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9화 (379/605)

379화. 강자

빠바바바바암-!

빠아암-! 빠암-! 빰-!

거센 날숨이 좁은 금속관을 타고 올라가 웅장한 소리로 뿜어져 나왔다. 가슴이 부풀고 심장이 요동치는데, 그러한 소리가 33개나 되었다. 이른 봄바람에 들썩이는 133개 깃발이 마치 나팔 소리에 춤추는 듯했다.

“와아아아아-!”

“우오오-!”

진짜로 춤을 추는 것은 드넓은 마상시합장을 가득 메운 포클랜드 시민이었다.

오리 주둥이 모양 아멧을 쓴 청년 기사, 사슴뿔 모양 헬름을 쓴 중년 기사, 말 엉덩이까지 덮는 비단 망토의 노(老)기사 등등. 포비아 왕국 각 지방에서 올라온 ‘챔피언’이 마상시합장을 한 바퀴 돌며 퍼레이드했다. 시리도록 푸른 봄 하늘과 거인의 고동 같은 북소리와 두 눈이 멀듯 한 갑옷 반사광이 어우러져 일대 장관이었다. 기사의 전통이 희미한 남쪽 나라 사람들은 화려함이 넘치는 기사 퍼레이드에 넋을 잃었다.

로벨은 챔피언 타이틀을 획득한 적 있는 볼탄 반도 기사들과 함께 퍼레이드에 참가했다. 지역과 가문으로 무리 짓는 경우가 많아 이상하지 않았다. 호른 경이 작은 깃이 달린 랜스를 세우고 로벨 곁에 바짝 붙었다.

“저쪽은 세 갈래 강의 기사들입니다. 부자가 함께 출정했군요. 저쪽의 버거넷을 쓴 기사는 블랙우드 시티 챔피언입니다. 주군을 제외하면 가장 유력한 우승 후보지요.”

로벨은 파나케아 투구의 바이저를 살며시 올리고 흙먼지와 말똥을 뿌리는 기사들을 보았다. 포클랜드 출신이 가장 많고, 그다음이 볼탄 반도 출신이었다. 그러나 ‘볼탄 반도’가 꼭 로드릭 가문 기사를 뜻하지는 않았다. 사트로 가문의 기사가 다수 섞여 있었다.

“첫 시합은 누구요?”

첫 번째 시합은 만인의 이목이 집중되는 영광된 자리였다. 그랜드 토너먼트쯤 되면 아무나 추천하지 않았다.

“고른 가문의 기사가 나올 겁니다.”

“국왕 폐하의...?”

“방계입니다. 오륙 촌쯤 되겠지요.”

지역구 챔피언들이 모인 만큼 자존심이 대단했다. 첫 시합의 영광을 양보하려면 당연히 왕족이어야 했다. 로벨은 출신보다 솜씨에 관심 가졌다.

“얼마나 가겠소?”

“그래도 3번째 창은 뽑지 않겠습니까?”

세 자루의 창으로 승부를 보기 때문에 최소 한 번은 동수가 되어야 했다. 어지간히 무능한 기사가 아니면 한 번은 창을 맞힐 테니 지나친 예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왕의 이름을 달고도 명성을 떨치지 못한 풋내기를 과대평가했다.

화려한 퍼레이드가 끝나고, 아무도 관심 가지지 않는 국왕 폐하의 짤막한 연설 후 곧장 첫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긴장감이 한껏 고조되었으나 결과가 좋지 않았다. 고른 가문이 고르고 골라 내보낸 기사는 첫 격돌에서 블랙우드 시티 챔피언의 창에 맞아 낙마했다. 관객들이 자지러지며 환호했다. 고귀한 왕족이 흙바닥을 구르는 광경은 흔치 않으니 좋아할 만했다. 의도한 것과 다르지만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시간 벌이도 안 되는군요.”

기사와 기사 종자 사이에서 비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나 로벨은 웃지 않았다. 첫 시합이 순식간에 끝난 탓이다. 호른 경이 나직이 속삭였다.

“주군의 시합입니다.”

@

대진표를 짠 것이 누군지 모르지만 머리를 아주 잘 썼다. 유쾌한 왕족의 시합에 이어서 본격적인 토너먼트 분위기를 띄웠다. 지난 대회의 그랜드 챔피언이 등장한 것이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7년 전을 기억하는 포클랜드 토박이들은 물론이고, 외지인과 어린아이도 1천 명의 호위병을 이끌고 열병식을 치른 그랜드 챔피언 공작을 알아보았다.

“꺄아아아-! 공작님! 이기세요!”

