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93화 (393/605)

393화. 어둠

로벨 로드릭 대공의 철군 소식이 알려지자 기사, 용병, 상인, 농민 가리지 않고 펄쩍 뛰었다.

기뻐서 뛰는 사람도 있고, 안타까워서 뛰는 사람도 있지만, 절대다수의 농민들은 무서워서 그리했다.

“공작님이 가시면? 우리는? 우리는 누가 지켜주는감?”

“호, 호수성으로 가야 하지 않나요?”

“너 미쳤어? 거기 가면 화살받이야!”

“여기 있어도 어차피 징집될 걸세.”

어느쪽 백작에게 징집되느냐만 달랐다. 조상대대로 모신 호수성 백작이 조금 낫지만, 진짜 조금이었다.

“이렇게 된 거! 대공 나으리를 따라갑시다!”

“집을 버리고?”

“우리 집의 닭이랑 양은 어쩌고요?”

“대공이 없으면 전부 빼앗길 것들인데 무슨 상관이에요?”

인간군상이 다양하여 모두가 한마음이 되지는 않았지만, 상당수의 농민이 짐을 싸들고 울프 용병단 꽁무니를 따랐다. 영지민이 대놓고 이탈하자 기사와 촌장은 할 말을 잃었다. 그렇다고 로벨이나 도반 도트넘 백작에게 항의할 수도 없었다.

“뭐가 저리 많아? 적당히 쫓아와야 눈감아주지!”

로벨과 어린 집사도 영지민이 달갑지 않기는 마찬가지였다. 저들이 가진 식량은 여름을 나기도 버거운 수준이고, 여자와 아이, 절름발이와 노인이 섞여서 맨앳암즈의 느린 행군조차 따라오지 못했다. 솔직히 말해 짐이었다.

“집에 가라고 쫓아낼까요?”

“그건 좀...”

로벨의 성품상 모질게 대하지도 못했다. 관심 없는 척하면서 먹을 것을 남기고 행군속도를 줄여주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과묵한 몬트가 정찰을 마치고 돌아왔다.

“강철성의 용병들이 나무를 베고 있습니다.”

로벨이 자리를 뜨자 바로 시작되었다. 예상한 일이고 의도한 상황이었다.

“여름에 땔감이 필요한 것은 아닐 테고, 공성병기겠죠?”

“사다리나 충차겠지.”

대포는 안 가져왔구나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폴라 경은?”

“호수성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쯤이면 더스틴 폴라가 아니라 폴스틴 더라 쯤으로 이름을 바꿨을 것이다.

‘폴스틴도 어감이 좋은데?’

로벨은 엉뚱한 생각을 하며 근심 가득한 어린 집사에게 말했다.

“그럼 나도 준비해야지.”

“정말... 이렇게 까지 해야 해요?”

어린 집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홉 번째 물음이었다.

“두 백작이 알아서 하라고 놔둬도 되잖아요.”

로벨은 짜증내지 않고 여덟 번째와 똑같이 답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을 몰라? 많은 사람이 죽을 거야. 그리고 호수성을 방치한 나한테도 비난이 쏟아질 테고.”

“그래도...”

“이전에도 잘했잖아. 걱정하지 말고 펄프 대장이랑 허풍쟁이를 불러와.”

로벨은 측근들에게 해야 할 일을 알려주었다. 수백 명의 호수성 영지민을 지켜야 하니 쉬운 여정이 아니었다. 하지만 똑똑한 어린 집사와 노련한 펄프 대장이니 잘해낼 거라 믿었다. 이제 남은 고민은 하나였다.

‘난 앞뒤를 바꿔도 로벨 로드릭인데... 중간을 바꿀까? 로드 로벨릭...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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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풍쟁이 제이콥은 기분이 좋았다. 기이한 일이었다. 지금까지 전례를 보면 ‘왜 또!’를 골백번 외쳐야 마땅한데, 어째서인지 실실 쪼개고 있었다. 로벨은 아침을 잘못 먹었을까, 괴담 속의 도플갱어가 아닐까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요?”

“...내 말 이해한 거 맞지?”

“그럼요. 그럼요. 제가 나으리를 모신 게 한두 해도 아닌뎁쇼.”

“...그럼 위험한 것도 알지?”

로벨이 두 번 묻자 허풍쟁이가 정색했다.

“기사 나리를 따른 지 어언 11년. 지금껏 위험하지 않은 적이 없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가르쳤어?”

“호른 나으리 말투잖습니까요.”

허풍쟁이는 혼자 흉내 내고 혼자 껄껄 웃었다. 로벨은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겁쟁이 데비한테서 빌려온 케틀 햇이 살짝 기울어졌다.

