쎄... 상황을 봐서 결정해야지. 사자성을 쳐서 허리를 끊거나, 해안을 따라 방어시설을 만들거나...”
로벨은 성실히 대답하다가 어색한 분위기를 감지했다.
“국왕하고 협상하는 선택지는 없나요?”
어린 집사가 나직이 물었다. 이럴 때는 항상 금전적 문제가 있었다.
“얼마가 모자란데?”
“아직은 괜찮지만, 가을이 오면 33만 페닝이 사라져요.”
울프 용병단의 전쟁수당이나 가을 농사를 망친 세수 피해가 아니었다. 40일의 의무종군일이 끝나면 기사들이 끌고 온 4천여 명의 병사를 먹여 살려야 했다.
“최대한 빨리 점령해야겠네.”
“제 말은 그게 아닌데...”
“그게 그거야. 국왕 폐하를 협상 테이블로 모셔야 하니까.”
로벨은 무적무패의 자신감으로 어린 집사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땀 냄새가 심해서 썩 감동적이진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