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8화 (378/605)

378화. 위기

포클랜드 시티가 다시 한 번 뒤집혔다.

수차례 보낸 경고에도 로벨 로드릭 군은 멈추지 않았다. 전령이 애걸복걸하자 답신이라 보낸 것이 ‘거, 뭔소리인지 모르겠고, 배고프니까 먹을 거나 준비해라’ 수준이었다.

자신이 지혜롭다 자부하는 포클랜드 귀족과 부르주아는 ‘먹을 거’를 심도 있게 분석했다. 수도의 권력을 암시한다. 볼탄 반도의 주인이 왜? 이것은 재화와 권리다. 아니다. 그랜드 토너먼트에 어울리지 않는다. 챔피언의 명예일 것이다. 자비에 후작이 한숨처럼 말했다.

“빵과 고기를 준비해라.”

“...예?”

“에르나 왕국인과 어울리다 보니 감을 많이 잃었군. 기사가 어떤 자들인지 모르나?”

놀랍게도 정답이었다. 로벨 로드릭 군은 푸짐하게 차려진 식사에 대단히 만족하는데, 그것은 좀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포클랜드 시티 거리를 뒤흔드는 열병식이 화제였다.

그랜드 챔피언이자 ‘무적무패’란 이명으로 명성을 떨치는 영웅의 등장이었다.

“로벨 로드릭! 로벨 로드릭!”

“그랜드 챔피언! 그랜드 챔피언!”

지난 밤 광을 한껏 낸 풀 플레이트 아머 기사가 가문의 깃발을 앞세우고 행진하고, 크고 흉측한 무기를 어깨에 걸친 울프 용병단이 고개를 빳빳이 들고 폼을 잡으며, 난생 처음 도시에서 환대를 받아 정신을 반쯤 놓은 농민병이 왁자지껄 떠들며 뒤따랐다. 1천 명은 절묘한 숫자였다. 경외감을 주면서 식상해지지 않는 열병식이었다.

“전쟁에서 이기고 돌아온 군대 같군.”

“정쟁(政爭)도 전쟁이니 승리한 것이 맞지.”

명예로운 기사 로벨 로드릭이 이렇게 막무가내로 나올지 몰랐다. 덕분에 포클랜드 귀족원의 권위는 더욱 바닥 쳤다. 지방 영주들은 물론이고. 도시의 부르주아까지 로벨의 눈치를 보았다. 포비아 왕국의 실세가 누군지 느낀 것이다.

로벨은 2층과 3층에서 환호하는 포클랜드 시민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당나귀를 탄 어린 집사에게 속삭였다.

“여기까진 성공이지?”

“제 생각대로 말이죠. 험.”

“그래. 집사 생각대로야. 훌륭해.”

로벨은 친구의 기를 살려준 후 은근히 물었다.

“이제 어떡할까?”

“그야 당연히 왕성으로 가야죠.”

기사가 영지를 지날 때는 영주를 찾아가 인사하는 것이 예의였다. 그것은 국왕이라고 예외가 아니었다. 로벨 정도 되면 수도에 올 때마다 국왕을 알현해야 했다. 더욱이 지금은 초대를 받고 왔다.

“전부 들어가긴 힘들겠지?”

로벨은 시가지를 가득 메운 병사를 보고 난색을 표했다. 어린 집사가 말해 무엇하냐고 타박했다.

“기사들만 데리고 가세요. 여기는 펄프 대장이랑 애꾸눈한테 맡기고요. 그걸로 충분할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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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은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상징적으로나 의미가 작지 않은 샘 포클 왕성 앞에서 잠시 복장을 살폈다.

긴 여정으로 지저분하지만 화사한 외모 탓에 멋으로 느껴지는 꼬랑지 머리. 어린 집사가 침을 발라 빡빡 닦은 최첨단 필드 아머. 뱀 가죽 특유의 광택이 흐르는 망토와 망토 자락을 살짝 비집고 나온 길고 짧은 두 자루 명검. 딱히 흠잡을 곳이 없었다.

“성문을 열어라. 포클랜드 후작이자 볼탄 반도 공작이신 로벨 로드릭이 폐하를 뵙고자 한다.”

로벨을 기사 종자를 대신해 신원을 밝히는 호른 경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하지만 왕성 수비대장은 조금도 고맙지 않았다.

로벨 로드릭 공작 뒤로 우글우글 모인 기사들이 끔찍했다. 갑옷 무게만 2천 5백 파운드가 넘는 중무장 집단이었다. 성 안에서 난동을 피우면 아무도 막지 못할 것이다.

“이곳은, 이곳은 국왕 폐하가 계신 곳입니다. 사사로이 무기를 지참할 수...”

“기사의 무기를 뺏겠다고?”

그렇다. 이들은 전부 기사였다. 무기를 내놓으라 하면 버럭버럭 화내며 목을 칠 것이다.