그러나 허풍쟁이의 웃음은 순수했다. 로벨의 계획을 들었을 때 자신일 줄 알고 진작 포기했는데, 뜻밖에도 어린 집사가 로벨을 잘 보필하면 1천 페닝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사실 할 일을 하고 돈을 받는 건데, 그동안 무상으로 부려진 탓에 공돈처럼 느껴졌다.

“조용해라. 호수성이다.”

로벨은 비뚤어진 투구를 앞으로 당겨서 고쳤다.

폴 액스, 배틀 사이드, 버디슈 등등 흉악한 병장기를 가진 용병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지나갔다. 로벨 일행과 가벼운 기 싸움이 있었지만, 피식- 웃으며 넘어갔다. 이곳에 온 이상 같은 편이었다. 칼밥 먹은 것도 한두 해가 아닌데 ‘전우’끼리 싸워서 좋을 것 없었다.

로벨은 흉악한 용병들이 떠난 뒤 챙을 올리고 위를 보았다. 호수성의 굳건한 자태가 보였다. 오래된 성이라 도개교는 없지만, 이중으로 된 성문에 팔뚝만한 쇠창살이 무척 견고했다. 더스틴 폴라 경이 말했듯 공격하기 어려운 성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용병대장역(役)을 맡은 과묵한 몬트가 용케 이해하고 대답했다.

“영주님의 판단이 옳습니다.”

이런 성을 정면으로 공략할 리 없었다. 로벨이 아는 강철성의 백작이라면, 그리고 뱀파이어 군주의 힘이라면 필히 수작을 부릴 것이다.

“우리 일은 도반 도트넘 백작을 죽이는 게 아니야. 우리 정체를 들켜서 안 돼.”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호수성을 지원한 사실이 알려지면 곤란했다.

로벨은 자신처럼 변장한-그래 봐야 무기 몇 개 바꾼 거지만- 과묵한 몬트, 흉내쟁이, 허풍쟁이, 아자르 경을 차례로 보았다. 자칭 입이 무거운 사람이 모인 ‘침묵의 용병단’이었다.

“우리가 싸울 상대는 도트넘 백작이 아니라 뱀파이어 군주야.”

“뭐가 다릅니까요?”

“음지에서 해야 할 일이란 거지.”

아직도 이해 못한 사람이 있었다. 흉내쟁이 퍼시발이 뒤통수를 팍팍 긁으며 새로 물었다.

“그럼 강철성의 백작 나으리는 누가 해치웁니까요?”

아자르 경을 제외한 모두가 한숨을 쉬었다.

“폴스틴 경이라고 새로운 영웅이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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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성 안에는 용병이 바글바글했다. 평시에는 출입이 불가능한 아성에도 사람이 들끓었다. 늙은 백작에게 잘 보이고 싶은 용병들이 수시로 기웃거렸다. 로벨에게 아주 좋은 현상이었다.

“이쪽이야.”

로벨은 정통성 전쟁 때의 기억을 더듬었다. 세월이 지나 구조가 조금 바뀌었지만, 길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

“근데 이렇게 돌아다녀도 됩니까요? 이거 무단이탈 아닌가?”

허풍쟁이의 걱정에 흉내쟁이가 낄낄거렸다.

“넌 임마, 울프 용병단에 오래있다 보니 감을 잃었냐?”

“내가 뭘?”

“이게 정상적인 상황 같냐?”

성 안에 주둔하는 용병만 400명이었다. 기사의 가족과 수행원, 기타 잡일꾼을 합치면 6, 700명이었다. 전시상황을 생각하면 그리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본래는 성 아래 영지민까지 들여야 한다-, 문제는 열흘도 안 되어 급하게 모은 병력이란 점이다.

정석대로 하면 권위 있는 용병대장을 고용해 용병들을 모아오도록 해야 했다. 그래야 영주가 통제하는 시늉이라도 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황이 급박하여 프리랜서가 아니라 용병단을 제각각 받아들였다. 서너 명의 소규모 패거리부터 스무 명이 넘는 대규모 집단까지 다양했다. 속된 말로 ‘대가리’가 많아 통제가 되지 않았다.

로벨 일행이 배치받은 남동쪽 성문이 아니라 북서쪽 성탑으로 갈 수 있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우리 울프 용병단에서는 상상도 못 할 일이지.”

흉내쟁이가 콧대를 세우고 자랑했다. 급료를 오래 받다 보니 소속감이란 게 생긴 모양이다. 과묵한 몬트가 나직이 웃었다.

“그런데 왜 하필 이곳입니까요?”

