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4화. 뒤통수
어둠이 쪼개졌다.
명사와 동사의 조합이 어울리지 않으나 달리 표현할 문장이 없었다. 어둠이 찢어지고 갈라지고 뭉개졌다. 과묵한 몬트 이하 자칭 침묵의 용병단은 입을 딱 벌리고 비현실을 관람했다.
“저게 뭐...”
일상적이지 않고 일반적이지 않은 현상을 가리키는 단어가 있었다. 그렇기에 보통은 입 밖에 꺼낼 일이 없는 단어기도 했다.
“마, 마법이다.”
늑대성의 말괄량이가 쓰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어휘력이 부족해 감각까지 묘사할 수 없지만, 성탑 주변에 까만 장막이 둘러진 듯했다. 그 증거로 아자르 경이 후려친 곳에서 시원한 호수의 바람이 불어왔다.
“내 무기가 안 드십니다! 지금 무적무패가 등장합니다!”
“...토너먼트 출신이라 그런가? 저런 말은 또 아네?”
그 순간, 로벨이 해치를 열고 올라왔다. 쾌변이라도 했는지 표정이 밝았다. 이 긴박한 상황에 어울리지 않았다.
“응? 누가 나 불렀어?”
허풍쟁이와 흉내쟁이가 동시에 야만인을 가리켰다.
“저 나으리요!”
로벨은 정통 드루이드의 친구이자 현시대를 대표하는 마도의 수호자였다. 따라서 당황하지도, 머뭇거리지도 않았다. 흐룬팅을 뽑아 성큼성큼 걸어갔다.
“위험! 조심! 사랑! 대비! 경계!”
아자르 경이 경고의 의미를 가진 단어를 닥치는 대로 꺼내놓았다. 로벨은 눈동자를 움직여 안심시키고 아자르 경이 쪼갠 어둠을 찔렀다.
끼아아아아- 끼아아앗-!
벤시의 울음소리가 이러할까, 어둠이 요동치며 비명 질렀다.
“이거 살아있는 거야?”
로벨에게도 학자의 자질이 있었다. 의심이 가는 것은 확신이 될 때까지 반복했다. 어둠을 계속해서 찔렀다. 아자르 경은 주군의 영민함에 감탄했다.
“과연이다! 무적무패! 위대합니다!”
그리고 비명에 놀라 멈춘 메이스를 다시 휘둘렀다. 퍽! 퍼퍽! 꺄아아아-!
밤눈 좋은 감시병이 봤으면 정신 나간 기사들이 야밤에 칼춤 춘다고 생각할 모습이었다. 하지만 효과 있었다. 성탑을 감싼 어둠이 갈기갈기 찢겨져 사라졌다. 여전히 어둡고 칙칙한 밤 풍경이지만, 아까와 달리 감춰진 것이 드러났다.
과묵한 몬트가 제빨리 여장을 부여잡고 성 밖을 내다보았다. 그리고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영주님! 아래에!”
지난날을 돌이켜 보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고 장소가 바뀌어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호수에서...”
익살로 지은 ‘침묵의 용병단’이 이름값을 했다. 성탑 아래 성벽, 그리고 성벽 아래 호수를 바라보는 기사와 용병이 입을 다물었다. 숨을 크게 몰아쉬기를 여러 번, 중간을 생략하고 간신히 입술을 떼었다.
“...올라온다?”
네 개의 손가락을 가진 앙상한 팔이 성가퀴를 붙잡았다. 근육이 남지 않아 한동안 반응이 없었으나, 아래에서 밀어붙이는 힘으로 기어이 상체를 끄집어 올렸다. 훤히 드러난 갈빗대 사이사이로 썩어 문드러진 내장이 흘러내렸다. 물고기가 파먹은 구멍에서 진물이 흐르고, 제집을 포기하지 못한 가재가 입과 콧구멍으로 들락거렸다.
허풍쟁이가 생략한 중간 단어를 아자르 경이 대신했다.
“저것이 괴물. 살아있는 시체.”
“우리는 구울이라 부르오.”
3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호수에 가라앉은 시체가 얼마일까. 흉악한 범죄로 가라앉은 시체, 뜻밖의 사고로 잊혀진 시체, 스스로 비관하여 몸을 던진 시체, 가난 탓에 소리 없이 버려진 시체... 세월의 무상함으로 모두가 형체를 남기지는 못했지만, 그럼에도 어두운 물가로 기어 올라오는 시체가 족히 수백 구였다.
“흡혈귀 백작! 또다시 죽은 자를 욕보이다니!”