‘무기도 무기 나름이지! 지금 꼴이 알현하러 온 꼴이냐!’

샘 포클의 나라가 기사의 나라라고 하지만 기사 50명이 완전무장하고 알현을 요청하는 일은 없었다. 반란이 일어났을 때나 볼 수 있을까?

로벨은 속으로 욕하는 왕성 수비대장과 대놓고 욕하는 기사들 사이를 중재했다.

“우리는 토너먼트에 참가하러 온 거야. 다른 뜻은 없어. 내 칼과 내 가문의 이름으로 맹세해.”

로벨이 한 마디 한 마디 힘주어 말하자 수비대장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애초에 100명도 안 되는 왕성 수비대로 막을 상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공작님의 명예를 믿겠습니다.”

로벨은 흉갑을 두드려서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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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클랜드의 문무백관이 모이는 샘 포클의 홀에 볼탄 반도 기사가 가득 찼다. 왕위계승전쟁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용감한 시종들이 무기 비슷한 것을 챙겨서 슬금슬금 모였지만, 저 북쪽의 야만인부터 저 남쪽의 이교도까지 두루두루 박살낸 볼탄 반도 기사들은 코웃음도 치지 않았다.

로벨은 기사들을 대표해 왕좌로 다가갔다. 어느덧 20대 중반이 된 국왕은 변방의 공작을 복잡하게 내려다보았다. ‘지난날의 벗인가, 아니면 욕망에 사로잡힌 새로운 역도인가?’ 로벨은 몸짓으로 대답했다.

“국왕 폐하 만세. 강건하신 모습을 뵈니 실로 안심이 됩니다.”

로벨은 한쪽 무릎을 꿇고 국왕의 반지에 키스했다. 변함없는 충성의 표시였다.

주군이 무릎 꿇으니 호른 경 이하 볼탄 반도 기사들도 차례로 무릎을 꿇었다. 기사는 공작에게, 공작은 국왕에게 충성하니, 정말 안심이 되는 광경이었다.

국왕은 험상궂은 기사들이 머리를 조아리자 비로소 안심되는 듯 한숨을 쉬었다.

“공작도 건강해 보이니 다행이오. 아, 경들도 반갑소이다.”

호른 경이 머리를 살짝 더 숙였다. 로벨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 싶을 만큼 예의를 표시한 후 몸을 일으켰다. 역시나 로벨이 일어나니 기사들도 따라 일어났다. 시종장의 낯빛이 조금 어두워졌다. 가장 충성스러운 기사만 골라 데려왔겠지만, 그렇다 해도 로드릭 가문의 볼탄 반도 지배력이 대단했다.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하러 온 것이오?”

“이전 챔피언이 참가하는 것은 관례지 않습니까.”

“그야 그렇지만... 워낙 바쁘니 못 올 줄 알았소.”

로벨은 입꼬리를 억지로 올려 웃었다. 희고 뾰족한 송곳니가 진짜 늑대 같았다.

“아무리 바빠도 폐하의 부름인데 응당 달려와야지 않습니까.”

그 말은 국왕을 기쁘게 했다. 적장자가 아닌 국왕이 강력한 왕권을 누리는 것은 하얀 숲, 검은 숲, 볼탄 반도 등의 제후가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이다. 지금 로벨의 말은 호시탐탐 왕의 권력을 넘보는 포클랜드 귀족들을 닥치게 하기 충분했다.

“시합 당일까지 왕성에 지내도록 하시오. 공작의 기사들도 함께 머물러도 좋소. 최대한 편의를 봐주리라.”

로벨은 잠시 갈등하다가 고개를 숙였다.

“국왕 폐하 만세. 변함없는 호의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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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성에서 지내란 말이 성 안에 갇혀 있으라는 말은 아니었다. 로벨은 알현이 끝나자마자 기사들을 이끌고 시내로 나왔다.

국왕은 궁중연회에 참석하라고 은근히 졸랐지만 피로를 핑계로 슬그머니 거절했다. 고향에서 데려온 식솔이 1천 명이라 챙길 것이 많았다.

“병력을 분산할 수 없으니 도시 밖에 숙영지를 세우시지요.”

“그래도 일부는 시내에 남겨야 해요. 그래야 유사시를 대비하죠.”

“울프 용병단 북군 3개 소대를 시내에 나눠 배치하고, 기타 남군을 부두에 있는 백상아리 호로 보내겠습니다.”

보급은 수송선으로 해결되지만, 숙영지가 문제였다. ‘잠재적인 적’이 아니더라도, 혈기왕성한 병사들이 사고 치지 못하게 병력을 뭉쳐놔야 했다. 펄프 대장 외 각 군 지휘관이 고심하고 고심하는데, 의외의 해결책이 나왔다.

