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6화 (376/605)

376화. 용서

암살기도가 일어난 지 보름이 지났다.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은 괘씸한 자비에 후작을 응징하기 위해 백방으로 손을 썼지만 성과가 없었다. 포클랜드에 정치기반이 없을뿐더러 후작이 암살을 지시한 물증이 없었다.

“이러쿵저러쿵해도 늙은 여우예요. 빈틈이 보이지 않네요.”

자비에 후작은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입지가 탄탄했다. 유일하게 부족한 것은 왕위계승전쟁 이후 박탈당한 군사권한인데, 국왕 폐하를 지척에서 모시고 있으니 군사적으로 압박할 수도 없었다. 포클랜드에 군대를 보냈다가는 난리가 날 것이다.

“우리가 저쪽에 영향력이 없는 만큼, 저쪽도 우리한테 영향력이 없어요. 그러니까 암살 같은 저급한 수를 썼겠죠. 에에잇! 우리도 암살자를 보낼까요? 애꾸눈이면 100야드 밖에서 눈알을 맞힐 거예요!”

“그리고 애꾸눈 몸뚱이에 100개의 칼이 박히겠지. 안 돼.”

울프 용병단 북군을 훈련시키던 애꾸눈이 돌연 재채기했다. 감기에 걸리기 쉬운 계절이었다.

로벨은 창문을 올리고 받침대를 괴였다. 겨울바람이 성을 내며 들이닥쳤다. 벽난로의 빨간 일꾼이 몸부림쳤지만 무시했다. 이 성의 주인은 찬 공기가 필요했다.

“도트넘 백작은?”

“사흘 전에 버팅거 시티로 갔어요.”

도반 도트넘 백작은 소수의 기사를 데리고 볼탄 남쪽으로 내려갔다. 처음부터 볼 일은 남쪽에 있었던 모양이다. 늑대성 신년행사에 참석한 것은 지나가는 길에 겸사겸사 들린 것뿐이었다.

“그곳에 무슨 볼일일까?”

“그러게 사람을 붙이자니까요.”

“이미 붙어 있잖아.”

로벨은 손가락을 구부려 활 모양을 만들었다. 더스틴 폴라 경이 강철성 백작을 쫓고 있었다.

“강철성은 폴라 경이 견제하니 일단 지켜보고, 포클랜드는 암살에 실패했으니 한동안 몸을 사리겠지. 음. 봄이 올 때까지는 아무 일 없을 거야.”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봄이 찾아들려면 아직 멀었다. 따뜻한 남풍이 불어와 눈이 녹고 강이 흐르면 세상은 또다시 숨 가쁘게 흘러갈 것이다. 그때는 비밀 많은 기사도 쉬지 못할 것이다.

로벨은 짧은 휴가를 마음껏 즐기기로 했다.

@

로드릭 시티 북쪽 숲에서 흘러온 개울물은 도시를 둘러싼 해자를 가득 채우고 살며시 넘쳐 남쪽 평야로 내려갔다. 수량이 풍부하지는 않지만, 성 밖 농민들의 식수가 되고, 용수가 되고, 놀이터가 되었다.

“우와! 우와! 우와앗!”

“간다! 간다! 간다!”

얼음이 녹지 않은 시리디시린 강가에 아이들이 몰려다녔다. 돌을 던져 물고기를 기절시키고, 땅을 뒤집어 겨울잠 자는 개구리를 납치했다. 솜씨 좋은 꼬마는 양손 가득히 사냥감을 쥐었고, 운이 나쁜 꼬마는 빈손에 콧물만 묻혔다. 오늘의 수확은 어른이 모르는-모른 척해주는-비밀기지에서 바짝 구워져 일용할 간식이 될 것이다.

성 안 포목점 장남도, 동구 밖 농부의 외동딸도 희희낙락하는데, 한 꼬맹이만 시무룩했다. 여관집 막내아들 티미였다.

“왜 그래? 개구리 못 잡아서 그래?”

“에이! 신경 쓰지 마! 넌 아직 어리니까 괜찮아.”

대여섯 살 많은 친구들이 꼬마 티미를 위로했다. 본래는 쌍둥이 누이가 할 일이지만, 여관일이 바빠서 놀러 나오지 못했다.

“그게 아니고... 혼자 먹으니까...”

아무래도 그 쌍둥이한테 미안한 모양이다. 포목점 장남이 무모한 발언을 했다.

“나, 남겨서 가져다줄까?”

못 미더운 시선이 쏟아졌다. 이 잔혹한 시대에 누가 먹을 것을 양보할까. 더욱이 그것은 규칙 위반이었다. 사냥에 참가하지 않은 아이는 사냥감을 가져갈 수 없었다.

