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7화. 애인
로벨 로드릭 군은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을 통과했다.
그리 어려울 것 없었다. 주변 영주들이 찾아와 먹을 것과 쉴 곳을 마련해주었다. 무적무패의 기사를 존경해서 대접한 영주도 있지만, 대부분은 생존본능이었다.
“주군, 여기서 돌아가겠습니다.”
“느, 늑대성까지 함께하고 싶지만...”
검은 숲의 영주인 브릭 자작과 도너반 자작이 먼저 해산했다. 봄 농사가 한창인 시절이라 계속 같이 갈 수 없었다. 의무종군일과 무관하게 함께한 것만도 고마운 일이었다.
북부대로에 접어들자 볼탄 반도 기사들도 하나둘 떠나갔다.
어린 집사는 호수성의 일이 어찌 될지 모르니 좀 더 잡아두자고 했지만, 로벨이 거부했다. 기사들은 크고 작은 봉토를 가지고 있었다. 주인이 자리를 비운 땅은 필연적으로 말썽이 생기니 돌려보내야 했다.
방향을 남쪽으로 틀어 늑대도로에 접어들자 호른 경, 켈트 경, 도너반 남작, 그리고 눈칫밥 먹으며 조용히 따라온 아자르 경만 남았다.
“저 친구를 어찌할 생각입니까?”
호른 경이 모닝스타 옆에 바짝 붙어 속삭였다. 로벨을 해칠 뻔한 기사였다. 설령 속았다 해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충성을 맹세하면 봉신으로 받아들일까 하오.”
그 말에 어린 집사가 가장 놀랐다.
“봉신이요? 나눠줄 땅이 없는데요?”
“뉴 로드릭 마을이 있잖아.”
“...제 시체를 파묻기 전에는 꿈도 꾸지 마요. 거기서 투자한 페닝이 얼마인 줄 알아요?”
로벨은 예상 밖의 반대에 호른 경을 보았다. 그러나 호른 경도 불안한 표정이었다. 자작나무 숲을 가지고 있으니 로드릭 항을 반납하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나친 걱정이지만 그럴만했다.
기사 한 명이 갑옷과 말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농민 스무 명과 그들이 경작할 땅이 필요했다. 기사의 가족, 생활공간, 품위유지 등을 고려하면 최소한 20가구의 마을이 있어야 한다. 기사는 그저 서임하고 충성서약 받으면 끝이 아니었다.
“아, 아니면 크레타 시티의 상점이나 농장을 주자. 그 정도는 가능하잖아?”
“정말... 아무 생각이 없군요?”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었다. 명문가 출신인 몰트 도너반 남작에게 봉토를 줄 때도 여기저기서 볼멘소리가 나왔는데, 외해의 야만인에게 봉토를 주면 난리가 날 것이다. 지금은 능력만 있으면 기사가 되고 영주가 되는 정복왕의 시대가 아니었다.
“우선 호수성의 일을 처리하고 천천히 생각해봐요.”
“응... 그렇게 하자.”
로벨은 과묵해진 아자르 경을 한번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먼저 처리해야 할 상대는 과거 볼탄 반도의 왕이었던 백작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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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없는 말이 발 달린 말보다 빨랐다. 늑대성의 주인이 돌아왔다는 소문이 도시 곳곳에 퍼졌다.
동녘이 어스름한 시간. 리암 수사, 헨리 상회장, 페리 행정관, 그람 형제, 닥터 줄리안, 마녀 키르케가 로드릭 시티 동문으로 몰려왔다.
“이쪽으로 오시는 게 맞아?”
“바닷길로 오는 게 아니면 동문이죠. 설마 숲을 가로질러 오실까요?”
일찍이 봄이 찾아왔으나 여명이 닿지 않은 새벽바람은 지나간 겨울을 그리워했다. 가죽과 뼈 사이에 보온재가 부족한 말라깽이 그람이 몸이 부르르- 떨었다. 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없었다. 마중 나오라고 시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이리 안 와? 누가 가서 어디쯤 왔는지 봅시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마녀가 떡갈나무 지팡이를 끌어안고 중얼거렸다.
“컹! 컹!”
“아우우우우-!”
아야와 이야카가 빠르게 반응했다. 꼬리를 바짝 올리고 힘차게 울었다. 가족을 반기는 하울링이었다.
잠시 뒤, 로드릭 가문의 깃발이 구릉 위로 솟아났다. 이어서 봄바람에 꽁지머리를 휘날리는 기사가 아침 해를 등지고 나타났다. 보이는 것은 검은 실루엣이지만, 모두가 알 수 있었다.
“영주님이 오셨다!”
“늑대성의 공작님이 오셨다!”
잘 모르는 사람이 보면 수 년 만에 돌아왔다고 오해할 만큼 좋아했다.
“아침부터 왜 저리 난리래요?”
