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83화 (383/605)

383화. 재량

전쟁에 이골이 난 베테랑 용병은 짤막한 날붙이를 꺼내 일단 쑤셨다.

전리품 회수는 승자의 정당한 권리인데, 간혹 죽은 척하며 기습하는 놈이 있었다. 일단 목을 그어놓고 품을 뒤지는 게 안전했다.

비위가 약한 신참과 살인이 낯선 농민병은 두 눈을 질근 감고 몇 마디 외우지도 못하는 기도문을 반복 낭송했다. 그러면서도 ‘먹이’가 있으면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몹쓸 것을 만지는 몸짓으로 허리와 가슴을 더듬는 게 가관이었다. 싸움개 패거리가 낄낄거리며 웃었다.

전투는 쉽고 일방적이었다. 기세 좋게 군대를 몰고 온 포클랜드 기사들은 로벨이 등장하자 바로 꽁무니를 내뺐다. 수적 우위를 앞세웠으면 그래도 해볼 만했을 텐데, 지난 전쟁의 공포가 이성을 잡아먹었다. 그걸 의도한 작전이었으니 운이 좋다 말할 필요는 없었다.

“연승 기록이 나날이 경신되는군요.”

폭풍성의 랭스터 경이 히죽거렸다. 이기는 편에 서는 것은 언제나 즐거운 일이었다. 로드릭 가문에 충성하기를 정말 잘했다.

로벨은 뻐근한 왼팔을 조금씩 움직이며 말했다.

“해가 지기 전에 이동해야 하오. 정리를 서두르시오.”

“포로들은 어찌합니까?”

“귀족과 자유민은 데려가고, 농민들은 그냥 풀어주시오.”

샘 포클 시대 이전에는 포로를 노예로 삼았지만, 옛 신의 교리가 뿌리내린 지금은 교인을 노예 삼는 것이 불가능했다. 굳이 페닝으로 바꾸자면 ‘죄를 사면하는’ 노잡이로 팔 수 있지만...

‘그럴 시간이 없지.’

시간은 금이었다. 케케묵은 격언이 아니라 전황이 그러했다. 하루가 지나면 자비에 후작군의 패전 소식이 전해질 것이다. 그리고 이 하루가 로벨 로드릭 군의 무기였다.

“주군, 회군 준비가 끝났습니다.”

몰트 도너반 남작이 보고하다가 피식- 웃었다. 로벨 주위의 기사들도 덩달아 웃었다. 말이란 게 재미있었다. 여담이지만, 이날의 기록은 전쟁사학자 사이에서도 논란이 되었다.

“거, 웃지 말고 제대로 합시다. 진군이오, 회군이오?”

“적진으로 가는데 진군이지요.”

“온 곳으로 돌아가니까 회군이오.”

“아무러면 어떻소? 얼빠진 후작의 낯짝을 보러 갑시다.”

볼탄 반도의 군대가 포클랜드 시티로 진군-혹은 회군-을 시작했다. 왕국이 뒤집히는 일대 사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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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토너먼트의 열기가 가시지 않은 포클랜드 시티에 온갖 소문이 몰아쳤다. 그때나 지금이나 주인공은 동일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이 저승에서 살아 돌아왔다!’

‘1만 5천의 군세를 몰아 포클랜드 시티로 진격 중이오.’

‘옛 신의 천사가 가호하니 적이 절로 죽고 강물이 갈라지더라.’

대부분 허무맹랑한 이야기지만, 이성적인 지식인들은 풍문 속에서 진실을 찾아 전황을 파악했다.

“죽은 자가 어찌 살아나? 애초에 멀쩡했던 거지!”

“그럼 왜 죽었다고 소문을 낸 거야?”

“국왕 폐하와 포클랜드 귀족원을 시험한 거요.”

그랜드 토너먼트의 암살도 자작이 아니냐는 말이 나왔지만, 그것은 목격자가 너무 많아 음모론으로 여겼다. 아무리 그래도 마상 랜스에 맞아 사망을 위장할 인간은 없었다. 그걸 제외해도 충분히 혼란스러웠다.

‘적이냐, 아군이냐.’

성문을 닫고 군대를 소집해야 할지, 아니면 부활(?)을 축하하고 기쁘게 맞이해야 할지 헷갈렸다. 그러나 의논할 시간이 없었다. 로벨은 시간을 금쪽같이 아껴가며 행군했고, 포클랜드의 귀족과 시민들은 무장조차 못한 채 부활자를 맞이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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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어정쩡하게 닫혀 있는 성문을 보고 미소 지었다. 로벨이니까 살며시 웃었다. 거칠고 사나운 것을 매력으로 아는 기사와 용병들은 배를 잡고 껄껄 웃었다.