“일하지 않고 먹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실로 훌륭한 신앙심이었다. 하지만 개인의 사상은 다양했다.

“응? 아닌데? 우리 아빠가 영주님은 아무것도 안 하고 배불리 먹는다고 했는데?”

“뭐? 아니야! 우리 엄마가 영주님이 열심히 일한 덕분에 우리가 편히 지내는 거라고 했어!”

꼬마들은 개구리와 민물 생선을 들고 티격거렸다. 아이들의 싸움은 항상 갑작스러웠다. 그리고 누구 하나 울기 전에는 쉬이 끝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놀랍게도 싸움의 주체가 나타난 것이다.

“앗! 영주님이다!”

로벨은 전쟁, 전투, 전략, 전술, 전법 등 전(戰)자로 시작하는 모든 것의 귀재였다. 그것은 동네 아이들의 싸움에도 어김없이 위력을 발휘했다. 로벨을 모함한(?) 아이들은 일제히 벙어리가 되었다. 반대로 로벨의 위대함을 찬양한 아이들은 늠름한 모닝스타 앞으로 쪼르르 달려갔다.

“영주님! 영주님! 안녕하세요!”

“영주님! 쟤네가 영주님 놀렸어요!”

“영주님! 영주님은 엄청! 엄청 많이 일하시죠?”

로드릭 시티 외곽 시찰을 나온 로벨, 어린 집사, 마녀 키르케, 펄프 대장, 외팔이, 과묵한 몬트 등은 갑자기 몰려와 고자질하는 꼬마들에 당황했다.

“이놈들이 감히 공작님의 앞을 막고...!”

“그만. 그만. 분위기 좀 파악해라.”

울프 용병단에 입단한지 얼마 안 된 용병이 꼬마들을 혼내려다가 도리어 혼이 났다. 로벨은 친근한 꼬마들의 수다를 가만히 들었다. 너도나도 떠들어 정신이 없지만 그럭저럭 이해되었다. 마녀 키르케가 허리에 손을 얹고 웃음을 감추었다.

“저런! 누가 그런 못된 말을 했을까요? 곱슬곱슬한 저 소년일까요?”

가장 목청 높여 영주님=게으름뱅이라 주장하던 사내아이가 겁에 질려 울먹였다.

“아니면, 그 옆에 예쁜 꼬마 아가씨?”

입을 꾹 다문 아이들을 지목했을 뿐이지만, 순진한 아이들은 속마음을 읽는 마법이라 생각했다. 마녀의 한결같은 복장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꼬마 아가씨가 히끅! 거리며 딸꾹질하자 곱슬머리 사내아이가 용감하게 앞으로 나섰다.

“제가 그랬어요! 제니는 아무 잘못 없어요! 저만 잡아가세요!”

비장해서 더 재미있었다. 수염이 풍성한 용병들은 웃음을 참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마녀 키르케도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용서를 받으려면 대가가 있어야 하는데요? 우리 꼬마 기사님은 무엇을 할 수 있을까요?”

사내아이는 주춤했다. 가진 것이라곤 방금 잡은 개구리 두 마리와 민물 생선 한 마리가 전부였다.

“이거 드릴게요... 용서해 주세요...”

“영주님 땅에서 난 거니까 영주님한테 세금 바치는 것은 당연하지. 뭘 선심 쓰듯이 말해?”

어린 집사가 틱- 쏘았다. 시선이 집중되었다. 마녀의 으름장은 장난이지만, 어린 집사는 100% 진담이다. 애들한테 왜 그러냐는 시선이 쏟아졌다.

“그냥 그렇다고요. 그냥... 누가 코 묻은 거 뺏는데요?”

“그쪽이면 충분히 그럴 것 같수.”

이 상황을 정리할 사람은 가장 윗사람인 로벨 뿐이었다. 로벨은 코로 한숨을 쉬고 말했다.

“우선 난 놀지 않아.”

이번에는 로벨에게 시선이 쏟아졌다. 특히 어린 집사 눈알이 표독했다. 하지만 철판을 좋아하는 기사는 얼굴도 단단했다.

“그러니까 너희가 한 말은 오해야.”

“자, 잘못했어요...”

“그래. 원래라면 혼이 나야 하지만,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니까 용서할게.”

아이들의 얼굴이 해바라기처럼 밝아졌다.

“잘못을 인정하는 것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야. 이것은 너희의 용기를 치하하는 하사품이야. 빵집에 가서 빵이랑 같이 먹어.”

결국은 개구리 말고 빵 먹으라는 내용이었다. 아이들은 은화 쪼가리에 신이 나서 와! 와! 소리 질렀다.

