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88화 (388/605)

388화. 위로

겨우내 쌓인 눈이 녹아 곳곳이 진창이 되었다.

네발짐승을 부리는 사람에게 빙판보다 안 좋은 것이 진창이었다. 수레바퀴가 수렁에 빠져 오도 가도 못하는 상인, 양들이 늪지에 갇혀 발을 굴리는 양치기, 승마를 고집하다 애마의 발목을 부러뜨린 기사가 속출했다.

로벨은 모닝스타에서 내려 고삐를 잡고 걸었다. 지체 높은 기사가 두 발로 걷는 것은 수치스러운 일이나 길이 안 좋아 도리가 없었다. 모닝스타는 괜찮으니 어서 타라고 칭얼거렸지만, 말의 말을 몰라 ‘배고픈가?’ 짐작하고 당근을 물려주었다.

“이곳 영주는 무엇을 하기에 길이 이 모양이지?”

“에이, 이게 보통이죠. 우리 영주님처럼 성 밖까지 포장도로를 까는 영주님은 거의 없어요.”

로벨은 호수성으로 가는 일행을 차례로 보았다.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더스틴 폴라 경, 나마르 아자르 경이었다. 기사의 체면 따위 신경 쓰지 않는 조합이라 두 발로 걷는데 거리낌이 없었다.

“늑대도로가 정말 잘 만든 가도죠. 기초공사가 확실해서 비가 내리고 얼음이 녹아도 끄덕 안 해요. 어설프게 돌을 심은 도로는 2, 3년만 지나도 여기저기 구멍 나서 주저앉거든요? 하지만 우리 영주님이 만든 늑대도로는...”

어린 집사가 쫑알쫑알 떠들었다. 본래 수다스러운 성격은 아닌데, 로벨을 자랑할 때나 마녀와 싸울 때는 말이 많았다.

“얼마나 더 가야 해?”

로벨은 적당한 타이밍에 수다를 끊었다. 어린 집사는 ‘잠시만요!’ 외치고 지도를 꺼냈다. 로드릭 상회에서 정식으로 제작한 남부 상행 지도 중 하나였다. 어린 집사가 이것저것 주워 모아 만든 기존 지도보다 정확하고 자세했다.

“점심 때 양치기 마을을 지났으니까... 이쯤 내려와서... 여기 근처에요!”

로벨은 어린 집사가 쫙- 펼친 지도를 슬쩍 보고 말했다.

“늪지성 마을이네?”

로벨의 충직한 기사 메튜 경의 영지였다.

“쉬었다 가면 좋겠지만...”

“무적무패가 왔다고 소문내지 않으려면 조용히 지나가야죠.”

로벨 일행은 정체를 숨기고 있었다.

로벨은 평소 자랑하는 필드 아머 대신 철판을 꼼꼼하게 덧댄 브리간딘을 입고 품이 넉넉한 꼬뜨를 뒤집어썼다. 옷자락 사이로 삐쭉 나온 칼자루가 아니면 수도사로 보일 것이다.

어린 집사는 소매가 짧은 튜닉에 양털로 짠 맨틀(Mantle:직사각형 겉옷)을 입어 목동처럼 꾸몄고, 마녀 키르케는 고깔모자 대신 귀를 덮는 보닛을 써서 시골 처녀로 변장했으며, 더스틴 폴라 경과 아자르 경은 털가죽을 칭칭 감아 사냥꾼으로 위장했다.

“그런데 왜 자꾸 쳐다보지?”

“글쎄요...?”

개개인을 보면 흠잡을 데 없었다. 그러나 모아놓으니 문제가 있었다. 수도사, 목동, 사냥꾼은 어지간해서 같이 다닐 일이 없는 조합이었다. 당나귀를 끄는 상인이 힐끔거리며 지나갔다. 마녀 키르케가 손가락을 딱! 튕기고 말했다.

“기사님이 잘생겨서가 아닐까요?”

“아, 음.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가능성이 있군요.”

어린 집사가 고개를 주억이자 아자르 경이 손뼉을 치며 마녀를 칭찬했다. 유일하게 문제를 눈치 챈 더스틴 폴라 경은 지적하고 싶은 욕구를 꾹 참았다.

이상한 일당이란 오명을 쓰기는 했지만, 볼탄 반도의 공작 일행이란 것은 숨길 수 있었다. 애초에 공작 나리가 수행원도 없이 진창길을 지나갈 거라 생각하기 힘들었다.

늪지성 마을을 지나자 볼탄 반도에서 가장 크고 가장 아름다운 버팅거 호수가 나타났다. 이국에서 온 아자르 경이 크게 감탄했다.

“바다? 바다 맞다?”

“호수에요. 호수. 못 믿겠으면 맛을 보세요.”

