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7화. 무식
그랜드 토너먼트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왕국 곳곳에 전해졌다. 기사와 기사 종자뿐만 아니라 자유민까지 크게 들떠 소란을 피웠다. 그도 그럴 것이 근 7년 만의 그랜드 토너먼트였다.
세간의 관심은 전전 대회에 그랜드 마스터가 되어 13년 동안 자리를 지켜온 로벨 로드릭 공작에게 집중되었다. 사실 13년이라 해도 전쟁과 반란 탓에 제대로 토너먼트가 개최되지 않았으니 무위도식한 감이 있었다.
“아직 한창때지 않소? 그 실력이 어디 가지 않았을 거요.”
“그것은 모르는 일이지. 이변은 예기치 못하니 이변인 법이니.”
“어허. 공작이 싸우는 것을 한 번이라도 봤으면 그딴 소리 못하네.”
그렇기에 로벨 로드릭 공작이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것은 기정사실로 여기며, 우승하느냐 못하느냐에 관심을 두었다.
“으으으... 경들도 그렇게 생각하고 오신 거예요?”
어린 집사의 물음에 소위 ‘로드릭 가문 기사’라 불리는 호른 경, 켈트 경, 바이란 경, 매튜 경, 랭스터 경 등이 헛기침했다. 누구 말마따나 머리에 말똥이 가득해서 아무 생각이 없었다.
“포클랜드에서 암살자를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포클랜드에 가자고 신나서 놀러 와요? 정말 생각이 없어요?”
“거, 일개 집사 주제 말이 너무 심하...”
“일개 집사도 이리 걱정하는데! 옛 신과 가문의 이름으로 충성맹세한 기사들이 하하호호히히헤헤 웃으며 주인을 사지로 몰아요?”
기사의 꽉 막힌 언변 수준으로 어린 집사를 이기기란 불가능했다. 딴청을 피우며 못 들은 척하는 게 최선이었다. 보다 못해 로벨이 구원의 손길을 내밀었다.
“펄프 대장이 말했잖아. 내가 안 가는 것도 이상해.”
“아프다, 바쁘다, 귀찮다, 깜박했다! 핑계거리야 많죠!”
“그건 그것대로 의심할 거 같은데?”
어린 집사는 혼자 쉬익- 쉬익- 거리다가 결국 포기했다. 저 못난 기사들이 북치고 나팔 불며 볼탄 반도를 가로질러온 탓에 이제 아프다, 바쁘다, 까먹었다를 할 수 없었다. 지금부터라도 철저히 준비해서 로벨의 안전을 챙기는 것이 옳았다.
“기왕 오해할 거! 아주 작정하고 오해시키죠!”
“으응? 뭔가 불안한데?”
“영주님은 가만히 계세요. 이참에 포클랜드 늙은이들 콧대를 눌러놓을 거니까!”
볼탄 반도 출신이란 것에 자부심이 강한 조단 랭스터 경이 기립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호응이 없어서 오래 하지는 않았다.
“기사님들도 오신 김에 좀 도와주세요. 영주님의, 아니, 볼탄 반도의 명예가 걸렸으니까요.”
기사 앞에서 명예를 운운하면 발을 뺄 수 없는 법이다. 두고두고 회자될 볼탄 반도 퍼레이드가 기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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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겨울에 폭풍성에서 올라온 조단 랭스터 경도 대단한데, 더 대단한 기사들이 있었다. 까마귀 성의 존 도너반 자작과 가시나무 숲의 머를 브릭 자작이 각각 스무 명의 수행원을 이끌고 찾아왔다.
두 자작은 멀고 험한 검은 숲에서 왔다는 것 외에 공통점이 없었다. 존 도너반 자작은 이 기회에 볼탄 반도 세력과 유대를 다지기 위해서였고, 머를 브릭 자작은 순수하게 로벨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각자의 이유가 얼굴에 잘 드러났다.
“으하핫! 이런 행사에 로드릭 가문 ‘제1기사!’ 머를 브릭이 빠져서 안 되지요! 영광의 순간까지 함께하겠습니다!”
브릭 자작의 자칭에 호른 경-가장 가까이서 보필한다-, 랭스터 경-가장 세력이 크다-, 켈트 경-가장 공적이 많다- 등이 얼굴을 찌푸렸다. 가장 먼저 충성맹세한 것은 맞지만, 그것이 ‘제1기사’라 칭할 근거는 아니었다.
“브릭 자작은 검은 숲 기사로 참가해야지 않소? 볼탄 반도까지 무슨 일이오?”
“그것도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할 실력이 된다면 말이겠지.”
