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2화. 허상
상황이 급변했다. 죽어서 안 되는 사람이 죽었다. 회담이 제대로 진행될 리 없었다. 화가 나서 소리치는 기사, 말을 잊고 주저앉는 기사, 전령을 다그치는 기사 등으로 난장판이 되었다.
노회한 볼트 헤르만 백작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호수성을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 상황판단이 빠른 강철성 기사가 가로막았지만 완력과 숫자로 뚫었다. 펄프 대장과 맨앗암즈들은 누구를 제지해야 할지 몰라 손쓰지 못했다.
‘셰인 자작이 죽으면...’
호수성이 내놓을 협상 카드가 사라졌다. 그리고 로벨이 애써 준비한 증인도 소용없어졌다.
몰드 헤르만 백작의 피살로 원한을 품은 호수성 내부 소행일 수도 있지만, 타이밍이 공교로웠다. 기사의 직감, 혹은 여자의 육감이 범인을 지목했다.
로벨은 도반 도트넘 백작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쪽 짓이야?’
‘무슨 말씀을.’
도반 도트넘 백작은 어깨를 으쓱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입술을 떼자 천연덕스러움이 사라졌다.
“명예를 모르는 호수성이! 내 아들을 살해했다!”
회담장의 우수선함이 단번에 사라졌다. 강철성 기사들이 일제히 칼을 잡았다. 볼트 헤르만 백작과 호수성 기사들은 맨앳암즈를 뚫고 지나가다 멈추었다.
“우, 우리가 한 짓이 아니오! 성으로 돌아가 사태를 파악하겠소!”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것 같소. 조금만 기다려주시오.”
호수성 기사들이 열심히 해명했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그게 말이 되는가!”
강철성 기사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롱소드를 ‘한 뼘’ 뽑았다. 의도한 것은 아니었다. 본래는 볼트 헤르만 백작의 머리를 쪼갤 생각이었다. 갑자기 튀어나온 새하얀 칼이 폼멜을 찍어 누르지 않았으면 말이다.
회담장의 모든 시선이 로벨을 향했다. 어느새 아론다이트를 뽑아 칼자루를 막았다. 기가 막힌 칼솜씨였다. 검술학회의 고명한 소드 마스터도 이런 묘기를 선보이진 못했다.
‘아, 대공도 롱소드 마스터였지?’
그랜드 챔피언 위명에 가려져서 모르는 사람이 많으나, 로벨은 포클랜드 검술학회의 공인 소드 마스터였다.
“내 앞에서 나의 기사를 해칠 생각인가?”
그 말에 호수성 기사들이 감동했다.
헤르만 가문은 볼탄 반도의 터줏대감 가문으로, 샘 포클을 따라와 슬그머니 정착한 프란시스 가문과 그 충복들을 달가워하지 않았다-페르젠 가문도 비슷하다- 그것이 300년 전이라 해도 뿌리 깊은 편견은 쉬이 바뀌지 않았다.
하물며 로드릭 가문은 명성 없는 세습 기사 가문이었다. 로벨의 대(代)에서 무명을 떨친다 하나 진심으로 충성하기는 어려웠다. 지금까지는 말이다.
“대, 대공...”
로벨은 갑자기 돌변한 시선이 불편했다.
“셰인 도트넘 자작이 정말 살해당했는지, 그렇다면 흉수가 누구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소. 의심만으로 전쟁을 선포하거나 결투를 신청하지 마시오.”
“대공이 성자 마르틴이라도 되시오? 무슨 자격으로 신성한 결투를 막겠다는 것이오!”
칼을 뽑기도 전에 제압당한 기사가 혀를 휘둘렀다. 그러나 로벨은 기사 중의 기사였다. 논리 따위로 싸우지 않았다.
“정녕 피를 보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시오. 하지만 알아두시오. 결투를 신청하면 본인이 대리인으로 나설 것이고, 전쟁을 선포하면 늑대성이 대적자가 될 것이오.”
그리고 다시 감동하려는 호수성 기사들을 차단했다.
“헤르만 가문도 마찬가지요. 피를 볼 각오라면 나와 나의 군대를 상대할 각오도 해야 할 것이오.”
볼트 헤르만 백작은 그 정도로 만족했다. 어찌 됐든 당장의 싸움은 피했다. 하지만 도반 도트넘 백작은 아니었다. 표정만 봐도 영 마음에 안 드는 눈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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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담이 흐지부지 끝났다. 칼부림이 나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어린 집사가 한숨처럼 말했다.
