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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일기-395화 (395/605)

395화. 안배

허풍쟁이가 페닝을 건 4경이 지나고, 마침내 여명이 밝아왔다. 간밤에 난리를 겪은 호수성은 모든 게 엉망이었다.

혹시 모를 전화(戰火)를 피해 북쪽으로 옮겨둔 창고가 내부 소행으로 전소했다. 지난 가을에 수확한 곡식과 애써 손질한 나무, 수년간 모은 가죽, 기름을 짜기 위한 양털과 새 옷을 지을 아마실 등등이 사라지고, 뼈대만 마디마디 남아 시커먼 연기를 뿜었다.

“아... 아아...”

화마에 잡아먹힌 구울이 곳곳에 남아 있었다. 뼈까지 불타 사라진 시체도 있지만 치아가 보일 만큼 형체가 남은 시체도 있었다. 심지어 아직 살아있었다. 그을림 가득한 손가락이 잔해 사이에서 꿈틀거렸다.

“우리 영지에서... 이런 일이... 옛 신이시여...”

로벨은 꼬뜨에 묻은 검댕이를 털어내고 이빨로 따닥! 딱! 소리 내는 구울을 짓밟았다. 잿가루가 푸석하게 일어났다.

볼트 헤르만 백작이 지팡이를 짚고 수행기사의 부축을 받아 현장으로 나왔다. 난전을 치른 로벨과 울프 용병단 모습에 멈칫했다가 잿더미가 된 성안 풍경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먼저 고맙다고 해야겠지.”

로벨은 흐룬팅을 옆으로 뿌리고 칼날을 살폈다. 과묵한 몬트가 헝겊을 꺼내 두 손으로 바쳤다. 페닝으로 고용된 용병치고 정중한 태도였다. 대공의 병사쯤 되면 뭐가 달라도 다르다 생각했다.

로벨은 흐룬팅에 붙은 구울을 살점과 오물을 닦은 후 칼집에 밀어 넣었다. 이어서 아론다이트를 받아 허리에 찼다. 원주인인 볼트 헤르만 백작의 표정이 기괴했다.

“그러나 해명도 들어야겠소. 대공께서 어찌 내 성에 계시며, 저 지저분한 괴물과 무슨 상관이시오.”

불편한 표정을 지은 것은 의외로 호수성의 기사들이었다. 반짝이는 것보다 날카로운 것을 경외하는 기사들은 간밤에 누구보다 치열히 싸운 로벨을 존중했다. 물론, 불에 탄 재화가 자기 것이 아닌 이유도 있었다.

로벨은 주위로 모이는 부하들-아자르 경, 허풍쟁이, 흉내쟁이 등-을 힐끔 보고 담담히 말했다.

“자세한 사정은 말할 수 없으나, 한 가지는 분명하오. 호의였소.”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싸운 호수성의 기사와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로벨이 아니었으면 아성까지 구울이 들이닥쳤을 것이다. 그곳에는 기사의 가족과 비무장 민간인이 가득하니 지금과 비교할 수 없는 참사가 벌어졌을 것이다. 기사보다 정치가에 가까운 볼트 헤르만 백작은 로벨에게 우호적인 분위기를 깨닫고 한발 물러났다.

“무례했다면 용서하시오. 성의 주인으로 걱정이 많아 그런 것이니. 지난밤의 폭우는 피했으나 다가올 뙤약볕이 문제라오.”

‘초여름에 무슨 뙤약볕?’이라 생각한 칼잡이가 여럿이었다. 분명했다. 똑똑한 로벨도 그러했으니까. 다행히 지식과 교양수준을 겨룰 필요 없었다.

부우우우우우우웅-

로벨도, 헤르만 백작도, 용병들도 모두 움찔했다. 시선이 천천히 남쪽으로 돌아갔다.

부우우우우우-

부아아아아암-

수백 명의 호수성 사람이 잘못 들은 게 아니라면, 호수성 밖에서 울리는 나팔소리였다. 짐작대로 남쪽 성탑에서 보고가 들려왔다.

“강철성이! 도반 도트넘 백작군이 접근하고 있습니다!”

지칠 대로 지친 호수성에게 진짜 위기가 닥쳐왔다.

@

호수성의 수비병이 급히 남쪽으로 몰려갔다. 그러나 상황이 좋지 않았다.

성벽 수비를 위해 쇠뇌를 잡았지만, 간밤에 전투로 화살통이 비어있었다. 심하면 쇠뇌도 망가져 있었다. 시위가 끊어지고 염소발이 부러졌다.

“이런 제기랄!”