“어허어, 너무 그러지 마시오. 검은 숲 수준에서는 자작도 출전할 수 있을 테니.”
텃새가 비아냥으로 흘러나왔다. 브릭 자작이 화를 내기 전 존 도너반 자작이 말했다.
“우리는 로드릭 가문에 충성한 기사요.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왔으니 부디 명예를 존중해주시오.”
예의바르나 날카로운 말이었다. 계속 비웃으면 로벨의 가문까지 비웃는 꼴이 되니 입을 다물었다.
‘도너반 자작이 후계로 삼은 이유가 있네.’
어린 집사는 어색한 공기를 기회 삼아 대화에 끼어들었다.
“엿새 뒤에 출발할 거예요. 포스트 포레스트 요새를 경유해서 육로로 가되, 백상아리 호를 바닷길로 보내 두 번 보급할 거예요.”
어린 집사의 브리핑에 전후 사정을 모르는 브릭 자작이 끼어들었다.
“뱃길을 이용할 거면 바로 포클랜드 시티로 가면 되잖아? 그편이 빠를 텐데?”
그리 물을 줄 알았기에 바로 대답했다.
“북서풍이 부는 계절이라 먼 바다로 못 나가요. 배를 타도 해안을 따라가야 하는데, 해적과 암초 때문에 위험하죠. 시합에 나갈 전투마가 스트레스도 많이 받고요.”
“아, 그런가?”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여정’ 자체에요.”
미리 귀띔을 받은 기사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아는 척했다. 브릭 자작은 의아해서 함께 온 기사들을 보았으나 존 도너반 자작은 이채를 띄웠다.
“경고로군.”
대사를 뺏긴 어린 집사가 깜짝 놀랐다. 존 도너반 자작이 의자에 등을 붙이고 마저 말했다.
“시위라고 해야 하나? 군대만 보내면 침략, 침입, 협박, 반란 따위가 되지만, 시합에 참가할 기사와 함께 보내면 경사스러운 퍼레이드가 되지. 몇 명이나 딸려 보낼 생각인가?”
“와... 기사 맞으세요?”
어린 집사 딴에는 칭찬이지만 존 도너반 자작은 불쾌한 듯 인상을 꾸겼다. 지혜로운 것보다 용감한 것이 대접받는 기사의 시대였다. 어린 집사는 아차! 해서 말을 이었다.
“기왕 할 거면 제대로 해야 한다는 게 제 생각... 아니! 우리 영주님의 생각이에요.”
존 도너반 자작은 한 손으로 턱을 괴었다.
“이곳에 모인 기사들의 수행원만 100명이지. 그렇다면 늑대성의 병사까지 200명, 아니면 300명인가?”
“아뇨. 아니에요.”
어린 집사가 싱글벙글 웃었다.
“그랜드 토너먼트는 왕국 최고의 축제잖아요? 구경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아주 많아요.”
“그게 무슨... 건방지게 굴지 말고 말하라. 몇 명이나 가지?”
존 도너반 자작이 짜증스럽게 물었다. 어린 집사는 기사들을 향해 상체를 내밀고 나직이 속삭였다.
“1천 명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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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랜드 토너먼트’란 카드를 뒤집어놓고 볼탄 반도의 반응을 관찰하던 포클랜드의 오래된 가문들은 스무날이 지나지 않아 뒤집어졌다.
“며, 몇 명이라고?”
“가문의 깃발이 어림잡아 50개! 확인된 병사수가 1천 명이 넘습니다.”
견제 좀 하려고 잽을 날렸더니, 전신갑주를 입고 칼을 빼 든 채 쫓아오는 기분이었다.
“그게 무슨 수행원인가! 전쟁이지! 로벨 로드릭 공작! 이자가 미친 건가!”
기사만 최소 50명. 잘 훈련된 용병과 겨울벌이를 생각하는 징집병이 1천 명이면 전쟁 나온 군대였다. 포클랜드 북동쪽에 자리한 영주들은 허겁지겁 성문을 닫고 영지민을 무장시켰다. 이성적인 영주들은 ‘설마?’, ‘에이, 설마?’하면서 시종을 보내 의도를 캐물었지만, 겁이 많은 영주들은 로벨이 뭐라 하기도 전에 백기부터 내걸었다. 얼떨결에 성을 몇 채 더 가지게 되었지만 뒤탈이 날 게 뻔하니 정중히 반납했다.
“후후후... 이런 반응을 원했어요.”
“그렇게 웃지 마. 악당 같잖아.”
