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기사의 일기-375화 (375/605)

375화. 아들

강철성의 위용은 대단했다.

사트로 후작조차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뿌리 깊은 호족 정통성에 북부대로를 틀어쥐고 쌓은 막대한 재화로 한 지역의 패자가 되었다.

“강철성이 여기로 올 줄이야.”

“검은 성은 어찌하고?”

“검은 성이 문제가 아니지.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덤으로 늑대성과는 북쪽 숲을 사이에 두고 오랫동안 대립했다. 선대 조지 도트넘 백작부터 시작된 갈등이니 어느덧 10년이 넘었다.

남부에서 제법 방귀 좀 뀐다는 기사들이 알아서 길을 열어주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과 그의 기사들이 찬바람 머금은 망토 자락을 끌고 로벨 앞에 섰다.

“어서 오시오, 백작.”

“그간 무탈하셨소, 공작?”

도반 도트넘 백작의 시선이 머리 위로 올라갔다.

“시 서펜트로군.”

“시 서펜트?”

기사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어린 집사가 이마를 짚었다. 저 늙은 모기가 초 치려는 것 같았다.

“수룡이라 불리는 바다의 괴물이오. 이 정도 크기면 최소 5백 년은 살았겠군. 힘도 힘이지만 보통 영악한 놈이 아닌데, 정말 대단하시오.”

“수룡? 그러니까 용 맞잖아?”

“그야 당연히 용이지!”

로벨의 정적이 로벨의 무용을 칭찬하자 분위기가 한결 좋아졌다. 적어도 깽판 치러 온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긴장을 놓지 못하는 사람이 셋 있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의 정체를 아는 로벨과 어린 집사, 그리고 뜬금없지만 리밍턴 성에서 온 이름 모를 청년 기사였다. 마지막 기사의 경우 갑자기 쏘아진 백작의 시선에 더욱 그러했다.

“왜, 왜 그렇게 보시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청년 기사를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돌렸다.

“공작, 서쪽에서 수상한 바람이 부는 것을 아시오?”

서쪽에는 여러 세력이 있지만, 로벨 일행이 지금 경계하는 서쪽 세력은 하나뿐이었다.

“포클랜드.”

로벨의 입에서 지명이 나오자 청년 기사의 표정이 바뀌었다. 원래도 그리 선량해 보이는 얼굴은 아니었지만, 인상을 쓰니 제대로 험악했다.

“국왕 폐하와 포클랜드의 역적! 죽어랏!”

젊은 기사는 허리에 찬 스몰 소드(Small sword:찌르기에 특화된 한손검)를 뽑았다. 사람과 사물이 뒤섞여 동선이 복잡한 곳에서 최적의 무기였다. 실제로 의자에 앉은 로벨이 칼을 뽑는 것보다 한 호흡 빨랐다. 그러나 이미 장전된 쇠뇌보다는 반 호흡 느렸다. 팡-!

2층 계단 앞에 선 애꾸눈이 아바레스트를 쏘았다. 애꾸눈 솜씨면 머리를 노릴 법도 하지만, 만에 하나 빗나가면 엉뚱한 사람이 피를 보니 안전하게 가슴을 노렸다. 기세 좋게 칼을 치켜든 젊은 기사 가슴에 두 뼘이 조금 안 되는 나뭇가지가 솟아났다. 그 충격으로 내디딘 발이 우뚝 멈췄다. 전진하는 힘과 밀어내는 힘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 그것도 잠깐이었다.

2층의 저격수들은 선각자의 행동을 본받아 일제히 방아쇠를 당겼다. 정지된 표적이라 빗나갈 일이 없었다. 퍽! 퍼퍽! 퍽-! 젊은 기사 가슴에 연거푸 쿼럴이 꽂혔다. 그때마다 한 걸음씩 밀려났다. 기사는 점점 멀어지는 로벨을 향해 애타게 손을 뻗었다. 매가리 없는 손짓이었다. 가늘고 가벼운 스몰 소드가 파르르 떨렸다. 갑작스러운 사태에 모두가 경악했다. 너무 놀라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피가 튀고 고통이 흐르는 가운데 정적이 가라앉았다.

“주제를 모르는 것이 한심하군.”

도반 도트넘 백작이 침묵을 가르고 한 걸음 떼었다. 화려하지만 조잡한 스몰 소드와 대비되는, 단순하고 투박한 롱소드를 뽑아 수평으로 휘둘렀다. 화살꽂이가 된 청년 기사의 목이 부드럽게 썰어졌다. 머리 잃은 몸통은 실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풀썩 쓰러졌다. 심장에서 뿜어진 피가 2층 테라스까지 치솟았다. 기사와 용병이 모인 곳이라 호들갑은 없지만, 새된 비명이 조금 나왔다.