어린 집사는 농으로 말했지만, 아자르 경은 진짜 호숫가로 달려가 물을 떠마셨다. 길가에 위치한 물이라 지저분했다. 일행이 일제히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아자르 경은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아니 짜다! 좋은 물이다! 깨끗하다!”

더스틴 폴라 경이 수염을 긁적였다.

“며칠 전부터 생각했는데, 저 친구 좀 모자란가?”

“...그냥 공용어가 서툰 거예요.”

마녀가 후다닥 뛰어가서 모자라지 않은 아자르 경을 끄집어왔다. 아자르 경이 무어라 떠들었는데, 대충 착한 아이라는 뜻 같았다. 어린 집사와 더스틴 폴라 경은 멀리서 남인 척하다가 슬그머니 합류했다.

버팅거 호수의 풍경은 아름다웠고, 아름다운 것을 보는 사람의 마음 또한 아름다우니 호수성으로 가는 내내 분위기가 좋았다.

“이 애비애미 팔아먹을 개 호로자식들이...!”

“뭣이라? 똥물에 튀겨도 못 먹을 비렁뱅이 새끼가?”

“똥물에 튀기면 원래 못 먹어 이 무식한 돼지야!”

청명한 하늘 아래 고운 소리 맑은 소리가 울려 퍼졌다. 로벨 일행은 걸음을 멈추고 소리꾼을 쳐다보았다. 야트막한 농장 울타리를 경계로 무장집단이 대립하고 있었다. 로벨은 전쟁 전문가답게 한눈에 알아보았다.

“용병들이야.”

참나무에 못을 박은 무기와 생가죽을 기워 만든 갑옷이 초라하면서 험악했다.

“가난한 용병인가요?”

“아니, 평균수준 아닐까?”

울프 용병단 때문에 용병을 보는 눈이 많이 높아진 탓이다. 농사짓기 싫어서, 혹은 매 맞기 싫어서 고향을 떠난 대다수 용병이 원래 저러했다.

“돈 냄새를 맡고 온 모양이군요.”

“피 냄새겠지. 두 가문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으니.”

로벨 일행은 멀찍이 떨어져서 피해갔다. 아니, 피해가려고 했다. 열 걸음쯤 뗐을 때 발목이 잡혔다.

“꺄아아아아-!”

사내의 것과 다른 고음의 비명. 기사라 자부하는 로벨이 멈췄다. 자연히 로벨을 따르는 모두가 멈춰 섰다.

“영주님?”

어린 집사가 불안한 눈초리로 불렀다. 로벨은 즉시 꼬뜨 자락을 걷고 칼자루를 쥐었다.

“에휴...”

그럴 줄 알았기에 화내지 않았다. 마녀 키르케는 “역시 우리 기사님!”하며 좋아했고, 더스틴 폴라 경과 아자르 경은 우정으로 적극 동참했다.

“멈춰라!”

“이게 무슨 짓이냐?”

두 용병집단은 갑자기 나타난 제3의 세력에 움찔했다. 하지만 여자와 아이-치고 좀 크지만-가 섞인 무리란 것은 알고 껄껄 웃었다.

“가던 길이나 가지 웬 참견이야?”

“뭣이여? 기사 나리라도 되냐?”

정체를 들켰다고 생각한 것은 로벨 뿐이었다. 로벨이 ‘아직도 기사처럼 보이나?’하고 복장을 점검하는 사이, 성미 급한 더스틴 폴라 경은 허리춤에서 숏보우와 화살을 동시에 뽑아 재지도 않고 쏘았다. 말 그대로 속사였다.

“꾸르륵...”

제일 앞에서 거들먹거리던 용병이 목을 잡고 무릎 꿇었다. 기도가 뚫린 듯 비명이 나오지 않았다. 얼굴은 하얗게 질리고 가슴은 빨갛게 젖었다.

“이, 이, 이 새끼가! 진짜 쐈어!”

“그럼 가짜로 쏘는 것도 있나?”

뱀파이어를 사냥하는 기사다웠다. 용병들은 갑작스러운 살인에 우왕좌왕하다 간신히 결론을 내렸다.

“저 새끼들부터 조져!”

스파이크 클럽을 든 용병이 소리쳤다. 로벨은 직접 덤비지 않는 게 추하다 생각했지만, 분위기를 탄 용병들은 거기까지 고민하지 않았다. 쇠붙이와 몽둥이가 흉흉하게 공기를 마셨다.

“싸움 좋다! 나한테! 너 아니다! 죽는다!”

아자르 경이 한발 크게 내디디며 주먹을 뻗었다. 연장과 주먹이 붙으면 상식적으로 연장이 먼저 닿아야 하는데, 압도적인 피지컬이 상식을 무시했다. 몽둥이가 내려오기 전에 주먹이 얼굴을 가격했다. 로벨과 어린 집사는 황금방패 호의 불쌍한 기사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있었다. 얼굴이 뭉개지고 허리가 뒤로 접혔다.