로벨은 포스트 포레스트의 드넓은 평야를 가로지르는 1천 명의 군대를 보았다. 로드릭 깃발을 비롯한 수십 개의 가문 깃발이 펄럭이고, 정오 햇살에 반짝반짝 빛이 나는 기사들이 갓길로 말을 몰며, 창을 높이 세운 용병과 농민병이 줄지어 행군했다. 위풍당당했다. 싸워서 진 적이 없는 로벨 로드릭 공작의 군대였다.
“지금은 싸우러 가는 것이 아니지만...”
그래서 더 기운찼다. 로벨이 무적이라고 병사들까지 무적은 아니니까.
“수당을 주기로 했으니까 좋겠죠. 싸우지 않고 페닝을 벌잖아요?”
“음... 비싸지 않아?”
“당연히 비싸죠! 입이 몇 갠대요? 그러니까 토너먼트에서 꼭 우승하세요. 상금으로 손실을 메워야 해요.”
“아, 그런 거구나...”
로벨 로드릭 군은 단순히 위세를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포클랜드의 거만한 귀족에게, 특히 자비에 후작에게 보내는 경고였다.
‘싸우기도 전에 항복하는 포클랜드 영주가 이렇게 많은데, 정말 자신 있어?’
지금쯤이면 포클랜드 시티에 경고가 전해졌을 것이다. 샘 포클의 정통성에 대한 도전이라 외치는 기사도 있을 테고, 과격하게 반역이라 부르짖는 기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주류는 소심하고 소극적인 노(老) 대신들일 것이다. 그랜드 챔피언이 조금 과한 퍼레이드를 했을 뿐이니, 점잖게 타이르고 환대하자는 의견이 대세였다.
어린 집사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다시 히쭉히쭉 웃었다. 송충이 응가를 씹은 얼굴의 자비에 후작이 그려졌다. 허나, 여러 번 거론됐듯 어린 집사의 정치적 수완은 그리 좋지 않았다. 포클랜드의 노회한 정치꾼에 비하면 한참 모자랐다.
어린 집사는 전령이 숨넘어가기 직전에 가져온 명령서를 가만히 읽었다. 포클랜드 최고의 달필가가 받아쓴 듯 길고 장엄했다. 빼곡한 글자가 한 팔 길이 종이를 가득 채웠는데, 요약하면 아래와 같았다.
“공작의 퍼포먼스는 감명 깊게 보았으나, 1천 명이나 되는 병사를 먹이고 재울 공간이 없으니 수도에 주둔시킬 수 없다?”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기사들만 오라는 명령이었다. 어린 집사 얼굴에 낭패가 떠올랐다.
“이건 예상 못했는데...”
어린 집사에게 강철 같은 시선이 쏟아졌다.
“똑똑한 척은 혼자 다하더니...”
“늑대성의 귀재도 별것 없군?”
“주군! 저 친구를 혼낼 거면 제게 맡기시지요!”
기사들은 어린 집사에게 쌓인 게 많은 듯했다. 어린 집사는 당황해서 변명했다.
“잠깐! 잠깐 기다려 보세요! 방법이 있으니까! 에... 음...”
어린 집사는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고민했다. 이제 와서 군대를 돌릴 수도 없고, 기사들만 보낼 수도 없었다.
로벨은 탈모 위기의 소꿉친구를 위해 포클랜드 귀족원이 보낸 명령서를 직접 확인했다. 그리고 속 시원하게 결론지었다.
“무시하자.”
어린 집사와 어린 집사를 구박하던 기사들이 일제히 로벨을 돌아보았다.
“...무시해요?”
“응. 그냥 무시하고 가자.”
소극적인 단어인데 과격하게 들렸다.
“국왕 폐하 명령인데요?”
“국왕 폐하 아니야. 포클랜드 귀족원이야.”
“어? 그래요?”
기사들이 명령서를 차례로 돌려보았다. 화려한 미사여구에 샘 포클과 샘 포클 왕성은 거론되었으나 데이브 국왕의 이름은 나오지 않았다. 서기관이 실수로 빠트렸을 수도 있지만, 없는 것은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왕명이라 해도 상관없어. 내용이 너무 어려워서 이해가 안 되잖아?”
참으로 기사다운 발언이었다. 글자를 모르는 것이 도리어 자랑인 기사들이 뱀처럼 웃었다.
“퍼레이드 잘 봤다는 내용인데 이해 못 할 게 있습니까?”
“어라? 빨리 오라고 재촉하는 내용이 아니었나?”
“1,000명은 못 재우지만, 999명은 재울 수 있다는군.”
“오호라! 그런 뜻이었군!”
지혜를 이기는 것은 더 큰 지혜가 아니라 무식함이었다. 대개 그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