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84화 (384/605)

384화. 대공

이국(異國)의 표현을 빌리자면 전광석화, 속전속결, 파죽지세 등으로 묘사할 수 있었다.

로벨 일당은 자비에 가문의 식솔을 무장해제 및 억류하고, 가문의 모든 자산을 동결시켰으며, 포클랜드 후작의 이름으로 귀족원을 소집해 자비에 후작을 고발했다.

“그럼 이견이 없는 거로 알겠소.”

“크흠! 흠!”

“고, 공작 뜻대로 하시구려...”

위로는 국왕 폐하와 왕실을, 아래로는 볼탄 반도 군대와 포클랜드 시민의 인기를 가졌으니 유서 깊은 가문도 반발하지 못했다.

자비에 후작은 국가전복 및 살인교사 혐의로 작위가 박탈됐다. 또한 포스트 포레스트 지방에서 치른 부활자 전쟁의 배상금도 토해냈다. 이 모든 것이 만 하루 만에 일이었다.

“이로써 12기사의 가문 중 하나가 몰락했군요.”

“사트로 가문과 프란시스 가문에 이어서 세 번째지요.”

시대의 흐름의 민감한 사람은 서서히 깨달았다. 샘 포클 이후 300년간 이어져 온 질서가 무너지고 있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의 시대다.

“왜? 왜 안 되는데?”

현 시대의 주인이 처량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린 집사는 새로 들어온 문서다발을 와락! 꾸겼다가 조심스럽게 펴냈다. 이게 다 페닝인데, 성질 못 이겨서 버릴 수 없었다.

“그걸 몰라서 물어요? 자비에 가문의 재산, 땅, 직위, 식솔 등등 챙겨야 할 게 산더미잖아요. 이걸 그냥 두면 누가 해결해줘요?”

해결이란 단어가 듣기 좋았다. 챙길 수 있을 때 챙기자고 하면 경박하니까.

“그러니까 그냥 국왕 폐하에게 넘기면 되잖아?”

“카악! 곰이에요? 곰? 아니지! 곰도 재주만 부리고 뿌듯해하지 않아요! 연어 대가리라도 받아야 만족하지!”

호른 경은 욕심이 부족한 기사와 욕심이 철철 넘치는 집사 사이를 중재했다.

“국왕 폐하도 처치가 곤란한 재산입니다. 자비에 후작은 쫓겨났지만, 그 수족은 아직 건재합니다. 사자성의 돌체 백작과 얼음성의 데이브 백작을 생각하시지요.”

로벨은 측근들의 오해와 달리 머리가 아주 좋았다. 단지 머리를 쓰는 곳이 관심분야로 한정되었을 뿐이다. 로벨은 자비에 후작의 수족들이 포클랜드를 장악할 경우 일어날 약 서른 가지의 사건을 거의 동시에 떠올리고 한숨지었다.

“이 짓을 또 하면 안 되지...”

“그럼요. 그럼요. 그러니까 이참에 확실하게 휘어잡아야죠.”

“그러나 정통성이 문제입니다. 지금은 주군이 수도에 계시고, 암살사건의 험악한 분위기가 남아있어서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지만, 몇 달, 어쩌면 며칠만 지나도 정통성을 문제 삼을 겁니다.

“정통성...”

“자비에 가문은 12기사의 가문입니다. 국왕 폐하나 공신에게 반기를 든 것이 아니라, 크흠, 죄송합니다. 고작 변방의 제후와 마찰을 빚은 것뿐이지요. 작위와 봉토를 몰수하는 게 과하다는 여론이 나올 겁니다.”

“우리 영주님 가문도 샘 포클의 기사 가문이거든요? 한 다리 건너면 바로 12기사 직통이라고요!”

어린 집사가 입술을 삐죽이며 따졌다. 호른 경은 주먹을 살며시 쥐었다가 슬그머니 풀었다. 주인이 지켜보니 때릴 수가 없었다.

“주군의 가문을 폄하하려는 게 아니다. 현실이 그렇다는 것이지. 공신(功臣)이란 말을 되새겨 보아라.”

어린 집사는 펜을 잉크통에 담그고 팔짱 끼었다.

“좋아요. 좋아. 정통성이 문제란 거죠?”

“그렇다.”

“그럼 그것도 해결하죠.”

