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화. 창끝
외해 원주민과 포비아 왕국인의 혼혈 기사 나마르 아자르 경은 관용적인 표현으로 ‘작은 거인’이었다.
힘이 얼마나 좋은지 싸우는 족족 상대방의 팔다리를 부러트렸다. 주먹질은 말할 것도 없고, 그라운드 상황에서도 갑옷 채로 어깨 관절을 뽑았다. 나중에는 겁을 먹은 상대가 알아서 기권했다. 야유가 쏟아졌다. 유쾌한 야유였다. 농민이 기사를 야유할 수 있는 유일한 순간이었다.
“주군의 안목이 옳았습니다. 진짜 우승했군요.”
“엣헴.”
펄프 대장의 전 재산을 빼앗고, 호른 경의 주머니까지 가로채 배팅한 도박이 승리했다. 150페닝이 300페닝으로 불어났다. 로벨은 양심껏 1/n로 50페닝만 챙겼다.
‘어린 집사가 좋아하겠지?’
셋이 가서 고작 150페닝 배팅했냐고 화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용돈을 안 올려줘서 가진 게 없는데.
“볼탄 반도 공작님 옳습니까?”
누가 잡생각에 빠진 로벨에게 말을 걸었다. 치열한 경기 끝에 흙투성이가 된 나마르 아자르 경이었다.
호른 경과 펄프 대장이 반걸음씩 앞으로 나가 칼자루를 쥐었다. 필요 이상으로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싸우지 않습니다. 개인적인 호기심과 존경입니다. 이것이 사실입니다.”
외해 출신이라 유라피아 대륙 공용어가 어눌했다. 로벨은 수행기사와 용병대장을 물리고 나마르 아자르 경을 자세히 보았다. 곱슬거리는 까만 머리와 보기 좋게 그을린 듯한 갈색 피부. 호수처럼 푸른 눈동자와 덥수룩한 수염. 출신만큼이나 외모도 이질적이었다. 아니면 불타는 산 원주민은 다 저럴지도 모르겠다.
“시합 잘 보았소.”
로벨은 흉갑을 한 번 두드렸다. 기사로서 경의를 표시했다.
“어제도 오늘도. 말 위에서도 아래에서도 훌륭했소.”
말은 잘 못 해도 듣는 것은 잘하는 듯했다. 로벨의 칭찬에 활짝 웃으며 마주 가슴을 두드렸다.
“공작이 비교하자 아니다. 하지만 최선이다. 내일은 싸웁니다.”
이해하기가 좀 어려웠다. 로벨이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펄프 대장이 속삭였다.
“영주님에 비하면 부족하지만, 최선을 다해 시합에 응하겠답니다.”
“...저걸 알아들어?”
“울프 용병단 남군(南軍) 중에 외해 야만인이 있지 않습니까? 말하는 게 비슷합니다.”
이상한 통역가가 생겼다. 로벨은 어눌하지만 명예로운 외해의 기사에게 약속했다.
“본인 역시 최선을 다하겠소. 결승전에서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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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토너먼트 3일 차가 끝나자 최소 4번의 승리를 거머쥔 8인이 가려졌다. 한 번은 요행일 수 있고 두 번은 기적일 수 있지만, 세 번 이기고 네 번 이기면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그야말로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었다.
“옛 신과 샘 포클의 이름을 빌어... 빌어먹을... 명예로운 승리의 자리가... 우욱...”
토너먼트 개최 수일 전부터 연회를 시작해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만취한 국왕 폐하는 안색이 심히 안 좋았다. 시종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사람 꼴을 갖춰 결승전에 참석했지만 축사를 읊을 상태가 아니었다.
국왕이 몇 마디 웅얼거리다가 주저앉자 당황한 왕비가 대신 경기 시작을 알렸다. 33개 나팔이 푸른 하늘을 향해 고동 소리를 내었다. 애초에 축사 따위 관심 없었던 관객은 환호로 응답했다.
로벨은 대진표에 따라 청색 코너로 말을 몰았다. 인원이 줄어서 시합이 빠듯했다. 계속해서 승리할 경우 세 번 연속으로 싸워야 했다.
‘도보전을 치르면 체력이 바닥나. 결승전에서 버티지 못하겠지.’
경기 일정이 빡빡했다. 원래라면 셋째 날에 8강전이 끝났어야 하는데, 참가자가 많고 시합이 길어져 오늘로 밀렸다.
“주군의 첫 상대는 검은 숲의 챔피언입니다.”
로벨을 따라온 호른 경이 나직이 조언했다.
“솜씨가 좋아 창을 피하기 어렵습니다. 속도를 올려서 선제공격하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로벨은 친구의 배려에 고마움과 한심함을 느꼈다.
“나보다 경의 시합이 먼저요. 자신의 상대부터 살피는 게 어떻소?”
호른 경은 홍색 코너를 슬쩍 보았다. 하필 첫 상대가 나마르 아자르 경이었다.
“저런 야만인 따위에게 지지 않습니다.”
