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6화. 콧대
여름 햇살이 보듬은 푸른 평야에 시체와 병장기가 점점이 뿌려졌다. 까마귀와 들쥐가 볼 때는 어떨지 몰라도, 로벨이 볼 때는 외롭고 씁쓸한 광경이었다.
“시신 수습도 안 하고...”
눈구멍에 쿼럴이 박힌 시체나 목이 반쯤 잘린 시체는 비교적 온전한 편이었다. 대형 망치에 맞아 투구채로 머리가 깨진 시체, 말발굽에 짓밟혀 내장이 터져 나온 시체, 미치광이에게 난도질당한 시체 등은 정상적으로 수습하기가 곤란했다.
“장례를 치를 시간에 하나라도 더 죽이겠다는 뜻이지요.”
“계속 죽을 거니까 장례식이 의미 없긴 하구만요.”
로벨은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본디 맞서 싸울 때보다 후퇴할 때 사상자가 많이 나왔다. 전(前)백작과 구울의 일로 화가 많이 난 호수성 기사들은 인정사정없이 피를 뿌렸다. 이에 강철성은 극단적인 수단을 사용했다. 흔히 ‘도마뱀 꼬리’로 비유하는 작전이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가치가 없어진 용병부대를 차례로 떼어냈다. 버려진 용병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호수성의 기사들은 마을과 농장을 약탈한 저들에게 짙은 유감을 가지고 있었고, 호수성이 고용한 용병들은 적으로 만난 동종업계 종사자를 먹잇감으로 생각했다. 고기와 가죽 대신 포상금과 전리품을 남기는 고급 사냥감이었다.
국지적인 전투, 아니, 전투를 가장한 학살이 수차례 벌어졌다. 그러나 로벨은 아무 말 하지 못했다. 애초에 로벨이 기획하고 실행한 작전이었다. 전부 예상한 결과였다.
허풍쟁이가 한쪽 코를 막고 팽! 소리 내어 코를 풀었다.
“파도성의 나으리는 좋아하겠군요. 저렇게 병력이 줄어서야.”
“...아니야.”
로벨이 한숨처럼 말했다.
“그쪽에서 싸울 일은 없어.”
파도성의 기사들이 북쪽 숲을 지나 강철성으로 가는 일은 없었다. 펄프 대장과 울프 용병단 500명을 함께 보낸 것은 괜한 짓이 아니었다. 혹여나 허튼짓을 시도하면 강철성 이전에 늑대성과 싸울 거란 경고였다.
“그럼 페르젠 ‘주니어’ 나으리는 진짜 술만 마시고 갑니까요?”
“내 말을 오해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될 거야.”
로벨은 진지한데, 아자르 경과 용병들은 ‘으하핫!’하고 웃었다.
“그 멍청한 백작 나으리 표정을 봐야 하는데.”
“올해 담근 리암 수사표 맥주를 마실 수 있을 테니 잘 됐지.”
로벨은 더 이상 전쟁이 나지 않게 심혈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보다시피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묵한 몬트가 모처럼 입술을 떼었다.
“늑대성으로 가시지요.”
군대가 느린 것은 개개인의 체력 때문이 아니라 먹을 것과 마실 것 때문이다. 마을의 우물이나 옹달샘으로 수백 명이 목을 축일 수 없으니 수원지를 찾아가야 했다. 그것은 쫓기는 강철성이나 쫒아가는 호수성이나 마찬가지였다. 고작 5명인 로벨 일행은 강철성의 진군로를 따라갈 필요 없었다.
로벨은 호수성에서 빌려온 전투마를 다독여 북쪽을 보았다. 모닝스타에 비해 순종적이지만, 머리가 나빠 일일이 명령해야 했다. 나쁜 뜻은 아니었다. 지금 상황에서는 순종적인 말이 좋았다.
“여기서 가로질러가면?”
“사흘이면 충분합니다.”
로벨은 거리와 시간을 재어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페르젠 백작을 먼저 만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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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특별한 해였다. 로벨이 전례 없는 대공이 된 것도 특별하지만, 강철성의 도트넘 백작, 호수성의 헤르만 백작, 파도성의 페르젠 백작이 한자리에 모인 것도 만만치 않게 특별했다. 지금껏 전장이 아니면 마주할 일이 없던 사람들이었다.