명성뿐만 아니라 외모도 인기 요소였다. 심미관이 아주 독특한 경우가 아니면 로벨이 잘생겼다는데 이견이 없었다. 헬멧을 쓰고 바이저를 내릴 때는 뭇 여인들의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어린 집사가 컨틀렛을 주고 버드나세를 골라 거꾸로 들었다. 로벨은 100야드 떨어진 청 코너의 기사를 살피며 가죽끈을 쪼였다.

“조지 볼메른 경이에요. 세 갈래 강 지방의 기사인데, 출신이 좀 복잡해요.”

“출신은 상관없다니까. 실력은 어때?”

“고드만 가문의 토너먼트에서 3번 연속 챔피언이 되었어요. 그 동네가 시골 동네긴 하지만, 그래도 연속 챔피언이면 훌륭한 편이겠죠?”

로벨은 버드나세를 받아 길이와 무게를 가늠했다. 익숙한 사이즈였다.

“난 8번 연속 챔피언이야.”

빠아암-! 빰-!

나팔이 불고, 깃발이 아래로 떨어졌다. 로벨은 버드나세를 수평으로 내렸다. 속 빈 창은 가벼웠다. 창받침에 걸지 않고 팔심으로 창끝을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번이 9번째가 될 거야. 히럇!”

모닝스타가 신나서 뛰쳐나갔다. 기름칠한 쇠 냄새와 환호하는 관객이 전투마의 심장을 뛰게 했다. 주인보다 사납게 울부짖었다. 네 발이 땅을 스칠 때마다 속도가 2배로 올라갔다.

“뭐 저런...!”

출신이 안 좋아서, 혹은 외진 땅이라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을 뿐, 스스로 왕국 최강이라 자부한 모 기사는 눈 깜짝할 사이 거리를 좁히는 그랜드 챔피언에 적잖이 당황했다.

“전투마는 최상품이군! 하지만 창 솜씨는...”

여기까지가 볼메른 경이 기억하는 마상시합이었다.

로벨은 상체를 살짝 숙여 볼메른 경의 랜스를 어깨로 빗겨내고 자신의 랜스를 고짓 플레이트에 꽂아 넣었다. 초(秒)를 여러 개로 쪼개야 할 찰나의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볼메른 경은 자신이 뭐에 맞았는지 인지조차 못하고 낙마했다. 우다탕탕- 땡그랑- 갑옷으로 꽁꽁 싸맸으니 죽지야 않겠지만, 집에 돌아가는 날까지 고생 좀 할 것이다.

우와아아아아아-!

첫 시합과 다른 함성이 터져 나왔다. 결과는 비슷하지만 과정이 달랐다. 전광석화 같이 달려가 일격에 상대를 꼬꾸라트린 미남 기사는 관객을 흥분시키기 충분했다. 로벨은 부러진 랜스를 버리고 파나케아 투구를 벗었다.

“좋은 시합이었소.”

눈알이 뒤집히고 혓바닥이 2인치쯤 흘러나온 게 알아들을 것 같지 않지만, 그래도 예의를 갖춰 위로했다.

데이브 국왕은 자리에서 일어나 ‘과연!’을 연발했다. 볼탄 반도 출신 기사들은 ‘봤냐? 봤어? 우리는 저런 인간이랑 10년째 겨루고 있다고’ 의미의 이상한 자부심을 표출했다. 그중에서 가장 기뻐하는 것은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었다.

“역시 우리 영주님! 수고하셨어요!”

“첫판에 끝낼 줄은 몰랐습니다. 대단합니다.”

로벨은 땀 한 방울 묻지 않은 파나케아 투구를 건네주고 컨틀렛을 벗었다. 1차전이 금방 끝나 2차전까지 시간이 많이 남았다.

“이제 구경 좀 할까?”

@

세 번째 시합부터는 조금 느슨해졌다.

고향에서 챔피언을 한 번씩 했던 기사들이라 실력이 기본은 넘었다. 세 번의 돌격으로 승부가 나지 않아 도보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칼싸움을 빙자한 레슬링은 그리 인기가 좋지 않았다. 피라도 좀 뿌리면 모를까, 죄다 토너먼트용 갑옷을 입어서 쇳소리만 무성했다.

“역시 창을 늘려야 해.”

로벨은 그랜드 토너먼트 규칙에 불만을 표시했다. 말에서 내리면 마상시합이 아니었다.

“버드나세 가격이 만만치 않아요. 가난한 기사들은 창 살 돈이 없어서 참가 못 할 걸요.”

“주최자가 창을 빌려줘야지.”

“...혹시나 로드릭 토너먼트에서 그럴 생각이면 저를 잡아먹고 하세요.”

