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80화 (380/605)

380화. 배당

외해에서 온 기사의 솜씨는 조야했다.

마상시합에서 흔히 사용하는 ‘창대 끼우기’, ‘방패 빗겨들기’, ‘고개 숙이기’ 등의 기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위험한 짓이었다. 속 빈 버드나세라도 정통으로 맞으면 충격이 대단했다. 잘 부러지기 때문에 나무 파편이 눈구멍을 찌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기술의 차이가 실력의 차이는 아니란 것이 증명되었다. 외해의 얼굴 없는 기사는 우악스럽게 랜스를 내뻗었다. 창의 무게와 전투마의 속도를 생각하면 말이 안 되는 짓이었다. 설령 창끝을 맞혀도 본인이 균형을 잃고 낙마할 가능성이 높았다.

“호오?”

그러나 얼굴 없는 기사는 멋지게 성공했다. 상대의 창을 다릿심으로 버텨내며 역으로 얼굴을 가격했다. 두 자루 창이 모두 부러졌으나 낙마로 승부가 갈렸다.

“저돌적이야. 수비를 전혀 하지 않아.”

힘만 보면 그렉 페럿 경 이상이었다. 자비에 후작이 염소수염을 말아 올리며 부연 설명했다.

“수컷 멧돼지를 목 졸라 죽인 자요. 힘도 힘이지만, 용맹하기가 사자 같지.”

“사자보다 곰이... 아니오. 신경 쓰지 마시오.”

얼굴 없는 기사는 관객의 환호를 무시하고 귀빈석으로 다가왔다. 국왕 폐하가 치하하자 머리를 살짝 숙이고 로벨을 보았다. 구닥다리 헬름의 눈구멍으로 푸른 안광이 번쩍였다.

‘...재미있는데?’

로벨은 아론다이트의 폼멜을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호승심이 샘솟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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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 7년 만에 개최된 그랜드 토너먼트라 출전자가 유독 많았다. 해가 질 때까지 시합이 계속되었으나 2차전은 끝내 시작하지 못했다. 그래도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챔피언 중의 챔피언이 두각이 드러내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로벨 로드릭 공작이지!”

싸구려 맥주 석 잔을 연거푸 비우고 취기가 오른 어물전 사장이 소리쳤다. 같은 라인을 탄 시장 상인들이 고개를 주억이며 동조했다.

“무적무패의 기사라고! 무적무패! 엉? 에르나 왕국, 잉그비아 왕국, 네일 공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기사들이 기도 못 펴고 도망간 최강의 기사! 우리 왕국의 자랑!”

“그래도 이제 나이가 있잖아?”

술집 한구석에서 반론이 나왔다. 즉시 반발이 쏟아졌다.

“나이? 아직 한창때인데 무슨 나이?”

“맞네. 맞네. 생긴 것을 보면 아직 10대라 해도 믿겠구만.”

주름살의 개수로 노화를 측정하는 풍토에 따르면 로벨은 아직도 청춘이었다.

“이제 국왕 폐하 다음가는 공작님이 아닌가? 옛날처럼 찬바람 맞으며 전쟁터를 누비지 않는데, 실력이...”

“누가 그래? 누가? 작년 여름에 기사들을 이끌고 가서 이교도를 한 땀 한 땀 꿰었다는데?”

“이 사람 취했구먼. 이교도라니? 말조심하게.”

포클랜드 시티는 포비아 왕국 최고의 교역도시였다. 외국 상인과 용병이 많은 만큼 말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흥분한 술꾼들은 아무렇게나 말을 던졌다.

“설령 전쟁터에서 잘 싸운다 해도 토너먼트에서 잘 싸우는 것은 아니지.”

다수가 Yes라 하면 괜히 No를 외치고 싶은 게 사람 심리였다. 분위기가 살짝 바뀌었다.

“국왕 폐하의 거시기 삼촌인지 사촌인지 때려잡은 기사 보았는감? 그랜드 챔피언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던데?”

“검은 숲의 챔피언이구만.”

“그 기사 나으리보다 큰 투구를 쓴 기사가 어떤가? 보통이 아니던데?”

“포턴 경을 한 방에 떨군 덩치 큰 기사 말이야?

순수한 열정만으로 나누는 대화가 아니었다. 승자와 패자가 갈리는 곳에 어김없이 등장하는 것이 하나 있으니, 바로 도박이었다.

유흥거리가 거의 없는 하층민 삶에서 토너먼트, 그것도 왕국 전역의 챔피언이 모이는 그랜드 토너먼트는 최고의 축제였다. 게다가 잘만 하면 목돈이 생기기에 열기는 말할 것도 없었다.

먹고 사는 것 이상의 여유가 있는 시민은 빠짐없이 판돈을 가져왔다. 둘째 날에는 분위기를 파악한 외지인이 합세하여 규모가 더욱 커졌다. 보통은 1페닝이나 5페닝을 걸지만, 손이 큰 사람은 100페닝씩 내놓기도 했다.