로벨이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로벨이 예상한 수작은 볼트 헤르만 백작을 암살하거나 식량 창고에 불을 지르거나 성문의 도르래를 망가트리는 것이었다. 그 정도만 해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 수 있었다. 하지만 최악의 괴물은 최악의 수단을 사용했다.
“또! 또 구울이야!”
“옛 신이시여... 가만, 옛 신의 교단은 뭐하는 거야? 저렇게 대놓고 악마라 외치는데?”
고블린을 부리는 것까진 넘어갈 수 있었다. 식인을 하지만 그것은 곰이나 늑대도 마찬가지니 위험한 짐승을 부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애초에 인간을 죽이는 것은 인간이 으뜸이니 꺼림칙하기는 해적이나 야만인이 더했다. 허나, 언데드는 달랐다. 그것은 사자(死者)의 도래를 믿는 옛 신의 교리에 반하는 짓이다.
“증거가 없잖아. 하몬 남작령에서도, 붉은 산에서도, 그리고 지금도 도반 도트넘 백작이 한 짓이란 증거가 없어.”
“이럴 때는 왜 이리 똑똑하십니까요?”
“나 원래 똑똑하거든?”
로벨이 불만을 표시했다. 강철도 자르는 병장기를 들고 있어서 설득력이 있었다. 현실에 충실한 흉내쟁이가 소리쳤다.
“그럼 똑똑한 기사 나리가 볼 때 저걸 어쩝니까요?!”
로벨도 생각하고 있었다. 로벨 일행이 있는 성탑까진 기어오르지 못했지만, 그 아래의 성벽은 이미 점령했다. 시체가 계단이 되어 하나둘 넘어왔다. 그것을 막을 호수성의 수비병은 전부 남쪽에 있었다.
“성내에 방어진을 구축해야 해. 과묵한 몬트는 지금 바로 헤르만 백작을 찾아가. 내가 보냈다고 하면 만나 줄 거야.”
“저들이 믿어 주겠습니까?”
이 늦은 밤에 용병 하나가 최고 지휘관을 불러 달라 하면 뭇매를 맞을 것이다. 로벨은 왼쪽 허리에 아론다이트를 풀어주었다. 성채 하나 값이라는 보물을 순순히 맡기는 게 인상적이었다.
“이 칼은 원래 헤르만 가문의 것이야. 이걸 보여주면 믿을 거야.”
과묵한 몬트는 여러 의미로 믿을 수 있는 용병이었다. 로벨을 배신하지 않을 것이며, 헤르만 백작을 제때 설득할 것이다.
“그럼 저희들은... 무얼 합니까요?”
흉내쟁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로벨은 흐룬팅을 고쳐 쥐고 말했다.
“시간을 벌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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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일행은 성탑에서 날듯이 내려갔다. 높은 곳이 안전하지만, 고립되어서는 의미가 없었다.
성벽으로 통하는 중간문도 그냥 지나쳤다. 얼핏 보니 성벽에 올라온 구울이 생육(生肉)을 찾아 돌아다니고 있었다. 숫자가 점점 늘어났다. 시각과 청각이 남아있는 놈들은 불빛과 소음이 있는 남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계속 가!”
로벨이 나직이 윽박질렀다. 과묵한 몬트는 진작 1층으로 내려가 성탑을 벗어났다.
“어디서? 어디서 저것들을 막습니까요!”
“좁고, 높고, 우회로가 없는 곳.”
군사학적인 답변이었다. 선행조건으로 지형정보가 필수였다. 로벨은 호수성의 내부 구조를 열심히 떠올렸다. 그때, 성벽 위에서 구울이 떨어졌다. 철부덕-! 물 자루 떨어지는 소리가 울렸다.
“그, 그, 그런 곳이 있습니까?”
“없으면 만들자.”
로벨은 성탑 밖으로 뛰쳐나갔다. 시간이 촉박했다. 성벽 위에 구울이 하나둘 내려오고 있었다. 아니, 떨어지고 있었다. 오랜 수중 생활로 짓무른 피부가 낙하충격에 터졌다. 그때마다 지독한 시취(屍臭)가 퍼졌다. 거칠고 더러운 삶을 살아온 용병들도 코를 쥐고 한 걸음 물러났다.
“헛간으로! 불을 피워서 길을 막아!”
로벨은 어기적어기적 일어나는 구울의 목을 치고 성내로 달렸다.
로벨 일행보다 먼저 내려온(?) 구울이 있어 앞을 막았다. 흉내쟁이가 반사적으로 클리버를 휘둘렀다. 넓적한 칼날이 정수리를 쪼개고 코밑까지 닿았다. 뼛속까지 썩어서 저항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더욱 기분이 나빴다.
