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9화. 살기
머리가 쪼개진 시체, 얼굴이 함몰된 시체, 목구멍에 구멍 난 시체를 정성껏 밧줄로 묶어 아름드리나무 위에 걸었다. 기사들이 흔히 하는 경고였다. 조심성이 있는 도적이라면 한동안 이 근처에서 약탈하지 않을 것이다.
“저렇게 두면 새들이 쪼아댈 텐데...”
마녀 키르케가 조그맣게 걱정했다. 이상한 쪽으로 선량했다. 어린 집사가 코웃음 쳤다.
“저런 놈들은 매장해줄 필요 없어요. 살아생전 도움이 안 된 놈들이니 죽어서라도 써먹어야죠.”
반면, 용감하게 저항하다 죽은 농장 주인은 곱게 염해서 가족묘로 보냈다. 죽다 살아난 아들과 험한 꼴을 당한 딸이 연신 고마움을 표시했다.
로벨은 육체노동으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물었다.
“사제를 불러야 하는 거 아니야?”
“이 지경인데 사제가 오겠어요?”
장례식은 가족끼리 조촐하게 치러졌다. 로벨 일행이 할 일은 더 이상 없었다. 어린 집사는 도망간 용병이 돌아와 보복할까 걱정되어 잠시 피해있으라 권했지만 남매는 거절했다.
“조상대대로 가꿔온 땅입니다. 지켜야지요.”
“일단 살아야 지키죠. 그러지 말고 도시로...”
로벨은 어린 집사의 어깨를 당겼다. 사실 집사도 알고 있었다. 가진 재산이 땅뿐인 농부에게 땅을 버리라는 것은 죽으라는 것이다.
“여동생을 남장시키시오. 무기를 항시 휴대하시오. 유사시 도망갈 곳과 숨을 곳을 마련하시오. 이게 도움이 될 거요.”
더스틴 폴라 경이 대거를 뽑아 주었다. 농장 아들은 어색한 동작으로 칼집을 잡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아, 성함을 알려주시겠습니까? 기회가 되면 꼭 은혜를 갚겠습니다.”
로벨 일행은 서로를 힐끔 보았다. 정체를 숨겨야 하는 로벨이나 수배 중인 더스틴 폴라 경은 이름을 밝히기 곤란했다. 아자르 경도 이름이 특이해서 흔적이 남았다.
로벨은 짧은 갈등 후에 대화를 마쳤다.
“은혜 같은 거 신경 쓰지 마. 잘 먹고 잘 살아. 그거면 충분해.”
로벨은 모닝스타의 고삐를 잡고 출발했다. 더스틴 폴라 경은 ‘그렇다는군’ 한마디 하고 돌아섰고, 아자르 경은 자세히 설명하려다가 포기하고 두 기사를 따라갔다.
“저, 정말 가십니까? 허면, 은혜를 어떻게 갚으라고...”
마녀 키르케마저 손을 한 번 흔들고 떠났다. 남은 것은 잔걱정이 많은 집사뿐이었다.
“용병이 다시 와서 곤란한 일이 생기면, 그러면 안 되지만, 정말 곤란한 일이 생기면 버팅거 시티 상회에서 제 이름을 대세요. 제 이름은...”
어린 집사는 이름을 밝힌 후 비밀이라 당부했다. 흔한 이름이라 외우기 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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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기운이 감도는 나뭇가지를 치우자 볼탄 반도에서 손꼽히게 아름다운 성, 호수성이 나타났다. 보석처럼 빛나는 호수에 치맛자락을 걷고 조심스레 한 발을 담근 소녀 같았다.
더스틴 폴라 경은 수면에 비치는 성채를 가만히 보며 말했다.
“서방 세계의 성은 참으로 대단하오.”
“어떤 점에서?”
“요충지마다 하나씩 세워져 있소.”
로벨이 원한 대답이 아니었다. 더스틴 폴라 경은 빙그레 웃으며 몇 마디 덧붙였다.
“그래서 실용적이오. 저 성도 성벽이 높고 진입로가 좁아 공격이 쉽지 않아 보이오. 호수 때문에 고사(枯死)하기도 쉽지 않지.”
“어험! 험! 우리 영주님은 병사 10명으로 점령했어요.”
“저렇게 큰 성을? 정말이오?”
“지금 생각하면 운이 좋았어...”
시야가 넓은 곳에서는 눈에 보이는 거리와 실제 거리가 조금 달랐다. 로벨 일행은 반나절을 꼬박 걸어 간신히 호수성 마을에 도착했다. 어린 집사는 드디어 쉴 수 있다고 좋아했지만,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뭐 저리 병사가 많아요?”
“사실 당연하지만...”