어린 집사는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로벨과 호른 경이 동시에 ‘어떻게?’라고 물었다. 어린 집사는 구렁이 같은 미소만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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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가 무엇을 꾸미는지 알지 못했다. 브릭 자작과 도너반 자작을 불러 무언가 상의한 것은 아는데, 관여하면 피곤해질 테니 모른 척했다. 그게 무엇이든 로벨과 늑대성에 해가 되지 않을 테니 그냥 믿고 두었다. 물론, 핑계였다.

로벨은 로벨 나름대로 바빴다. 하루 만에 수도를 장악한 대가로 각계각층의 사람을 만나야 했다. 시티 가드의 기존 권한을 인정받으려는 수비대장, 항구를 봉쇄할까 조바심 내는 선주 조합장, 세금을 올리거나 약탈을 시도할까 걱정하는 시장 대표 등등. 말 위에서 꼬챙이 휘두르는 게 천직인 로벨에게 피곤한 일이었다. 호른 경이 조심스럽게 위로했다.

“괜찮으십니까?”

“...안 괜찮소.”

로벨은 눈치 볼게 어린 집사밖에 없는 고향 늑대성을 떠올렸다. 지금쯤이면 봄 농사가 한창일 것이다.

“보리는 아주 중요하오. 사람이 먹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물이라 겨울까지 주식이 되지. 그리고 맥주도 되오. 빵과 고기는 없어도 되지만, 맥주가 없으면 탈이 나는 게 우리 볼탄 반도잖소.”

로벨이 좋아하는 리암 수사표 홉 맥주가 아니라 씹히는 맛이 독특한 그루트 맥주지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하하... 금방 돌아가실 수 있을 겁니다.”

로벨의 불평은 단순한 향수병이 아니었다. 창칼로 빌어먹는 울프 용병단은 천생 군인이라 상관없지만, 본업이 농사인 농민병은 푸른 새싹을 볼 때마다 한숨을 내쉬었다. 봄 농사를 망치면 한해가 고단했다. 늙은 아비와 여린 아내가 걱정이었다.

“로벨 공작! 진심으로 축하하오! 아? 공작이 아닌가?”

정신없는 나날이 지나 어느 아침이었다. 로벨과 친분이 있는-혹은 그렇게 믿는- 포클랜드 귀족원의 기사가 로벨의 거점이 된 동문 요새를 찾아왔다. 별거 아닌 것 같지만 대단한 배짱이었다. 전쟁을 치른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 단신으로 찾아오기란 쉽지 않았다. 로벨은 출신을 가리지 않고 용감한 사람을 좋아했다.

“어서 오시오, 바인 경. 안 그래도 아침을 먹으려는 참이었소. 식전이면 함께 하겠소?”

로벨의 검소하다 못해 초라한 식사는 그 칼솜씨만큼 유명했다. 호사스러운 수도 귀족 바인 경은 재빨리 거절했다.

“지금 빵 쪼가리를 쪼갤 때가 아니지요. 어째서 준비를 안 하고 계십니까?”

“준비? 무슨 준비?”

로벨의 반문에 바인 경이 당황했다.

“왕성으로 가셔야지요?”

“본인이?”

“당연하지 않소?”

“어찌해서?”

“주인공이니까?”

로벨은 대화가 겉돈다는 것을 깨닫고 말을 멈췄다. 처음부터 정리가 필요했다. 때마침 호른 경, 켈트 경, 브릭 경 등이 찾아왔다.

다른 기사들은 손님을 보고 머뭇거렸지만, 호른 경은 도리어 걸음을 서둘렀다. 로벨의 무심한 성격상 아무것도 모르고 대화하는 게 분명했다. 예상은 적중했다.

“주군, 국왕 폐하께서 기다리십니다.”

로벨이 ‘이 인간까지?’하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호른 경은 그럴 줄 알고 재빨리 속삭였다.

“어린 집사가 사고 쳤습니다.”

“설마? 국왕 폐하에게 무례라도...?”

“그건 아닙니다. 주군을 대공(大公, Prince)으로 추대했습니다.”

오우거가 꽃다발을 들고 고백해도 그저 난감한 듯 볼을 긁적일 로벨이지만, 이번에는 좀 놀랐다.

“아니, 왜?”

“그것이...”

호른 경은 흥미진진하게 쳐다보는 바인 경을 힐끔보고 간단히 설명했다.

“어린 집사가 그리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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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이 쌓은 업적이 대부분 그렇지만, 대공위 수여 또한 유례가 없었다.

대공(Prince)의 직함은 나라마다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나 통상적으로 왕실의 직계 가족이 아니면 수여되지 않는 작위였다. 하다못해 혼인으로 왕실의 일원이 되어야 대공이라 불릴 자격이 생겼다. 잉그비아 왕국의 흑태자(Black Prince)처럼 말이다.