“괴, 괴물...!”

괴물이 하나라고 한 적 없다. 더스틴 폴라 경은 화살 3대를 뽑아 쏘고 당기기를 연달아 했다. 1초에 1발씩 날아드니 피하기는커녕 반응조차 할 수 없었다.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소리쳤다.

“잠깐만요! 누가 누구 편인지 모르잖아요?”

세계 각지에서 온 기사들은 대수롭지 않게 취급했다.

“어차피 그놈이 그놈 아니더냐.”

“죽인다! 그래서 죽인다!”

“그거 묘하게 말이 되는군.”

로벨은 날뛰는 친구들을 그대로 두고 비명이 들린 곳을 찾았다. 보수공사가 시급해 보이는 헛간이었다. 어린 집사와 마녀에게 기다리라 말하고 홀로 찾아갔다. 유령을 보고 비명 지른 게 아닌 이상 누군가 같이 있을 것이다.

“이 개자식이!”

예상대로 헛간 문을 박차며 늙수레한 용병이 뛰쳐나왔다. 날이 시퍼렇게 선 배틀 액스에 제법 구색을 갖춘 호버크(Hauberk) 차림이었다. 두 용병무리 중 한 곳의 두목이리라. 로벨은 전장의 관례대로 제안했다.

“항복해.”

그리고 아론다이트를 칼집째 올리며 칼날을 뽑았다. 3피트 길이의 롱소드가 주머니칼처럼 움직였다. 도끼날을 부드럽게 빗겨내고, 머리 위에서 완전히 분리되었다. 그런 후 당연하다는 듯 수직으로 내려왔다. 두목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했다. 항복하라 해놓고 항복할 시간을 주지 않았다. 머리가 한 뼘 깊이로 쪼개졌다.

“대, 대장!”

짐작대로 두목이 맞았다. 용병무리 하나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로벨은 피 묻은 칼날을 털고 옆으로 늘어트렸다.

‘일곱 명.’

갑옷이 부실하지만 든든한 아군이 있으니 문제없었다. 물론, 저들의 우정이 목숨보다 깊을 때 이야기였다.

“제길! 대장이 죽었잖아!”

“그냥 튀어!”

세 명이 바로 이탈했다. 그러자 남은 네 명은 어버버하며 서로를 보았다.

“우, 우리는...”

어린 집사가 답답한 듯 가슴을 두드렸다.

“아, 진짜! 실력이 없으면 눈치라도 있어야지! 뭐해요? 빨리 도망쳐요!”

평생 고마워해야 할 충고였다. 아자르 경이 주먹을 올리자 조금 전까지 싸우던 상대 무리와 사이좋게 도주했다.

“음. 본의 아니게 화해시켰군요.”

“...뿌듯해 하지 마.”

“맞아요. 집사님은 아무것도 안 했잖아요.”

로벨은 바깥이 정리되자 헛간 안으로 관심을 돌렸다.

햇빛이 닿지 않는 가장 깊은 곳에 로벨을 부른 여자가 있었다. 그런데 혼자가 아니었다. 피 흘리는 사내와 이미 숨이 끊긴 노인이 함께 있었다.

로벨은 착하지만 바보가 아니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바로 알았다.

“난 용병이 아니야. 해칠 생각 없어.”

“오, 오지 마요! 오지 마!”

“네 가족이지? 구해줄게. 솜씨 좋은 의사가 있어.”

이런 상황에서 무장한 사내를 믿기란 힘들 것이다. 로벨은 큰 소리로 마녀를 불렀다.

“어? 어라? 무슨 일이에요?”

마녀와 티격태격하던 어린 집사가 함께 들어왔다. 아자르 경과 더스틴 폴라 경은 시체를 처리하는 듯했다. 로벨은 오들오들 떠는 여인을 지켜보며 간략히 설명했다.

“흔한 일이야.”

기사가 보호하지 않는 농가는 약탈의 대상이었다.

“호수성이 성문을 걸어 잠갔으니, 성 밖의 주민이 안전할 리 없잖아.”

더스틴 폴라 경의 말이 맞았다. 두 용병무리 중 착한 쪽은 없었다. 그놈이 그놈이었다.

“서로 저 여자를... 그러니까 서로 차지하겠다고 싸운 거예요?”

“저항한 사내들은 칼 맞았고.”

어린 집사의 얼굴이 울그락불그락해졌다.

“살려 보내지 말걸 그랬어요.”

로벨은 자신보고 순진하다 놀리는, 그러나 사실은 자신보다 순진한 어린 친구를 위로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마녀가 부상자를 확인하고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다. 다행히 치료가 늦지 않았다.

“그래도 한 사람은 구했잖아.”

로벨의 위로에도 어린 집사의 표정은 밝아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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