로벨은 성문으로 뛰어가는 내일의 로드릭 시민들을 뿌듯이 보고 다시 출발했다. 아이들이 끼어들기 전까지 무게 있는 대화 중이었다.

“그랜드 토너먼트를 개최한다고?”

“성 마르틴의 축일을 기념해서 각 지방의 제후를 초대한다고 해요.”

“새삼스럽게?”

“사실 재작년에 했어야 할 토너먼트에요. 잉그비아 왕국 때문에 으르렁거리다 보니 미뤄진 거죠.”

로벨은 모닝스타가 알아서 가게 내버려두고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그러자 어린 집사가 정색했다.

“안 돼요.”

“...뭐가?”

“지금 생각한 거 전부 안 돼요. 꿈도 꾸지 마요.”

로벨은 모자를 벗고 꽁지머리 아래를 긁었다.

“저녁은 생선 파이로 하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저도 찬성이지만... 거짓말하지 마요! 영주님이 저 막돼먹은 키르케도 아닌데 그런 걸 고민할 리 없잖아요!”

“뭐라구요?”

마녀가 집사 옆구리를 꽉 꼬집었다. 하지만 10년간 티격태격하며 단련된 옆구리는 끄덕하지 않았다.

“영주님을 노리는 사람이 있어요. 이곳에서는 고작 암살자지만, 그곳에서는 중무장한 기사가 떼로 덤빌지 몰라요. 절대 가면 안 돼요.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하는 것은 더더욱 안 되고요.”

펄프 대장이 불편한 다리를 조금 끌며 말했다.

“고귀한 나리들의 생각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그거 무례 아니오? 국왕이 초대한 토너먼트에 불참해도 되는 거요?”

“무례하면 어쩔 건데요? 우리 땅에 군대라도 보낼까 봐요? 솔직히 까놓고 국왕 폐하나 포클랜드 귀족이나 우리 영주님이 욕심 없는 것에 감사해야죠!”

“그분들은 그걸 모르잖아요.”

마녀 키르케가 다시 끼어들었다. 외팔이 이하 울프 용병단은 정치 이야기가 지루해 하품하거나 자기들끼리 잡담했다. 그래서 진지하게 반응한 것은 몇 사람 안 되었다.

“무슨 뜻이죠?”

“기사님은 강하고, 착하고, 잘생기고-이히힛-, 솔직하지만, 그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잖아요. 음... 강한 거랑 잘생긴 것만 알겠죠?”

“그거야! 그렇군요... 음... 작년의 남해 원정도 따지고 보면 오해에서 비롯된 거였죠. 호수성이 부추긴 오해지만.”

좀 더 파고들면 에릭 프란시스 공작 때부터 그러했다. 로벨은 그럴 생각이 조금도 없지만, 로벨의 성품을 모르는 권력자와 세도가는 제 발 저려서 경계하고 위협했다.

그들을 무지하다 탓할 수 없었다. 로벨이나 어린 집사가 그들이었어도 심상치 않게 커지는 이웃을 견제했을 것이다.

“국왕님도 오해할지 몰라요. 그랜드 챔피언 기사님이 그랜드 토너먼트에 참가하지 않으면 더 그럴 거예요.”

“고작 그런 거로 영주님을...”

“그곳에도 호수성 백작님이 있으면요? 오해를 푸는 것은 당사자가 나서도 어렵지만, 오해를 부추기는 것은 제삼자도 쉽게 할 수 있어요.”

“자비에 후작이라면... 그럴 만하군요.”

어린 집사가 팔짱 끼고 고민에 잠겼다. 로벨의 위세를 업고 큰소리 탕탕 치지만, 진짜 전쟁이 나는 것은 원치 않았다. 승리하면 그나마 다행이지만, 패하거나 장기화되면 천문학적인 빚이 쌓였다. 이제 겨우 재정이 안정된 로드릭 가문에게 치명적이었다.

로벨과 마녀는 어린 집사를 따라 팔짱을 끼고 고민하는 척하다가 재미가 없어 그만두었다. 의심하고 걱정하는 것은 원래 어린 집사 몫이었다.

“성 마르틴의 축일이지? 아직 시간이 있으니 천천히 고민해 보자. 정 방법이 없으면 호른 경이랑 켈트 경이랑 랭스터 경이랑 다 데리고 가지 뭐. 그러면 후작이 어쩌겠어?”

세상에는 말이 씨가 된다는 속언이 있다. 호른 경, 켈트 경, 랭스터 경 등이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완전무장을 갖추고 늑대성을 찾아왔다.

“성문을 열어라! 주군을 보필하러 왔노라!”

이상하게도 로벨 로드릭 공작의 그랜드 토너먼트 참가가 기정사실로 알려지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