“이렇게 뜬금없이 작위 수여라니...”

“고삐를 채우겠다는 생각이지요. 정확히는 그리 생각하게 만들었지만.”

어린 집사가 꾸민 짓이었다. 볼탄 반도를 지배하고, 검은 숲과 하얀 숲의 지지를 받으며, 포클랜드 시티마저 장악한 로벨 로드릭은 기존 질서의 최대 위협이었다.

질서면에서 왕가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프란시스 가문과 자비에 가문의 전철을 따를 수 없었다. 국왕에게 로벨은 최고의 위협인 동시에 최고의 우방이었다.

“명실상부 왕국 최고 권력자가 되신 거예요. 이걸 뭐라고 하더라? 일인지하...”

“어려운 말 쓰지 마. 지금도 머리 아파.”

어린 집사는 최고 권력자의 측근답지 않게 “이히히히힛-!” 웃었다. 약간 경박했다. 하지만 주인부터 무게가 없으니 탓할 사람이 없었다.

왕성에 도착하자 왕실 시종이 우르르 몰려나와 로벨 일행을 안내했다. 별다른 말이 필요 없었다. 작위 수여를 서재나 응접실에서 하지는 않을 테니 샘 포클의 홀로 향했다.

“험험! 험! 볼탄 반도의 공작이자 포클랜드의 후작이자 크레타 시티의 통치자이자 잉그비아 왕가의 조언자이자...”

공식적인 직함만 대여섯 개고, 비공식적인 호칭은 열 개가 넘었다. 관례에 따라 전부 읊으니 한참 걸렸다. 봉신의 권위가 국왕의 권위보다 높다는 것을 문제 삼는 사람도 있지만, 여기서 티 내지는 않았다.

“...북부대로의 관리자이자 늑대성의 주인이자 그랜드 챔피언이신 로드 로벨 로드릭 입장입니다!”

문무백관이 일제히 박수를 쳤다. 백관(百官)은 관용적인 표현이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만 3백 명이었다. 에르나 왕국풍의 무도회를 열어도 널널한 샘 포클의 홀이 가득 찼다. 그러나 오직 한 곳, 왕좌로 향하는 붉은 카펫만 주인공을 위해 비어있었다.

로벨은 3백 개의 시선에 잠시 멈칫했다. 군대를 소집해도 이만한 인원이 모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귀족과 자유민 중 직함이 있는 사람은 모두 모인 모양이다.

하지만 로벨은 괜히 로벨이 아니었다. 놀란 것은 잠깐이고, 평소처럼 덤덤하게 걸어갔다. 로벨의 발걸음을 따라 세상이 움직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어서 오시오, 공작. 어서 와요.”

데이브 고른 데오니스 국왕이 자리에서 일어나 반겼다. 형식적이지만 알기 쉬운 제스처였다.

로벨은 계단을 3개 올라 무릎을 꿇었다. 그러고 보니 격식을 갖춰 작위를 수여받는 것은 처음이었다. 포클랜드 후작위도, 볼탄 반도 공작위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수여됐었다.

‘대공이라...’

로벨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직 실감이 나지 않았다. 볼탄 반도 공작이란 자리도 이제 겨우 익숙해졌는데, 포비아 왕국 대공 자리까지 받게 되었다. 후대에 뭐라고 평가할지 궁금했다. 왕국의 위대한 영웅이라 칭할까, 아니면 거짓으로 점철된 희대의 사기꾼이라 칭할까.

“...이와 같은 이유로 로벨 로드릭 공작에게 대공위를 수여하는 바요. 대공, 일어나시오.”

로벨은 딴 생각하다가 뒤늦게 국왕의 말을 따랐다. 약간 꿈 떠서 나쁠 것이 없었다. 본의와 다르게 ‘대공 작위쯤 아무것도 아니다’는 여유로움으로 보였다.

“이 시각부터 사흘 동안 대공을 축하하는 연회를 열 것이오.”

당연하지만, 순수하게 축하하는 자리는 아닐 것이다. 정치 감각이 늙은 늑대 남매보다 떨어지는 로벨도 직감했다. 솔직히 그런 자리에 끼고 싶지 않지만, 국왕 폐하의 조마조마한 눈빛과 서로를 축하하는 휘하 기사들과 한껏 들뜬 어린 집사를 보니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국왕 폐하 만세. 기쁘게 참석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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