“그랜드 챔피언이 옛날의 그랜드 챔피언이 아니라니까요? 강산도 10년이면 변하는데 인간이 10년 전 그대로겠어요? 게다가 30살 넘으면 젊을 때 체력이 안 나온다니까요? 아저씨, 아저씨는 예전이랑 비교해서 어때요?”

“그, 그야 예전 같지는 않지만...”

“맞아 맞아. 왕년에는 나도 한가닥 했다니까? 나이 먹고 골골거려서 그렇지.”

그 ‘큰 손’ 중 하나는 이제 20살이나 됐을까 싶은 회색 머리 청년이었다. 포클랜드 시민은 아니지만, 옷차림이 화려하고 우락부락한 경호원을 셋이나 데리고 다니는 것을 보아 인근 영주의 아들이거나 부르주아 도련님이 아닐까 짐작했다. 그 외 특이점은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 로벨 로드릭 공작을 폄하하는 것인데, 가만히 들으면 가문의 원수쯤 되는 거 같았다.

도련님의 열변을 보는 경호원들의 표정이 괴상했다. 커다란 게 마려운 것처럼 몸을 꼬기도 하고, 흠칫흠칫 놀라며 주위를 살피기도 했다. 참다못한 외팔이 경호원이 도련님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기사 나리를 깎아도 되우?”

침 튀기며 떠들던 도련님도 목소리를 낮췄다.

“그래야 조금이라도 배당률이 올라가죠. 칫! 이렇게 깎았는데 30%가 안 되잖아?”

부잣집 도련님으로 오해받는 어린 집사가 엄지손톱을 잘근잘근 뜯었다.

“영주님보고 한 번 져주라고 할까요? 최저 배팅 기사한테 지면 750%가 가능한데...”

“...아무리 집사라도 나으리한테 칼 맞을 거요.”

“칼은 아니겠지. 딱밤은 세게 맞겠지만.”

“으... 아픈 거 싫은데.”

어린 집사는 정수리를 만졌다. 승부조작은 안 될 거 같았다. 그때 옆자리에서 재미난 이야기가 들려왔다.

“그럼 우승은 무적무패 나으리가 따놨다 치고, 준우승은 누구 같습니까요?”

“그거 쉬운 질문이군. 주군을, 아니, 로드릭 공작님을 가장 나중에 만나는 기사다.”

“오호오? 공작 나으리가 그렇게 대단합니까요?”

“두말하면 입 아프고, 세말하면 짜증나지.”

어린 집사는 용돈벌이의 훼방꾼을 마침내 찾아내어 휙! 돌아보았다. 그리고 양쪽 다 놀랐다.

“엥? 조나 켈트 경?”

“넌 주군의 충복... 어... 이름이 뭐였지?”

켈트 가문의 장남 조나 켈트가 술꾼들 사이에서 머리를 내밀었다. 자유도시연맹 사절단 이후 처음인데, 엊그제 만난 것처럼 변함이 없었다.

“조나 경이 어쩐 일이에요? 영주님, 아니지, 켈트 남작님을 따라왔어요?”

“내가 아비의 품에서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더냐?”

‘그럼 아닌가요?’라는 질문이 혓바닥까지 올라왔지만 참았다. 저래 봬도 정식으로 서임 받은, 그것도 로벨이 직접 서임해준 기사였다. 체면을 지켜줘야 했다.

‘착하잖아. 그래. 무능하고 찌질해도 착하니까 봐주자.’

어린 집사는 억지로 방긋방긋 웃었다.

“그건 아니죠. 그래서 어떻게 오셨나요?”

“백상아리 호에 밀항했다. 선원들이 예의가 없더군. 주군의 이름으로 겨우 설득했지.”

안 봐도 교회 공연이었다. 상선도 아니고, 군함에 숨어든 밀항자가 좋은 꼴 보기 힘들었다. 상어 밥이 될 뻔했다가 로벨의 이름을 팔고 싹싹 빌어서 살아났을 것이다.

‘켈트 남작은 전쟁터에서 죽지 않을 거야.’

고혈압으로 죽을 테니까. 하지만 한 가지는 마음에 들었다. 준우승자에 대한 식견이었다.

“영주님을 마지막에 만나는 기사가 2등이라... 그럴듯한데요?”

어린 집사는 기억 속에 대진표를 꺼내고 배팅 대상을 바꾸었다. 2등과 3등 배팅도 제법 인기 있었다. 후보를 추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로벨이 지목한 기사 중 가장 나중에 만나는 기사를 찾으면 되었다.

“아자르 가문의... 나마르 아자르 경?”

독특한 이름을 가진 독특한 기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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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토너먼트는 국왕의 이름으로 개최된 축제인 만큼 느긋하게, 그러나 빈틈없이 진행되었다. 첫째 날에 36인의 기사가 가려져서 밤을 꼴딱 새우는 연회를 벌이고, 둘째 날에 숙취가 가시지 않은, 그래서 더욱 재미있는 시합 끝에 18명의 기사가 가려졌다.