아무튼, 로벨 기준에서 심심한 편이었다. 호른 경이 출정했을 때만 잠깐 관심을 기울이고, 그 외에는 가문과 출신도 듣지 않았다. 로벨의 무관심을 눈치 챘는지 주최 측에서 한 사람이 다가왔다.

“공작에게는 그랜드 토너먼트도 별 볼 일 없는가 보오?”

“자비에 후작...?”

어린 집사가 깜짝 놀라 일어났다. 로벨을 경호하는 흉내쟁이와 과묵한 몬트가 쇠망치를 움켜쥐었다. 하지만 거기서 멈췄다. 기사와 귀부인, 그리고 포클랜드 시민이 모인 자리였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로벨은 눈동자만 살짝 굴려 쳐다보았다.

“진정한 강자들을 알기 때문이오.”

“여러 챔피언조차 상대가 안 될 강자라... 그게 누구요?”

“에르나 왕국의 그렉 페럿 경, 잉그비아 왕국의 흑태자 에드워드, 사트로 가문의 볼프 사트로 후작, 동방의 더스틴 폴라 경, 슐츠 가문의 고르크 슐츠 경...”

로벨은 강자들을 이름을 나열하다가 어쩐지 익숙한 느낌을 받았다. 둠 노릭스 후작이 알려준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공작의 벗이 아니오?”

“벗이었던 사람도 있지.”

로벨은 고인이 된 그렉 페럿 경을 떠올리고 우울해 했다. 자비에 후작은 분위기가 어색해지자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영웅은 영웅을 알아보고, 강자는 강자를 알아보는 법이라지. 공작이 인정한 기사들이면 실력은 의심할 것 없겠소.”

“그야 물론이오.”

로벨이 다시 기운차게 답했다. 이쪽으로는 참 단순한 인사였다.

“그럼 공작이 볼 때 저자는 어떻소?”

여섯 번째 시합이 끝나고, 일곱 번째 기사가 출정을 준비했다. 시합장 바닥에 너부러진 창 조각과 갑옷 파편을 치우느라 잠깐 지체되었다. 덕분에 양쪽 기사를 모두 눈여겨볼 수 있었다.

청코너는 안면이 있는 기사였다. 포클랜드 출신으로 지난 그랜드 토너먼트에서 겨룬 적 있었다. 역사가 스포일러라 당연히 로벨이 승리했는데, 그래도 기억에 남은 것을 보면 실력이 괜찮았던 모양이다.

“그쪽이 아니오.”

로벨은 홍코너로 시선을 돌렸다. 구식이 된 그레이트 헬름을 쓴 기사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시합 전에는 바이저를 올리거나 헬름을 벗어 얼굴을 보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꼭 그래야 한다는 규칙은 없지만,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주된 이유가 명예와 명성이니 얼굴을 비출 수 있으면 잠깐이라도 비추는 것이 좋았다.

“저자가 누구요?”

“불타는 산에서 온 기사요.”

로벨은 낯선 지명 탓에 놀라지 못했다. 이름을 보면 화산이 있는 동네 같은데, 포비아 왕국에는 화산이 없었다. 어린 집사가 로벨을 대신해 소리쳤다.

“불타는 산이요? 거긴 외해 식민지잖아요?”

“식민지? 야만의 땅이야?”

인어의 바다를 벗어나 남쪽으로 내려가면 끝이 없는 해안선이 이어지는데, 이곳을 야만의 땅이라 불렀다.

에르나 왕국과 잉그비아 왕국은 일찍부터 야만의 땅으로 진출하여 식민지를 개척했지만, 인어해 깊숙한 곳에 자리한 포비아 왕국은 지금껏 외해 개척에 관심이 없었다. 그나마 최근 열대작물에 관심 많은 귀족과 부르주아가 나서서 왕명으로 섬 하나를 사들였는데, 그곳이 ‘불타는 산’이었다.

“우리나라의 유일한 식민지죠. 설마 원주민인가요?”

“그럴 리가 있나. 혼혈이다.”

“...혼혈이라도 충격인데요? 기사 작위를 누가 내려준 건가요?”

자비에 후작은 빙그레 웃었다. 지금 표정만 보면 고상하고 자상한 귀족 영감이었다. 하지만 속내를 알 수 없었다. 어린 집사는 조심스럽게 추리했다.

“설마... 후작님이신가요?”

그때 일곱 번째 시합이 시작되었다. 어둡고 뜨거운 야만의 땅 기사가 창을 치켜들었다. 덩치는 훨씬 작지만, 왠지 모르게 버그베어가 생각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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