“사, 살인이다!”

“아니, 암살이야!”

암살자가 죽었지만 분위기는 한층 사나워졌다.

어린 집사는 암살자가 더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성 밖의 용병을 불러모았다. 호른 경은 호들갑 떠는 기사들을 밀치고 로벨 곁으로 뛰어갔다. 가로막으면 코뼈를 부러뜨릴 기세라 감히 막지 못했다.

정적 속에서 홀로 분주하던 강철성 백작은, 이제 소란 속에서 홀로 고요했다. 손수건을 꺼내 피 묻은 롱소드를 닦았다. 무기를 꼬나들고 꾸역꾸역 들어오는 울프 용병단과 우왕좌왕하여 구석으로 밀려나는 남부 기사들을 무대 위 연극처럼 느긋이 감상했다.

“저자가 암살자란 것을 어떻게 알았소?”

입장은 다르지만 침착한 사람이 하나 더 있었다. 어쩌면 둘 다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

로벨은 길고 무거운 아론다이트 대신 짧고 날렵한 흐룬팅을 잡았다. 엉덩이를 바짝 당기고 한쪽 다리를 구부려 당장이라도 치고 나갈 자세를 취했다. 합당한 태도였다. 암살자의 정체를 아는 사람은 암살자를 보낸 당사자일 가능성이 높았다. 도반 도트넘 백작은 의심을 풀어주었다.

“리밍턴 가문의 사내들은 미망인 전쟁 당시 모두 죽었소.”

로벨은 기억을 더듬었다. 어린 시절 볼탄 반도의 기사 가문을 배울 때 얼핏 들은 기억이 있으나, 근래에는 이름을 듣지 못했다. 이때쯤 상황이 정리되었다. 로벨 주위로 늑대성 사람이 모이고, 도반 도트넘 백작 주위로 강철성 사람이 모여서 마주 보았다. 이상한 대치였다. 어린 집사가 상황을 ‘올바르게’ 돌렸다.

“그것보다 중요한 게 있잖아요. 아까 저, 저 가짜 리밍턴 경이 뭐라고 했는지 들었어요?”

어린 집사가 목 없는 시체를 삿대질하며 말했다. 도반 도트넘 백작이 깨끗해진 롱소드를 칼집에 꽂아 넣고 말했다.

“아직 젊은 거 같은데 귀가 안 좋군.”

“엥? 질문이 아니라 확인이거든요? 백작님은 나이를 많이 먹어서 이해력이 안 좋아요?”

어린 집사가 지지 않고 대들었다. 강철성의 기사들이 인상을 꾸겼다. 어린 집사 또래의 기사 종자는 칼자루를 움켜쥐기까지 했다. 그러자 호른 경을 비롯한 늑대성 기사들도 무기를 잡았다.

“국왕 폐하와 포클랜드라 했지.”

정작 모욕을 받은 도반 도트넘 백작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나이를 많이 먹은 것은 사실이니 화낼 이유가 없었다.

“국왕 폐하가 본인을 음해할 리 없소.”

로벨도 감정싸움을 일으키지 않았다. 정확히는 관심 갖지 못했다. 유언이 되어버린 암살자의 기합이 몹시 신경 쓰였다.

“충성심이오? 아니면 자의식 과잉이오?”

도반 도트넘 백작은 비웃는 기색 없이 비웃었다. 로벨은 정적이자 숙적의 지적에 반박했다.

“우정이오. 믿음이오. 그리고 확신이오. 국왕 폐하를 위해 싸우고, 국왕 폐하를 위해 무릎 꿇었소. 그런 본인을 이유 없이 적대할 리 없소.”

어린 집사와 호른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현 국왕 데이브 고른 데오니스를 왕위에 올린 사람이 로벨이었다. 또한 왕권을 위협하는 포클랜드의 유력 가문 사이에서 왕좌를 지킬 수 있는 것은 로벨을 비롯한 각 지방의 제후들이 지지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손발을 자신이 자를 리 없었다.

“그렇다면 야심을 충성으로 포장한 잡것과 과잉충성하는 멍청이겠군.”

자신이 똑똑하다고 생각하는 기사들 뇌리에 공통된 이름이 떠올랐다. 하지만 똑똑하기에 함부로 입 밖에 꺼내지 않았다. 가늘고 긴 신음이 흘렀다.

“역사가 재미있게 움직이는군.”

