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82화 (382/605)

382화. 부활

심장이 뛴다. 뜨겁다. 아프다. 화난다. 괴롭다. 어지럽다. 춥다. 졸리다. 슬프다. 무섭다. 무기력하다. 조용하다. 외롭다. 심장이 멈춘다.

로벨은 꿈을 꾸었다. 시작과 끝을 알 수 없는 수천 개의 꿈이었다. 그곳에는 모든 것이 있었다. 자상한 아버지와 늠름한 첫째 오라비와 새침한 둘째 오라비와 나팔 부는 아기 천사와 금화자루를 꼭 안은 어린 집사와 깡충깡충 뛰는 키르케와 손주를 안은 펄프 대장과 수줍게 고백하는 호른 경과 미소 짓는 고양이와 꽃다발을 숨기는 외팔이와 한숨짓는 허풍쟁이와 술 취해 노래 부르는 리암 수사와 미남이 된 도너반 자작과 편지 쓰는 페럿 경과 조용히 흐르는 구름과 욕심부리는 모닝스타와 질투하는 플레일과 재롱 피우는 아야와 낮잠 자는 이야카가 있었다.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넌 누구야?’

‘로벨 로드릭’이란 이름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이해할 수 없었다. 그 이름의 주인은 따로 있었다.

‘난 누구지?’

여름 꽃이 만발한 화사한 정원을 뛰노는 소녀가 있었다. 흑단을 풀어낸 듯 고운 머리카락과 뽀얀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치맛자락이 나폴 걸릴 때마다 화관에서 마르지 않은 꽃잎이 떨어졌다.

‘넌 행복해?’

질문은 있지만 답이 없었다. 소녀는 눈앞에 있지만 외해 건너 미지의 대륙처럼 닿지 않았다. 눈부신 햇살이 고통스러워 시선을 돌렸다. 쇠 냄새와 기름 냄새. 그리고 피 냄새가 물씬 났다.

‘나도 행복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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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뜨면 낯선 천장이 보이는 것은 영웅소설의 흔한 전개였다. 하지만 직접 겪기는 쉽지 않거니와 썩 좋지도 않았다.

로벨은 손가락 발가락을 한 번씩 움직여본 후 상체를 일으켰다. 배에 힘을 주었는데 어깨가 몹시 아팠다.

“상처를 꿰매었습니다. 좀 더 누워계시지요.”

로벨은 왼쪽 어깨를 보았다. 햇빛을 못 봐 뽀얀 살결에 지저분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붕대를 따라 오른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소담한 가슴이 그대로 드러났다. 맨살을 보인 것이 새삼 부끄러운데 이제 와 감추기도 이상했다.

로벨은 시선을 침대 밖으로 옮겼다. 풀 플레이트 아머에 워 해머와 메이스를 쥔 호른 경이 있었다. 다른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소?”

“몇 해 되었습니다.”

로벨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어느 순간부터 로벨을 대하는 게 조심스러웠다. 이렇게 확실해지니 오히려 안심이었다.

“시합은 어찌 되었소?”

호른 경의 표정이 변했다.

“축하드립니다. 3회 연속 그랜드 챔피언이 되셨습니다.”

나마르 아자르 경은 반칙패로 실격되었다. 그리 중요한 사실은 아니었다.

“아자르 경은?”

“체포했습니다.”

로벨이 진짜 창에 맞아 쓰러지자 호른 경을 비롯한 기사들이 일제히 달려들었다. 아무리 곰 같은 자라도 30명이 넘는 기사를 당해낼 수 없었다.

“켈트 경과 랭스터 경이 심문 중이나 자백하지 않고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공용어가 서툴러 대화가 되지 않습니다.”

“그자가 아니오.”

로벨은 담요를 치우고 일어났다. 호른 경이 손에 든 메이스를 치우고 고이 접은 우플랑드를 건네주었다. 로벨은 무심코 손을 뻗다가 통증에 움찔했다. 호른 경은 민망한 부위를 의식하지 않기 위해 시선을 위로 올렸다.