어린 집사가 소란을 보고 투덜거렸다. 입꼬리가 들썩이는 것이 싫은 기색은 아니었다.
“그야 가족이잖아.”
로벨은 환호하는 로드릭 시민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포클랜드 시티와 달리 따뜻하고 포근했다.
볼탄 반도에 진짜 봄이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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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생업이 있는 농민병을 해산시키고 밀린 업무를 우선 처리했다. 어린 집사가 짜놓은 예산에서 초과된 항목을 검토하고, 봄 농사의 작황을 확인했다. 페리 행정관과 리암 수사가 꼼꼼하게 정리하여 크게 손 댈 것은 없었다.
“호수성으로 가실 거죠?”
사실 시급한 것은 호수성이었다. 몰드 헤르만 백작은 죽고, 셰인 도트넘 자작은 체포되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과 강철성 기사들은 정당한 결투라 주장하며 젊은 자작의 석방을 요구했지만, 볼트 헤르만 백작과 호수성 기사들은 비겁한 암습이라 주장하며 성문을 걸어 잠갔다. 일촉즉발의 위기였다. 강철성의 기사들은 군대를 동원해서 젊은 자작을 구하자고 외쳤고, 호수성의 기사들은 젊은 자작을 당장 매달자고 외쳤다.
“볼트 헤르만 백작?”
“공식적인 직함은 영주 대리에요. 정통성 전쟁의 책임을 지고 기사 작위를 반납했으니까요. 백작이 될 수 없죠.”
“헤르만 가문의 힘을 생각하면 그냥 선대 백작이잖아.”
“그래서 다들 백작이라 부르고 있죠.”
대화가 잠시 끊겼다. 로벨은 안장을 벗어서 기분 좋은 모닝스타를 세우고, 억센 농마가 갈아엎은 춘경지를 내려다보았다. 고운 흙을 비집고 파란 보리싹이 자라고 있었다.
“작년 여름에 잡초가 무성했지?”
“저 밭이요? 그랬죠. 휴경지였으니까요.”
로벨은 다시 생각에 잠겼다. 어린 집사가 시간이 아까워 재촉하자 겨우 입술을 떼었다.
“역시 엎어야겠어.”
“뭘 엎어요?”
“두 백작 가문 말이야.”
로벨을 볼탄 반도의 주인으로 인정하지 않는 가문이 있었다. 강철성의 도트넘 가문과 호수성의 헤르만 가문이었다. 대놓고 반기를 들지는 않지만, 사사건건 시비를 걸고 말썽을 일으켰다.
“그럼 채비할까요?”
“응. 정보원이 오면 출발하자.”
“엥? 영주님한테 정보원이 있어요?”
로벨은 어릴 적 습관을 버리지 못한 어린 집사를 어린애 취급해주었다. 머리를 마구 헝클었다.
“당연히 있지. 발이 빠른 친구니까 금방 도착할 거야.”
어린 집사는 까치집이 된 머리에 비명을 질렀다. 체면이란 것을 생각할 나이라 급히 매만졌다. 그러면서 로벨의 몇 안 되는 친구를 떠올렸다. 강철성과 관련된 친구는 딱 한 명뿐이었다.
“아... 더스틴 폴라 경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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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의 장담대로 정보원이 찾아왔다. 동방의 기사 더스틴 폴라 경이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을 사냥감으로 꼭 집어 쫓아다니는 지독한 사냥꾼이기도 했다.
“결투라면 결투지만, 내용이 복잡하오.”
더스틴 폴라 경은 맥주를 거절하고 물을 부탁했다. 성 뒤뜰에서 차디찬 물을 가져다주자 한 모금 마시고 머리에 부었다. 열이 식으니 김이 모락모락 피어났다. 로벨하고 하는 짓이 비슷했다.
“그 어린 자작이 호수성 백작의 애첩을 건드렸소.”
로벨 이하 늑대성 사람들은 즉각 이해하지 못했다.
“애첩?”
“아, 이곳에는 처첩제가 없지. 정부(情婦)라 생각하시오. 애인이라 해도 좋겠군.”
유라피아 대륙의 나라들은 옛 신의 교리로 일부일처제가 강하게 지켜졌다. 동방의 나라와 정서가 달랐다. 첫째 부인, 둘째 부인, 후궁, 첩 같은 단어를 바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나마 정부라 하면 비슷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
“헤르만 백작이 바람을 피웠어?”
“옛 신의 사제가 알면 가만 안 있을 텐데...”
“왜? 붉은 산의 늙다리 자작은 이혼만 일곱 번 했는데?”
용병들 사이에서 잡소리가 나왔다. 어린 집사가 얼굴을 붉히고 조용하라 윽박질렀다.
“그래서요? 젊은 자작이 백작의 애인을 차지하기 위해 결투를 신청했나요?”
“그랬으면 이곳 정서에도 낭만적이었겠지.”
