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7화. 예상
로드릭 시티 동서남북에 주둔지가 세워졌다.
규모는 제각각 200명에서 600명으로, 도시 안의 울프 용병단까지 합치면 총 2천 명에 이르렀다. 이것이 놀라운 이유는, 로벨이 소집한 군대가 아니었다.
“군대만 모인 게 아니에요. 저것 좀 보세요.”
어린 집사가 성벽 아래 옹기종기 모인 피난민을 가리켰다. 천막 비슷한 것을 두어 개 만들고 한 그릇도 안 되는 귀리죽을 나눠 먹는데 여러모로 열악했다. 여름이라 다행이었다. 늦가을에서 초봄이었으면 동사자가 두 자릿수로 나왔을 것이다.
“호수성 영지민이에요. 중간에 좀 줄었지만, 그래도 300명은 되어요.”
“300명...”
예전의 로드릭 마을 인구가 그 정도였으니 결코 적지 않았다.
로벨은 근심거리가 끊이지 않아 한숨 쉬었다. 그래도 내정(內政)에는 전문가가 많았다.
“뉴 로드릭 마을 옆에 작은 마을을 하나 더 개척해요.”
“그게 가능해?”
마을을 늘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볼탄 반도의 땅은 거칠고 잡목이 많아 밭을 일구기 힘들었다.
“가능하게 해야죠. 저대로 두면 도시 빈민이 될 텐데요. 감당 안 돼요. 리암 수사님이 설득하고 있으니까 기다려 보세요.”
개간에 필요한 농기구와 가축, 내년 가을까지 지원한 식량과 첫해에 심을 구황작물 목록 등을 대략적으로 작성해 놓았다. 과연 어린 집사였다.
“물론, 저기 저 호수성 백작이 묵인할 때 가능한 일이에요. 자기 농민이니 자기가 데려가겠다고 하면 곤란해지죠.”
로벨은 팔짱을 끼고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방긋 웃었다. 볼트 헤르만 백작이 그럴 것 같지 않았다.
“빚이 있으니까 아무 말 못할 거야. 그래도 관례가 있으니까 금화로 보상해주자.”
“얼마나요?”
“두 당 50로닝이면 되지 않을까?”
새끼 양 가격도 안 되었다. 어린 집사는 ‘이히힛!’ 웃었다.
“그럼 문제는 강철성이네요? 저치들이 고개를 숙여야 호수성이 포기할 텐데요.”
“아니야. 진짜 문제는 포클랜드야.”
로벨은 성벽을 따라 서쪽으로 걸었다. 로드릭 항으로 향하는 늑대도로 한켠에 포클랜드 사절단이 주둔 중이었다.
‘저들을 핑계로 화해시키는 건 좋아. 그런데 다음은 어쩌지?’
로벨이 정치와 모략에 어두워도 눈치는 있었다. 친목이나 다지려고 세 자릿수 병력을 보내진 않았을 것이다. 의심하고, 경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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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릭 시장의 상인들은 살판났다.
늑대성에서 술과 고기를 보내준다 해도, 누구 말마따나 입맛 까다로운 기사와 1천여 명의 용병 패거리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거친 사내 집단이라 먹을 것과 마실 것은 항상 부족했다.
그렇다고 호수성에서 한 것처럼 약탈할 수도 없었다. 성 밖에 500명, 성 안에 300명, 도합 800명의 울프 용병단이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늑대성 영역 밖에서 몰래 해결하려 해도 호른 성, 가시성, 바위성 등등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이 에워싸고 있으니 마뜩치 않았다.
결국, 필요한 물자는 전부 페닝을 주고 사야 했으니, 로드릭 시장의 상인들은 때 아닌 호황을 맞았다.
“왜들 저러는지 몰라도 1년쯤 머물다 갔으면 좋겠네.”
어느 동네와 달리 속 편한 시민들이었다.
승리도, 명예도, 배불리 먹고 나서 할 일이다. 40일의 의무종군일이 지나자 백작들은 휘하 기사들의 전쟁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금화가 물 새듯이 빠져나갔고, 진지하게 회군을 고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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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성 안팎을 돌며 분위기를 살폈다.
포클랜드 사절 때문인지, 아니면 재정 부담 때문인지 첫째 날의 살벌함은 거의 사라졌다. 시장에서 마주친 용병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안부를 물었다. 개와 고양이처럼 으르렁거리던 기사들도 애써 못 본척했다. 어느 한쪽이 철수하면 자연스레 휴전이 될 듯했다. 로벨이 우쭐해서 말했다.