도반 도트넘 백작은 백옥처럼 하얀 턱을 만졌다.

“이 자는 선물로 두고 가겠소. 다음에는 좀 더 좋은 일로 봅시다.”

“응? 간다고?”

신년행사가 엉망이 되긴 했으나 오자마자 가는 것도 이상했다. 암살자를 잡아주러 온 것일까, 아니면 암살자가 찾아드는 열악한 환경을 확인하기 위해 온 것일까. 어느 쪽이든 도반 도트넘 백작에게는 좋은 핑계가 있었다.

“암살 위협에 시달리는 것은 공작만이 아니오. 이런 위험한 곳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군.”

“그게 무슨... 아?”

불로불사를 탐하는 기사가 돌아온 것을 아는 듯했다. 로벨은 할 말이 없었다.

“...고생이 많소.”

“그러게 말이오. 공작이 비호하니 잡기가 쉽지 않군.”

로벨이 직접 보호한 것은 아니지만, 늑대성 공작의 벗으로 알려진 덕분에 늑대성 영향 아래 있는 가문들이 강철성에 협조하지 않았다.

더스틴 폴라 경이 아무리 완숙한 기사고 백발백중의 명사수라도 기사들이 방관하지 않았으면 진작 체포되거나 사살되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강철성 기사들은 음흉하고(!) 야비한(!) 로벨을 좋게 보지 않았다. 특히 도반 도트넘 백작의 기사 종자는 대놓고 적개심을 불태웠다.

로벨은 자꾸 으르렁거리는 기사 종자가 살짝 거슬렸다. 그런 로벨의 심경을 읽었는지 도반 도트넘 백작이 직접 소개했다.

“너무 고깝게 보지 마시오. 내 아들인 셰인 도트넘이오.”

“그렇소? 아들 관리를 잘해야... 아들?”

로벨은 고민을 잠시 잊었다.

‘흡혈귀가 자식을 낳을 수 있어?’

‘그, 글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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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집사는 어수선해진 신년행사를 끝내고 손님의 신상을 파악했다. 가장 궁금한 것은 가짜 리밍턴 가문의 기사지만, 솔직히 흥미로운 것은 기사 서임과 동시에 ‘도트넘 자작’이 될 셰인 도트넘이었다.

“양자에요.”

“그렇지? 친자일 리 없지.”

로벨은 안도했다. 왜 안도하는지는 본인도 몰랐다.

“마도의 수호자라고 우쭐거리며 온갖 패악질하는 작자가 인간 흉내 내는 거 보면 솔직히 역겨워요. 괴물이면 괴물답게 깜깜한 숲이나 질척이는 늪에서 피나 빨고 살아야... 왜 그러세요? 어디 아파요?”

신생 마도의 수호자 로벨은 마음의 상처를 입었다. 보다 못한 마녀 키르케가 화를 냈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해요!”

“무슨 말이 무슨 말이요?”

“괴물도 인격이, 아니, 괴격(?)이 있는데! 동굴로 꺼지라니, 늪에 처박히라니, 괴물이 들으면 기분 나쁘잖아요!”

“자꾸 괴물 괴물거리지 마...”

로벨은 마녀 때문에 더 아팠다. 호른 경은 대화를 따라가지 못해 화제를 돌렸다.

“그 건방진 종자는 되었다. 그보다 암살자에 관해 알아낸 것이 있나?”

어린 집사도 새파란 양아들에 관심을 버렸다. 자신과 동갑이란 것은 굳이 떠올리지 않았다.

“괴물 백작 말대로 리밍턴 가문 사람이 아니에요. 리밍턴은 고사하고 볼탄 반도 출신도 아니에요.”

“그럼 역시...”

“그 이상한 칼을 조사하니까 최근 포클랜드 왕성에서 유행하는 칼이래요. 결투검이라 부르는 모양인데, 볼탄 반도에서는 쓰지 않는 칼이죠. 그 외에도 소지품에 포클랜드 지방 것이 많아요.”

로벨과 로벨의 측근들이 한숨을 쉬었다.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지?”

“편지나 명령서가 있을까 해서 옷감 안까지 살펴봤는데 없어요. 가문을 증명하는 것도 없고요. 초상을 그려서 포클랜드 상인들한테 돌리면 정체를 밝힐 수 있겠지만...”

“오래 걸리겠지.”

“예. 그리고 그렇게 할 필요가 있나 싶고요.”

사실 포클랜드 출신이란 것만 알면 충분했다. 그 동네에서 로벨을 암살기도 할 인물은 한 명뿐이었다.

“자비에 후작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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