“몰트 도너반 남작을 필두로 사형에 처하자는 기사가 많습니다.”

“몰트 남작은 성미가 급하오.”

“존 도너반 자작도 그리 말하더군요. 일단 구금 중입니다.”

로벨은 아픈 팔을 올려 옷을 입었다. 제대로 품위를 갖추려면 겨드랑이와 허리를 꿰매야 하는데, 어린 집사가 없어 거기까지는 힘들었다.

“내 집사는? 다른 기사들은 어디 있소?”

“요새 밖에 있습니다.”

“어째서?”

호른 경은 손에 든 병장기를 슬쩍 보이고 미소 지었다.

늑대성에 이어 두 번째 암살기도였다. 어린 집사가 히스테리를 부리며 사람들의 접근을 막았다. 누구도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로벨의 제1기사를 자처하는 브릭 자작, 켈트 남작, 랭스터 경 등이 화를 냈지만, 눈이 반쯤 뒤집힌 어린 집사와 300명의 용병을 꺾을 수 없었다. 오직 호른 경만 ‘주군의 비밀을 알고 있다’와 ‘시급히 치료해야 한다’는 설득으로 접근을 허락받았다. 그리고 만 하루를 꼬박 지켜주었다.

“주군의 비밀 때문만은 아닙니다. 진정 누구도 믿을 수 없습니다. 한시 빨리 볼탄 반도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선 아자르 경을 만나야 하오.”

로벨의 고집에 호른 경이 인상을 찌푸렸다. 꿈 때문인지 친 오라비한테 혼나는 느낌이었다.

“그자는 주군을 위해한 암살자입니다.”

“아니오. 아자르 경은 피해자요. 아무것도 모르고 이용당한 것이오.”

“기사란 작자가 랜스와 버드나세를 구분 못 했을 리 없습니다. 무게와 재질이 다르지 않습니까?”

“아자르 경은 정식으로 훈련받은 기사가 아니오. 진짜 랜스를 다뤄본 적 없을 거요.”

로벨이 거듭 옹호하자 호른 경은 자세를 바꾸고 한숨 쉬었다.

“그럼 자비에 후작입니까?”

“십중팔구 그렇소.”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후작은 과거 왕위계승전쟁 당시 제1왕자파였다. 본래라면 전쟁배상을 물리고 강력히 처벌해야 하지만, 볼프 사트로 후작이 모든 죄악을 뒤집어써서 흐지부지 넘어갔다.

그렇다고 지난 일이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포클랜드 귀족원의 수장 자리에서 쫓겨나고, 포클랜드 시티의 권리 대부분을 박탈당했다. 원로 귀족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으나 과거처럼 기사들을 모을 권위도, 재산도 남아있지 않았다.

“자존심이 강한 후작이니 복수할 생각은 있겠지만, 그렇다고 암살 같은 저급한 수를...”

“꼭 원한 때문은 아니오.”

로벨의 눈썹이 아래로 조금 쳐졌다. 침울한 표정이었다.

“내가 무섭기 때문이오.”

호른 경의 표정이 이상해졌다. 로벨은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설명했다.

“내 주군... 이었던 에릭 프란시스 공작을 떠올려보시오.”

자신의 집에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세력이 생기니 지레 겁을 먹었다. 에릭 공작이 딱히 우둔하거나 소심해서가 아니다. 누구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볼탄 반도에 울프 용병단을 능가하는 군사집단이 생기고, 여러 기사가 그곳에 충성한다면, 로벨 역시 가만두지 못할 것이다.

“주군을 오해하고 있군요.”

두 기사는 침묵을 깔고 고민했다. 반쪽의 성공을 거둔 후작이 어떻게 나올까.

“역시... 선제공격일까요?”

로벨이 없는 볼탄 반도 군대는 무서울 것이 없었다. 적어도 자비에 후작과 포클랜드 기사들은 그리 생각했다.

“당장 포클랜드 시티를 벗어나는 순간 공격할 거요.”