부족한 것은 화살만이 아니었다. 기름이 바닥나고 창칼이 부러졌다. 무엇보다 체력이 모자랐다. 성내의 전투로 쉴 수 있었던 병사가 하나도 없었다.

“이렇게 바로 공격하다니!”

“그게 현명한 거지만... 그래도 화가 나는군!”

그나마 숱한 전쟁으로 단련된 기사들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화살이 없으면 깨진 돌을 던지고, 기름이 모자라면 화로의 숯을 부었다.

그러나 전쟁경험으로 따지면 강철성의 기사들도 만만치 않았다. 호수성의 발악을 보고 미소 지었다.

“백작님의 말씀이 옳았소. 간밤에 내분이 일어난 모양이오.”

“저 수준이면 오늘 안에 점령할 수 있겠지.”

한밤중의 화재, 거의 날아오지 않는 화살, 엉성한 수비병의 반응이 많은 것을 알려주었다.

“옛 신이 가엾은 셰인 자작을 보살피는군.”

정말 그런지는 두고 볼 일이었다.

로벨은 성벽에 오르지 않았다. 기사의 본능이 두 다리를 유혹했지만 이성이 고삐를 잡았다. 정체가 탄로 난 이상 두 백작의 싸움에 관여해서 안 되었다.

볼트 헤르만 백작은 로벨과 달리 두 다리가 고삐였다. 지팡이 없이는 운신이 힘든 늙은이라 성탑에 오르지 않았다.

“대공은 이제 떠나시오.”

볼트 헤르만 백작이 체념하듯 말했다.

“북문 수로에 작은 배가 있으니 수하들을 데리고 빠져나갈 수 있을 거요.”

뜻밖의 호의에 아자르 경 눈이 커졌다. 생긴 것과 달리 사내다웠다. 로벨도 의아해서 물었다.

“백작은?”

“나는 늙었소. 또다시 성을 포기할 만큼 배짱이 좋지 못하오.”

지난 전쟁을 곱씹는 듯 입술을 우물거렸다.

“대공이 여기 있으면 호수성에서 끝날 불이 볼탄 반도 전체로 옮겨붙게 되오.”

“호수성에서 끝난다는 보장이 없잖소?”

“그럴지도 모르지. 허나, 또다시 일어날 볼탄 반도 전쟁의 원인이 호수성으로 기록되길 원치 않소. 우리 가문의 불명예는 지금 쌓인 것만으로 버겁소.”

로벨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노(老)백작을 새삼스레 보았다. 저 입에서 불명예가 거론될 줄 몰랐다.

‘죽기 전에 철이 든 걸까’

아니면 자신보다 일찍 떠난 자식과 조카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백작이 죽을 날은 오늘이 아니었다.

“호수성은 무너지지 않소.”

로벨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용기를 주는 격려도, 궤변을 통한 위로도 아니었다. ‘저녁을 많이 먹어 배가 부르오’ 수준의 담백한 고백이었다. 로벨의 전략, 전술능력을 잘 아는 백작은 의심보다 기대를 품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로벨은 늙은 백작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두 가지 안배를 두었소.”

“두 가지나?”

“하나는 저 성벽 위에 있소.”

로벨은 욕설이 난무하는 남쪽 성벽을 가리켰다. 아래에서는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본인이 아는 최고의 활잡이가 저곳에 있소.”

@

더스틴 폴라 경, 아니, 지금은 ‘폴스틴’으로 알려진 동방출신 용병이 시위에 화살을 두 개씩 걸었다. 안 그래도 부족한 화살로 장난치냐 화내던 옆자리 용병은 한참 전에 말을 잃고 자신의 화살까지 양보했다.

“내 친구가 자주 그러더군.”

폴스틴은 사다리를 어깨에 이고 뛰어오는 용병에게 속삭였다.

“투구를 안 쓰는 것은 죄악이라고.”

만약 용병이 들었으면 크고 무거운 사다리를 옮기느라 잠시 벗었을 뿐이라고 항의했을 것이다. 물론, 씨알도 먹히지 않을 항의였다. 전장에는 ‘잠시’나 ‘잠깐’이 없었다.

사다리를 나르는 용감한 용병들이 연거푸 쓰러졌다. 앞뒤에 두 명이 동시에 쓰러지기도 하고, 떨어진 사다리를 줍다 자빠지기도 했다. 강철성의 쇠뇌병들은 저격수의 존재를 깨닫고 응사했지만 도저히 당해내지 못했다.

여장 사이로 한 번에 두세 발씩 쏘는 것은 기본이고, 재장전하는 사이 자리를 바꿔 엉뚱한 곳에서 살을 날렸다. 저격수의 얼굴조차 못 본 쇠뇌병이 있었다.