“싸우겠다는 거야, 말겠다는 거야?”

성문을 지킬 바리게이트는 보이지 않고, 격자문(Portcullis)만 반쯤 내려왔다. 성벽 위의 수비병은 쇠뇌 없이 창 한 자루 달랑 들고 최대한 불쌍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때 왔소.”

“저들 입장에서는 아니지요.”

로벨이 이렇게 빨리 올 줄 몰랐을 것이다. 싸울 준비는커녕, 싸울지 말지 결정조차 못했다.

“자연스럽게 들어갑시다. 자연스럽게.”

“잊은 물건 찾으러 온 것처럼?”

“그거 좋소. 진짜로 잊은 게 있으니까.”

자비에 후작의 목을 깜박하고 갔다는 뜻이다. 눈치 빠른 기사들이 와하핫! 웃었다.

머를 브릭 경이 앞서가서 무어라 호통치자 수비병이 횡설수설 답했다. 무장한 군대를 들일 수 없다는 뜻 같은데, 우스운 일이었다. 며칠 전까지 내 집처럼 지낸 곳이었다. 메튜 경과 도너반 남작이 합세해서 윽박지르자 아무 힘이 없는 성문지기는 슬그머니 격자를 올리고 모른 척했다. 포클랜드 역사상 가장 황당한 함락이었다.

“역시 젊은 기사들이라 기운이 좋아.”

기사 종자보다 어려 보이는 로벨이 ‘젊은 기사’ 운운하니 실소가 나왔다.

“그리 말하니까 꼭 늙은이 같습니다.”

“수염부터 기르고 노인 흉내 내시지요.”

로벨 로드릭 군은 화기애애한 분위기로 포클랜드 시티에 입성했다. 그리고 두 번째 개선식이 펼쳐졌다.

포클랜드 시민들은 무혈입성한 그랜드 챔피언의 군대를 적으로 생각할 수 없었다. 설령 그리 생각해도 자존심상, 그리고 분위기상 티 낼 수 없었다. 로벨의 인기는 ‘진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대다수 도시 노동자에게 귀족 나으리 이권 다툼은 남의 나라 일이었다. 그저 전쟁에서 승리하고 마상시합에서 잘 싸우면 최고였다.

로벨은 환호하는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빠르게 명령했다.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은 울프 용병단 제2, 3소대를 이끌고 자비에 후작의 저택을 포위하시오. 고양이 한 마리 빠져나가게 해서 안 되오.”

“Yes, My Lord.”

“브릭 경, 도너반 경, 아니, 존 도너반 자작 말이오. 두 사람은 왕성으로 가서 지금 상황을 설명하시오. 검은 숲에 기반을 둔 경들이면 좀 더 객관적인 평가를 받을 수 있을 거요.”

혹은, 검은 숲까지 등에 업고 압박할 수 있었다. 머리가 좋은 존 도너반 자작은 금방 이해했다.

“랭스터 경은 북문을, 메튜 경과 마튼 경은 동문을 봉쇄하시오. 병력이 부족하면 맨앳암즈 중대를 빌려주겠소.”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

가장 기사다운 기사들이었다. 시민의 사정 따위 개의치 않고 철저히 봉쇄할 것이다.

“주군께서는 어디로 가십니까?”

“우선 왕성으로 가셔야 하지 않습니까?”

로벨은 고개를 조금 들었다. 포클랜드 시티는 포비아 왕국의 수도이자 인어해의 교역항이었다.

“그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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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가지를 지나자 시가행진이 전격전이 되었다. 기사들은 각자 부대를 이끌고 흩어졌다.

네 자릿수의 무장집단을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수비대가 기겁해서 제지했지만 소용없었다. 이미 피를 본 병사들이었다. 수비대건 나발이건 걸리적거리면 때려눕힐 기세였다.

로벨은 울프 용병단 3개 소대를 이끌고 시장을 가로질렀다. 왕국에서 가장 크고 번화한 시장이지만 100명의 용병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10피트 길이의 파이크를 가진 용병이 있어 더욱 그러했다. 창날에 천막이 찢어지고 간판이 떨어졌다.

앞치마를 두른 빵집 주인이 전투화에 짓밟혀 박살난 빵 모양 간판을 허망하게 바라보았다. ‘삼대째 이어온 우리 집 마스코트가...’ 어쩌고 하는데 괜스레 미안했다.

“아, 미안. 보상해 줄게.”

어린 집사가 한숨을 쉬고 은화 한 닢을 던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었다. 여기저기서 깨지고 부셔지고 뭉개지니 어린 집사의 마법주머니도 감당이 안 되었다.