“이제 어쩌죠?”
“...몰라.”
힘으로 눌러서 충돌을 막았을 뿐, 근본적인 해결은 하나도 되지 않았다. 아니, 몇 배로 심각해졌다. 두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셰인 도트넘 자작의 죽음이 사실로 밝혀졌다.
볼트 헤르만 백작은 시신을 성 밖으로 운구했다. 호수성 마을을 지나 강철성 주둔지로 떠났다. 로벨 일행은 가까이서 셰인 자작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얼마 전 늑대성에서 본 그 건방진 종자가 맞았다.
사슴 바위 농장의 엘라는 창백해진 자작의 얼굴을 보고 그대로 혼절했다. 두 사람이 만난 것은 시간상 얼마 되지 않을 텐데 진심으로 사랑한 모양이다.
로벨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30년 동안 혼자였기 때문인지, 마도의 수호자가 되어 감정을 잃어가기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호수성 딴에는 화해의 제스처겠죠?”
“뱀파이어 군주가 받아들일 리 없어.”
볼트 헤르만 백작도 극적인 화해는 기대하지 않았다. 시간을 버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양아들의 장례를 치르려면 사흘은 꼼짝 못 할 것이다. 그 시간이면 용병을 족히 100명 고용할 수 있었다.
“결국 싸울 생각이네요.”
로벨이 언제까지 막을 수 없었다. 그리고 진짜 문제는 검은 성-사트로 후작 가문이었다.
로벨이 호수성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끼어들면, 검은 성도 봉신을 보호하기 위해 참전해야 했다. 과거 붉은 산 전쟁에서 명예와 권리를 잃은 북부 영주들이 대거 몰려올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되면 볼탄 반도는 또다시 혼란에 빠질 것이다.
“저 망할 강철성은 왜 남쪽까지 내려와서 분란을 일으킬까요? 좀 조용히 살면 안 되나?”
“피를 마시는 괴물이니까. 전쟁과 혼란이 좋을 거야.”
로벨의 의견에 동의하는 사람이 하나 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이 롱보우 시위를 가볍게 당겼다.
“언젠가 내가 말하지 않았소.”
로벨과 로벨의 측근이 모두 동방의 기사를 보았다.
“인간과 괴물은 공존할 수 없으니 반드시 싸우게 될 것이라 말이오.”
그러고 보니 들은 기억이 있는 것도 같았다. 자작나무 숲에서 였나? 하지만 그때와 처지가 달랐다. 마녀 키르케가 지팡이를 휘두르며 항변했다.
“괴물이 꼭 나쁜 것은 아니잖아요? 착한 괴물도 있고, 뭐냐, 이로운 괴물도 있잖아요? 지렁이를 보세요! 생긴 것은 꾸물꾸물하지만 얼마나 이로운 데요! 그렇죠, 기사님?”
“...나한테 묻지 마.”
더스틴 폴라 경은 시선을 피하는 로벨과 열변하는 마녀를 번갈아 보고 말했다.
“본인의 우정이 부족했을지 모르나, 지금까지 대공의 뜻을 따라주었소.”
“...부족하지 않았소.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하오.”
로벨이 목례하자 더스틴 폴라 경은 미소 지었다.
“이제부터 본인의 뜻대로 움직이겠소.”
도반 도트넘 백작을, 다시 말해 뱀파이어 군주 드라카를 죽이겠다는 뜻이었다.
이성적으로, 그리고 정치적으로 볼 때 나쁘지 않았다. 당장은 두 가문의 전쟁을 막을 수 있고, 좀 더 나가면 뱀파이어 군주의 끊임없는 살육도 막을 수 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과 더스틴 폴라 경의 험악한 과거를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 제삼자가 불편한 의혹을 사는 일도 없었다. 어디까지 도반 도트넘 백작을 죽일 수 있다면 말이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진실을 일부 알려주었다.
“그는 마도의 수호자요.”
“...무엇의 수호자?”
“인간이 빚어낸 허상(虛像)과 허구(虛構)를 수호하는 존재요. 그 역시 거짓된 생물이니 인간이 인지하고 인식할 때만 존재하오.”
활잡이 기사가 이해하기에 너무 어려운 말이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주위 사람을 한 번씩 보았다. 혼자 똑똑한 척 다 하는 꼬마 집사와 지나간 세월을 연륜이라 우기는 늙은 용병도 이해를 못해 눈을 껌벅였다. 유일하게 고깔모자 마녀만 고개를 끄덕였다.
