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1화. 회담
로벨 로드릭 대공은 무질서하고 무자비한 호수성 일대를 단숨에 장악했다. 크게 어려울 것 없었다. 무적무패의 신화와 울프 용병단의 명성으로 충분했다.
“늑대성의 군대야!”
“저분이 대공인가?”
“그 못돼먹은 것들은...”
“진즉에 다 내뺐네.”
로벨은 약탈을 금지했다. 필요한 물자가 있으면 종군상인을 통해 구매했으며, 상인이 못 구하는 것은 인근 영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값을 치렀다. 숨죽인 속삭임이 열렬한 환호로 바뀌는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옛 신이 보내주신 구원자요!”
“대공 전하 만세! 만세!”
로벨은 왕족이 아니라 전하(Your Highness)란 호칭은 잘못되었다. 하지만 아무도 지적하지 않았다. 스스로 빛을 내는 듯한 하얀 갑옷과 윤기가 흐르는 하얀 전투마, 그리고 시정잡배 용병과 다른, 전쟁터에서 단련된 진짜배기 용병들을 거느린 모습이 누가 봐도 볼탄 반도의 왕이었다.
하루 대부분을 조롱하고 협박하는데 사용하던 강철성과 호수성의 기사들도 통일된 깃발을 가진 늑대성 군대에 기가 죽었다. 단일 부대로 500명, 그것도 전쟁 전문 용병으로 500명을 거느린 기사는 흔치 않았다. 어지간한 가문은 500명의 급료조차 감당 못했다.
“그것보다 무서운 것은...”
“무적무패의 대공이지.”
로벨에게 패한 적 있는 강철성 기사들은 마른침을 삼켰다. 설욕도 어느 정도 급이 맞을 때 가능했다. 곰하고 싸워서 졌다고 설욕을 말하진 않았다.
긴장한 것은 호수성 기사도 마찬가지였다. 아군일 때는 마냥 든든했는데, 적이 된다고 생각하니 어찌 상대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설령 저 무시무시한 500명의 용병을 격파해도, 로벨이 마음먹으면 그 열 배를 동원해 다시 공격할 수 있었다. 저항하는 것은 계란으로 바위치기였다.
지팡이가 없으면 한 걸음도 못 떼는 늙은 볼트 헤르만 백작이 쉰 목소리로 명령했다.
“성문을 여시오.”
기사들이 깜짝 놀라 돌아보았다. 충성을 맹세한 헤르만 가문의 웃어른이라 대놓고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체로 비슷한 생각을 했다. ‘노망이 났나?’ 하지만 노(老)백작의 정신을 멀쩡했다.
“늑대성 공작이 온 이상 전쟁은 없소.”
로벨과 함께 전쟁을 치른 백작이었다. 로벨의 힘을 잘 알았다. 백작은 마른기침을 조금하고 말했다.
“우리는 피해자요. 나는 조카를 잃었고, 경들은 주군을 잃었소. 그럼에도 저 간사한 시해범을 명예롭게 대해주었소. 우리가 저들을 피할 이유는 없소.”
사회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큰 힘’이었다. 로벨 로드릭이란 큰 힘이 등장한 이상 모두가 질서에 순응해야 했다. 이때부터는 정당성과 도덕성이 무기가 되었다. 셰인 도트넘 자작을 끝까지 살려둔 혜안이 빛을 발했다.
그런데 강철성도 비슷하게 생각했다.
“저 비열한 호수성 기사들은 결투에 수긍하지 않고 숫자로 밀어붙여 자작을 납치했소. 그러나 우리는 늑대성의 체면과 명예를 존중하여 공격하지 않았지.”
“로벨 로드릭 대공은 명예로운 기사요. 호수성이 자기 봉신이라 하나 명명백백히 판결할 것이오.”
강철성 기사들도 포위를 풀고 로벨을 맞이했다. 차라리 덤비는 편이 좋았을지 모른다. 로벨은 서로 정당하다 주장하는 기사들 속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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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일전에 피해갔던 호수성 마을에 입장했다. 그리고 참담함을 감추었다. 영주의 보호를 받지 못한 마을은 처참했다.
마을 입구에는 재미와 경고가 반씩 섞인 시체가 주렁주렁 걸려 있고, 길거리에는 갈비뼈가 보일 만큼 굶주린 짐승이 어슬렁거렸다. 그것도 운이 좋은 편이었다. 대부분의 가축은 진짜 뼈만 남아 수북이 쌓였다.
작년 가을에 비축한 곡식은 모두 빼앗겼고, 올해 가을에 파종할 종자는 불타 사라졌다. 봄농사 또한 망쳤으니 여름이 올 때쯤이면 아사자가 속출할 것이다.