“내 예상대로야.”
“...거짓말하지 마요. 경제개념이 콩알만큼도 없으면서.”
어린 집사가 뾰족하게 찌르자 허풍쟁이가 낄낄거렸다.
“그런데 기사 나리, 호수성과 파도성은 그렇다 쳐도, 강철성은 왜 저럽니까요?”
허풍쟁이 외에도 군략에 밝은 사람은 의문을 표시했다.
강철성은 엎어지면 코 닿는 곳에 있었다. 자신의 영지에서 싸울 때는 의무종군일이 적용되지 않으니 기사들의 참전비용을 줄일 수 있으며, 당면한 보급문제도 해결되었다.
“다른 백작들이 연합할까봐 그런 거잖아?”
“에헤이, 그런 거면 기사 몇 명만 두고 감시하면 되죠. 저 많은 군대가 주둔할 필요 있습니까요?”
숫자가 제법 줄었어도 아직 2, 300명이었다. 체불되는 급료도 급료지만, 하루에 먹어치우는 식량이 한 수레였다. 허풍쟁이가 재정문제도 거론하자 로벨과 어린 집사가 과하게 놀랐다.
“와아, 허풍쟁이 제이콥 맞아?”
“...기사 나리의 충직한 종복 제이콥이 맞습니다요.”
로벨은 장난기를 지우고 진지하게 뱀파이어 군주를 생각했다. 호수성에서 흘릴 피가 줄어 심통이 난 것은 분명했다. 스스로 왕이라 칭할 만큼 자존심 강한 괴물이 순순히 물러날 것 같지 않았다.
“바인 경을 노릴 거야.”
“예? 누가요?”
로벨은 주위의 귀를 생각해 대답하지 않았다. 그래도 대비는 충분했다. 아자르 경과 싸움개의 맨앳암즈 1소대를 호위로 붙였으니 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수성에는 더스틴 폴라 경이 있었다.
‘파도성을 공격하지도 않을 테고...’
아무리 전쟁이 좋고 피가 좋아도 불리한 싸움을 할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나도 모르겠어.”
“그게 뭡니까요.”
전(戰)자와 군(軍)자가 들어가는 분야에서는 천재인 로벨조차 답을 모르자 허풍쟁이는 김이 빠진 듯 혓소리를 내었다. 로벨이 변명하려고 입술을 떼었을 때 훼방꾼이 나타났다.
“기사님! 기사님!”
로드릭 시티에서 저리 경박하고 친근하게 ‘기사님’을 찾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어어? 키르케에요.”
마녀 키르케가 아야와 이야카를 데리고 뛰어왔다. 셋 다 숨이 찬 것이 늑대성에서 쉬지 않고 뛰어온 듯했다. 로벨은 진지하게 물었다.
“왜 그래? 배고파?”
“이잇! 배고프면 뛰겠어요?”
“키르케라면 그럴 것 같아. 음... 빨리 먹으려고.”
“제가 바보 멍청인 줄 아세요!”
길거리에서 목청 높이는 것은 품위유지에 안 좋았다. 로벨은 웃음을 기침으로 감추는 시민들을 보고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 무슨 일이야?”
마녀 키르케는 평소답지 않게 심각했다.
“싸움이 났어요! 포클랜드에서 온 기사님이요!”
로벨이 우려한 대로였다.
“상대는? 아니, 그것보다 아자르 경과 싸움개는?”
아무리 마도의 수호자라 해도 우악스러운 기사와 백전연마 맨앳암즈 소대를 당해낼 수 없다.
‘아, 아닌가?’
늑대의 왕이나 마왕 버그베어를 생각하면 당해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쉽지는 않을 것이다. 그런고로 바인 경이 습격 받은 게 믿기지 않았다.
“아뇨! 아뇨! 그 반대에요! 포클랜드 기사님이 먼저 싸움을 걸었어요!”
펄프 대장이 수시로 하는 말이 있었다. 전쟁과 사랑이 다른 것은, 어느 한쪽만 결심해도 성사된다는 것이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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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패싸움이 일어난, 고상하게 말하면 대규모 결투가 벌어진 서쪽 주둔지로 달려갔다. 얼마나 서둘렀는지 말(馬)이 없는 어린 집사 등이 뒤처져서 같이 가자 소리 질렀다.
“워! 워!”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당기고 제자리를 한 바퀴 돌았다.
포클랜드 사절단 주둔지에서 불과 20야드 떨어진 도로변이었다. 차가운 땅바닥에 얼굴을 묻고 꿈틀거리는 기사 종자, 잘린 팔뚝을 붙잡고 살아보겠다고 애쓰는 늙은 용병, 제 주인을 찾아 시체를 뒤집는 어린 시종 등으로 엉망이었다.