호수성 마을은 과거 로드릭 마을과 비교하면 비교한 것이 미안할 만큼 부유한 마을이었다. 비옥한 토지와 풍부한 수량, 그리고 버팅거 시티의 거대한 시장으로 게으름만 피우지 않으면 가난한 농민도 재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얼마 전까지 말이다.
화가 잔뜩 난 기사와 재물욕이 넘치는 용병이 들이닥치자 모든 것이 엉망이 되었다. 가축을 멋대로 잡아먹고, 헛간을 뜯어 불을 피우고, 부녀자를 희롱하고, 값나가는 것을 훔쳐갔다. 마을주민은 집 안에 숨어 제발 우리 집은 건들지 않기를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아니? 시골 마을도 아니고, 백작이 직접 다스리는 곳에서 저래도 되나요?”
“다른 백작이 용인하고 있잖아.”
도반 도트넘 백작. 인간의 탈을 쓴 악마. 결국은 강철성이 문제였다.
로벨은 불타는 공용창고를 보면서 머리를 가로저었다.
“저런 분위기면 마을에 들어가서 좋을 게 없겠어. 폴라 경, 여자가 있는 곳이 어디요?”
갓 구운 빵과 시원한 맥주 한잔은 물 건너갔다. 어린 집사와 마녀가 시무룩해졌다.
“그리 멀지 않소. 한 시간만 돌아가면 되오.”
“그럼 바로 여자를 구하고 북쪽으로 갑시다.”
로벨에게 충성하지는 않지만, 로벨의 결정권을 부정하진 않았다. 어깨를 한번 으쓱이고 마을 진입로를 우회했다.
주인이 손 놓은 밭은 해로운 짐승과 억척스러운 잡초로 금방 황폐해졌다. 낮에는 봄을 맞이한 철새가 종자를 파먹고, 밤에는 허기를 못 참은 두더지가 땅을 헤집었다. 간신히 싹을 틔워도 먼저 뿌리내린 잡초가 성장을 방해했다.
‘농사로 부를 쌓은 곳이 농사를 못 지으면...’
로벨은 호수성의 처지가 딱해 혀를 찼다. 로벨이 호수성의 주인이라면 젊은 자작을 풀어주고 결투를 신청하거나 군대를 몰아 바로 선제공격했을 것이다. 아무튼 시간을 끌어 좋을 것이 없었다.
“세상 사람이 전부 영주님 같지 않잖아요. 결투에서 패배하면요? 선제공격이 전면전이 되면요? 호수성 입장에서는 위험한 도박이죠.”
“그럼 어떡해?”
“계속 버텨야죠. 그러면 영주님이든 검은 성이든 중재할 테니까요. 그때를 노리고 젊은 자작을 살려두는 거고요.”
“...마음에 안 들어.”
“영주님 마음에 들려고 싸우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제 마음에도 안 들어요.”
이런저런 잡담하는 사이 호수성의 농경지를 지나 외진 농장에 도착했다.
“소리를 낮추시오. 파수꾼이 있을지도 모르오.”
로벨은 후드를 눌러쓰고 꼬뜨자락을 모아 칼을 숨겼다. 어린 집사와 마녀도 눈치가 아주 없지는 않아 호칭을 생략했다.
수레 하나 겨우 지나갈 흙길에 허리 높이 울타리가 빙 둘러져 있고, 그 너머로 짚을 얹은 오두막과 흙으로 쌓은 창고가 보였다. 전형적인 볼탄 반도 농장이었다. 로벨이 송곳니를 보이고 중얼거렸다.
“제대로 찾아왔어.”
“예?”
마녀가 엉뚱한 호기심을 보였다.
“어떻게 알아요? 혹시 살기가 느껴져요?”
“살기? 그게 뭐야?”
“또! 또 헛소리하네요.”
어린 집사가 이상한 소설 좀 그만 보라고 타박했다. 그런 게 있으면 사냥당할 짐승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관리가 잘 된 농장에 일꾼도, 가축도 없잖아.”
그 말이 정답이었다. 로벨 일행이 대문을 지나자 칼을 찬 사내들이 어슬렁어슬렁 나타났다.
“이곳은 귀족 나리의 사유지다. 볼일이 없으면 돌아가라.”
로벨은 칼잡이의 숫자와 위치를 빠르게 확인했다. 본능에 가까운 행위였다.
“강철성? 아니면 호수성이야?”
소속을 묻자 분위기가 변했다. 칼잡이 하나가 칼자루를 쥐고 물었다.
“그걸 알아서 뭐하게?”
“적인지 아군인지 알아야지.”
무장을 보아 용병들이었다. 언제 전쟁이 벌어질지 모르는데 귀한 기사를 이런 곳에 묶어둘 리 없었다. 갑자기 일이 터져서 기사가 포로로 잡히면 두 배로 골치 아팠다.
‘오른쪽에 셋. 왼쪽에 둘. 안 보이는 곳에 두어 명 더 있어도...’