“그만 좀 부숴요! 이익! 지금 일부러 그런 거죠! 거기! 좌판 좀 치워요! 뭐라고? 그거 불법 장사잖아! 시티 가드에 신고하기 전에 치워!”

정작 시티 가드는 로벨과 울프 용병단이 무서워서 접근조차 못하고 있었다.

천만 다행히 파산 직전 시장을 빠져나왔다. 로벨은 탁 트인 전경에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짜디짠 소금 냄새에 비릿한 생선 냄새가 더해졌다. 항구의 냄새였다.

“자비에 후작은 사자성과 얼음성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애꾸눈이 나직이 속삭였다. 로벨이 실수했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크게 말해도 상관없었다.

“난 후작을 잘 알아.”

로벨은 모닝스타의 목덜미를 두드려 부두로 향하게 했다. 짐을 싣고 내리던 선원과 인부가 좌우로 갈라졌다.

“양을 가장 잘 아는 것은 양치기가 아니라 늑대라고 하잖아.”

흔한 농담인데 ‘늑대’ 공작이 하니까 더 재미있었다. 몇몇 용병이 낄낄거렸다.

“자비에 후작은 영악해. 그리고 과감하지. 마상시합 중에 암살을 획책할 정도로 말이야.”

“그것이 영악한 것과...”

“육지로 도망가지 않은 것은 영악한 거야. 성에 갇혀서는 아무 희망이 없으니까.”

“저것이 그때 저 배입니다.”

죄인이 되어 침묵하던 기사가 마침내 입술을 떼었다. 눈치가 부족한 외팔이는 ‘어? 벙어리가 아니었수?’ 따위의 헛소리를 했지만, 상황파악이 빠른 용병들은 창을 앞으로 기울였다.

“자비에 후작의 갤리선이야.”

“출항준비가 끝난 거 같습니다요!”

“아직 못 갔잖아? 그럼 됐어.”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를 쓰고 아론다이트를 뽑았다. 시야가 상하좌우로 확대되었다. 갑판 위의 선원이 당황해서 뛰어가는 것이 보였다. 이윽고 기사라 해도 믿을 만큼 무장이 잘 된 사내가 나타났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자비에 가문의 기사야.”

로벨 옆의 기사가 움찔했다.

“포클랜드 후작의 권한으로 명령할게. 전부 체포해. 저항하면 재량껏 제압해.”

전쟁의 프로페셔널들은 제압의 형태를 편의적으로 해석했다. 로벨은 자신만큼 후작에게 쌓인 게 많은 기사를 보았다.

“먼저 가시겠소? 금방 따라갈 테니.”

“호의는 감사합니다. 잊지 않은 것은 그대로 가능합니다.”

펄프 대장이 아니어도 대충 알아들었다.

“그래도 죽이지는 마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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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나이 핑계로 한 발 빠진 펄프 대장과 교양이 철철 넘치는 어린 집사를 이끌고 자비에 가문의 갤리선 ‘황금방패 호’에 올랐다. 고작 10분 남짓 지났을 뿐인데 풍경이 많이 바뀌었다.

울프 용병단은 움직이지 않으면 제압된 것이라 주장했고, 아자르 경은 죽이지만 않으면 어떻게 해도 된다고 판단했다. 그 결과 갑판 위에 팔다리가 성한 선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저항하지 않으면 그냥 두라니까.”

“저항을 열심히 했나 보지요.”

펄프 대장이 남 일이라고 태연히 말했다. 코뼈가 부러진 선원이 손을 뻗자 ‘이크!’ 하면서 피하기까지 했다.

선실에는 중무장한 기사가 있었지만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못했다. 울프 용병단이 용맹해서가 아니었다.

“아자르 경의 솜씨일까?”

로벨은 안면이 2인치쯤 함몰되어 죽은 기사를 살폈다. 머리를 모루에 올리고 망치로 내려치면 이리될까. 확실히 인간의 힘이 아니었다.

“장난 아니군요. 저런 기사를 어찌 이겼습니까?”

“음... 반칙패로?”

로벨은 기사의 눈을 감겨주려다가 포기했다. 안구에서 빠져나온 눈알을 도로 넣기가 힘들었다.

“선장실이 어디야?”

“보통은 선미쪽이요.”

로벨은 핏자국을 따라 계속 갔다. 그래도 뒤로 갈수록 폭력의 흔적이 줄었다.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 전부 내뺀 것이다. 후작도 도망간 게 아닐까 걱정될 때, 문짝이 박살난 선장실이 나타났다.

“로벨 로드릭 공작...”

로벨은 조그맣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는데 무척 반가운 사람이었다.

“자비에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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