“로벨 대공, 어서 오시오.”
이 참담함의 원흉이 사람 좋은 미소로 마중 나왔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형식적인 악수를 나눴다. 강철로 만든 뱀브레이스가 일그러질 정도로 꽉 쥐었다.
“이게 무슨 짓이야.”
사나흘 굶주린 늑대의 으르렁처럼 들렸다. 로벨은 살기가 없다고 말했지만, 지금 모습을 보면 아무도 믿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강철성의 주인이자 뱀파이어의 군주인 도반 도트넘 백작은 태연했다.
“실인과 방화 말이오? 아니면 약탈과 강간 말이오? 인간 사이에서 흔한 일이잖소?”
“...흔하지 않아. 적어도 내 땅에서는 용납 못 해.”
인간의 탈을 쓴 괴물들의 대화였다. 그저 악수만 하는데 분위기가 살벌했다. 그러나 언제까지 서로를 잡고 있을 수 없었다. 먼저 손을 놓은 것은 도반 도트넘 백작이었다.
“먼 길 오느라 피곤할 텐데, 일단 안으로 들어갑시다. 물이 좋아서 그런지 술맛도 좋소이다.”
“피 맛이 좋은 게 아니고?”
주변 사람이 짐작하는 것과 달리 은유가 아니었다. 마을 밖 시체 중 일부는 백작이 피를 빨아 죽였을 것이다.
“너무 그러지 마시오. 이제 대공도 같은 처지 아니오.”
새삼스럽지만, 도반 도트넘 백작은 로벨을 가장 잘 아는 자였다. 로벨의 비밀, 성격, 최근의 변화와 정체까지 속속히 알고 있었다. 걸음마를 뗄 때부터 함께한 어린 집사보다 많이 알았다. 그래서 항상 껄끄러웠다.
로벨은 초대를 거절하고 강압적으로 말했다.
“군대를 1마일 밖으로 물리시오. 그리고 본인의 허락 없이 어떤 군사행동도 하지 마시오.”
자존심 강한 강철성 기사들이 눈을 부릅떴다. 도트넘 가문은 로드릭 가문에 충성하지 않았다. 아무리 대공이라도 명령할 수 없었다. 하지만 도트넘 백작은 명쾌했다.
“예의바른 손님이라면 응당 주인의 요청을 따라야지. 그리하겠소.”
그 여유로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사흘 뒤 헤르만 가문과 회담할 것이오. 그때 다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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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날에 어린 집사는 시간 끌지 말고 홀딱 해결하자고 졸랐다. 하지만 둘째 날이 되자 보름쯤 머물자고 너스레를 떨었다.
어린 집사의 마음을 바꾼 것은 당연히 반짝이는 금속이었다. 로벨이 재판을 맡자 강철성과 호수성의 기사들이 선물-을 가장한 뇌물-을 보내왔다. 단순히 내 편을 들어달라는 부탁이 아니었다. 두 가문과 얽힌 기사, 지주, 상인 등도 허겁지겁 찾아왔다. 요구는 다양했다.
‘볼트 헤르만 백작은 고령이라 차기 백작으로 적합하지 않다. 누구누구를 차기 백작으로 지목해 달라’, ‘나는 주인 잃은 사슴 바위 농장의 먼 친척이다. 소유권을 인정해 달라’, ‘강철성의 용병이 내 가족을 살해했다. 복수를 도와 달라’ 등등... 얽히고설킨 가문이 너무 많아 어린 집사조차 헷갈릴 정도였다.
반면, 로벨은 황폐해진 영지에 이렇게 많은 금붙이가 있다는 것에 놀랐다. 그리고 매우 잘 됐다고 생각했다.
“종군 상인을 불러와.”
어린 집사가 눈에 띄게 움찔했다.
“...아니죠?”
“뭐가 아니야?”
“저 재물을 뿌릴 생각 아니죠?”
로벨은 빙그레 웃고 다시 말했다.
“종군 상인을 불러와.”
역시는 역시였다. 로벨은 종군 상인에게 귀리와 콩을 대량으로 사들이겠노라 밝혔다. 울프 용병단 500명이 소비하기에 턱없이 많은 양이었다. 눈치 하나로 전쟁터를 누벼온 상인들은 바로 이해했다.
호수성의 주인이 방치한 호수성 영지민을 로벨이 구휼했다.
“정말 고마운 분이야. 정말 위대한 분이야.”
“옛 신이 보낸 천사라니까. 암. 천사지. 천사야.”
밀과 보리를 사지 않은 것은 값도 값이지만 곡물값이 오르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과거의 로벨을 생각하면 굉장한 발전이었다.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흐윽...”