이곳에 모인 기사와 병사는 볼탄 반도 군대의 핵심이었다. 소집령을 내리면 2천 명, 3천 명을 더 모을 수 있지만, 이들이 없으면 오합지졸의 무기력한 군대였다.

“공격을 막을 방법은 간단합니다.”

로벨의 건재함을 과시하면 슬금슬금 발톱을 꺼내던 포클랜드 영주들이 언제 그랬냐는 듯 헤픈 미소로 배웅 나올 것이다. 로벨은 다친 어깨를 움직여보고 말했다.

“그건 안 되겠소.”

로벨의 부정적인 대답에 화들짝 놀랐다.

“마, 많이 불편하십니까? 혹시 제 치료가 잘못되어서...”

로벨은 어쩔 줄 모르는 호른 경에게 배시시 웃어주었다.

“그것도 아니오. 경의 치료는 훌륭했소.”

사실은 생명의 나무 파나케아의 효과와 마도의 수호자로 각성한 로벨의 권능 때문이지만, 밤새 애쓴 호른 경의 공을 무시할 필요 없었다.

“적의를 가진 포클랜드 일당을 굳이 남겨둘 필요 없다는 뜻이오.”

로벨을 다년간 따라다닌 호른 경은 잠시 뒤 이해했다. 평소에는 순하다 못해 맹한 로벨이지만, 피를 볼 때는 확실히 보았다. 어쩌면 그것도 천성이 착한 탓이었다. 열 명의 피로 천 명의 피를 아낄 수 있으니 말이다.

“나마르 아자르 경을 챙기시오. 볼탄 반도로 함께 갈 것이오.”

사랑하고 존경하는 주군이지만, 치료해준 자신보다 상처입힌 야만인에게 신경 쓰는 것이 조금 못마땅했다.

“살아있으면 그리하겠습니다.”

“...뭐라고 했소?”

“아직 살아있으면 말입니다.”

기사의 명예 때문에 고문조차 하지 않았으니 당연히 살아있다. 하지만 방에서 나올 수 없는 로벨을 괴롭히기 위해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자그마한 질투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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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이 철수를 시작했다. 애초에 싸우러 온 것이 아니라 승패를 구분할 수 없지만, 분위기는 확실히 패전에 가까웠다.

기사들은 왕실 연회에 모두 불참했다. 딱히 무례는 아니었다. 국왕도 연회를 할 기분이 아니었다. 볼탄 반도 공작은 왕실의 가장 큰 협력자였다. 로벨의 지지가 사라지면 검은 숲과 하얀 숲의 지지도 사라지고, 그리되면 정통성에 흠이 있는 국왕 또한 사라질 수 있었다.

“설마, 설마 공작이 죽은 것인가? 그런 것이야? 누가 공작을 살피고 오라!”

“로드릭 가문의 기사들이 외지인의 출입을 막고 있습니다.”

“왕이자 주군인 나조차 만날 수 없단 말이냐? 서, 설마 만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

“공작을 오랫동안 따른 용병들의 표정이 심상치 않습니다. 마음의 준비를 하셔야 할 듯합니다.”

로벨 로드릭 공작의 사망설이 포클랜드를 강타했다. 수많은 전쟁에서 승리한 무적무패의 기사치고 허무한 죽음이었다.

로벨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사람만큼 남몰래 기뻐하는 사람도 있었다.

“흠. 당연하지. 창끝에는 모나카 방울뱀의 맹독이 발라져 있었으니까.”

한 방울만 피에 섞여도 혈관이 막혀 사망하는 맹독이었다. 정상적인 인간이라면 말이다.

반쯤 인지의 존재가 된 로벨에게 인지할 수 없는 독은 아무 효과가 없었다. 차라리 독을 발랐다고 동네방네 소문내는 편이 좋았을 것이다. 그러면 그 대단한 독이 조금이나마 효과를 발휘했을 것이다.

“로벨 로드릭 공작은 죽었다. 왕가의 위엄과 포클랜드의 정의를 위해 그 일당을 처단하라.”

