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98화 (398/605)

398화. 선택

로벨의 심기가 불편했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대외적으로 알려지길 누구 하나 죽어 나갈 만큼 몹시 불편했다. 용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운할 볼탄 반도의 주인이 화가 났는데, 그 앞에서 부채질할 만큼 간 큰 영주들은 없었다.

“이거 참... 불똥이 엉뚱한 곳에 튀는데?”

파도성의 적법한 주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까슬까슬하게 자란 수염을 긁적였다. 반면, 호수성의 비공식 주인 볼트 헤르만 전(前)백작은 지팡이를 무릎에 올리고 주름을 그렸다.

“대공이 바보짓을 했소.”

페르젠 백작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본인도 대공을 썩 좋아하진 않지만, 패자가 은혜를 입고 비하하는 꼬락서니는 불쾌하군.”

마녀 키르케가 있었으면 ‘거짓말...’이라고 중얼거렸을 것이다.

로벨을 경쟁자로 보고 시기, 질투, 음해하기는 했으나 그것도 옛날 일이었다. 기사로서, 영주로서, 사내로서 패배를 인정한 후 경쟁심은 존경심이 되었다. 그저 자존심이 남아 시인하지 않을 뿐이었다.

연륜이 깊은 헤르만 백작은 치기 어린 페르젠 백작의 마음을 읽었으나 그냥 두었다.

“강철성을 내버려 둔 것을 말하오. 지난 전쟁 때 끝을 봤어야 했거늘... 기사다운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지.”

“기사가 기사다워야 좋은 거지. 참나.”

황혼에 접어든 노백작과 세상 물정 모르는 젊은 백작이 어울리기는 힘들었다. 서로를 한심하게 보다가 말았다.

“전쟁이 시작될 거요.”

“그쪽하고 강철성?”

“그 일은 잊으시오.”

“그럼 설마 국왕 폐하와 우리 대공이 싸운단 말이오?”

“가능성이 높지.”

페르젠 백작은 고개를 젖히고 ‘와하하!’ 웃었다.

“지금의 국왕을 왕좌에 앉힌 게 대공이오. 포클랜드의 바인 경? 안타까운 일이오. 하지만 전쟁은 아니오.”

그러나 헤르만 백작은 웃지 않았다.

“늙은이의 문제는 자신이 겪은 것만 고집하는 것이고, 젊은이의 문제는 지나간 것을 되새기지 않는 것이지.”

“뭔 소리요?”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 왜 아직도 이곳에 있는 것이오?”

페르젠 백작은 입술을 굳게 닫았다가 간신히 열었다.

“초대를 받았으니까. 뭐 하나 결론 난 것도 없고...”

“아니지. 아니야. 백작도 느끼고 있는 것이오. 이미 한 번 겪었으니까.”

로벨은 자신의 세우고 지켜준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쳐냈다.

“로벨 로드릭 대공은, 우리의 무서운 주군은 오래전에 전쟁을 결심했소.”

“웃기는군. 증거. 증거가 있소?”

볼트 헤르만 백작은 정적의 아들을 딱하게 보았다.

“전쟁을 피할 방법이 훤히 보이는데 모른 척하는 것이 증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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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그거야 쉽죠. 결혼하면 돼요.”

“...진짜?”

“국왕 폐하가 원하는 게 그거잖아요. 고삐를 채우고 미래를 낚는 거요.”

로벨은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미래를 왜 낚아?”

“후계자 말이에요. 영주님이랑 공주님이랑 맺어지면 가깝게는 사돈이 되고, 나중에는 핏줄이 되죠. 외조카가 대공이 되니까요.”

“음... 거기까지 생각할까?”

“보통은 거기까지 생각해요.”

어린 집사는 정치의 정자도 모르는 주인을 질타했다.

“그런데 결혼을 안 하겠다고 도망치고, 나아가 군사를 모으고 바인 경을 살해했으니, 솔직히 제가 국왕 폐하라도 의심하겠어요.”

“안 하는 게 아니라 못 하는 거잖아. 그리고 바인 경의 죽음은 뱀파이어 짓이고.”

“그걸 어떻게 이해시켜요? 칫! 고자라고 할까요?”

“고자? 고자가 뭐야?”

로벨이 순진하게 되묻자 어린 집사 얼굴이 빨개졌다.

“그런 게 있어요. 영주님은 몰라도 돼요.”

이렇게 순진한 처녀를 희대의 야심가로 오해하는 국왕과 제후들이 안타까웠다.

로벨은 손질이 끝난 흐룬팅을 칼집에 밀어 넣고 턱 아래 괴었다.

“결혼 말고는 방법이 없어?”