“에, 음, 주군의 대공 즉위를 축하하오. 아, 이게 맞는 거지?”
파도성의 젊은 주인, 하베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어색한 분위기를 타파하고자 말문을 열었다. 안 할만 못했다.
300년의 역사가 살아 숨 쉬는 고풍스러운-허름하고 낡은- 늑대성에 3개 백작 가문과 7개 남작 가문, 그리고 명예욕과 출세욕이 넘치는 33곳의 기사 가문 출신이 모였다. 칼부림이 나지 않은 것이 기적이었다.
‘영주님이 기적을 부른 건가?’
어린 집사는 실없는 생각으로 도피했다가 번뜩! 정신 차렸다. 볼탄 반도의 실세들이 모인 자리였다. 말 한 마디 한 마디, 표정 하나 하나에 집중해야 했다. 그것은 어렵지 않았다. 논리적인 비난이나 고차원적인 조롱을 할 줄 모르는 기사들이었다.
“저자와 싸우게 해주시오!”
“누가 할 말인데! 대공, 결투를 허락해주시오!”
“저, 저 건방진... 대공이 아니면 진작 목이 떨어졌을 자가...”
“본인의 이야기를 남처럼 하시오?”
멱살을 잡지 않는 것은 두툼한 갑옷 때문이고, 칼을 뽑지 않는 것은 로벨과 울프 용병단 때문이다. 좋게 보면 로벨의 권위가 통한다는 것이고, 현실적으로 보면 그 권위로도 화해시키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여기까지 오면서 얼마나 많은 피가 흘렀는지 대공도 보았을 것이오. 헌데, 이제 와서 사이좋게 술을 마실 수 있겠소?”
강철성의 기사가 냉담하게 쏘았다. 그러자 호수성의 기사가 껄껄 웃었다.
“그쪽이 우리 영지에서 저지른 패악질은 생각지 않는 모양이군?”
로벨은 말주변이 좋지 못했다. 설령 전설적인 웅변가라 해도 명예와 재산을 잃은 기사들을 설득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 칼을 뽑으면 나에 대한 도전으로 알겠소.”
그나마 웅변가에게 없는 설득기술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세 가문의 기사들은 서로의 눈치를 볼 뿐 자리를 뜨지 못했다. 강철성은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 호수성과 파도성이 연합할까 경계했고, 호수성은 간신히 잡은 승기를 놓치기 싫어했으며, 파도성은 그냥 파도성이었다.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의 성격이 그러하니 물러나지 않았다.
“전쟁이 아니어도 명예를 회복할 수 있잖소. 결투? 종전한다면 얼마든지 좋소. 본인이 증인이 되어주겠소.”
“저 명예를 모르는 자들과 협정을 맺으란 말입니까?”
“저, 저, 저놈이! 듣자 듣자 하니까 진짜...”
로벨이 최소한 평화협정이라도 맺게 하려고 골머리를 썩일 때, 뜻밖에 네 번째 손님이 도착했다.
“영주님, 포클랜드에서 사절이 왔습니다.”
애꾸눈 볼포스가 나직이, 그러나 메인 홀에 모인 기사가 모두 들을 수 있게 말했다. 공교로운 타이밍이었다. 주먹질 직전까지 간 기사들이 입을 다물었다. 어느 가문의 어느 기사든 ‘볼탄 반도’였다. 외지인에게 추태를 보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음흉한 도반 도트넘 백작과 노회한 볼트 헤르만 백작은 로벨이 파도성에 이어 포클랜드까지 끌어들였다고 의심했다. 물론, 과대평가였다.
국왕의 사절이 메인 홀로 들어왔다. 백여 명의 기사를 보고 흠칫했지만, 곧 당당히 로벨 앞으로 걸어갔다.
“마이 로드, 이렇게 다시 뵙는군요.”
“음, 바인 경?”
로벨이 포클랜드 시티에서 지낼 때 뻔질 나게 찾아온 포클랜드 토박이 기사였다. 대공 즉위를 가장 먼저 축하한 배짱 두둑한 기사이기도 했다.
바인 경은 왕가의 인장이 찍힌 편지를 꺼내 정중히 건넸다. 로벨은 기사들의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외면하며 국왕의 편지를 읽었다. 별 내용은 아니었다. 대공 즉위를 다시금 축하하며 혼사 문제를 넌지시 꺼내고 있었다.