“바인 경!”
로벨이 힘껏 소리쳤다. 안 그래도 살짝 하이톤인데, 목청을 높이니 카랑카랑하게 울렸다.
“바인 경! 바인 경, 어디 있소!”
“기, 기사 나으리...”
바인 경 대신 싸움개 패거리가 다가왔다. 로벨은 오랜만에 주인을 태우고 달려 신이 난 모닝스타를 버리고 훌쩍 뛰어내렸다.
“이게 무슨 일이야? 바인 경은 어디 있어?”
“저, 저쪽에...”
싸움개가 현장 한 곳을 가리켰다. 하프 아머 차림의 기사가 피 웅덩이에 잠겨 있었다. 얼굴은 안 보이지만 출혈량을 보아 죽은 것이 확실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칼에 맞아... 흥분한 포클랜드 기사들이 차례로 덤볐지만 당해내지 못했습니다.”
“아자르 경은 뭐하고? 너희들은 뭐했어?”
싸움개 패거리가 서로를 보았다. 군데군데 피가 묻긴 했지만 싸운 몰골은 아니었다.
“저 포클랜드 나으리가 먼저 결투를 신청했습니다요. 그래서 저희도 끼어들 수 없었습니다요.”
“저 나으리가 쓰러진 뒤에는 죄다 뛰쳐나와서 손쓸 겨를이 없었고요. 아자르 나으리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로벨은 차갑게 식은 바인 경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강철성의 기습이나 뱀파이어의 암살만 걱정했다. 바인 경이 먼저 결투를 신청할 줄 몰랐다.
“저 멍청이가...”
로벨의 잘못은 아니었다. 국왕의 사절이 지방의 영주와 결투하는 것은 삼류희극에도 안 나올 소재였다. 이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은 상대가 도반 도트넘 백작이기 때문이었다.
“말썽이란 말썽은 죄다 피우는군.”
간신히 가라앉은 볼탄 반도의 공기가 계절에 맞춰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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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가 정신없이 지나갔다.
살아남은 포클랜드 사절이 거세게 항의했지만, 강철성은 정당한 결투였다고 주장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호수성에서 상황이 그대로 재현되었다. 차이점이 있다면 로벨의 땅에서 로벨의 기사가 증인이 되었다는 것이다.
로벨은 바인 경의 시신을 수습하며 상처를 살폈다. 겨드랑이 틈새로 칼을 찔러 심장을 뚫었다. 훌륭한 솜씨였다. 평범한 기사는 두 팔 벌리고 찔러보라 해도 못할 일이다.
“마법이야.”
로벨은 바인 경의 팔을 내리고 말했다. 시신을 염하던 닥터 줄리안이 기겁했다. 수도원 출신이라 그쪽으로 민감했다.
“이, 이건 평범한 관통상입니다. 마법이라니요?”
로벨은 바인 경의 무구를 챙겨 일어났다.
“결과 말고 과정 말이야. 바인 경은 결투 따위를 할 자가 아니야.”
바인 경은 대범한 만큼 영리한 기사였다. 자신이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알고 있었다.
로벨은 호수성의 반응을 살폈다. 이 일을 계기로 강철성을 압박할지, 아니면 로벨의 입장을 고려해 침묵할지 궁금했다. 예전의 볼트 헤르만 백작이라면 전자겠지만, 지금은 알 수 없었다.
“머리 아파. 이러려고 기사가 된 게 아닌데...”
정치 싸움, 악마, 충성시험, 음모... 로벨과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저, 영주님?”
리암 수사가 수도복을 움켜쥐고 지하실로 내려왔다.
“포클랜드 사절단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합니다. 그리고 바인 경의 시신을 내어달라 합니다.”
저들이 돌아가 국왕과 귀족원에게 뭐라 할지 훤했다. 결투를 벌인 것은 도트넘 백작이지만, 결투를 벌인 장소가 로벨의 땅이니 책임을 피하기 힘들었다. 로벨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고 힘없이 말했다.
“내가 편지를 쓸 거야. 오해를 풀 수 있게. 그러니 잠시만 기다려달라고 해.”
리암 수사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지상으로 올라갔다. 닥터 줄리안은 ‘이 날씨에 시체를 옮기면 금방 상할 텐데’ 등을 중얼거렸다. 사절단도 알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시신을 가져가는 것은...
“정말 돌이킬 수 없는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