당연히 있었다. 작위와 봉토를 반납하거나, 옛 신의 이름으로 고해성사하거나, 울프 용병단을 축소하거나, 영외의 권리를 포기하면 의심 많은 포클랜드 귀족들도 로벨의 진의를 믿어줄 것이다.

‘그리고 기쁘게 볼탄 반도에 간섭하겠지.’

어린 집사는 이모저모 고민한 후 한 마디로 줄였다.

“없어요.”

로벨은 낙담했다.

“국왕 폐하가 믿어주길 바라는 수밖에 없구나.”

수차례 말했듯 지난한 일이었다.

보리 탈곡이 끝나고 밀밭이 노랗게 익어갈 무렵, 로벨이 보낸 편지의 답장이 돌아왔다. 로벨은 왕실 서기관의 요란한 문장력을 저주한 후 핵심 내용을 한 줄로 요약했다.

“수행원을 열 명만 데리고... 포클랜드 시티로 오라는데?”

로벨의 집무실에 옹기종기 모인 자칭타칭 최측근들이 일제히 반발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죠!”

“영주님의 목을 가지고 싶어 하는 기사가 못해도 두 자릿수입니다.”

“으앙! 가면 안 돼요!”

“이것은 주군을 모욕하는 겁니다. 벌써 반란이라 확정 지은 태도 아닙니까.”

로벨은 무거운 편지를 치우고 친구들을 보았다. 나이와 출신이 전부 다른 저들이 한마음이 된 것은 오랜만이었다.

“그럼 어떡해?”

로벨은 기대를 가지고 물었다. 그러나 충족되지 않았다.

“그냥 무시해요. 지들이 쳐들어올 거야 어쩔 거야? 몇 년 잠자코 지내면 흐지부지되겠죠.”

“그게 말이오, 방구요? 코흘리개가 삐진 것도 아니고 그게 그렇게 넘어가겠소?”

“선물을 보내면 어때요? 선물을 싫어하는 사람은 없잖아요? 그리고 오해를 푸는 거죠.”

“저들이 저리 모함한다면 아예 힘을 보여주시지요. 그것이 확실합니다.”

궁정식으로 표현하면 어린 집사와 마녀 키르케는 온건파, 펄프 대장과 호른 경은 강경파였다. 그러나 방법의 차이일 뿐, 전쟁을 원치 않는 것은 모두 같았다.

“어휴. 바보 같은 소리 좀 하지 마요. 그것도 선물이 아니라 뇌물이잖아요.”

“뇌물이 왜요? 뭐라도 하는 게 맞죠! 정말 멍청한 집사야.”

“이 멍청이가 자꾸 멍청이라고...”

“멍청해. 멍청해. 멍청해. 멍청해...”

점잖은 회의가 깨물고 할퀴는 몸싸움으로 변할 때쯤, 이 자리에 참석하지 않은 상인 친구가 찾아왔다.

“영주님, 문제가 생겼습니다.”

기사, 집사, 마녀, 용병대장의 시선이 동시에 돌아갔다. 헨리 피터 상회장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뙤약볕에 언덕길을 오르느라 땀을 뺀 모양이다. 행상인 시절에는 탄탄한 몸을 가졌었는데, 나이 탓인지, 직위 탓인지 살이 부쩍 올랐다. 지금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포클랜드 시티 지부의 상회 직원이 전원 쫓겨났다고 합니다.”

“뭐라고요?!”

마녀에게 머리채를 잡힌 어린 집사가 벌떡 일어났다.

“그것만이 아닙니다. 고정하고 들어주십시오. 영주님의 명의로 된 포클랜드 시티의 재산과 권리가 전부 압류되었다고 합니다.”

“이, 이, 이 국왕놈이 미쳤나!”

어린 집사의 불경함을 탓할 겨를이 없었다. 기가 막힌 타이밍으로 까마귀 성의 전령이 찾아왔다. 어린 집사를 말리느라 정신없는 로벨을 대신해 호른 경이 내용을 일러주었다.

“포스트 포레스트의 검문이 강화되어 상행이 불가능하다고 하는군요.”

“끄응... 검은 숲의 제후들을 압박하는군.”

펄프 대장이 신음을 흘렸다. 검은 숲의 봉신들은 물론이고, 제임스 가문의 기사들도 당황하고 있었다. 무려 국왕의 일이었다. 함부로 나서지 못할 것이다.

“진짜 갈 데까지 가는군.”

재산압류와 외교압박 다음은 뻔했다. 그래서 세 번째 소식이 전해졌을 때는 아무도 놀라지 않았다.

“국왕의 기사들에게 소집령이 내려졌습니다.”

그중 로드릭 가문은 제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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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비아 왕국의 기사들은 선택의 기로에 섰다. 정통성을 가진 국왕과 막강한 힘을 가진 대공 중에 하나를 택해야 하는 갈림길이었다.