“도시 동쪽 요새를 비워두었소.”

“자비에 후작?”

하필 ‘잠재적인 적’이 제시한 해결책이었다. 로벨은 아론다이트 손잡이를 살며시 쥐었다.

“이상한 오해 마시오. 통제 불능의 무장집단이 도시 안팎을 휘젓고 다니는 게 싫은 것이니. 요새에 가만히 뒀다가 축제가 끝나면 돌려보내시오.”

로벨 일행은 서로를 보았다. 의도야 어떻든 거점이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만에 하나 군사적 마찰이 생겨도 요새를 끼고 있으면 버틸 수 있었다.

‘반대로 고립될 수도 있지.’

로벨은 군사적인 가능성을 검토한 후 유보했다.

“자비에 후작, 본인에게 할 말이 있소?”

“글쎄... 무운을 빈다는 것 말고 없는 것 같군.”

“무운?”

“그랜드 토너먼트에 출정한다 하지 않았소. 시합에 나온 모든 기사가 공작의 낙마를 바랄 테니 어찌 무운이 필요하지 않겠소.”

로벨의 눈꼬리가 살짝 내려갔다. 반대로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의 눈꼬리는 바짝 올라갔다.

‘이자가 아닌가?’

확신이 흔들렸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으니 오래 의심할 수 없었다.

“호의를 기쁘게 받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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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벨 로드릭 군은 포클랜드 시티 요새에 군장을 풀었다. 처음 온 곳이라 부대배치, 물자배치, 초소확인, 경계근무 편성 등을 처리해야 했다. 물론, 펄프 대장과 애꾸눈이 할 일이었다.

로벨은 개인장비를 점검하는데 시간을 투자했다. 이번 원정의 목적은 어디까지 그랜드 토너먼트였다. 포클랜드 시민을 놀라게 한 1천 명의 병사는 사실 응원단이었다.

“잘 쳐주면 호위병이죠.”

“그게 좀 더 낫네.”

로벨은 북적거리는 호위병이 시끄러워 창문을 닫았다. 누가 요새 아니랄까 봐 창도 작고 두꺼웠다.

“...아닌 것 같지?”

옹알이할 때부터 함께 지내온 어린 집사는 두서가 없어도 잘만 알아들었다.

“그거 다 연기에요. 영주님을 방심시키려는 거죠.”

“그럼 요새를 왜 빌려줘?”

로벨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도 수비대장이 쓰는 집무실이었다. 깨끗이 청소된 벽난로 좌우에 마른 장작이 층층이 쌓여있고, 오동나무로 만든 원탁에 포클랜드 시티의 시가지 지도가 고정되어 있으며, 홀아비 냄새가 좀 나는 간이침대도 있었다. 이만하면 왕성 못지않은 최고의 숙소였다.

“전면전을 치를 생각은 없다는 거겠죠. 영주님을 대놓고 핍박하면 다른 제후들이 가만있지 않을 테니까요.”

“그런가?”

로벨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흉갑의 가죽고리를 망치로 두드렸다.

크게 나눠도 21개 파츠, 세세하게 나누면 세 자릿수 부속에 이르는 풀 플레이트 아머는 정비 과정도 복잡했다. 게다가 마상시합용 랜스도 스무 자루쯤 준비해야 했다. 전부 사비로 장만해야 했으니 토너먼트는 아무나 나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토너먼트가 열리면 대장장이와 사채업자가 몰려드는 것은 당연했다.

“옛날 생각나지 않아?”

“언제 적 옛날이요?”

“너랑 나랑 토너먼트 찾아다니던 옛날 말이야.”

어린 집사는 뽀드득- 뽀드득- 소리 내며 닦던 그리브를 내려놓고 한숨 쉬었다.

“추억이라면 추억이지만,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는 않네요.”

“그건 그래. 시합이 없으면 끼니를 걱정해야 했으니까.”

감회에 젖었다가 현실로 돌아왔다.

“그래도 그때는 경기에만 집중할 수 있었어. 지금은 신경 써야 할 게 너무 많아.”

어린 집사가 정색하고 말했다.

“자비에 후작이 아니더라도 영주님을 노리는 자들이 있어요. 절대 혼자 다니지 말고 기사들, 기사가 안 되면 용병들을 데리고 다니세요. 최소한 5명은 대동하세요.”

“응.”

“가장 위험한 것은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포클랜드 기사들이에요. 합법적으로 창질하니까요. 마상시합에서 죽어 나가는 기사가 한둘이 아니잖아요?”

“한두 명 맞는데...”

어린 집사는 수학 천재의 반박을 무시했다.

“이곳은 적진이에요. 무슨 수작을 부릴지 몰라요. 아무쪼록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해요.”

어린 집사의 걱정은 기우에 그치지 않았다. 위기는 다각도로 찾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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