“그리 가볍게 볼 상대가 아니오. 신중하시오.”
로벨의 경고에 호른 경은 흔치 않은 치기를 보였다.
“자작나무 숲의 패트릭 호른. 주군과 겨루기 전에 패배는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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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 나마르 아자르! 승리!”
로벨은 바이저를 올리고 이마를 짚었다. 자신만만하게 뛰쳐나가더니 첫 격돌에 낙마했다. 실력 차가 크지 않은데 로벨의 상대를 분석하느라 시간을 다 쓴 것이 폐인이었다. 관객들의 야유가 괜히 부끄러웠다.
땅바닥에 대자로 뻗은 호른 경은 비적거리며 일어났다. 그래도 정신을 잃고 실려 나가는 추태는 면했다. 아니, 로벨과 어린 집사의 표정을 보면 차라리 혼절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큰소리칠 때 된통 당할 줄 알았다. 에휴... 어디 가서 로드릭 가문 기사라 하지 말라고 해요.”
“그 정도는 아니야. 음... 준준결승이면 잘한 거지.”
로벨은 영혼 없이 반박했다. 사실 로벨 기준에서는 ‘고작’ 준준결승이었다.
“아무튼, 내 기사에게 수치를 주다니. 용서할 수 없어. 내가 복수하겠어.”
“호른 경한테 그렇게 전할까요?”
“...조금 있다가.”
로벨의 상대는 검은 숲의 챔피언이었다. 호른 경이 우려를 표시할 만큼 강적이었다.
평범한 기사들의 시합이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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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 로벨 로드릭! 승리!”
로벨의 승리. 그것도 압도적인 승리였다. 지난 사흘 동안 승승장구한 검은 숲 챔피언이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어, 어, 어떻게...?”
검은 숲 챔피언은 일어날 생각조차 못하고 로벨과 모닝스타를 올려다보았다. 정확히는 로벨의 버드나세를 쳐다보았다.
속이 비었다 해도 기본 모양이 원뿔이라 찌르면 창끝이나 중간에서 먼저 부러진다. 그러나 로벨의 버드나세는 손잡이만 남고 산산조각이 났다. 무지막지한 힘의 결과물이었다.
“어떻게...?”
로벨의 괴력과 모닝스타의 주력이 합쳐진 결과라 상식으로 설명할 수 없었다. 로벨은 혼이 반쯤 나간 검은 숲 챔피언에게 경의를 표시하고, ‘로벨 로드릭’을 연호하는 관객에게 화답했다.
이어지는 준결승도 무난하게 진행되었다. 세 갈래 강의 챔피언은 큼직한 방패를 들고나와 철저히 수비로 일관했다. 그 결과 세 번의 창을 견디는 데 성공하나 점수를 내는 데 실패했다. 로벨은 3대 2로 무난하게 결승전에 진출했다.
마침내 그랜드 챔피언을 가르는 결승전이었다.
현세에서 가장 고귀한-숙취로 구울 같은 몰골이지만-왕과 왕비를 비롯해 수천 명의 관객이 지켜보는 마지막 시합이었다.
로벨은 컨틀렛을 고쳐 끼우다가 어린 집사의 헤벌쭉한 표정을 보았다.
“왜 그래? 좋은 일 있어?”
“공돈이 생겨서 그래요. 히히!”
“공돈?”
어린 집사는 로벨의 우승과 나마르 아자르 경의 준우승에 배팅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다. 금액을 알면 용돈을 올려 달라 조를 것이기 때문이다.
“영주님. 마지막이에요.”
“응.”
“꼭 이기세요. 이겨서 기분 좋게 고향으로 가요.”
로벨은 평소보다 비장한 어린 집사가 의아했지만, 결승이라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응. 그럴게.”
그리고 바이저를 내렸다. 국왕 폐하의 결승 축하 후 곧장 깃발이 떨어졌다. 귀족, 귀부인, 자유민, 농민, 외국인, 어린아이 가리지 않고 함성을 질렀다.
“가자.”
로벨은 마상시합에 완전히 재미 들린 모닝스타를 가볍게 두드렸다. 외해에서 온 기사. 그가 온 고향에서는 필시 영웅일 것이다.
‘이곳은 내 나라야. 이 시합은 내 것이고.’
날씨가 좋고, 기분이 좋고, 느낌이 좋았다. 적당한 긴장감이 의욕을 북돋웠다. 허나, 도저히 질 것 같지 않았다. 로벨은 창을 수평으로 내렸다.
다그닥- 다그닥- 다그닥- 다닥- 다닥- 닥- 타닥-
모닝스타의 네 발이 점차 빨라져 순식간에 최고속도가 되었다. 상대방도 마주 달려오니 100야드 거리는 눈 깜짝 사이 사라졌다. 앗! 하는 순간 창이 닿았다.
텅-!
로벨은 등자를 밟은 발에 힘을 주었다. 왼쪽 가슴의 방패로 창을 받아냈으나 위력이 대단했다. 흡사 소뿔에 치인 기분이었다. 호른 경이 일격에 낙마한 것이 단순히 방심해서는 아니었다.