상식적으로 보면 충성을 맹세한 국왕의 소환에 응해야 옳았다. 그러나 펜과 종이보다 칼과 창으로 이견을 좁히는 일이 많은 시대였다. 왕국 전체를 뒤흔드는 싸움에 맹세나 맹약은 깃털보다 가벼웠다.

로벨은 플레이트와 스커트를 두드려 잠금장치를 확인한 후 소드 벨트를 한 칸 쪼였다. 오랫동안 입은 갑옷이라 제 몸처럼 편했다. 고급스러운 정향유 냄새도 마음에 들었다.

“휴우...”

그러나 마음은 편하진 않았다.

기사가 되기는 바랬지만 전쟁을 원한 적은 없었다. 이기고 또 이겨서 드높은 명성을 얻었으나 싸움은 끝이 보이지 않았다.

“주군, 모두들 기다립니다.”

어린 집사가 머리카락을 모아 단단히 묶어 주었다. 그것으로 마지막 준비가 끝났다.

“...가자.”

오른쪽 옆구리에 파나케아 투구를 끼우고, 왼손을 아론다이트 칼자루에 올린 채 집무실을 나갔다. 호른 경과 아자르 경이 좌우로 비키며 길을 열어주었다. 그 뒤로 자연스레 어린 집사, 리암 수사, 마녀 키르케 등이 따라붙었다.

2층 난간 아래로 메인 홀을 보니 일군을 이끌고 온 각 지역 영주들이 모여 있었다. 숫자를 헤아릴 필요 없었다. 수일 전부터 보고받아 알고 있었다.

“대공!”

“주군께서 내려오셨소!”

로벨이 등장하자 휘황찬란한 갑옷의 기사들이 서서히 갈라졌다. 어느 선지자가 붉은 바다를 가른 것처럼 강철의 바다를 갈랐다.

로벨은 기사들을 지나 아성 밖으로 나갔다. 그리 크지 않은 늑대성의 연병장이 거친 사내들로 가득 메워졌다. 서임 받은 지 얼마 안 된 젊은 기사와 성 안에 발을 들일 엄두를 내지 못한 기사 종자와 밥값을 운운하며 사납게 웃는 용병들이었다.

“북군(北軍)은 먼저 출발했습니다. 남은 병사들은...”

성 안에 모인 병사가 끝이 아니었다. 활짝 열린 성문 너머로 몇 배나 되는 인파가 몰려 있었다. 삐뚤삐뚤한 몽둥이에 녹슨 쇠붙이를 감고 창이라 우기는 농부와 몇 안 되는 화살을 애지중지 품은 사냥꾼과 긴장 탓에 몸을 떠는 수레꾼과 여름 햇살에 눈살을 찌푸리는 양치기들이었다.

“비무장 인원을 제외하고 총 4,870명입니다.”

충성을 맹세한 국왕과 싸우는 것은 패륜이었다. 옛 신의 이름으로 선언한 맹세를 어기는 일이며, 수백 년 동안 이어진 주종의 계약을 어기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볼탄 반도의 수많은 기사와 자유민이 로벨의 깃발 아래 모였다. 로벨이 원치 않은 일이라 해도 대단한 업적이었다.

로벨을 본 병사들은 잡담을 멈추고 자세를 바로 했다. 침묵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져갔다. 마침내 성 밖 농민병까지 입을 다물자 볼탄 반도의 왕이 말했다.

“이 전쟁은 정의가 아니다.”

첫 구절이 탐탁지 않았다. 가까이 있는 기사들이 웅성거렸다.

“이 전쟁은 의심과 욕심과 편견과 오만으로 시작되었다.”

로벨은 따가운 햇볕에 눈을 찌푸리고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따라서! 국왕의 부덕함과 볼탄 반도의 기치를 말하지 않겠다! 전쟁은 시작되었고, 우리에게 주어진 것은 이기느냐 지느냐, 사느냐 죽느냐의 선택뿐이다!”

전장에서 닳은 용병들이 동조했다. 거리가 멀어 실시간으로 전해 듣지 못한 성 밖 징집병도 뒤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깟 정의는 높으신 분들이나 챙기는 거지.

“내가 약속한다! 볼탄 반도의 주인이 약속한다! 무적무패의 기사가 약속한다! 우리는 이길 것이고 살아남을 것이며 명예와 재산을 가지고 다시 돌아올 것이다!”

애국심이란 단어가 등장하지 않은 시대에 최고의 연설이었다. 1천 5백 명의 용병과 3천 명의 징집병이 우렁찬 함성으로 증명했다.

기사 로벨 로드릭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출진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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