로벨 일행이 찾아간 곳은 버팅거 호수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북서쪽 탑이었다. 강철성이 주둔하는 남쪽 목초지와 한참 떨어진 곳이라 수비 병력도 없었다. 하늘을 날거나 물 위를 걷는 재주가 없으면 접근이 불가능한 곳이라 당연한 조치였다. 안 그래도 엉망진창인 용병들을 분산시킬 수 없었다.

로벨은 거미줄 짙게 처진 성탑문을 당기며 말했다.

“나라면 여기로 올 거야.”

“예?”

로벨은 말귀가 어두운 용병들을 흘겨보았다. 어린 집사와 마녀가 그리웠다. 절친한 친구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속을 알아보는 재주가 있었다.

“내가 그자라면, 이곳으로 괴물을 보낼 거야.”

호수성을 점령한 전적이 있는 기사의 혜안인지, 아니면 같은 마도의 수호자가 가진 직감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럼 언제쯤 나타날지도 아십니까요?”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오늘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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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성탑 꼭대기에서 건설적이지 못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그래서 네 생각은 뭐냐고.”

“허, 참나. 너부터 말해라.”

로벨에 대한 신뢰가 신앙에 가까운 일행이라 로벨의 말을 의심하지 않았다. 오늘밤 괴물이 온다고 했으니 오긴 올 것이다.

“3경이다.”

과묵한 몬트가 확신을 담아 말했다. 지금 시각이 3경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은 없었다. 머리 위에 달이 휘황찬란했다.

“그렇게 늦게 와서 뭐하려고? 상식적으로 밤이 깊은 2경이지.”

“에헤이, 말번초도 잠들지 않았겠다. 3경이 맞아.”

“난 4경에 1페닝이다. 해뜨기 전이 가장 취약하다는 것은 상식 아니냐?”

“1페닝 받고 1페닝 더! 멍청아! 뱀파이어가 보낸 괴물이면 뱀파이어인데 해 뜰 시간에 오겠냐?

“그 말이 맞다. 안 그래도 여름이라 밤이 짧지.”

울프 용병단은 ‘괴물’이 찾아올 시간을 두고 내기했다. 그 괴물을 상대해야 하는 걱정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로벨이 있으니까.

그러나 맹목적인 분위기에 적응하지 못한 아자르 경은 입을 헤- 벌렸다. 애초에 괴물이니 뱀파이어니 하는 것도 생소했다.

“거, 외해에서 온 나으리, 나으리는 참가 안 합니까요?”

까무잡잡한 피부에 시리게 푸른 눈을 가진 이국의 기사라 말투가 조금 경박했다. 여느 기사라면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자르 경은 기사의 권위가 뭔지 몰랐다.

“나 모른다. 그쪽이 하는 말씀입니다. 의미가 다양하다.”

아자르 경의 어눌한 말투에 무례한 용병들이 껄껄 웃었다.

“그 남군(南軍)의 시커먼 녀석보다 더하네.”

“이 나으리는 그래도 모나카 왕국인하고 생긴 게 비슷한데...”

허풍쟁이가 내기에 관해 차근차근 설명했다. 하지만 ‘내기’가 무슨 뜻인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었다. 아자르 경은 유라피아 대륙 공용어가 서툴 뿐 바보가 아니었다. 금방 이해했다.

“첫 번째 파수꾼입니다.”

“첫 번째?”

“아, 1경이라고요?”

울프 용병단이 서로를 보았다.

“지금이 2경인데?”

“아니야. 달이 꺾이지 않았어. 아직 1경이야.”

“이 나으리가 아직도 이해를... 흐끼야!”

아자르 경이 메이스를 꺼내 휘둘렀다. 대포알이 스쳐 지나간 것처럼 부아앙-! 소리가 났다. 머리통이 사라질 뻔한 허풍쟁이는 바닥에 주저앉았다.

“거, 거 갑자기 무례하게...! 굴었다면 죄송합니다! 사, 살려주세요!”

아자르 경은 메이스를 고쳐 쥐고 벌떡 일어났다. 안 그래도 덩치가 대단한데. 밤하늘을 등진 탓에 더욱 크게 느껴졌다. 아자르 경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먼 곳에서 용병들의 웃음이 들렸다. 아성쪽에서 쇠를 두드리는 소리도 들렸다. 그러나 여장 아래에 파도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지금이 첫 번째 파수꾼 시간이다.”

놀라울 만큼 또박또박한 발음이었다. 허풍쟁이는 이 기사 나으리가 일부러 바보인척 했나 의심했다. 물론, 그럴 리 없었다.

“괴물이 오셨다. 환영합니다. 죽어라.”

아자르 경의 메이스가 어둠을 때렸다. 태세전환이 빠른 허풍쟁이는 깨달았다. 어둠도 비명을 지를 수 있었다.

끼아아아아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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