자비에 후작의 편지가 포클랜드 각 지역으로 전해졌다. 왕위계승전쟁 때 일로 복수심을 품은 기사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정의니 복수니 하는 것에 관심 없었다. 볼탄 반도의 비옥한 농지와 늑대성이 쓸어 담고 있는 재화에 관심이 있었다.

‘무적무패의 기사가 없으면...’

‘천 명의 오합지졸이지.’

유일하게 눈치 볼 것은 양심 하나였다. 그 친구와 돈독한 관계를 유지해온 영주들은 기사가 할 짓이 아니라 생각하며 외면했다. 정말 양심적인 기사는 호른 경에게 사람을 보내 경고하기도 했다. 지금 볼탄 반도로 가는 것은 위험하니까 기다리라고 말이다.

하지만 로벨 로드릭 군은 꾸역꾸역 북동쪽으로 행군했다. 그리고 포스트 포레스트 초입에서 마침내 구(舊)왕자파이자 전(前)자비에 후작 일파 기사들과 마주쳤다. 그 숫자가 무려 2천 명이었다. 한 뼘이라도 더 많은 땅과 한 줄이라도 더 많은 권리를 차지하기 위해 가진 병사를 죄다 끌어온 것이 분명했다.

봄이 찾아온 푸른 들판에 두 군대가 마주 섰다. 약속이라도 한 듯 자연스러운 만남이었다. 누구도 시작을 외치지 않았지만 싸움은 기정사실이 되었다.

“자작나무 숲의 호른 경은 볼탄 반도에서 명성이 높은 기사입니다.”

“그래봐야 평범한 기사 아니오. 로벨 로드릭, 그 악마의 사생아만 아니면 되었소.”

옛 신의 사도로 추앙하는 것은 볼탄 반도 주민들뿐인 듯했다.

포클랜드의 ‘비열한’ 영주들은 길게 끌지 않았다. 북을 치며 기마대를 전진시켰다. 최적의 돌격거리는 100야드였다. 그 이하는 속도가 나지 않고, 그 이상은 말의 체력이 떨어졌다.

양측의 군대가 천천히, 정말 천천히 가까워졌다. 거리가 150야드로 접어들자 전열을 넘어 개개인의 무장이 보이기 시작했다. 120야드로 접어들자 상대측 진영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리고 100야드에 접어들자 어렴풋이 표정들이 보였다.

‘웃어?’

전쟁에 미친 볼탄 반도 기사들이라 해도 전투 중에 웃을 수 없었다. 포클랜드 기사들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에 젖었다.

‘주인을 잃은 군대가... 어찌 저리 사기가 높지?’

조금 늦은 깨달음이었다. 20야드 전에 깨달았으면 참 좋았을 것이다. 눈치가 없는 건지 눈이 나쁜 건지 어느 기사가 해비 랜스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포클랜드의 형제 기사들이여! 돌격 대열을 갖추시오!”

그에 대한 호응은 볼탄 반도의 형제들이 대신했다. 기마 용병이 나팔을 불자 기사와 기사 종자가 일사불란하게 자리를 잡았다. 중무장한 기사가 50명인데, 오직 한 명만 시야에 들어왔다. 지난 전쟁에서, 그리고 이번 토너먼트에서 잊을 수 없는 기억으로 자리한 왕국 최강의 기사였다.

“눈처럼 하얀 아멧과 필드 아머...”

“검은 갈기를 가진 백마...?”

부우우우우웅-!

볼탄 반도 진영에서 두 번째 나팔이 울렸다. 말을 탄 사람 중 절반이 기사라 나팔의 의미를 알았다. 돌격신호였다. 그러나 포클랜드 기사들은 마주 돌격할 수 없었다. 새까만 창을 앞세운 적의 모습에 질려버린 탓이다.

“로, 로, 로벨 로드릭이다!”

“무적무패 기사가 살아 있었어!”

“후퇴! 후퇴! 후퇴하라!”

영웅은 죽지 않았다. 설령 죽어도 부활할 것이다.

‘부활자의 전쟁’은 시작과 동시에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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