“이것들 뭐야!”
게다가 위험하기까지 했다. 머리가 두 쪽 났는데도 죽지 않고 두 팔을 뻗었다. 흉내쟁이는 기겁해서 무기를 놓고 떨어졌다. 아자르 경이 기다렸다는 듯 메이스를 휘둘러 머리통을 날렸다. 쾅!
“목이 분명하다. 파괴합니다. 죽어라.”
“에, 에잇! ‘죽어라’만 붙이면 다 말이 되는 줄 아십니까요?”
로벨은 뒤따라오는 구울의 목을 깔끔하게 자르고 앞으로 기울어지는 몸통을 슬쩍 피했다.
“저기가 헛간이야!”
“태, 태울게 있을까요? 봄이 지났는데?”
“조금은 있겠지!”
헛간 문은 자물쇠로 잠겨있었다. 아자르 경과 흉내쟁이가 뒤를 경계하는 사이 로벨이 흐룬팅을 휘둘러 고리를 잘라냈다.
“제기랄! 거의 비었습니다요!”
허풍쟁이가 깜깜한 헛간 안을 필사적으로 더듬었다. 겨울을 나고 봄을 지새우며 가축 먹이로 거의 소모했다.
“끄어어어- 끄으어-”
그러는 사이에도 구울이 늘어갔다. 로벨은 헤르만 가문에게 사과한 후 명령했다.
“헛간채로 태워버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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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성 곳곳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수비병의 위치를 숨기기 위해, 혹은 기름을 아끼기 위해 등화관제하는 것은 기본이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로벨 일행은 남쪽으로 내려가는 성내 길목마다 불을 놓았다. 호수성의 재무관이 보면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구울 때문에 입은 피해보다 로벨이 불태운 재산피해가 더 클지도 모른다. 그래도 오늘 밤은 무사히 날 수 있을 것이다.
“이게 무슨 일... 우아악!”
이지가 없는 구울은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재가 되었고, 용하게 불길을 피한 구울은 놀라서 달려온 수비대에게 가로막혔다.
로벨은 수레를 밀어 불이 닿지 않은 길목을 막고 그 위에서 흐룬팅과 빗자루를 휘둘렀다. 팔이 짧아 슬픈 구울은 로벨을 붙잡기 전에 머리가 갈라졌다.
“이제 그만 태워! 화재로 죽겠다!”
허풍쟁이가 방화에 재미 들린 흉내쟁이를 뜯어말리고 북쪽을 보았다. 대낮처럼 밝아진 탓에 북쪽 성벽이 훤히 보였다. 아직도 구울비가 내리고 있었다. 쿵! 쿵! 철푸덕! 쿵-!
“앞으로 저 호수에서 잡힌 물고기는 안 먹어야지.”
살아남았을 때 이야기였다.
로벨은 싸리빗으로 불똥을 받아 불타는 빗자루를 맹렬히 휘둘렀다. 그랜드 챔피언다운 창솜씨였다. 세 구를 베고 여섯 구를 불태웠을 때 기다리던 지원군이 왔다. 풀 플레이트 아머 차림의 기사와 용병 2개 소대였다.
“맙소사... 그 용병의 말이 사실이었군!”
“옛 신이시여! 시브럴! 저게 뭐야!”
신성모독이 아닐까 의심하다가 그냥 넘어갔다. 야심한 밤에 불타는 창고와 수백 마리의 구울을 보면 옛 신을 찾으며 욕할 수 있었다.
하지만 기사와 용병이 먼저 감탄한 것은 구울이 아니라 로벨이었다. 발디딤이 불안한 수레 위에서 불타는 창-사실 빗자루-을 휘두르며 발아래 구울을 막는 모습은 마치 몽상가의 그림 같았다.
“거 보고만 있지 말고 우리 나으리 좀 도와주쇼!”
허풍쟁이가 임시 횃불을 집어던지고 숏소드를 뽑았다. 호수성의 기사는 나으리란 단어에 우선 집중했다.
“그럼 저자가... 아니, 저분이 정녕...”
로벨을 따라다니며 나팔수 역할을 한 버릇이 어디 가지 않았다. 허풍쟁이는 긴박한 와중에도 가슴을 펴고 소개했다.
“무적무패로 이름 높은 그랜드 챔피언이자 볼탄 반도의 적법한 통치자, 로벨 로드릭 대공입니다요!”
정체를 숨겨야 한다는 생각 따위 잊은 지 오래였다. 흉내쟁이가 한심하게 뒤통수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지금은 두 백작의 싸움이 아니라 인간과 괴물의 싸움, 산 자와 죽은 자의 싸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