결론이 금방 나왔다. 하지만 농장의 칼잡이들은 시간이 필요했다.
“생긴 것부터 수상하더니... 어느 백작이 보냈지?”
“내가 먼저 물었는데? 잠깐, 내가 수상해?”
“...이곳 주인이 누군지도 모르고 왔다? 안 되겠군. 전부 붙잡아!”
마침내 결론이 나왔다. 칼잡이가 칼을 뽑았다. 손질이 잘 된 숏소드와 팔치온이었다. 일전에 본 깡패 수준의 용병과 비교하면 품격이 느껴질 만큼 고급스러웠다. 그래도 기사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흠!”
로벨은 물론이고, 더스틴 폴라 경과 아자르 경도 칼침 놓을 상대와 말을 섞는 취미는 없었다. 각자 생각한 위치에서 각자 준비한 병장기를 꺼냈다.
챙! 챙챙-! 깡-!
쇠와 쇠가 부딪치며 불꽃을 뿌렸다. 햇살이 칼날에 튕겨 나와 어지럽게 반사광을 뿌렸다. 그러나 오래 걸리지 않았다. 큼직한 무기에 빈약한 갑옷은 대개 삼합 안에 승부가 갈렸다.
로벨은 과감한 찌르기를 칼끝으로 비켜낸 후 폼멜로 턱을 부수고 쓰러지는 칼잡이를 어깨로 밀어 뒤따라오는 두 번째 칼잡이에게 선물했다.
“시발! 비켜!”
앞이 막힌 칼잡이가 동료에게 화풀이했다. 하지만 우정이 얕다고 할 수 없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빙그르 돌려 칼날을 찔렀다. 두 사람이 한 번에 관통되었다.
“개자식이!”
세 번째 칼잡이가 팔치온을 치켜들었다. 로벨은 뼈와 근육에 꽉 잡힌 아론다이트를 억지로 회수하지 않았다. 칼은 한 자루 더 있었다. 자세를 낮추고 흐룬팅을 빠르게 뽑았다. 롱소드 길이 칼자루에 속은 걸까, 아니면 로벨의 발검이 상상 이상으로 빠른 걸까. 팔치온이 떨어지기 전에 손목을 베었다. 면도해도 될 만큼 날카로운 흐룬팅이었다. 칼을 쥔 손이 그대로 떨어졌다.
“으, 으으, 으아ㄱ-! 꾸륵...”
비명 지를 기회조차 가지지 못했다. 더스틴 폴라 경이 자비롭게 머리를 날려주었다. 다른 칼잡이는 아자르 경이 전부 때려눕힌 상태였다. 고작 2, 30초 지났을 뿐인데 두 발로 서 있는 것은 로벨 일행뿐이었다.
“와우...”
어린 집사가 입술을 모아 탄성을 질렀다. 지난번 농장과 비슷하면서 달랐다. 죽이기로 작정한 싸움이라 시작과 끝에 군더더기가 없었다. 역설적으로 잔인하단 생각도 안 들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를 회수해 칼날을 살폈고, 아자르 경은 워 해머에 달라붙은 살덩이와 머리카락을 떼어냈다. 살인이 아니라 쟁기질을 끝낸 것 같았다.
“이들이 전부요. 도망친 자는 없소.”
더스틴 폴라 경이 화살을 모으며 말했다. 활잡이답게 시력이 좋고 시야가 넓었다.
“여자는 저쪽인가?”
일행의 시선이 오두막을 향했다.
여기까지 모두 순조로웠다. 목격자도 없고, 다친 사람도 없었다. 이대로 고(故)헤르만 백작의 애인을 구해서 군대를 이끌고 남하하는 펄프 대장과 합류하면 끝이었다.
“나온다. 이곳에. 부순다.”
아자르 경이 워 해머로 자물쇠를 부수고 빗장을 치웠다. 그리고 일행은 첫 난관에 봉착했다.
“...여기가 아닌가요?”
오두막 안은 텅 비어있었다. 그러나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벽난로에 불씨가 남아있고, 먹다 남긴 빵과 수프도 있었다. 마녀가 보닛의 귀덮개를 잡고 나무창을 보았다.
“여기 있었는데, 없어요.”
창문을 올리는 경첩이 망가지고 창틀이 흙투성이였다. 크지 않은 창문이라 빠져나가기 힘들었을 텐데, 얼마나 급했는지 옷을 찢어 먹으며 해냈다.
“아, 당연한가?”
입장을 바꿔 생각하면 집 밖에서 칼부림이 나 여럿이 죽었다. 안 그래도 두 백작 가문 사이에 끼어서 오늘내일하는데, 죽기 살기로 탈출하는 것은 당연했다. 더스틴 폴라 경이 롱보우를 풀어 쥐고 으르렁거렸다.
“여유부릴 때가 아니잖소. 망할... 당장 쫓읍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