“이것 때문에 경이 직접 온 것이오?”
편지만 보면 안부에 가까웠다.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를 오가는 상인을 통해 보내도 될 만큼 가벼운 내용이었다. 바인 경은 빙그레 웃으며 다시 주변을 살폈다.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로벨은 무슨 뜻인지 몰라 눈을 껌벅이다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볼탄 반도의 소란을 살피려고 온 것이었다.
샘 포클 시대 이전부터 뿌리내리고 있던 3개 백작 가문과 전례 없는 전공을 쌓은 로벨 로드릭 대공이 한자리에 모였으니 근심 걱정 많은 포클랜드 귀족들의 잠자리가 편할 리 없었다. 국왕이 직접 나선 것은 좀 의외지만, 대략적인 분위기를 알 수 있었다.
“이해해 주시지요. 대공께서 갑자기 자리를 뜨는 바람에 왕성에서도 말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이렇게...”
‘볼탄 반도’ 이름으로 하나 된 기사들이 ‘뭐? 왜? 어쩌라고?’ 등의 표정을 지었다. 완전무장한 기사 백여 명은 실로 위압적이었다. 담대한 바인 경도 식은땀을 흘렸다.
“포클랜드와 볼탄 반도는 피를 나눈 형제입니다. 형제간의 오해는 아니 될 말이지요.”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컨틀렛을 벗어 귓구멍을 후볐다.
“거 누가 포클랜드 기사 아니랄까봐 빙빙 돌려 말하기는. 까놓고 우리 대공이 무섭다는 거 아니오?”
바인 경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거 모욕적인 말이군, 서(Sir)...”
“서 하버트 페르젠이오. 기왕이면 로드 페르젠이라 불러주시고.”
인어해 무역으로 부를 쌓은 페르젠 가문은 포클랜드에서도 인지도가 있었다. 애초에 바인 경이 사절로 온 것도 저 백작들 때문이었다.
바인 경은 로벨에게 충성심을 보이는 페르젠 백작을 마음에 담아두고 이어 말했다.
“대공, 솔직히 말하지요. 국왕 폐하와 포클랜드 귀족원은 최근 볼탄 반도에서 군사활동이 빈번한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로벨은 세 백작 가문에 이어 고른 왕가까지 끼어들자 머리가 아파왔다.
“자랑할 일은 아니지만, 새삼스러운 일도 아니잖소?”
볼탄 반도의 잦은 내전은 바다 건너의 나라들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로벨이 간과한 것이 있었다. 당사자라 그럴지도 모른다. 로벨 로드릭이란 걸출한 영웅이 등장한 볼탄 반도는 고만고만한 가문들이 다투던 과거의 볼탄 반도가 아니었다.
“자비에 후작의 실각으로 구심점이 사라진 포클랜드입니다. 더욱이 후작이 우려한 것이 볼탄 반도의... 험! 험! 과격한 발언을 용서해주시지요. 볼탄 반도의 반란이었습니다.”
기사들의 반응이 볼만했다. 로벨을 잘 아는 도반 도트넘 백작은 피식- 웃었고, 정치에 밝은 볼트 헤르만 백작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으며, 단순무식한 페르젠 백작은 재미있다는 듯 손뼉을 쳤다. 그 결과 바인 경이 혼란에 빠졌다.
‘이곳의 기사들은 무슨 생각이지...?’
로벨은 머리를 가로젓다가 어느덧 싸움을 멈춘 기사들을 보았다. 가장 험악하게 굴던 기사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우물쭈물했다. 국왕이 등장하고 포클랜드가 끼어들자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했다. 로벨에게 나쁘지 않았다.
“이야기가 길어지겠군. 각자 군영으로 돌아가시오. 술과 고기를 보내줄 테니 괜한 생각 하지 말고 얌전히 있으시오. 조만간 다시 부르겠소.”
세 백작 모두 고개를 끄덕였다. 돌아가는 판을 점검할 필요가 있었다. 물론, 페르젠 백작은 술과 고기에 더 관심을 보였다.
“본인은 사슴고기가 아니면 안 먹는데... 혹시 양고기를 보낼 거면 빼주시오. 요즘 입맛이 까다로워서...”
“...그냥 좀 가시오. 제발.”
로벨에게 ‘제발’ 소리를 들은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오늘 회담의 승리자였다. 높이 솟은 콧대가 그것을 증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