“그럼요? 설마 호수성 백작이 먼저 결투를 신청했나요? 그러다 칼 맞았고?”
더스틴 폴라 경은 젖은 머리를 좌우로 털었다. 가까이 다가가 귀 기울이던 외팔이와 싸움개가 욕지거리를 하며 떨어졌다.
“누가 먼저 칼을 휘둘렀는지는 모르지만, 칼을 휘두른 현장은 침실이다.”
“...설마?”
“어린 자작과 애첩, 아니, 애인이 정을 통한 현장이었지.”
늑대성의 사내들이 이마를 짚었다. 최악의 상황이 최악의 결과를 가져왔다.
‘그 젊은 기사가...’
로벨은 늑대성에 찾아온 셰인 도트넘 자작을 떠올리고 얼굴을 살짝 붉혔다. 반면, 더스틴 폴라 경은 덤덤하게 말을 이었다.
“그 때문에 양쪽 다 진실을 숨기고 있소. 남의 애인을 탐한 것도, 그 애인의 남자에게 칼 맞은 것도 자랑할 일은 아니니까.”
“확실히... 결투라고 우길만 하네.”
로벨이나 로벨의 측근이나 치정 문제에 약했다. 아닌 게 아니라 죄다 독신이었다.
“떳떳하지 못한 일이면 차라리 잘 됐어.”
로벨이 헛기침하고 말했다.
“두 가문을 화해시키면서 콧대 좀 눌러놓자.”
펄프 대장이 손을 살짝 들고 말했다.
“그게 잘 되겠습니까? 사람이 죽었는데요?”
“음... 일단 애인을 확보해야지. 폴라 경, 그 여자의 위치를 아시오?”
“성 밖 농장에 감금되어 있소.”
공식적으로는 이 사건과 관계없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멋대로 떠들고 다니게 둘 수도 없었다. 성 밖으로 쫓아내어 감시하는 것이 최선일 것이다. 상황에 따라 입막음하기도 쉬울 테고 말이다.
“그럼 여자를 먼저 구합시다.”
로벨의 결정에 모두가 미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쉬울까요?”
“왜?”
울프 용병단은 서로를 한 번씩 보고 설명했다.
“기사 나리 칼솜씨면 뭐, 감시병 몇 명 쓱싹하는 거야 일도 아니겠지만...”
“그전에 걸리지 않겠습니까요? 아무리 기사 나리라도 날아갈 수는 없잖습니까요.”
로벨과 로벨의 기사들, 그리고 울프 용병단의 핵심 간부들은 얼굴이 잘 알려져 있었다. 일반인은 몰라도 전쟁터 좀 구른 기사와 용병들은 쉽게 알아 볼 것이다.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 몇 명만 데리고 먼저 갈 거야.”
“어억? 영주님이 직접 가시려고요?”
“응. 후드를 구해줘. 얼굴을 가릴 거니까.”
“아니! 얼굴이 문제가 아니라! 위험하잖아요!”
“누가? 내가?”
로벨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외팔이 이하 용병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건 저쪽이지’, ‘암. 암.’ 하지만 어린 집사의 생각은 달랐다. 로벨은 옛날 옛적의 보잘것없는 세습 기사가 아니었다.
“그냥 폴라 경이 가서 납치, 아니, 구출해오세요! 자신 없어요?”
“사방이 적인 곳에서, 나 혼자 여자를 데리고 탈출하란 말이냐?”
...듣고 보니 무리한 요구였다. 게다가 더스틴 폴라 경은 강철성의 수배자였다. 울프 용병단보다 상황이 안 좋았다. 그때, 구석 자리에서 묵묵히 지켜보던 푸른 눈의 기사가 말했다.
“나는 가능입니다. 주군이 일입니다. 승리합니다. 아니 실망합니다. 모두가 약속합니다.”
그리 큰 목소리가 아닌데, 주위가 조용해졌다.
“저게 무슨 고블린 코 파는 소리야?”
“가만있어 봐. 해석 중이니까.”
펄프 대장이 주름을 만들고 단어를 새로 조합했다.
“영주님을 도울 수 있다고 합니다. 반드시 성공해서 실망시키지 않을 거라 약속한답니다.”
제대로 통역한 듯 아자르 경이 활짝 웃었다. 로벨도 기쁘게 생각했다.
“정말로 나를 돕겠소?”
“그것이 당연합니다. 잘못이 파괴합니다. 도움이 됩니다.”
펄프 대장이 다시 통역하려 했지만 로벨이 막았다. 이 정도는 알아들을 수 있었다.
“좋소. 경을 로드릭 가문의 기사로 임명하겠소. 우리 함께 갑시다.”
로벨이 활짝 웃자 아자르 경도 덩달아 활짝 웃었다. 순박한 용병은 박수쳤고, 음험한 집사는 걱정했다. 그리고 잡생각이 많은 마녀는 호른 경이 이곳에 없어서 다행이라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