“죽이면 안 된다는 뜻이오?”
“죽일 수 없다는 뜻이오.”
로벨은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비록 호의였다 하나, 뱀파이어의 소재를 알려주면 안 되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헛웃음을 지었다.
“지금껏 그런 생물은 본 적이 없소.”
“만일 죽일 수 있다면 경이 원하는 불로불사가 아니겠지.”
가만 생각하면 아이러니했다. 누구보다 불로불사를 원한 더스틴 폴라 경은 변한 것이 없는데, 아무 관심이 없던 로벨이 불로불사가 되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그자가 진짜 불사(不死)란 말이오? 그러면 대공도 승산이 없소?”
로벨은 오른쪽 허리에 매달린 흐룬팅을 쓸어 만졌다.
“한 가지 방법이 있소.”
“그게 무엇이오?”
“그가 쌓아온 영성을 파괴하는 것이오. 허나, 그것은 암살로 가능하지 않소.”
지금 생각하니 자비에 후작은 현명했다. 마도의 수호자를 죽일 뻔한 거의 유일한 인간이었다.
그의 방법을 잠시 빌리기로 했다.
“공개적으로 처형해야 하오. 세상 사람 모두가 도반 도트넘 백작이 죽었다고 믿도록 말이오.”
그리해도 진짜 죽지는 않겠지만, 영성을 빼앗아 현세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로벨이 여러 번 해낸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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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가 익어가는 계절이었다. 각종 병충해와 야생 짐승의 기승에도 씨알을 맺는 장한 보리가 있었다. 그러나 호수성 마을 농민은 수확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전쟁의 기운도 함께 익어갔기 때문이다.
두 백작 진영이 심상치 않았다. 어디서 페닝이 났는지-전부 빚이다- 세 자릿수의 용병을 끌어모았다. 기존의 병력과 합치면 양쪽 다 3, 400명 규모였다. 울프 용병단만으로 억제하기 힘든 숫자였다.
“지랄 났네. 지랄 났어.”
“저 잡것들은 왜 아침부터 칼부림이야?”
공을 세우고 싶은 신출내기 기사와 무식함을 용감함으로 착각하는 거친 용병이 수시로 몰려와 싸움질을 일삼았다. 로벨의 경고, 혹은 경고를 가장한 협박도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특히 갓 서임 받은 기사들은 자존감이 하늘을 찔러서 울프 용병단에게도 시비를 걸었다.
“기사 나리를 모셔올까?”
“어제도 그랬는데? 우리 나리가 착해도 슬슬 화낼 때가 됐지?”
“제기럴... 그럼 저 갑옷 돼지들을 어쩌자고? 죽일까?”
“...별 수 없지. 아자르 나으리를 불러와.”
“외해 야만인이 나으리는 무슨...”
“아, 좀 닥치고 불러와! 그래도 기사니까 정중히 부탁하고!”
로벨 진영의 문제는 기사가 거의 없었다. 봉신들을 소집해서 온 것이 아니라 더스틴 폴라 경과 아자르 경이 전부인데, 그나마 더스틴 폴라 경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싸움개와 피리 부는 쟝은 호수 동쪽에서 투닥거리는 두 백작 가문 기사들을 한심하게 보며 잡담했다.
“그러고 보니까 그 나리 진짜 안 보이는데?”
“강철성 나으리 눈에 띄어서 좋을 게 없으니 몰래 떠난 거 아냐?”
“그건 아닐걸? 전투마 숫자가 그대로야.”
기사들의 싸움은 지루했다. 전신 갑옷으로 어지간해서 끄덕도 하지 않으니 지칠 때까지 싸우는 편이었다. 갑옷 틈새를 노려 깔끔하게 제압하는 것은 로벨이나 호른 경쯤 되어야 가능했다.
잠시 뒤, 아자르 경을 데리러 간 신참 용병이 돌아왔다. 기대와 달리 혼자였다. 피리 부는 쟝이 오물거리던 보리알을 퉤! 뱉었다.
“뭐야? 꼴에 기사라고 귀찮데?”
“아니, 그건 아닌데, 우리 나리의 명령이야.”
“기사 나리 명령? 뭔데?”
어리숙한 신참은 자신이 들은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관심 없었다. 헤벌쭉 웃으며 명령을 전달했다.
“저쪽은 그냥 내버려 두래. 우리는 서쪽으로 이동한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