어린 집사의 울먹임과 함께 사흘이 정신없이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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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이 정상에 이르자 호수성에서 백기를 든 기사들이 나왔다. 하나같이 중무장했으나 헬름을 착용하지는 않았다.
조금 늦게 호수성 마을 남쪽에서 강철성 기사들이 올라왔다. 역시나 백기를 들고 있었다. 허풍쟁이가 양쪽을 빠르게 확인한 후 보고했다.
“기사 나리! 백작 나리들이 나타났습니다!”
“이놈아! 백작 나리한테 나타났다가 뭐냐? 당도했다고 해라!”
펄프 대장이 대신 호통치고 로벨을 보았다. 로벨도 회담준비를 마쳤다.
뼈대와 그을림만 남은 공용창고에 테이블과 의자를 준비하고 맨앳암즈 2개 소대로 주변을 지키게 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강철성과 마찰을 빚을 게 분명하니 마을구석에 숨겼다. 아자르 경을 수행기사로 대동한 채 상석에 앉았다.
“로벨 대공, 실로 오랜만에 뵙소. 집안 사정이 안 좋아 따로 인사드리지 못한 것을 용서하시오.”
그 말대로 오랜만에 볼트 헤르만 백작을 보았다. 세월 탓인지, 아니면 뒷방으로 쫓겨난 신세 탓인지 부쩍 늙었다.
“호수성에는 기사가 없소? 작위를 박탈당한 불명예 늙은이가 대표로 나오다니, 우스운 일이군.”
도반 도트넘 백작이 시비를 걸었다. 로벨은 내심 놀랐다. 저 냉혈괴물이 ‘진짜 인간’처럼 행동하는 게 신기했다. 얼마나 인간다운지 호수성 기사들이 칼을 빼들었다.
“네 이놈! 아가리를 찢어줄까!”
“주군의 원한을 지금 갚아주마!”
회담이 매끄럽지 않을 것은 예상했다. 로벨이 신호를 주자 아자르 경이 해머를 휘둘렀다. 쾅-! 포탄이 떨어진 것처럼 땅이 울렸다. 머리끝까지 차오른 열이 빠르게 식었다. 잊으면 안 되는 것이 있었다. 이곳은 늑대성의 군영이었다. 아자르 경이 누군지는 모르지만, 언제든지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수백 명의 군사 중 하나였다.
“다들 자리에 앉으시오.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상황을 원래대로 돌릴 것이오.”
‘원래대로’란 말에 항의가 나왔지만, 그리 크지 않아 무시되었다. 주도권을 거의 잡았다. ‘거의’였다.
“그 전에 내 아들, 셰인 도트넘 자작을 봐야겠소.”
도반 도트넘 백작이 다시 흐름을 끊었다. 아자르 경의 눈썹이 일자로 모였다.
“웃기는 소리! 죄인을 풀어줄 수 없소!”
“자작이 왜 죄인인가? 결투에서 승리한 게 잘못인가?”
“결투가 아니라니까!”
깨우친 게 있어 칼은 안 쥐었지만, 고성이 오고 갔다. 로벨은 고민하다가 그냥 회담을 진행했다.
“사건을 지켜본 증인이 있소.”
치정의 속사정을 아는 자와 모르는 자가 극명하게 갈렸다. 전자는 크게 당황했다.
“아자르 경, 엘라를 데려오시오.”
충직한 아자르 경은 고개를 꾸벅이고 자리를 떠났다. 회담장이 고요해졌다.
맨앳암즈 사이에 끼어 훔쳐보던 펄프 대장이 미소 지었다. 이제 두 백작 가문 모두 망신 당할 것이다. 그럴 리 없다고 우기는 기사도 있겠지만, 로벨의 고상한 명예와 40명의 맨앳암즈보다 무게 있진 않을 것이다.
‘전부 계획대로 진행되어... 응?’
아직 증인이 오지 않았는데, 뒤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심상치 않은 소란이었다.
‘그 여자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그럴 리 없었다. 엘라의 소재를 눈치 챈 백작이 암살자를 보낼까봐 철저히 보호했다. 지금도 외팔이와 흉내쟁이가 붙어있을 것이다. 그래서 급보가 왔을 때 놀랐다.
“암살! 암살입니다!”
언제 들어도 기분 나쁜 단어였다. 기사들이 벌떡! 일어났다. 몸에 걸친 쇠붙이 탓에 위압감이 엄청났다. 전령은 굵직한 침을 삼켰다. 그러나 보고를 안 할 수 없었다. 세 개 성에서 모인 기사들을 향해 폭탄을 던졌다.
“셰, 셰인 도트넘 자작이 옥사에서 살해당했습니다! 암살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