국왕의 축제답게 마상시합만 벌어지진 않았다. 말 위에서 패배한 기사에게도 이름을 떨칠 기회가 있었으니, 검술, 궁술, 레슬링 등의 시합이었다. 마상시합보다는 인기가 덜하지만 꾼은 판을 가리지 않기에 많은 구경꾼이 있었다.

로벨은 펄프 대장과 호른 경을 대동하고 각종 시합을 구경 다녔다. 풀 플레이트 차림으로 다녔지만 장소가 장소라 그리 눈에 띄지 않았다. 시합에 참가하는 기사, 주인을 보필하는 기사, 견문을 넓힌다는 핑계로 놀러온 기사 등이 상당해서 어디 가나 쇳소리 가득했다.

“거기 나으리들! 갑옷 수리하러 오셨습니까요?”

“수리비가 부족하면 이쪽으로 오시지요! 싸게! 정말 싸게 페닝을 빌려드립니다!”

기사들만 모인 것도 아니었다. 무기와 갑옷을 수리, 대여해주는 대장장이와 그 금액을 빌려주는 사채업자와 오고 가는 페닝을 노리는 장사꾼, 호객꾼, 사기꾼, 창녀, 소매치기까지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 숫자와 규모가 작은 도시 수준이었으니, 과연 그랜드 토너먼트였다.

“어어억! 로벨 로드릭이다!”

“이놈! 무례하다!”

“아, 아차! 로벨 로드릭 공작님이시다!”

로벨은 이들을 불러모은 마상시합의 주인공이었다. 국왕 폐하의 이름은 몰라도 로벨의 이름은 알았으니 고향에서보다 더한 인기와 관심이었다.

유명세 탓에 작은 헤프닝도 있었다. 페닝을 빌려줄 테니 잠깐 이야기하자던 사기꾼은 공작이란 호칭에 혼이 빠져 도망갔고, 갑옷에 트집을 잡아 무조건 고쳐야 한다던 대장장이는 벙어리가 되어 망치만 내려쳤다. 반대로 로벨의 정체를 알고 달라붙는 직종도 있었는데, 글을 파는 자와 몸을 파는 자였다. 호른 경은 둘 다 탐탁지 않았다.

“너희 천것들이 감히 주군을 현혹하는가!”

철이 없어서, 혹은 철이 너무 빨리 들어서 공작님의 관심을 끌고자 한 여인들은 호른 경의 호통에 모두 도망갔다. 펄프 대장이 아쉬운 듯 혀를 찼다.

“이거 정신이 없군요. 영주님, 그만 돌아가는 게 어떻습니까?”

로벨은 토너먼트의 활기를 가만히 만끽하다가 말했다.

“조금 더 있자. 언제 또 토너먼트에 참가하겠어?”

‘엄청 자주 참가할 거 같습니다.’

호른 경과 펄프 대장은 2차전에서 박살이 난 로벨의 상대를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랜드 토너먼트가 10년 뒤에 다시 열려도 가볍게 우승할 것이다.

“제7시부터 레슬링 시합이 열리오! 관심이 있으면 동문쪽 시합장으로 가시오!”

마상시합 다음으로 인기 있는 종목이 레슬링 시합이었다. 칼로 싸우는 것은 점수제라 깡깡 거리다 끝나고, 활로 겨루는 것은 활기가 없어서 지루했다. 반면 레슬링은 주먹질, 발길질, 박치기, 꼬집기 등을 하면서 진흙탕을 굴러 제법 볼만했다. 무엇보다 고귀한 기사 나리들이 쥐어 터져서 진귀했다.

“시합을 관람하시겠습니까?”

“음... 좋소.”

로벨도 호기심이 동해 발을 옮겼다.

레슬링 시합장은 마상시합장에 비하면 작고 초라했다. 귀족과 귀부인은 거의 보이지 않으며, 참가한 기사도 대부분 생소했다.

“가난한 기사들의 경기입니다.”

“전투마와 버드나세가 필요 없으니까요.”

로벨도 잘 알았다. 어느 지방이나 토너먼트의 꽃은 마상시합이고, 나머지는 일종의 번외편이었다.

“다음 출전자는... 에... 발음이 어렵군요. 나마르, 나마르 아자르 경입니다!”

그때, 로벨의 관심을 끄는 이름이 나왔다.

“자비에 가문의 기사야.”

“예?”

로벨은 호주머니를 뒤적이다가 난감한 얼굴로 펄프 대장을 보았다.

“페닝 좀 있어?”

기사에게 페닝 뜯기는 일이 흔한 시대라 살짝 긴장했다.

“조, 조금 있습니다.”

로벨은 환하게 웃었다.

“그럼 페닝 좀 벌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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