‘강해.’
옛날의 로벨이었으면 이 일격에 나가떨어졌을지도 모른다. 그랜드 챔피언이 되기 전에 만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하지만 재미있어.’
지금은 만나서 기뻤다. 마도의 수호자가 아닌, 평범한 인간에게 호승심을 느끼는 것은 오랜만이었다.
나마르 아자르 경도 무척 놀랐다. 정교하긴 하지만 완력이 부족해 ‘창을 가져다 대는’ 다른 기사와 달랐다. 찰나의 순간, 정확히 창을 밀어 넣었다. 그 힘이 자신보다 약하지 않았다.
‘백인이라고 거들먹거리는 자가 아니다. 진짜다.’
로벨 로드릭은 소문대로였다. ‘진짜 기사’를 만난 흥분이 샘솟았다. 이해하기 힘든 이곳 전사들의 승부 방식에 처음으로 열정이 생겼다.
“랜스!”
반대 코너에서 대기 중이던 허풍쟁이가 화급히 새 창을 올려주었다. 로벨은 시선을 나마르 아자르 경에게 고정한 채 창 자루를 쥐었다.
나마르 아자르 경도 말머리를 돌리고 자비에 가문의 시종이 내미는 창을 잡았다. 광대의 신호 따위 의미 없었다. 두 기사는 동시에 박차를 가했다.
“이럇!”
“히랴앗!”
투구 안에서 미소가 감돌았다. 이곳에 오길 잘했다. 창이 바람을 가르고 발굽이 땅을 두드리자 시간이 점차 느려졌다. 초를 여러 개로 쪼개자 엉뚱한 생각을 할 여유가 있었다.
출신 따위 관계없어. 훌륭한 기사야. 자비에 후작에게 충성을 맹세했을까. 서임만 받은 거면 늑대성에 가자고 할까? 그렉 페럿 경과 싸우면 누가 이길까?
나마르 아자르 경의 창이 선명하게 보였다. 요동치는 말 위에서도 창끝이 한 점에 고정되어 있었다. 지금껏 저만한 창술을 보인 기사가 없었다.
‘응?’
지나치게 느려진 시간 탓일까, 로벨은 알 수 없는 위화감을 느꼈다.
모닝스타의 앞발이 땅을 스치며 충격이 골반으로 올라왔다. 평소처럼 허리에 힘을 주어 충격을 흩트리고 다시 생각했다.
‘뭐야?’
나마르 아자르 경의 창이 조금씩 조금씩 다가왔다. 정확히 가슴을 노리고 있었다. 완전히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아니, 피하고자 하면 피할 수 있지만 그러면 공격을 할 수 없었다. 최대한 비켜내고 역공을 가해야 했다. 상체를 기울여 왼쪽 어깨를 내주었다. 창이 폴드런에 닿는 순간 뒤로 젖혀 충격을 흡수하고, 오른손의 창을 얼굴로 찔러 넣었다. 아니, 찔러 넣으려 했다.
‘이상해.’
로벨은 왼쪽 어깨에 닿은 나마르 아자르 경의 창을 보았다. 보통은 시야가 좁아 볼 수 없지만, 파나케아 투구의 놀라운 힘으로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창날을 감싼 헝겊뭉치가 흩어졌다. 그러나 창이 부러지지 않았다. 폴드런이 조금씩 일그러지고 있었다.
‘정말 이상해.’
창이 부러지지 않아 이상한 게 아니다. 나마르 아자르 경은 투박하지만 기사였다. 이런 짓을 할 것 같지 않았다.
헝겊뭉치가 완전히 벗겨지자 쇠촉이 드러났다. 까맣고, 단단하고, 뾰족했다. 마상시합에 어울리지 않았다.
마침내 창날이 부러졌다. 그러나 창끝이 폴드런의 판금을 뚫은 후였다. 붉은 피가 튀어 올랐다.
로벨은 나마르 아자르 경의 표정을 보기 위해 시선을 돌렸다. 동공이 최대치로 확장되고 있었다. 당황, 당혹, 공포, 분노 등이 느껴졌다.
‘역시 아니구나.’
이것도 파나케아 투구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로벨의 몸은 랜스 차칭의 충격을 버티지 못해 안장 아래로 떨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닝스타가 가벼워진 무게에 깜짝 놀라 머리를 돌리고 있었다. 어린 집사의 입술이 벌어지는 것이 보였다. 호른 경이 관객석에서 벌떡 일어나는 것도 보였다. 숙취에 끙끙거리던 국왕이 화들짝 놀라는 것도 보였다. 그리고 알게 모르게 비틀리는 자비에 후작의 미소가 보였다.
쿵-
충격이 머리를 흔들며 시야가 어두워졌다. 꺼져가는 불빛 속에서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의 목소리가 아련하게 들려왔다.
“영주님! 영주님! 영주님!”
“제길! 암살이다! 저자를 잡아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