“뭐 저런 놈이 다 있어?”

강철성이 밤낮으로 준비한 열두 개 사다리 중 절반이 저격수 때문에 옴짝달싹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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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트 헤르만 백작은 성벽 위의 전황이 유리하다는 보고를 받고 몹시 기뻐했다. 로벨이 말한 최고의 활잡이가 누군지 몰라도 하루쯤은 생명을 연장할 수 있었다.

“두 가지라고 했소? 또 하나는 무엇이오?”

그러고 싶지 않지만 조바심이 났다. 볼트 헤르만 백작은 흰머리가 자글자글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다급히 물었다. 그러나 대답하기가 좀 곤란했다. 로벨은 머리를 쥐어짜서 겨우 말했다.

“울프 용병단을 서쪽으로 보냈소.”

“서쪽?”

늑대성은 북서쪽에 있었다. 북서쪽도 서쪽이라 말할 수 있지만, 굳이 강조할 사항은 아니었다.

“호수성의 서쪽이면...”

로드릭 가문의 기사로 잘 알려진 늪지성이 있고, 조금 더 가면 구릉성이 있었다. 거기서 남쪽으로 내려가면 장미성이 있는 프란시스 시티가 나오고, 북쪽으로 가면 늑대성이었다. 로벨은 시야가 좁은 호수성 백작이 답답해 좀 더 힌트를 주었다.

“조금 멀리 보시오. 그렇지. 바다까지 가면 좋겠소.”

호수성 백작은 얼굴을 찌푸렸다. 대체 누구를 불렀기에 이리 조심스러운지 짜증이 났다. 이 시간에도 성 밖에서는 강철성의 군대가 파도처럼 몰아치는...

“...파도성? 설마 페르젠 가문을 불러들인 것이오?”

로벨에게 충성하니 강철성보단 낫지만, 호수성 입장에서 파도성도 달가운 가문은 아니었다. 까닥하면 적이 두 배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걱정은 절반만 맞았다.

“응? 부르다니? 두 가문의 명예가 걸린 싸움에 제삼자를 끌어들일 리 없잖소? 그럴 바에 본인이 협력하지.”

로벨은 진지하게 오류를 지적했다. 볼트 헤르만 백작은 백발이 성성한 나이를 잊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럼 대체 파도성을 왜 거론한 것이오! 무슨 속셈인지 시원하게 말씀하시오!”

로벨도 답답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아무리 그래도 직접 거론할 수 없었다. 정치적 수완이 있는 펄프 대장과 호른 경이 그리웠다.

“본인은 파도성이라 말한 적 없소.”

그리고 백작이 뒷목을 잡기 전에 말했다.

“선대부터 친하게 지내온 봉신이 있어 그저 늑대성으로 초대했을 뿐이오.”

늙은 백작의 주름이 조금씩 펴졌다. 회춘이라 해도 믿을 듯했다.

“오해하지 마시오. 선대에서 본인 이름으로 토너먼트를 개최한 적 있어, 그에 보답하고자 기사들을 초대했을 뿐이오. 지금 생각하니 주변 영주들이 좀 껄끄러울 수 있겠군. 본인을 모욕하는 별명이 있으니 말이오.”

그 별명을 가장 열심히 퍼트린 게 헤르만 가문이었다. 쌓인 게 많으니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반갑고 또 반가웠다.

“로벨 로드릭... 빈집털이의 달인...”

로벨은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본인은 그럴 의도가 조금도 없소. 옛 신에게 맹세하오. 볼탄 반도 공작이 사트로 가문의 봉신을 핍박할 수 없잖소? 본인의 초대를 받고 ‘우연히’ 찾아온 오랜 앙숙이라면 혹 모르지만... 그러고 보니 그 가문은 강철성을 점령한 전적이 있다지?”

볼트 헤르만 백작의 아래턱이 하염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본의 아니게 기사들의 지능 수준이 시험대에 올랐다. 로벨과 백작의 대화를 이해하고 입을 딱 벌린 기사는 절반이 되지 않았다. 그걸 보아 이 작전은 성공이었다.

다음날, 파도성의 하버트 페르젠 ‘주니어’ 백작이 기사들을 모아 북상한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강철성의 기사들은 고지를 코앞에 두고 화급히 철수해야 했다. 그러나 원한이 가득한 호수성의 기사들이 순순히 보내줄 리 없었다.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한편, 늑대성의 대공과 볼탄 반도의 뿌리 깊은 3개 백작 가문이 모두 군사활동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우려를 표시하는 곳이 있었다. 바로 포클랜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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